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프로레슬링의 신-88화 (88/634)

88.

WWF 월드 태그 팀 챔피언.

그 상징성은 어마어마했다.

수많은 미래의 아이콘, 슈퍼스타, 레전드들이 획득했던 벨트.

메인 커리어 1년차에 이걸 획득한 선수는 손에 꼽았다.

‘GCW까지 더하면 3년차지만.’

어쨌든 산하 단체의 벨트와는 다른 의미에서 기쁨이 느껴졌다.

GCW 때는 모두가 함께 협력해 이 벨트를 얻었다는 느낌이라면.

WWF에서는 반대로 내가 능력으로 당당히 쟁취한 기분이었다.

관계자들의 반응도 좋았다.

땀투성이가 된 내가 고릴라 포지션으로 돌아오자 바트를 포함한 모두가 다가와 축하를 해주었다.

“멋진 경기였네.”

“감사합니다. 보스.”

“이번 각본으로 두 팀 모두 반응이 좋아졌어. 자네 의견을 들으니 확실히 일이 잘 풀리는군.”

“과찬이십니다.”

“하하하! 좋아! 아주 좋아!”

호탕하게 웃는 바트.

그 뒤에 서있던 직원들과도 인사를 나눈 나는 뒤로 돌아섰다.

“…….”

메인 이벤트를 기다리고 있던 헌터와 눈이 잠시 마주쳤다.

그 옆에 딱 붙어 있던 오튼이 허리 아래로 손을 흔들었다.

피식 웃어준 나는 그대로 헌터를 지나쳐 락커룸으로 돌아왔다.

뭐, 이렇게 되었다.

내가 다시금 ‘신’ 기믹을 장착하고 난 뒤 벌써 몇 달이 흘렀고.

나는 헌터를 제외한 다른 레볼루션 멤버들에게는 인정을 받았다.

그들은 헌터의 눈치를 보는 와중에도 나를 존중해주었다. 때문에 나 역시도 그것을 돌려주었다.

이게 중요했다.

우리는 쇼에서 대립했지만 그를 위해서는 서로 협력했다. 때문에 이런 관계가 제일 좋았다.

서로 윈윈이 되는 구조.

나와 바티스타가 만들어낸 것처럼 말이다.

우리는 대립 후 각자가 서로 더 높은 영역에 도달했다.

나는 태그 팀 챔피언.

바티스타는 캐릭터의 발달.

‘이렇게 잘 풀리면 좋지.’

오튼과의 대립이나, 그전에 계속될 태그 팀 대립도 괜찮은 방향으로 풀려갈 것 같았다.

그 거만하던 레볼루션이 내게 절절 매는 것만 봐도 선배들은 자연히 나에게 존중을 보이겠지.

‘물론 레볼루션 전체가 그런 건 아니라서 좀 애매하긴 한데.’

정작 레볼루션의 수장인 헌터는 락커룸에서 한 대화 이후로도 여전히 날 눈엣가시 취급했다.

하지만 별수 없었다.

헌터와의 관계는 좀 복잡했다.

오튼과는 단순한 자존심 싸움이었지만 헌터와는 그것을 넘었다.

말하자면 헌터는 ‘자기 여자’를 빼앗겼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그건 아니지만.’

일은 일일 뿐이었다.

거기다 티파니는 헌터와의 관계는 분명 끝났다 이야기했다. 굳이 말하자면 헌터의 일방적인 집착에 불과했다.

자기도 창피한 일이라는 걸 아는지 최대한 숨기려고 했지만 연기나 행동에서 다 티가 났다.

나와 티파니, 헌터가 엮인 ‘막장 각본’은 현재 버닝콩에서 가장 큰 반응을 얻고 있는 각본이었다.

티파니와 내가 미묘한 감정의 기류를 연출하는 와중 ‘옛 남친’이 구질구질하게 군다는 스토리.

티파니는 헌터와의 관계에 선을 명백히 긋듯 나를 더 강하게 유혹했고, 헌터는 그런 그녀의 마음을 되돌리기 위해 갖은 수를 다 썼다.

‘현실하고 똑같지.’

그렇기에 나는 지금 이게 어쩔 수 없는 부작용이라고 생각했다.

우선순위를 두었을 때 헌터의 질투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자기가 더 잘나던가.

헌터는 물론 훌륭한 프로레슬러였지만, 지금은 내가 좀 더 위에 있었다.

그게 객관적인 사실이었다.

샤워를 마치고 나오자 록 시몬스가 병맥주를 든 채 서있었다.

“꼬마, 오늘은 마셔야지?”

“……락커룸에 술을 반입하는 건 분명히 금지사항 아닙니까?”

“누가 나한테 뭐라고 하랴. 크하하! 축하한다! 이 괴물 자식!”

일단 병만 받아 옆에 두었다.

차갑게 식혀진 병을 만지자 순간 욕구가 끓었으나 참아냈다.

“고생했다. 챔피언.”

“감사합니다.”

“부커도, 한 병 해라.”

“예, 시몬스.”

내 뒤를 따라 나온 부커가 마찬가지로 병을 받아 옆에 두었다.

“안 마셔요?”

“파트너가 안 마시는데 나만 즐겁게 홀짝일 수야 없지.”

내 등을 툭 두드리는 부커.

거기에 피식 웃은 나는 락커룸 한쪽에 놓인 TV를 돌아보았다.

한창 메인이벤트가 진행 중.

트리플 H의 상대는 록밴댐.

맞다. 오튼에게 부모님 운운했다가 본전도 찾지 못하고 위상이 박살 났던 바로 그 선수였다.

오늘 역시 헌터가 승리할 예정이었고 관객들은 결과가 뻔히 보이는 경기에 몰입하지 못했다.

‘최악이군.’

나 역시 심드렁했다.

헌터는 어떻게든 악역 연기로 어그로를 끌어보려고 했지만 관객들의 반응은 올라오지 못했다.

덕분에 상당한 수준의 경기력을 가진 록밴댐이 위험한 범프를 수행해 억지로 분위기를 띄워야만 했다.

선수들이 다들 웃고 떠드는 가운데 나는 계속 경기를 보았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누군가 락커룸의 문을 열고 나타났다.

“신 있나?”

“플레어…….”

“아아, 괜찮네. 인사만 하려고.”

플레어의 뒤를 따라 오튼과 바티스타가 나타났다. 그 모습을 본 모두가 놀라 어안이 벙벙해졌다.

나는 의자 위에 놓아두었던 맥주를 플레어에게 건넸다.

“일단 한 잔 하시죠.”

“오, 맥주로군. 시몬스인가?”

“하하! 귀신같네요, 플레어!”

적당히 분위기를 살피던 시몬스가 쭈뼛거리며 서있던 오튼과 바티스타에게도 맥주를 권했다.

맥주를 받아든 오튼과 바티스타는 곧장 내 앞으로 다가왔다.

랜스 오튼.

요 몇 달간 내 조언을 받아서인지 반응도 꽤 올라오고 어느 정도 적응을 해나가는 모습이었다.

비록 아직까지 벨트를 들고 있었지만 부킹 때 적극적으로 자기 의견을 내도록 변했다.

“축하한다.”

“헌터가 없으니 여기 온 거군.”

“그러니 인사만 하겠다고 한 거지. 헌터가 티파니 때문인지 널 언젠가 손봐주겠다고 하는걸.”

“……좋은 정보 고맙다.”

좀 조심해서 다녀야겠군.

그렇게 생각한 나는 오튼 뒤에 붙은 바티스타에게 말을 걸었다.

“바티, 오늘 고생 많았어요.”

“미안하다. 마지막이 가장 중요한 스팟인데 정신을 못 차렸다니.”

“어쩔 수 없죠. 힘 배분하는 것만 좀 더 연습하면 될 거예요.”

재빨리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고 사과하는 바티스타의 모습에 나는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이런 게 또 중요한 법이었다.

나는 의중을 모르는 처음에만 기 싸움을 벌였을 뿐, 상대가 숙이고 들어오면 배려를 해주었다.

그 결과가 이것이었다.

이들은 경기에 나간 헌터를 기다리는 대신, 나에게 먼저 인사를 하러 오는 선택을 내렸다.

헌터가 지지부진한 반응 속에서 챔피언 자리를 지키는 동안 우리는 실컷 떠들며 회포를 풀었다.

그리고 그로부터 다시 며칠 뒤.

나와 헌터의 꼬인 관계는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풀려나갔다.

그와 더불어 티파니 맥센과 나의 관계 역시 조금 미묘한 방향으로 흘러가기 시작했다.

* * *

여름이 슬슬 끝나가는 9월 말.

포르쉐의 조수석에 앉은 나는 목덜미를 스치는 바람을 느꼈다.

확실히 비싼 값을 하는 차였다.

두 번의 삶을 거치는 내내 장거리 운전에 익숙해진 나는 자동차에 관해서 좀 민감하게 따졌다.

그렇게 봤을 때, 전에 탔던 페라리나 포르쉐나 다 환상적이었다.

내가 운전대를 잡을 수 없다는 게 유일하게 아쉬운 부분이었다.

그래도 어쩔 수 없었다.

‘남의 차를 운전하다가 박살내면 그 관계도 같이 박살나거든.’

게다가 그 차가 한정판으로 전 세계 77대가 발매된 포르쉐 973 에디션이라면 더욱 그랬다.

티파니도 운전을 좋아하기 때문인지 나에게 핸들을 맡기고 쉬려는 낌새는 보이지 않았다.

현장팀과 잠시 떨어진 우리는 지금 스포츠 매거진 인터뷰를 마친 뒤 공항으로 가는 길이었다.

정말 하드한 스케줄이었다.

주간 쇼를 마친 게 바로 어제.

오늘은 매거진 인터뷰.

그리고 우리는 내일까지 비행기를 타고 유럽으로 가야만 했다.

유럽 투어가 있기 때문이었다.

말은 거창했지만 단순히 유럽에서 쇼를 촬영하는 것에 불과했다.

그쪽 역시 영어권이니 만큼 우리의 주요한 고객들인 것이다.

어쨌든 일이 잘 풀렸다.

다른 선수들과 해나가고 있는 대립도 계속해서 좋았고, 부커와 나의 태그 팀은 승승장구했다.

거기다가 태그 팀 외적인 삼각관계 각본 역시도 아주 좋았다.

나는 버닝콩에서 점점 빠질 수 없는 선수가 되었다. 대충 미드 카더 정도는 되는 포지션이었다.

무지막지하게 빠른 성장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모두 내 탁월한 실력과 더불어 지금 운전대를 잡고 있는 이 사람 덕이었다.

티파니는 운전을 하며 계속해서 뭔지 모를 노래를 흥얼거렸다.

그 내용이 참 가관이었다.

“무언가 내 안에 있어. 그게 나온다~. 난 널 죽이고 말 거야~.”

“…….”

“나의 분노가 세상을 뒤덮는다. 너를 반드시 죽이고 말 테다~. 넌 나의…… 응? 왜 그래요?”

“어, 누구 노래였죠?”

“카니발 홉스요.”

“지독한 노래로군요.”

“멋지죠.”

“심의에 안 걸립니까?”

“자유의 나라잖아요.”

미국이란 대체 뭘까.

나는 어이가 없어 데스 메탈을 계속 흥얼거리는 티파니를 바라보았다. 그러자니 선글라스를 낀 그녀의 하얀 뺨이 좀 붉어졌다.

“자꾸 볼 거예요?”

“왜 그런 노래를 좋아하죠?”

“……무례하군요.”

“왜 사람을 죽여요. 노래에서.”

“그럴 수도 있죠. 노랜데.”

“노래니까 하면 안 되죠.”

“나한테 뭐라고 하지 말고 노래를 가르쳐준 진 그렐한테 말해요.”

“진 그렐이라면…… 뱀파이어 컨셉으로 활동했던 선수요?”

“예, 그 선수가 저에게 이 노래를 가르쳐줬죠. 제가 15살 때요.”

“미성년자에게 가르쳐주기는 너무 하드코어한 노래 같은데.”

“그래도 그때 락커룸에서 저 정도면 얌전하게 논 편에 속하죠.”

“어땠는데요?”

“다들 여자와 술을 끼고 살았죠. 이해는 해요. 프로레슬러들은 강한 만큼 외로운 사람들이니까.”

맞는 말이었다.

레슬러들은 매일매일 도시에서 도시로 이동하는 삶을 보냈다.

1년에 300일 가까이를 그렇게 보냈고 가족과도 떨어져 지냈다.

“그렇기 때문인지 다들 일 이야기가 아니면 서로 의지하면서 지냈죠. 옛날의 락커룸은 마치 하나의 거대한 가족 같았어요.”

“제가 아는 것과는 다르군요. 알력 다툼이 심했다고 들었는데.”

“일할 때만 그랬죠. 끝나고 나면 다 같이 모여서 맥주도 마시고.”

“어린 시절의 추억이군요.”

“맞아요. 그때는 정말 이상한 모험이라도 하는 기분이었는데.”

차가 크게 돌았다.

티파니와 이야기를 하느라 몰랐는데 어느새 공항에 도착했다.

“언제나 그렇듯, 나와 아버지만 다음 시대로 나아가게 되었죠.”

더는 묻지 않는 편이 낫겠군.

그쪽에서도 그런 눈치였다.

* * *

그렇게 맥센의 전용기를 탄 티파니와 나는 유럽으로 향했다.

굳이 전용기를 쓰는 이유는, 돌아올 때 바트 역시 전용기를 탑승해야 하기 때문이라고 들었다.

처음 타보는 전용기.

그 압도적인 편안함에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나는 온갖 산해진미를 맛본 뒤 마사지 의자에 파묻혀 유럽에 도착할 수가 있었다.

런던 히드로 공항.

밖으로 나온 나는 수많은 사람들의 시선에 휩싸이게 되었다.

이제는 익숙해진 상황이었다.

여자들은 날 보며 은근히 캣콜링을 하고 남자들도 내 큰 키와 좋은 몸에 놀란 모습들이었다.

‘동양인이 이러니 더 놀라네.’

대부분 영국인들은 자신들의 편견이 깨져 놀란 모습이었다.

동양인은 작고 왜소한 체격에 공부나 잘하는 샌님들일 거라는 편견 말이다.

그런 놈이 며칠 뒤, 세계에서 가장 큰 프로레슬링 단체가 펼치는 경기에 출전하는 걸 알면 더 놀라겠지.

나는 이들을 놀라게 할 마음에 작은 설렘을 느끼며 먼저 나간 티파니를 찾아 두리번거렸다.

‘저기 있군.’

키가 크고 눈에 띄는 외모다.

하지만 전화를 받고 있던 그녀는 어딘가 좀 심각한 얼굴이었다.

뭐지?

“응, 그래……. 알겠어요. 일단 그쪽으로 곧장 합류할게요.”

전화를 끊은 티파니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래도 정말 심각한 상황 같은데.

“왜 그래요?”

“아, 문제가 좀 있어서요.”

“뭔데요?”

“지금 미국 쪽에 문제가 생겨서 선수들이 탄 비행기가 동부에 착륙했다고 하네요.”

“대체 무슨…….”

“거기 비행기에 전염성이 강한 질병을 가진 환자가 타고 있었다는 모양이에요.”

“……예?”

“지금 다들 격리 조치가 취해져서 아마 제 시간에는…….”

그 말을 들은 나는 황당한 와중 한 가지 기억을 떠올렸다.

분명히 전생에 겪어본 상황이다.

아니, 겪었다기보다 들었다는 표현이 적절했다. 나는 당시 GCW 소속이었으니 말이다.

선수들 대부분이 유행병에 걸려 유럽 투어에 참가하지 못했다.

그리고 그때 WWF는 쇼의 진행을 위해 분명히…….

이런, 제기랄.

더 위로 올라갈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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