83.
우리는 경기장 내부에 마련된 드넓은 회의실로 안내되었다.
‘티파니 맥센이 오니까 아예 대우 자체가 다르구먼.’
주차장에 도착했을 때부터 요란하게 사람들이 나와서 짐을 들어주고 하는 게 인상적이었다.
거기다 무슨 영화에 나올 법한 사람들이 시중까지 들어주었다.
각종 차와 쿠키를 준비해두어 긴 회의가 피곤해지지 않도록 배려한 모습도 인상적이었다.
거기다 마지막으로 분명히 맥센 저택에 있어야 할 집사까지 왔다.
……정작 아주 약간 늦은 우리를 빼고는 아무도 아직 회의실에 도착하지 않은 상황인데 말이다.
“아가씨, 차를 준비해드릴까요?”
“‘Gyokurou’로 부탁해요.”
“예, 바로 준비하겠습니다.”
“저는…….”
내 차례다 싶어 입을 열자니 집사가 쌩하게 내게서 등을 돌렸다.
나는 손을 든 자세 그대로 얼어붙었고, 티파니가 킥킥거렸다.
좀 창피하군.
“얼굴, 빨개졌네요.”
“……저는 물로 주십시오.”
“‘Gyokurou’는 괜찮아요. 그린 티인데 같이 마시지 그래요.”
“됐습니다.”
“그러지 말고. 이런 차 어디 가서 마셔볼 기회가 없을 걸?”
“비싼가 보죠?”
“100그램에 1,500달러였던가?”
“……장난 아니군요.”
“뭐, 저희 같은 부자가 값을 치르고 이 정도는 마셔줘야 세상에 돈이라는 게 도는 법이죠.”
티파니가 그렇게 얘기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차가 준비되었다.
“게다가 이 차는 심신의 안정에 도움을 주니 더 좋다니까요.”
“비싼 만큼 값을 하는 거군요.”
“아뇨, 반대로 값이 비싸기 때문에 그렇다고 믿게 되는 거죠.”
신랄하군.
나는 우아하게 차를 마시는 티파니의 모습을 보며 쓰게 웃었다.
그러자니 어디선가 거칠게 숨을 몰아쉬는 소리가 이어졌다.
뭔가 싶어 돌아보자 우리 각본 작가가 단상 위에서 잔뜩 긴장한 채 서있는 모습이 보였다.
참고로 오늘 프레젠테이션은 저쪽의 역할이었다. 나는 적당히 말만 맞춰주는 걸로 여기에 왔다.
물론, 마지막에 가서는 아마 대부분 내가 이야기를 하겠지만.
그러다 보니 눈이 마주쳤고 나는 가볍게 응원의 눈빛을 보냈다.
금방이라도 졸도할 것 같은 모습이었으나 작가는 어떻게든 가져온 휴대용 술병을 품속에서 꺼내 꼴깍대며…….
‘저거 괜찮을까.’
당황해 바라보고 있자니 얼마 지나지 않아 레볼루션의 네 사람이 회의실에 도착했다.
잔뜩 성이 난 얼굴로 먼저 들어온 것은 헌터. 그 뒤를 플레어, 바티스타, 오튼이 따라 들어왔다.
“어머, 헌터. 오랜만이에요.”
“……아가씨.”
“헤어질 때 아가씨라고 부르랬다고 정말 그렇게 부르기야? 정말이지. 남자가 배포가 없네.”
깔깔대며 웃는 티파니.
정말 무서운 여자다.
어쨌든 신경전에서는 한 수 앞서나가는 것 같았다. 벨트를 쥔 헌터가 반대편에 턱 앉았다.
그리고 마지막.
어디선가 햄버거 냄새가 났다.
“이거 원 더럽게 바쁘군!”
걸걸한 목소리를 들은 모두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 역시도 문을 열고 들어오는 그를 맞이했다.
바트 맥센.
손에는 유명 브랜드인 빅 카후나스 버거의 종이봉투를 들었다.
“미안하네. 점심을 못 먹어서 말이야. 다들 앉아. 난 이 맛 좋은 빅 카후나스 버거를 먹으며 발표를 듣고 싶군.”
“음료는 뭘로 하셨습니까?”
“당연히 밀크셰이크지. 이게 또 목 넘김이 죽여준단 말이야.”
헌터의 물음에 호쾌하게 웃은 바트의 시선이 빙글 돌았다.
“쿵-퓨리. 오늘도 멋진 아이디어를 기대하겠네.”
“저 친구의 아이디어죠.”
“그렇게 속이 싹 보이는 시치미를 떼는 게 자네 매력이지.”
버거를 꺼내든 그의 시선은 마지막으로 티파니에게 향했다.
여기서 유일하게 회장의 등장에도 일어서지 않아도 되는 사람.
“오랜만이구나. 티파니.”
“네, 아버지. 1년만이던가요?”
“전화로는 자주 통화했던 것 같은데 만나는 건 그쯤 됐겠군.”
1년 만에 자신의 딸을 보는데도 전혀 반갑지 않은 모습이었다.
티파니 역시도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바트는 봉투를 툭 던지고 앉아 반대편을 바라보았다.
“시작하게나.”
“예, 예!”
고개를 끄덕인 작가가 큰 스크린에 각본의 개괄을 띄웠다.
그사이 버거를 깐 바트가 가볍게 한입 먹고는 날 바라보았다.
그가 말했다.
“이거 먹어본 적 있나?”
“……없습니다.”
“아쉽군. 조지아에서 가장 맛있는 버거인데. 그만큼 이 맛을 온전히 즐기고 싶은 기분이야.”
“부드럽고 달콤한 밀크셰이크와 함께라면 가능하겠죠.”
“아니지.”
바트의 눈이 슬쩍 빛났다.
‘이 프레젠테이션의 내용이 자기 입맛에 맞느냐.’ 그게 중요하다는 사실을 말하고 싶은 거겠지.
그렇게 발표가 시작되었다.
작가는 내가 원래 생각하던 것보다는 꽤나 발표를 잘해주었다.
반대편에 앉은 레볼루션의 표정은 초장부터 점차 썩어 들어갔다.
“그, 콜 업 당시, 쿵-퓨리에게 잘못된 계약서가 가도록 조종한 게 닉 플레어 선수인 겁니다.”
이렇게 되면 플레어가 GCW 챔피언 출신인 날 막으려고 했다는 디테일이 나올 수가 있었다.
말인즉슨 내 위상이 수직으로 상승하는 각본인 셈이었다.
그것을 이해한 헌터는 곧바로 이를 드러내며 날 노려보았다.
옆의 플레어는 의외로 한숨을 내쉬는 정도에서 그쳤지만.
“쉽게 말해, 앞으로는 GCW도 사내의 세계관에 포함시켜서 전개하고 싶다는 게 저희 뜻입니다.”
“흐음…….”
바트의 표정은 미묘했다.
그것을 캐치한 티파니가 작가의 말에 한마디를 덧붙였다.
“아버지, 현재 GCW의 시청률은 무시할 수 없는 수준이에요. 제작비 대비 수익을 봤을 때는 버닝콩과 랙다운도 뛰어넘는다고요.”
“……그 정도냐?”
“예, 재무표도 준비해왔습니다.”
티파니가 손을 까딱거리자 단상 위의 작가가 스크린과 연결된 노트북을 황급히 조작했다.
재무표가 휘리릭 떠올랐고, 바트의 눈이 한 곳으로 향했다.
“그래봤자 버닝콩, 랙다운에 비하면 10분의 1 수준이로군.”
“예, 하지만 반대로 말하자면 그만큼의 홍보나 지원이 없었는데 저 정도의 성과를 냈다는 거죠.”
“신.”
바트가 날 돌아보았다.
“그리고 헌터.”
“…….”
무시를 당한 티파니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하지만 바트는 무시하고 말을 이어나갔다.
“너희 생각은 어떻지?”
“아주 멋진 아이디어죠. 유능한 리더까지 함께하고 있으므로 문제될 건 없다고 보는데요.”
나는 일부러 티파니를 살짝 띄워 기가 죽지 않도록 만들었다.
하지만 그로 인해 괜히 헌터의 화를 부추겼다는 느낌이었다.
“말도 안 됩니다.”
“어째서지?”
“GCW의 선수들을 동격으로 두실 생각이십니까? 그 친구들은 재능도 실력도 부족합니다.”
“부킹의 차이죠.”
“그럴 리가. GCW에서 나보다 더 나은 레슬러가 어디 있나?”
“어, 지금 여기 있는데요.”
“……이 새끼가.”
“러셀도 그렇죠. 당신이 솔직하게 물어보셔서 저도 솔직하게 제 감상을 말씀드리는 겁니다.”
“그렇게 말할 수는 있겠지.”
흥분해 일어서려는 헌터를 제지하듯 바트가 끼어들었다.
“하지만 중요한 건 대중들의 생각이다. 여기서는 그 외의 사적인 감정은 담아 말하지 않는다.”
“예, 죄송합니다.”
“사과는 헌터에게 해라.”
“미안함다.”
“큭…….”
“어쨌든, 그런 의미에서 보자면 나도 각본이 썩 마음에 들지는 않는군. 좀 담백한 기분이야.”
나는 바트를 힐끔 노려보았다.
저 인간의 성격대로라면 여기서 분명히 쓸데없는 헛소리를 내뱉을 타이밍이기는 했다.
하지만 그건 가끔, 아주 가끔 정곡을 찌르는 구석이 있긴 했다.
잔혹할 정도로.
“임팩트가 필요하지.”
그는 나와 같은 결론을 내렸다.
하지만 바트가 말하는 건 나와는 좀 다른 의미의 임팩트였다.
그는 쇼에 뭔가 ‘자극’적인 요소가 들어가길 원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우리는 시험대에 올랐다.
“두 사람, 아이디어는 있나?”
“…….”
“지금으로는 너무 담백해. 관객들을 이끌고 나갈 힘이 적어.”
“하, 하지만 오랫동안 쉬었던 제가 다시 버닝콩에 나오면…….”
“네가 뭔데?”
바트의 말에 꼬리를 마는 티파니. 나는 가볍게 뺨을 긁적였다.
아이디어라면 있다.
그것도 저 인간을 뼛속까지 만족시켜줄 아이디어가. 하지만 이걸 말하면 티파니는 싫어하겠지.
이건 나중에 한 소리 듣겠군.
그렇게 생각한 나는 기대감에 찬 바트의 시선을 잠시 느꼈다.
반대편의 레볼루션 멤버들은 해볼 테면 어디 해보란 눈치였다.
분명 놈들은 이제 갓 위로 올라온 신입인 내가 무슨 아이디어를 낼 수 있겠느냐는 얼굴이었다.
확실히 그렇기는 했다.
이런 순간에 바트가 말하는 포인트를 캐치해 말할 수 인간은 얼마 없는 게 사실이었다.
하지만 난 그걸 할 수 있다.
놈들의 일그러질 얼굴을 좀 기대하며 나는 입을 열었다.
답은 간단했다.
“연인 각본을 추가하죠.”
“연인……?”
“옛날 쇼에서 헌터와 티파니가 연인으로 출연하지 않았습니까?”
“호오.”
바트가 빅 카후나스의 맛을 아주 제대로 느끼는 얼굴이 되었다.
반면 티파니의 얼굴은 경악에 물들었다. 반대편의 헌터는 거의 날 죽일 것처럼 노려보았다.
하지만 말했듯.
이런 관심조차도 이제는 내 존재감을 느끼게 할 뿐이었다.
“티파니와 제가 연인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헌터와의 심리전에서 써먹는 건 어떨까요.”
“아니지. 아니야.”
바트 맥센이 고개를 내저었다.
‘제기랄.’
짧은 순간, 더 더러운 생각을 하는 그의 마음을 읽어낸 나는 가볍게 미간을 찌푸렸다.
“티파니가 자네를 유혹하는 걸세! 헌터를 열 받게 만들기 위해서 말이야. 이거라면 재밌겠군!”
참 개 같은 인간이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저 인간은 재미있는 쇼를 위해서라면 자기 자신도 똥 구정물을 뒤집어쓰는 미치광이인데.
당연히 자기 딸도 쇼에서는 탕녀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겠지.
“아, 이거 재미있군! 하지만 선역 부킹도 생각해야 하니 자네는 그걸 받아주지 않는 거지! 티파니는 점점 야한 옷을 입고!”
“아, 아버지…….”
“자네 바지를 만지다가 생각보다 큰 크기에 놀라는 거야! 크하하하하! 이거 완전 웃기겠어!”
호탕하게 웃음을 터뜨리는 바트.
그 앞에서 헌터와 나, 티파니는 제각기 다른 감정을 느꼈다.
* * *
티파니 맥센은 담배를 피웠다.
모두가 떠난 뒤의 회의실.
빅 카후나스 버거의 포장지를 누군가 치우려고 했다. 티파니의 시선이 잠시 거기에 머물렀다.
어쨌든 사업상 파트너다.
그리고 각본상으로도 파트너였다. 좀 위로를 해주어야겠지.
그렇게 생각한 나는 긴 담뱃재가 떨어지는 걸 지켜보았다.
그렇게 몇 대의 담배를 피운 티파니가 이윽고 입을 열었다.
“멋진 각본이군요.”
“미안해요.”
“아뇨, 어쩔 수 없죠.”
뜻밖에도 쿨하게 받아들였다.
평소 피우지 않는 담배의 힘일까. 그녀는 생각 외로 쿨하게 내 방식이 맞았음을 인정했다.
그렇기는 했다.
확실히 이렇게 되면 ‘현재 버닝콩’의 방식에 각본이 더 맞았다.
자극적인 부분을 통해 나는 더 겟 오버 할 수 있을 테고, 대립의 강도는 더욱 더 강해지겠지.
옛 연인이 적이 되어 나타난다는 이야기는 무척 매력적이니까.
“앞으로 잘 부탁해요. 그나저나 아버지도 참 너무하단 말이야.”
“그런 각본을 시켜서요?”
“결국 GCW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이 말했잖아요. 난 그래도 요 반년 간 미친 듯이 일했는데.”
“그렇다면 바트가 인정할 때까지 GCW를 키우면 그만이죠.”
“어쨌든 아버지로부터 허가는 나왔으니 큰 산은 넘었어요.”
고개를 끄덕인 티파니는 냄새가 배지 않도록 멀리 걸어둔 자신의 재킷을 집어 다시 걸쳤다.
“일단 가죠.”
“어딜요?”
“그래도 좀 같이 마셔줘요. 술에 취해서 징징대지는 않을 테니까.”
“……괜찮다면서?”
“저런 미친 아버지를 뒀는데, 너무 대수롭지 않게 넘어가면 나도 똑같은 인간처럼 느껴지거든요.”
나는 씁쓸하게 웃는 티파니를 따라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말은 저렇게 해도 상처를 많이 받았을 거다. 아무리 그래도 그녀는 하나밖에 없는 딸이니까.
익숙해질 수 없는 거겠지.
하지만 해야만 하는 걸 알기 때문에 속으로 삭히는 것일 터였다.
그런 그녀를 잠시 바라보던 나는 이내 한마디를 내뱉었다.
분위기를 환기시키기 위한 위로의 한마디.
“이번에는 오줌 싸지 마요.”
빠악!
……코를 맞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