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프로레슬링의 신-87화 (87/634)

87.

다음 날 아침.

체크아웃을 하고 호텔에서 나온 나를 기다리는 사람이 있었다.

부커-리? 아니다.

티파니 맥센? 아니다.

……놀랍게도 랜스 오튼이었다.

싸구려 비즈니스 호텔 앞에 엉거주춤 서있던 놈이 다가왔다.

“어, 어어.”

그리고 인사를 했다.

멍청해 보이는 선글라스와 셔츠. 프로레슬러가 항상 지참하고 다니는 트렁크 가방이 어색했다.

그 말처럼 어색했다.

나도 갑작스러운 연락을 예상하지 못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래도 놈이 먼저 인사를 해온 시점에서 무슨 이유로 연락한 것인지 예상이 대충 갔다.

‘고민이 많을 나이지.’

분명 ‘그런’ 이유에서일 터다.

“어, 아침은 먹었어?”

“아직.”

“어쩌다 보니 괜찮은 스시 레스토랑을 알게 됐는데, 갈래?”

“…….”

설마 이 새끼 나를 일본인이라고 생각해서 말하는 건가?

참신한 인종 차별이군.

아무리 일본인이라고 해도 아침으로 스시 레스토랑에 가지는 않을 텐데 말이다.

‘바보인가.’

하지만 뭐라고 말하기도 귀찮아 적당히 넘기자고 생각했다.

“적당히 근처로 가자고.”

“그, 그럴까?”

“그래, 분명히 아침 정식을 파는 가게가 근처에 있었는데.”

나는 마찬가지로 가지고 나온 트렁크를 끌고 가기 시작했다.

오튼이 허겁지겁 뒤를 따라와 기묘한 분위기가 계속 되었다.

녀석이 나에게 보자던 이유.

그건 바로…… 좀 표현이 묘한데, ‘상담’이 필요해서일 터였다.

물론 지금의 오튼은 건방진, 안하무인의 쓰레기이기는 했다.

하지만 그건 주변에서 놈을 계속해서 띄워주었기 때문이었다.

회사의 미래.

잘생긴 외모와 큰 키, 멋진 몸매, 거기다 백인이라는 인종까지.

녀석은 정확히 회사에서 원하는 인재상이었다. 따라서 입사 초기부터 큰 푸시를 받은 것이다.

헌터와 플레어 역시 놈을 점찍어 2선 벨트인 인터컨티넨탈 챔피언의 자리에까지 오른 것이지.

하지만 그것들을 제외한 채로 놓고 보면 녀석은 아무것도 모르는 신인이었다.

그렇기에 항상 의문을 가졌다……고 나중에 자서전에서 말했다.

왜 관객들이 자신에게 보내는 야유는 남들과 다른 것인지.

왜 나는 인정받지 못하는지.

그것을 깨달았을 때 놈은 성장했고, 시나의 라이벌이 되었다.

말인즉슨 그전까지는 엄청난 압박감 속에 일했다는 뜻이었다.

실제로 링 위의 선수가 받는 압박감은 정말 장난이 아니다.

경기장의 수만.

TV 시청자 수백만.

그 모두에게 평가를 받았다.

혹자는 여기서 묻겠지.

‘악역이 야유를 받는 건 어찌됐든 좋은 일이 아니냐.’

하지만 야유에도 수준이 있는 법이다.

좋은 야유는 관객들이 스토리에 깊이 몰입했을 때 나오는 법.

그렇기에 만약 최후에 악역이 승리해도 그 스토리에 설득력이 있으면 사람들은 갈채를 보냈다.

하지만 오튼에게 보내는 야유는 그와는 정반대였다. 말하자면 내가 헌터에게 말했던 ‘역반응’에 가까웠다.

단순히 저 선수에 대한 반발.

네가 뭔데 그 자리에 있냐.

인정할 수 없다.

선수들도 바보는 아니었기에 그 정도는 구분할 줄 알았다.

좋은 야유는 선수와 회사의 가치를 높여주지만, 나쁜 야유는 그와는 정반대였다.

선역으로서 좋은 환호를 받기 어려운 것처럼, 악역으로서 좋은 야유를 받는 것도 어려운 편이었다.

오튼은 초창기 그런 야유를 받고 ‘실패할 뻔한’ 선수였다.

‘울기도 했다지.’

이렇게 건방진 놈이 방에서 질질 짜는 게 상상은 안 갔지만.

그래도 찾아온 게 좀 기특했다.

사실 처음에 놈과 기 싸움을 했던 이유도 바로 이것 때문이었다.

놈이 굽히고 들어오도록.

시기는 생각보다 빨랐지만, 모든 게 예상하던 대로 흘러가고 있었다.

“나머지는 어쩌고 왔냐?”

“나머지?”

“네 친구들.”

“아, 잠깐 여기에서 볼일이 있다고 한 다음에 빠져나왔어.”

“그렇군.”

“그러는 너는? 부커나 친구들이 있지 않아?”

“누가 불러서 남았지.”

짧게 대답한 나는 곧바로 식당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소시지 냄새가 죽여주는 식당.

우리를 알아본 직원들에게 안내된 우리는 최대한 구석 자리에 앉아 조용히 메뉴를 주문했다.

나는 단백질 위주의 식단.

오튼은 똑같은 메뉴를 시키더니 거기에 팬케이크까지 주문했다.

내가 웨이트리스에게 말했다.

“팬케이크는 빼주세요.”

“뭐? 왜?”

“그거 먹으면 죽는 거야.”

“아니…….”

“내 말대로 해.”

내가 잠시 노려보자 오튼은 결국 팬케이크의 주문을 취소했다.

그러자니 주문서를 받아 적은 웨이트리스가 싱긋 웃어 보였다.

“두 분 어제 멋졌어요.”

“아, 감사합니다.”

“경기장에서 보니 역시 박력이 다르던데요. 그런데 실제로는 두 분 꽤 친하신가 봐요?”

살짝 흥분했는지 개인적인 영역을 물어보는 웨이트리스.

뻘쭘한 듯 시선을 피하는 오튼을 대신해 내가 대답했다.

“친합니다.”

“와! 멋지네요! 역시 프로레슬링의 세계는 정말 대단해요!”

“확실히 친한 사이인데 얼굴에 펀치를 하는 게 쉽진 않죠.”

적당히 대답하자 이내 만족하며 물러가는 웨이트리스.

오튼이 입을 열었다.

“……친했나?”

“그럼 그 앞에서 사실 친하지는 않고 네가 다짜고짜 만나자고 해서 온 사이라고 말하리?”

“아, 아니…….”

“정신차려. 오튼. 지금 내 앞에서 점잔 빼고 있을 때가 아니야.”

“무, 무슨 소리야?”

“네가 왜 사람들에게 미움을 받는가. 너와 내 차이는 무엇인가. 그걸 물어보려고 온 거잖아?”

“…….”

오튼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꽤나 길게 머뭇거리던 녀석은 식전 커피가 나오고 나서야 겨우 입을 열었다.

“너, 뭐든지 아는구나.”

“그거 대답하려고 뜸 들였냐?”

“그, 그렇게까지 심하게 말할 필요는 없잖아. 얼굴 보면서 밥 먹을 사이에 꼭 그래야만 해?”

“너만 보면 이마 찢겼던 게 아파서 말이야. 뇌에 문제가 생겼는지 말이 험하게 나오는군.”

“그거언…….”

또 잠시 고민.

아침 메뉴로 시킨 게 테이블에 오르고 나서야 대답이 이어졌다.

“미안. 내가 잘못했어.”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냐?”

“그, 헌터한테 배운 거야.”

“참 좋은 선생님이네.”

“얕보이면 안 된다고. 네 아래에 있는 선수는 무조건 세게 패서 위아래를 확실히 해두랬어.”

“내가? 네 아래라고?”

“일단 그 사람들 말로는.”

“그래서 네가 건방진 거였군.”

맞는 말이기는 했다.

일반적으로 신인은 락커룸에서 곧잘 무시당하기 마련이었다.

“하지만 그 인간들 하라는 대로 했더니 영 결과가 마음에 안 들어. 그래서 날 찾아온 거지?”

“……맞아.”

“조언을 바라는 거야? 아니면 해결책을 바라는 거야.”

“둘 다?”

“하나만 정해.”

“으음, 해결책으로…….”

“나한테 벨트를 넘겨.”

“……뭐?”

“넌 악역으로서 벨트를 제대로 넘겨주지 못했어. 지난 대립이 누구랑 어떻게 했지? 말해봐.”

“어, 록밴댐하고 했지.”

“어떤 내용이었는데?”

“그냥 벨트를 걸고 싸운 거지.”

“…….”

“내가 그 친구를 땅딸이라고 놀리고 아버지를 모욕했었지.”

“그리고 록밴댐은?”

“아버지의 명예를 위해서 반드시 이기겠다고 맹세를 했지.”

“그럼 여기서 문제. 네가 이기는 게 상황적 이치에 맞았을까?”

“……난 시키는 대로 했어.”

“네가 우리 집에서 키우는 개라면 아무 문제도 없지. 하지만 넌 사람이고, 스스로 한 행동에 책임을 져야 하는 챔피언이야.”

나는 소시지를 쿡 찍어 삼켰다.

“네가 그래서 미움 받는 거야.”

“남들이 하라는 대로 해서?”

“또 남 탓하네. 네가 아무 생각 없이 살아서 문제인 거라고.”

“으, 으음…….”

“록밴댐에게 그딴 각본을 시킨 것도 문제야. 지게 만들 거였으면 좀 적당히 하던가. 자기 아버지 명예까지 걸었는데 그딴 결말을 주면 뭐 어쩌자는 거야?”

“내가 졌어야 한다고…….”

“좋은 업계 각본들을 살펴봐. 선역이 그렇게 자기 모든 것을 걸었는데 패배하는 각본이 많았나.”

“……그게 많았다면 프로레슬링 업계에 선역이 있을 수가 없겠지.”

“근데 넌 그걸 이겨 먹었어. 사람들은 거기에서 불쾌감을 느낀 거야. 그 각본이 록밴댐의 위상을 철저하게 파괴해놓았거든.”

나는 오튼을 포크로 가리켰다.

“말도 안 돼. 몰입할 수도 없고. 네가 과도한 기회를 받고 있다고 생각해. 그래서 너에게 오는 야유는 현실에서 나오는 거야.”

“현실에서…….”

“악역은 져줄 때 져줘야 돼. 하지만 넌 과도하게 이기고 있고. 그래서 꼴 보기 싫은 개자식이란 뜻이지.”

“그래서 너에게 벨트를 넘기라는 거구나. 너는 지금 가장 핫한 선역 신인 중 하나니까.”

“그렇지. 그리고 날 대립 상대로 정하라는 건 다른 이유가 있어.”

“뭐, 뭔데?”

“네가 아직 인정받지 못한 부분을 채워줄 수가 있기 때문이야.”

“그건…….”

“대립이 시작되면 정하지.”

나는 물을 한 모금 마셨다.

“사실, 아직 때는 아니야. 나와 부커는 일단 태그 팀 챔피언부터 먹을 생각이거든.”

“이야기는 들었어.”

“그 태그 팀 챔피언도 플레어가 있어서 버티는 거야. 너와 바티가 챔피언이었다면 네 인터컨티넨탈 챔피언과 마찬가지로 안 좋은 야유가 계속 쏟아져 나왔겠지.”

“플레어와 우리의 사이에 차이가 있다는 거야?”

“당연하지, 이 멍청아. 플레어는 진짜 역대급 하이퍼 슈퍼…….”

흥분해 이야기하려던 나는 이내 얌전히 입을 다물었다.

“직접 생각해봐.”

“아, 왜! 더 이야기해줘!”

“허허, 네가 지금 내 앞에서 큰 소리 칠 때라고 생각하니?”

“으, 으음…….”

입을 꾹 다무는 오튼.

나는 녀석의 앞에 계산서를 내밀었다.

“상담료는 분할 납부해.”

“분할……?”

“앞으로 쇼가 끝난 뒤에 날 찾아와. 좋은 말을 듣고 싶거든 렌트카 비용과 함께 먹은 음식 값은 모조리 네가 지불하라고.”

“끄응.”

오튼이 계산서를 쥐었다.

그렇게 계약이 성립되었다.

* * *

2004년 8월.

WWF 4대 페이퍼뷰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는 섬머 수플렉스.

4대 페이퍼뷰는 다른 일반적인 페이퍼뷰보다도 훨씬 컸다.

큰 대립도 많았고, 경기 숫자도 평소 페이퍼뷰보다 더 많았다.

그렇기 때문에 대립의 완결을 기대하고 모인 관객의 수는 무려 10만 명을 가볍게 돌파했다.

나는 그런 관객들의 기대에 우리의 경기가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으리라고 확신을 가졌다.

[SIN! SIN! SIN! SIN! SIN!]

챈트가 이어졌다.

경기의 종반부.

링 위의 나는 체력적으로 한계임을 느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닉 플레어의 솜씨는 여전히 탁월했지만 체력적인 문제가 컸고, 그림이 죽는다는 이유로 인해 나의 주된 상대는 바티스타였다.

그리고 이 양반은 정말로 프로레슬링에 소질이 없었다.

“바티, 정신 차려!”

“끄윽…….”

“마지막이야! 힘을 내라고!”

말했듯 근육량이 너무 많으면 오히려 체력이 떨어졌다. 무게를 견디느라 힘을 쓰기 때문이었다.

거기에 바티는 늦은 나이에 데뷔해 벌써 나이가 35살이었다.

그런데도 터질 듯한 근육량을 유지하고 있어 체력이 부족했다.

나는 지금껏 그런 바티가 돋보일 수 있는 방향으로 우리들의 대립과 경기를 설계했다.

덕분에 바티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 역시 정상적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그 마지막이 찾아왔다.

쩌억-!

회사에서 ‘스팅거’라는 이름으로 명명한 내 니 킥이 일어선 바티의 안면에 정확히 적중했다.

하지만 그는 버텨냈다.

몸이 크게 뒤로 기울었지만 비틀거리다 이내 버티고 섰다.

내가 바티스타에게 주문한 셀링이었다. 관객들은 그런 그를 보고 엄청난 환호를 보냈다.

그 앞에서 숨을 몰아쉬던 나는 바티스타의 가슴을 툭 밀었다.

그제야 녀석은 쓰러졌다.

서서 기절한 것이다.

그렇게 바티스타의 위상까지 보호해준 나는 녀석의 위에 쓰러지며 동시에 커버를 했다.

심판과 함께 경기에 몰입한 관객들이 동시에 카운트를 셌다.

[1!! 2!! 3!!]

땡땡땡!!

경기의 끝을 알리는 링 벨이 거대한 경기장에 울려 퍼졌다.

장엄한 음악 속에서 나는 쓰러진 바티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고맙다.”

“수고, 했, 어.”

숨을 몰아쉬며 대답하는 녀석.

함께 대립을 하며 따로 아이디어를 나눈 덕인지. 녀석 역시도 내게 꽤나 호의적이 되었다.

비록 헌터와 함께 있을 때에도 그러지는 못했지만 말이다.

바로 그때, 링 아래에서 플레어를 상대하고 있던 부커-리가 벨트를 들고 위로 올라왔다.

“야! 꼬마!!”

그 얼굴에 웃음꽃이 폈다.

“진짜 죽여줬다!! 최고였어!! 네가 진짜 역대 최고다!!”

감격에 찬 부커는 체면도 신경 안 쓰고 날 와락 끌어안았다.

[SIN! SIN! SIN! SIN! SIN!]

관객들이 내 이름을 드높여 외치는 가운데 난 벨트를 하늘 높이 번쩍 치켜들었다.

슬슬 WWF 메인 쇼에서도 내 진가가 통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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