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
그 뒤로는 별일 없었다.
일단 내가 제시한 아이디어를 토대로 작가가 소小각본을 썼다.
그리고 그 소각본이 결재가 떨어지면 다른 작가들이 쓴 것과 조율이 되어 전체 각본이 나왔다.
메인 쇼는 그런 식이었다.
GCW보다 더 철저한 분업을 지향했다. 나에게는 좋은 점도, 나쁜 점도 있는 방식이었다.
하지만 이번 주만큼은 그런 방식이 더할 나위 없이 편했다.
적당히 메일 몇 번 확인하는 선에서 그치고 나머지는 내 자유롭게 쓸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내가 쇼의 메인 이벤터들처럼 외부 스케줄이 있는 것도 아니고.
덕분에 쇼가 열리는 날까지 만나고 싶었던 사람들과 만났다.
일단 GCW에 머무르며 옛날의 동료 선수들과 함께 훈련을 했다.
에보니와 그 딸인 제시와 식사를 했고, 소아암 병동의 아이들이나 윌리의 부모님과도 만났다.
그렇게 좋은 시간을 보낸 나는 상쾌하게 월요일 밤을 맞이했다.
경기장 안의 락커룸.
나는 파트너인 부커 및 그 크루의 일원에 섞여 쇼를 준비했다.
몇 달간 함께 지내는 일이 많아져 이제는 다들 그럭저럭 편했다.
시몬스가 평소처럼 날 놀렸다.
“휴가는 잘 보내고 왔냐?”
“무려 여자도 만났죠.”
“휘유, 역시 천재는 다르다니까. 주州마다 여자를 만들어뒀나?”
“50명은 너무 많은데요.”
“하하하, 뭘 약한 척이야. 네 능력이라면 정말 그럴 것 같은데.”
능력 문제는 아니지 싶은데.
하지만 나는 그렇게 대답하는 대신 자신만만하게 웃어 보였다.
어쨌거나 여기 이 떡대들에게 얕보이지 않는 게 가장 중요했다.
그런 식으로 해서 이 그룹에서 형성된 내 포지션은 ‘천재’였다.
살짝 건방진, 하지만 미워할 수 없고 무시할 수도 없는 막내.
인간은 사자 같은 짐승과 달리 우두머리와 나머지로 무리 내의 서열을 도식화하지 않는다.
그런 의미에서 내 포지셔닝은 무척이나 유용한 것이었다.
그걸 잘 이용해 동료들과 잡담을 나누고 있던 찰나, 락커룸의 문이 열리며 누군가 들어왔다.
티파니 맥센이었다.
그 모습을 보고는 휘유, 하고 시몬스가 다시 휘파람을 불었다.
바지 정장 차림이었으나 평소와 달리 성性적인 매력을 위해 가슴팍을 적당히 풀어헤쳤다.
그럼에도 금발을 딱 틀어 묶고 안경을 쓴 모습이 남자들의 판타지에서나 나올 법한 모습이었다.
그렇게 분장을 했는데도 표정은 또 내가 아는 그녀라 재밌었다.
시몬스가 먼저 인사를 했다.
“오랜만입니다! 아가씨!”
“하하, 록. 잘 지냈어요?”
“그럼요! 여기 이 멍청이들이 행여나 누를 끼치는 건 아니겠죠?”
“신이 절 좀 괴롭히네요.”
“…….”
시몬스가 날 노려보았다.
약간 진심을 담아서.
아무래도 경력이 긴 양반이라 어렸을 때부터 티파니를 귀엽게 여겨서 그러는 것이겠지.
적당히 시선을 피한 나는 엉덩이를 털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모함은 나중에 하고, 가시죠.”
“봐요~. 이렇다니까.”
킥킥대며 웃은 티파니.
그리고 나와 부커까지.
우리 셋은 오늘 쇼의 오프닝에서 큰 역할을 맡을 예정이었다.
즉 남들보다 한 박자 빨리 움직여야 한다는 뜻이었다.
“잘해라! 꼬마!”
“부커, 실수하지 마!”
“아가씨! 잘 부탁합니다!”
우리는 동료 선수들의 요란한 격려 속에 락커룸을 빠져나왔다.
왁자지껄한 소음에 약간 압도된 듯 서있는 티파니. 나는 그런 그녀의 어깨를 툭 건드렸다.
“왜 그래요?”
“어, 솔직히 말해서 너무 기합이 들어가지 않았나 싶어서요.”
“당연히 그럴 수밖에 없죠.”
“왜요?”
“저희가 쇼의 오프닝을 장식하면, 2년간의 길었던 레볼루션 강점기가 끝나는 셈이니까요.”
“아~. 확실히 그러네요.”
그동안 쇼의 오프닝은 메인 이벤터인 레볼루션의 전유물이었다.
그걸 우리가 깨뜨리는 것이다.
물론 레볼루션 역시 오프닝에 나왔지만 어디까지나 보조였다.
주인공은 나, 그리고 티파니.
이렇게 두 사람이다.
‘어디 한번 해보자고.’
나는 의지를 다잡으며 일행과 함께 고릴라 포지션으로 향했다.
안으로 들어서자 한창 쇼를 준비 중인 직원들의 모습이 보였다.
내 시선은 자연히 안쪽 자리에 있는 바트 맥센에게로 향했다.
의자에 앉은 그는 눈앞에 무려 8개의 모니터를 띄워놓은 채 최종 확인을 진행 중이었다.
“7번 카메라 돌려봐.”
관객석을 크게 비추는 7번 카메라가 정상적으로 작동했다.
오늘도 객석은 만원이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여러 입구를 통해 들어와 자리에 착석했다.
바트가 마지막으로 외쳤다.
“멋지게 해보자고!”
노도와 같은 외침에 각 직원들이 큰 소리로 대답했다. 역시 그답다 싶은 모습이라 재밌었다.
한 공룡 기업의 회장.
그럼에도 언제나 현장의 최전선에서 모두를 지휘한다. 그것이 바로 바트 맥센이라는 인간이었다.
그리고 쇼가 시작되었다.
암전된 화면이 켜지고, 미리 만들어둔 영상 하나가 흘러나왔다.
경기장에 도착하는 리무진.
부富의 상징과도 같은 차량이 카메라 앞에 우뚝 멈춰 섰고, 뒷좌석이 열리며 누군가 내렸다.
한 여성의 몸을 아래에서부터 천천히 비추는 카메라. 하지만 가장 중요한 얼굴을 비추진 않았다.
과연 누굴까?
그러한 관객, 시청자들의 의문을 털어내듯 오프닝이 이어졌다.
강렬한 락 음악과 함께 레슬러들의 편집된 영상이 흘러나왔다.
폭력과 유혈, 섹스.
강렬한 오프닝이었다.
그게 끝난 후, 카메라는 2만 명이 꽉 들어찬 경기장을 비췄다.
입장로 위의 스크린에서 폭죽이 터지며 쇼의 시작을 알렸다. 관객들의 환호가 자연스럽게 오디오에 섞여 멋진 장면을 연출했다.
슬슬 나갈 때였다.
* * *
‘홈 타운 보이’라는 말이 있다.
말 그대로 그 지역 출신의 선수를 표현할 때 쓰는 이야기였다.
지역에 대한 애착이 남다른 미국 관객들은 고향으로 돌아온 선수에게 큰 응원을 보내준다.
내 경우에도 그랬다.
……물론 엄밀하게 말해 내 고향은 로스 엔젤레스였다. 하지만 말했듯 조지아도 내 고향이었다.
보수적인 조지아 사람들은 날 홈 타운 보이로 대우해주었다.
나로 인해 이들은 미지의 존재라고 생각했던 동양인들에게 마음을 열고 다가갈 수 있었다.
다소 허황된 이야기겠지만 이런 엄청난 환호를 듣고 있자니 나는 그 말을 믿어보기로 했다.
내가 먼저 그래야 비로소 거짓은 진짜가 될 수 있는 법이니까.
[Waaaaaaaaaaaaaaaaagh!]
입장로 위에 선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피켓을 마구 흔들고 있는 사람들을 잠시 바라보았다.
이들 모두가 나를 정말 미친 듯이 환영해주었다. 그렇기에 나는 눈시울이 붉어지는 걸 느꼈다.
경기장에는 GCW의 사람들도 와있을 터였다. 그렇기에 나는 최대한 감정을 다스리며 움직였다.
이런 순간에 예정과 달리 감동의 눈물을 펑펑 쏟아버리면 이 얼마나 창피한 행동이란 말인가.
[SIN! SIN! SIN! SIN! SIN!]
내가 머리띠를 쓰고 우스꽝스러운 무술 동작을 취해도 사람들은 날 다른 이름으로 기억했다.
이 모습은 전 세계에 중계될 터였고 큰 쇼크를 안겨줄 터였다.
그렇기에 조지아밖에 없었다.
이곳이라면 내가 쿵-퓨리의 가면을 벗기에 최적의 장소였다.
부커와 나는 열화와 같은 환호 속에 링 위로 올라갔다.
[GCW! GCW! GCW! GCW!]
[SIN! SIN! SIN! SIN! SIN!]
관객들은 두 가지 챈트를 통해 아직 날 기억하고 있음을 알렸다.
나는 곧장 마이크를 쥐었다.
“쿵-푸의 힘이 느껴지는가?!”
그런 첫 마디를 들은 사람들이 강한 아유를 보냈다. 나는 저도 모르게 씨익 웃어버리고 말았다.
이들은 지금 내 기믹이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었다. 따라서 환호 대신 야유를 보내는 것이지.
대신 열렬한 SIN과 GCW 챈트만이 뒤를 이었다. 나는 다소 마이크워크를 바꿔야 함을 느꼈다.
원래 각본은 평소처럼 사람들에게 쿵푸를 가르친 내가 펀치 라인 한마디를 내뱉는 내용이었다.
‘일이라는 게 참 힘들어.’라던가. ‘계약은 신중하게 하라고.’처럼.
태그 팀이 된 이후 부커와 나는 이와 비슷한 각본을 사용해 꽤나 쏠쏠하게 반응을 뽑아먹었다.
여기서 중요한 건 마지막의 펀치 라인이었다. 신의 비참하고 웃긴 상황을 함축한 말로 사람들을 빵 터지게 만들어야만 했다.
그리고 지금 분위기를 보자니 그걸 먼저 써야 할 순간 같았다.
일반적으로 대사를 이어나갔다간 다들 몰입을 하지 못할 것이다.
‘반응도 죽겠지.’
나는 부커를 힐끔 돌아보았다.
마이크를 밑으로 내리고 최대한 짧고 정확하게 내 의사를 전했다.
“펀치 라인 대사부터 쳐줘요.”
눈썹을 치켜뜨는 부커.
하지만 그는 이내 경기장의 분위기를 보고는 마이크를 쥐었다.
“그래, 여기는 조지아였지.”
부커의 말에 관객들이 환호했다. 더욱이 그가 의미심장하게 날 돌아보자 소리는 더 커졌다.
“그런데 생각보다 반응이 훨씬 좋은데? 조지아가 멋진 도시던가. 아니면 누군가 여기 출신인가?”
[SIN! SIN! SIN! SIN! SIN!]
“누굴 말하는 건지 모르겠는데. 쿵-퓨리. 짐작 가는 바가 있나?”
“그, 글쎄.”
“정말로?”
“쿠, 쿵푸 타임이나 갖지!”
“여기 이 사람들은 뭔가 알고 있는 것 같은데? ……안 그래?”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관객들의 챈트는 이제 감당할 수 없을 정도가 되었다. 나는 어이없이 웃으며 로프에 몸을 기댔다.
‘이걸 어떻게 풀지?’
쿵푸 타임을 먼저 가져야 하는데 그럴 분위기가 전혀 아니었다.
링에서는 이런 경우가 알음알음 존재했다. 관객들의 반응이 각본의 예상과는 다른 순간 말이다.
무시하고 각본대로 하는 방법이 보편적이었지만, 나는 그렇게 넘어가고 싶지는 않았다.
프로레슬링은 관객들과의 호응이 가장 중요한 스포츠였다.
짧은 순간, 판단이 필요했다.
가장 중요한 순간이었다.
이 각본이 성공하길 바라고 있을 티파니나 GCW의 관계자들.
그리고 반대편에서 각본의 실패를 바라고 있을 레볼루션 멤버들.
마지막으로 결정권을 쥔 바트.
이미 원래 각본을 비튼 이상, 모두가 납득할 정도의 반응을 관객들로부터 이끌어내야만 했다.
그리고 내 결론은 간단했다.
“사인을 너무 섣불리 했군.”
펀치 라인을 계속 쳐나가며 사람들을 각본에 협조하게 한다.
이들은 내 말을 들어줄 터다.
지금의 각본을 부정하는 이유가 나에 대한 애정 때문이었으니까.
“하지만 뭐 어쩌겠어. 여러분도 나처럼 되지 말고 계약서에 사인할 때는 잘 보고 하라고.”
그리고 사람들은 나를 따라왔다.
백스테이지에 있을 헌터의 표정이 구겨지는 광경을 상상했다.
속이 통쾌했다.
나는 이쪽을 응원하는 관객들 속에서 계속 말을 이어나갔다.
“다들 조금만 협조해달라고! 우리 티셔츠가 발매되어서 판매 촉진을 좀 해야 할 시간이거든!”
나는 링 위를 제 것이라도 된 양 사용하며 마음껏 소리쳤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런 내 말에 반응해 이 이야기에 맞춰주었다.
부커는 순식간에 관객들을 사로잡은 내 탁월한 솜씨에 감탄했다.
쿵-퓨리의 연기를 할 수밖에 없는 나를 이해하고 호응해주었다.
[Kung-Fury! Kung-Fury!]
“좋아! 쿵푸-타임이다!”
관객들이 웃으며 일어났다.
내 테마곡이 흘러나왔고 나는 부커에게 머리띠를 하나 건네주고 함께 쿵푸-타임을 시작했다.
박자에 맞춰 주먹을 내지르고 발차기를 하며 분위기를 띄웠다.
“자, 다음은 정권 지르기!”
전생과 달리 쿵-퓨리는 멍청한 악역이 아니라 사람들에게 쿵푸를 가르치는 스승 컨셉이었다.
이 자체로도 나쁘지는 않았다. 이런 선수도 있어야 쇼의 다양성이 증대되는 법이다.
문제는 헌터가 말했듯, 이 컨셉에는 한계가 있다는 점이었다.
때문에 그런 인식을 날리기 위해 나는 조지아를 선택했다.
그리고 티파니를 불렀다.
TV를 보는 시청자들도 속이 시원하다고 느낄 정도의 청량감을 바로 오늘 선보일 예정이었다.
그렇게 쿵푸-타임이 무르익을 무렵, 오늘 쇼에서 반드시 필요한 악당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째깍, 째깍.
시계 소리와 함께 요란하게 이어지는 락 음악.
오늘 그동안 부려온 패악질의 대가를 받게 될 자들.
바로 레볼루션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