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
링으로 올라온 레볼루션의 멤버들은 어마어마한 야유를 받았다.
순간 경력이 짧은 오튼이나 바티스타가 진짜 당황할 정도였다.
[Boooooooooooooooooo!]
헌터가 마이크를 쥐었지만 야유 때문에 말을 시작하기 어려웠다.
그 앞에 서있던 나는 슬쩍 미소를 지으며 헌터를 바라보았다.
이를 어쩌겠는가.
관객들의 의지가 그런 것을.
거기에 헌터는 나와 마찬가지로 웃었다. 하지만 나는 녀석의 속이 타들어가는 것을 실시간으로 느끼고 있었다.
아마 진짜 열 받겠지.
데뷔한지 1년도 되지 않은 신인에게 반응이 밀릴 뿐만 아니라, 받쳐주는 역할까지 맡았다.
현재 버닝콩의 메인 이벤터로서 정말로 굴욕적인 상황이었다.
하지만 그는 냉정함을 가장했다.
자기 수염을 쓰다듬으며 의도한 바라는 듯 여유를 부렸다.
그러다 좀 조용해졌다 싶으니 다시 마이크를 들었지만.
[Booooooooooooooooo!]
관객들의 야유가 다시 커졌다.
“풉.”
아, 실수했다.
웃으면 안 되는 건데.
헌터가 죽일 듯 날 노려보았다.
그래도 나름 죄책감(?)을 느낀 나는 먼저 마이크를 들었다.
사람들은 헌터가 그런 것과 달리 조용히 내 말을 경청했다.
“여기는 무슨 일이지?”
“……멍청이 둘이 ‘내 링’을 점거하는 모습을 보고 가만히 내버려둘 수 없어서.”
다시금 야유가 쏟아졌다.
헌터를 돕기 위해 나는 다시 한 번 마이크를 들었다. 녀석과 나는 ‘함께’ 일하기 시작했다.
서로 백스테이지에서는 적대하는 입장이지만, 일은 일이었다.
헌터도 내 도움을 거절하지 않고 곧바로 대사를 쳐나가는 방식으로 자신의 일을 했다.
“멍청이라고? 우리가?”
“그래, 두 멍청이. 쿵-퓨리와…… 그쪽은 이제 완전히 쿵-부커로 링 네임을 바꿨나?”
“바꿨죠?”
“……아니, 그건 아닌데.”
부커도 잘 따라왔다.
“어쨌든, 이 신성한 링에는 언제나 버닝콩에서 가장 완벽한 레슬러들이 서있어야 하는 법이지.”
헌터가 챔피언 벨트를 들었다.
레볼루션이 우리를 포위하듯 움직였고, 이내 공격이 시작되었다.
관객들이 야유했다.
[Boooooooooooooo!]
나와 부커는 순간의 습격에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다.
오튼이 바닥에 쓰러진 나를 마구 짓밟아댔다. 나는 머리를 보호하며 놈의 공격을 받아주었다.
묘하게 거친 발길질에 찌릿 노려보자 오튼이 뒤로 물러났다.
‘이 자식이.’
나중에 또 한마디 해야 하나?
그렇게 생각한 순간, 헌터가 내 위에 올라타 주먹을 휘둘렀다.
사심이 담긴 듯한 공격 속에서 나는 때가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놈들의 집권기는 끝난다.
바로 이 순간.
상상할 수 있는 가장 큰 야유 속에서 음악 하나가 울려 퍼졌다.
드럼과 베이스 속에서 여성 랩퍼가 여왕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렇게 지금 이 순간, 이곳은 테마곡의 제목처럼 티파니 맥센의 Queendom이 되었다.
[Yeeeeeeeeeeeeeeeah!!!]
관객들이 환호를 보냈다.
조지아, GCW, 악역 커미셔너.
얼마 전까지 러셀 하트를 죽어라고 괴롭혔던 악당 권력자.
하지만 그 캐릭터에게 상황이라는 변주를 더해주자, 티파니는 그야말로 어마어마한 환호를 받았다.
텔레비전을 보고 있는 시청자들도 똑똑히 알게 될 터였다. 거기에 해설자들이 양념을 치겠지.
나와 티파니의 연결점.
사람들이 기대하는 그것에 대해.
티파니의 버닝콩 복귀에 놀란 레볼루션의 멤버들이 일어났다.
티파니는 개중 헌터와도 연결점이 있는 사람이었다. 몇 년 전 두 사람은 함께 연인 각본을 수행하며 악역으로서 반응을 얻었다.
그렇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약간의 긴장감이 가미되었다.
지금 이 순간, 티파니는 누구를 위해 버닝콩에 복귀했는가?
공격이 멈추자 나와 부커는 예정대로 레볼루션과 거리를 벌렸다.
한쪽에는 레볼루션.
반대쪽에는 우리.
그런 상황에서 티파니 맥센이 링 위로 올라왔다. 관객들은 어마어마한 호응을 보내주었다.
[GCW! GCW! GCW! GCW! GCW! GCW! GCW! GCW!]
챈트와 환호, 그리고 박수.
거기에 성적으로 과장된 모습을 하고 있는 티파니에게 휘파람을 부는 사내들 역시도 존재했다.
마이크를 쥔 티파니는 우리와 레볼루션은 신경도 쓰지 않은 채 제 할 말을 하기 시작했다.
“돌아오니 좋네요.”
매력적인 미소.
그녀는 천성적으로 악역에 타고났지만 이처럼 멋진 미소로 사람을 홀리는 재주 또한 존재했다.
“물론, 그동안 쉬고 있었던 건 아니죠. 대학도 다녔고…… 그래, 맞아요. College Girl이었죠.”
[College Girl! College Girl! College Girl! College Girl!]
성적인 뉘앙스가 담긴 농담에 챈트로 화답하는 관객들.
“그리고 얼마 전까지는 GCW에서 선수들을 ‘교육’했죠. 겁 없이 까부는 챔피언에게 권력의 쓴맛을 한번 보여주고 싶었는데.”
[GCW! GCW! GCW! GCW! GCW! GCW! GCW! GCW!]
‘슈퍼 대박인데.’
관객들은 완전히 미쳐 날뛰었다.
“결국은 실패했고, 그로 인해 좀 생각을 해봤어요. 그리고 깨닫게 되었죠.”
뜸을 들이는 티파니 맥센.
그녀가 선택하는 건 어디인가.
GCW인가.
옛 연인인가.
관객들을 들었다 놨다, 천성적인 센스를 유감없이 발휘하던 티파니는 이윽고 레볼루션의 헌터를 돌아보았다.
“……오랜만이에요. 헌터.”
거기에 활짝 웃는 헌터.
하지만 그가 뭔가 말하려는 순간 티파니는 우리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반가워요. 신.”
[Yeaaaaaaaaaaaaaaah!]
원했던 결과에 환호하는 관객들.
[Yes! Yes! Yes! Yes! Yes! Yes! Yes! Yes! Yes! Yes! Yes!]
열광적인 챈트 속에 다가온 티파니가 결정적인 말을 이었다.
“그럼 먼저, 당신 계약서에 장난을 친 게 누군지 가르쳐드리죠. 바로 당신들이죠. 레볼루션.”
“우, 우리는…….”
“시치미 뗄 생각 말아요. 당신들이 계약서에 장난을 쳤고 임원들을 매수해 통과시켰잖아요.”
“…….”
“하지만 제가 온 이상 그런 장난은 통하지 않아요. 이미 변호사와 상의해 불법적인 계약을 무효화시킨 지 오래니까요.”
티파니가 날 돌아보았다.
“가만히 있을 거예요?”
“……그럴 리가.”
나는 바보 같은 머리띠를 풀어헤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Yes! Yes! Yes! Yes! Yes! Yes! Yes! Yes! Yes! Yes!]
관객들이 미쳐 날뛰었다.
심상치 않은 상황에 헌터와 플레어가 주춤거리며 먼저 링 아래로 내려갔다.
나는 곧장 오튼을 향해 돌진했다.
감정을 주체하지 못한 채 녀석을 무자비하게 공격했다. 링 안으로 환호가 쏟아져 들어왔다.
바티스타가 날 공격하기 위해 달려들었지만 부커가 막아냈다.
그동안 당해왔던 설움을 풀어내듯 나는 오튼을 실컷 두들겨 팼다. 녀석이 우는 소리를 냈다.
“야, 야……! 이거 진짜?!”
물론 감정은 담지 않았다.
난 프로니까.
* * *
폭발적인 반응이었다.
요 근래 버닝콩에서 볼 수 없었던, 사람들이 각본에 몰입해 미쳐 날뛰는 환상적인 세그먼트였다.
때문에 백스테이지로 돌아오자 드물게 바트가 벌떡 일어났다.
일을 할 때는 웬만해서는 자리를 벗어나지 않는 바트인데.
“정말 멋졌네!”
그는 땀에 흠뻑 젖은 채 돌아온 내 어깨를 붙잡으며 소리쳤다.
“관객 반응이 정말 엄청나더군! 대체 무슨 마법을 부린 겐가!”
“다들 잘해준 덕분이죠.”
“하하하! 아, 다들 멋졌어!”
“……아닙니다. 보스.”
헌터가 표정이 굳어진 채 대답했다. 평소와 달리 자신이 곁다리 취급을 받아 분한 것이겠지.
하지만 그 감정을 온전히 드러내지는 못하고, 그는 자기 팀원들과 함께 안쪽으로 들어갔다.
남은 건 나와 부커, 티파니였다.
슬쩍 기대하는 티파니의 눈빛에 나는 약간 배려를 해주었다.
“티파니가 잘해주었죠.”
“음? 아, 그래. 확실히 그렇지. 티파니. 멋진 복귀였다.”
“감사합니다. 때마침 조지아에서 버닝콩이 열려서 다행이네요.”
“후하하하! 이거, 동양인이 여기서 환대받는 건 처음 보는데!”
분위기가 좀 싸해졌다.
티파니가 내 눈치를 살피는 가운데 나는 웃으며 이야기했다.
“제가 그들이 가지고 있던 고정 관념을 부숴버린 거죠.”
“호오, 그런가?”
“예, 저는 언제나 그렇게 해서 절 알려왔죠. 보스의 굳어진 마음도 좀 부서지지 않았습니까?”
“하하하! 글쎄, 나는 쿵-퓨리가 사라져서 조금 아쉽네만.”
“가끔 돌아오면 되죠. 재미있는 기믹이었으니까.”
농담이 안 통하는 양반이다.
반응이 죽여줘서 인정은 하겠지만, 내심 자기 마음에는 안 든다는 거겠지.
그렇게 바트와 대화를 나눈 우리는 일단 락커룸으로 돌아왔다.
기다리고 있던 동료들은 관객들처럼 신나 우리를 환영해주었다.
가장 먼저 시몬스가 낄낄 웃으며 나에게 헤드록을 걸었다.
“꼬마! 이 새끼 이거!”
“아, 아픕니다. 록.”
바쿠만큼은 아니었지만 백스테이지의 군기반장이었던 그 또한 실전 싸움의 강자였다.
“부커, 멋졌어.”
“이 꼬마가 다 한 거지. 제기랄. 각본 순서를 즉석에서 바꾸질 않나. 그런데도 말을 술술 지어내서 그럴 듯하게 이끌고 말이야.”
질린 듯한 얼굴로 중얼거린 부커마저 내 팔을 꽉 잡았다.
그렇게 선배들에게서 나는 한동안 잔뜩 귀여움(?)을 받았다.
……이게 또 GCW랑 다른 부분인데, 여기서 친해진 양반들은 나랑 많으면 20살 가까이 나이 차이가 나서 날 완전 애 취급했다.
티파티가 웃음을 터뜨렸다.
“와, 꼼짝 못하고 당하네요.”
“아가씨, 그래봤자 이놈은 이 시몬스에게 아직 안 됩니다!”
“그러게요. 록, 아직 안 죽었어. 평소에 여유가 넘치던 사람인데 저러는 얼굴은 처음 봐요.”
“원하신다면, 좀 더 할까요?”
“음~ 나중으로 하죠. 오늘 메인이벤트 경기도 뛰어야 하니까.”
헤드록이 겨우 풀렸다.
힘이 풀려 자리에 털썩 주저앉은 내 어깨를 누군가 툭툭 쳤다.
시몬스였다.
“선수들 중 그 아무도 너처럼 하지 못했을 거다. 정말이지 속이 시원했어. 꼬마.”
“오튼한테도 몇 달 전에 그랬던 것처럼 또 참교육해주라고.”
“예에…….”
이 사람들 역시 표현이 거칠다.
하지만 뭐 어쩌겠는가. 이 시대의 선수들은 다 이런 식이었다.
즉, 최상급의 칭찬이었다.
* * *
그 후로 쇼는 다른 선수들의 경기와 대립이 계속해서 이어졌다.
그와 동시에 중간 중간 미리 찍어둔 우리의 백스테이지 세그먼트를 방영해 기대감을 높였다.
메인이벤트에서 바로 나와 부커, 바티스타와 오튼이 태그 팀으로 붙을 예정이었기 때문이었다.
이것이 쇼의 메인 스토리였다.
세 시간이라는 한정된, 하지만 시청자들에게는 꽤나 긴 시간.
그 시간 동안 그들을 텔레비전 앞에 잡아놓기 위해서는 이 메인이벤트를 잘 꾸며야 하는 법.
그리고 중간에 들어온 시청률은 거의 떨어지지 않았고, 세그먼트가 이어질수록 더 상승했다.
레볼루션의 멤버들은 티파니의 전향에 분통을 터뜨리면서도 이기겠다는 결의를 내보였다.
그리고 두 번째 세그먼트.
티파니의 인터뷰가 이어졌다.
“티파니 맥센, 돌아온 걸 환영합니다. 어떻게 지내셨어요?”
“말했듯, 공부와 사업에 매진했죠. GCW는 멋진 쇼를 이어나가며 계속 성장하고 있습니다.”
“쇼를 키우는 건 맥센가의 전통과도 같은 것 같네요. 멋져요.”
“감사합니다. 테리. 하지만 쇼를 키운 건 제가 아니라 신이죠.”
“쿵-퓨리가 아닌 신 말이군요.”
“예, 그를 돕기 위해서 전 이 버닝콩으로 돌아온 것이죠.”
“그렇다면 앞으로 계속해서 버닝콩에 출연하실 건가요?”
“물론이죠. 메이저에 막 입성한 저 친구는 조금 케어가 필요한 것처럼 보이거든요.”
“……누가 그렇다는 거야.”
그리고 내가 나왔다.
관객들의 환호가 쩌렁쩌렁했다.
청바지에 러닝셔츠. 원래의 뒷골목 스타일로 돌아온 나는 머리를 쓸어 올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게 입으니 멋진데요?”
“난 언제나 그랬지. 인터뷰어 양반. 머릿속에서 반년동안 보았던 쿵푸 닌자는 지워버리라고.”
“예, 예에…….”
“생각보다 즐겁게 하던데요?”
“그야 난 뭐든지 잘하니까.”
티파니에게 자신만만하게 말하다가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깜빡 속았어. 제기랄, 당신도 사인할 때 제대로 보고 하라고.”
“……제대로 안 봤어요?”
“그때 좀 술을 많이 마셔서.”
“하아, 술을요.”
“맥주는 단백질이라 괜찮아.”
가벼운 농담으로 분위기를 끌어올린 세그먼트는 나와 티파니의 티키타카로 계속 이어졌다.
생각했던 것보다 좋았다.
건방진 신인과 그에게 도움을 준 개과천선한 금수저. 그 조합은 꽤나 신선하고 매력적이었다.
그렇게 이야기를 이어나가는 동안 부커까지 합류해, 우리는 레볼루션과 대적할 준비를 마쳤다.
마지막 말은 간단했다.
“다들 지켜보라고. 오늘까지 레볼루션의 시대가 이어졌지.”
나는 카메라에 얼굴을 바싹 들이댄 채로 이야기했다.
“하지만 그건 끝났어. 왜? 내가 너희들이 알고 있던 세계를 박살낼 생각이거든!”
내 캐치 프레이즈.
Break The World.
그것을 들은 관객들은 어마어마한 환호성을 내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