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
2004년 히페로 바이러스 사태.
멕시코의 한 작은 도시에서 처음 발생한 이 바이러스는 전 세계에 수많은 감염자를 발생시켰다.
치사율은 거의 없지만, 어떻게 보면 그보다 더 심한 문제가 발생해 사람들이 곤욕을 치렀다.
오한.
발열.
그리고 엄청난 구토.
[부웨에에에에에에에엑!!]
전송된 화면 속의 부커-리가 봉투 안에 먹은 음식을 게워냈다.
……브리또를 먹은 모양이었다.
냄새는 물론 알 수 없었으나, 그 빛깔이 황량한 게 보고 있던 모든 사람의 기분을 나락으로 빠뜨렸다.
그 외에도 내가 아는 수많은 선수들이 봉투를 붙잡고 토를 하는 영상이 벽에 투사되어 계속 흘러나왔다.
그걸 보는 수십 명의 팀장급들은 모두 안색이 좋지 못했다.
영상 때문만은 아니었다.
영국 노팅엄의 경기장.
다른 경로로 유럽에 도착했기에 운 좋게 바이러스를 피할 수 있었던 선수는 총 네 명이었다.
나.
숀 시나.
JBL.
트리플H.
그 네 사람과 바트, 티파니, 버닝콩과 랙다운의 팀장급 인원 30여 명 모두가 모인 상황.
“……이런 제기랄.”
바트 맥센이 한숨을 내쉬었다.
방금까지만 해도 ‘기합으로 와야지!’ 하며 선수들에게 분노를 터뜨렸던 그는 미국에서 보낸 증거(?) 영상을 보자 침묵했다.
‘아무리 그래도 저런 상태에서 유럽행 비행기를 탈 수는 없지.’
밀폐된 비행기 안이 브리또 냄새로 가득해지겠지. 상상만 했는데도 벌써 구역질이 올라왔다.
어쨌든 최악의 상황이었다.
당장 우리가 만들어야 하는 쇼는 하나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버닝콩, 그리고 랙다운.
하나의 도시조차 아니었다.
영국의 노팅엄과 런던.
두 개의 도시에서 각각 월요일 밤의 버닝콩과 목요일 밤의 랙다운을 제작해야만 하는 상황.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유럽 투어의 일정은 4주였다. 그동안 네 명의 선수로 쇼를 만들어야 했다.
말도 안 되는 조건이다.
그 때문인지 머리를 맞대 아이디어를 짜내야 할 사람들이 죄다 침묵한 채 말을 잇지 못하고 있었다.
만약 이 유럽 투어를 캔슬 낸다면 회사로서는 막대한 재정적 손실을 떠안게 되는 셈이었다.
거기에 더해 미국으로 돌아간다 하더라도 제대로 된 쇼를 제작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침통한 표정의 바트.
그 앞에서 티파니 역시 함부로 말을 꺼내지 못했고, 다른 사람들 모두가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뒤쪽의 벽에 기대어 서있던 나는 웃음이 흘러나오려는 것을 애써 참고 있었다.
그 이유는 간단했다.
나는 역대급 위기라고 할 수 있는 이 유럽 투어가 어떻게 흘러가고 해결되는지를 알고 있었다.
이제 중요한 건 반응을 지켜보다 정확한 타이밍에 찔러 들어가는 것뿐이다.
바트가 먼저 입을 열었다.
“……어떻게 할까. 연출팀장.”
“저, 일단 티켓을 전액 환불하고 미국으로 돌아가심이 어떨까요.”
“각본팀장.”
“과거 경기를 편집해 다큐멘터리 형식으로 내보내는 건 어떨까 싶은데요. 락콜드나 더 팍처럼 은퇴한 레슬러들로 말이죠.”
“……고작 그건가.”
바트 맥센은 이어서 몇몇 팀장들을 지목해 아이디어를 내도록 했다.
하지만 그의 기대에 부응하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모두가 ‘쇼를 취소한다’는 걸 전제로 두고 아이디어를 말했다.
일반적인 생각이기는 했다.
상식적으로 봤을 때 선수 네 명으로 쇼를 꾸려가는 것은 불가능했다. ‘물리적’으로 말이다.
하지만 이 상식을 뛰어넘어야 진짜 아이디어인 법이었다.
쿵! 하는 소리.
“연봉을 그만큼씩 쳐 받아가면서 그딴 아이디어밖에 못 내나!”
바트가 폭발했다.
“4주 동안 쇼를 그 지랄로 꾸미면 관객들이 좋다고 따라오겠군!”
“…….”
“레전드들의 다큐멘터리로 꾸며? 지금 필요한 건 그 새끼들이 아니야! 활동하는 현역들이지!”
“죄, 죄송합니다!”
“그딴 헛소리 할 시간 있으면 차라리 미국 가서 선수들 데리고 와!!”
바트의 노성에 겁을 먹은 사람들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이해를 못하는 건 아니다.
자기가 돈을 지불하고 고용한 선수들의 99%가 ‘못 쓰게’ 됐다.
하지만 저런 상황에서 화를 내는 건 전혀 도움이 되지 못한다.
‘다들 겁먹었군.’
이어질 바트의 말이 해고 통보가 될까 두려워하는 직원들.
상황이 점점 악화되기 전에 나서야겠다고, 나는 생각했다.
전생에서 이게 누구의 머리에서 나온 아이디어였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지금 상황에서는 분명 바트의 귀를 솔깃하게 할 터였다.
“보스. 일단 항공사를 고소하죠.”
내가 그렇게 이야기하자 사람들이 모두들 의아해 돌아보았다.
개중에서도 티파니 맥센은 거의 안색이 창백하게 질릴 정도였다.
맞는 말이었다.
그들에게는 지금 내가 독이 든 성배에 손을 뻗는 걸로 보이겠지.
하지만 뭐, 내게 통하는 종류의 독은 아니었다.
“……자네인가.”
“방역 체크 안 한 건 그쪽 잘못이잖아요. 공항이든 어디든, 일단 고소해서 피해부터 메꾸자고요.”
“그래, 그게 맞겠군.”
바트 맥센이 일어났다.
위협적인 표정을 지어 보인 그가 사람들을 밀치며 내게 다가왔다.
“그래서, 아이디어는 있나?”
“물론 있습니다.”
“말해보게. 단, 그에 상응하는 각오는 해뒀으리라 믿네.”
“유럽에도 프로레슬링 단체는 도처에 깔려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그쪽 선수들을 쇼에 출연시키는 겁니다. WWF의 신인 선수를 유럽에서 공개 모집하는 거죠.”
그 말을 들은 바트의 눈동자에 순간 의혹의 기색이 스쳤다.
나는 그것을 쳐내듯 곧바로 내 의견을 정확히 전달했다.
“그리고 저와 헌터, 시나와 JBL이 각각 버닝콩과 랙다운에서 심사위원 역할을 맡는 겁니다.”
“심사위원?”
“예, 일단 표를 산 관객들에게는 현 상황과 환불 처리에 관련되어서 이야기를 해놔야겠지만…… 아무래도 WWF 슈퍼스타들이 등장해야 쇼를 보러오지 않겠습니까?”
그런 의미에서 봤을 때 이렇게 네 명은 참 적절한 선발이었다.
현 WWF 월드 챔피언, 트리플H.
현 WWF 유니버스 챔피언, JBL.
두 베테랑에 대비되는 루키들.
U.S. 챔피언, 숀 시나.
WWF 월드 태그 팀 챔피언, 신.
잠시 내 이야기를 곰곰이 생각해보던 바트가 뒤로 돌아섰다.
자신의 자리로 돌아간 그가 바로 옆에 앉아 있던 각본팀장에게 차가운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비키게나.”
“예, 옙.”
“신, 이쪽으로.”
사람들의 시선이 느껴졌다.
그들 모두가 이 최악의 난관에 곧장 답을 내놓은 나를 다양한 감정을 담아 바라보고 있었다.
동경, 호감, 감사, 안도.
분노, 경멸, 시기, 혐오.
어느샌가 나는 이 거대한 메인 쇼에서도 그런 처지가 되었다.
‘이 4주만 그렇겠지만.’
적어도 내가 유럽 투어 동안에는 슈퍼스타가 될 것이 분명했다.
내가 바로 옆에 앉자 의자를 돌린 바트가 말을 걸어왔다.
어느새 우리 주변을 팀장급 인사들이 가득 채우고 있었다.
“자, 그럼.”
“예, 보스.”
“자세히 말해보게나.”
“일단 저희가 투어를 하는 영국, 독일, 프랑스, 스페인의 중소규모 단체들과 계약을 해야겠죠.”
바트가 눈짓을 보냈다. 그러자 팀장 중 하나가 밖으로 나갔다.
“선수 데이터를 받아서 정리해 각본을 만들어야겠죠. 실제로 테스트를 진행하면 좋겠지만…….”
나는 연출 팀장을 돌아보았다.
“어떨 것 같으세요?”
“뭐?”
“시간은 3일. 데이터를 받아서 선수들을 불러 모으고 테스트를 진행할 시간이 충분할까요?”
“글쎄…….”
“그렇기에 각 단체에게 3시간 이내로 답장을 받아야겠죠. 아주 좋은 기회라고 포장해서요.”
바트가 다시 눈짓을 했다.
사람 하나가 더 달려 나갔다.
시간에 맞추기 위해서는 정말 눈코 뜰 새 없이 움직여야 했다.
때문에 바트 역시도 깊게 생각하지 않고 순간의 감에 맡겼다.
단지 내 아이디어가 좋기에.
그걸 온전히 믿고 어떻게든 펑크 없이 쇼를 진행하려고 들었다.
‘실패한다면 방출이겠지만.’
그럴 리는 없었다.
전생에 같은 시기에 같은 방법을 사용해 크게 성공했으니까.
유럽의 각 국민들은 서로에 대한 경쟁심이 강하다. 4주간의 각본은 그것을 정확히 저격했다.
그들은 자신의 나라에서 선발된 선수를 응원하면서 쇼를 즐겼다.
전형적인 국뽕 각본이었지만, 그런 만큼 사람들은 더 몰입했다.
평소 즐겁게 보았던 WWF의 쇼에 자국 선수가 출전해 자신들의 재능을 마음껏 뽐내니까.
“일단 저희 넷은 버닝콩과 랙다운에 매번 출연해야만 합니다.”
“경기는?”
“다양하게 가죠. 각자 택한 선수를 데리고 태그 팀 매치, 상대가 선발한 선수와 싱글 매치, 저희가 매니저를 서도 괜찮고요.”
“그쪽은 관리팀하고 이야기를 해보게나. 자네들의 아이디어는 최대한 수용하지. ……좋아.”
일의 방향성이 대강 정해졌다.
“쇼는 정상적으로 진행한다.”
자리에서 일어선 바트는 각 팀장들에게 지시를 내렸다.
위기의 순간이기 때문인지 그는 한없이 진지했다.
“일단 이번 주 티켓 구매한 손님들부터 다 전화 드려. 인트로 각본 제작하고, 선수들 협업 계약 마치면 바로 불러서 선발해!”
모두가 한마음이 되어 그 말을 경청했다. 마지막으로 바트는 주먹을 불끈 쥐며 소리쳤다.
“그리고 항공사 고소 때리게 당장 내 변호사 불러!!”
그다운 발언이었다.
* * *
3시간 30분 뒤.
영국의 작은 단체인 IPW, AJW, FAW 등지에서 선수들이 왔다.
WWF와 달리 유럽의 레슬링 단체들은 대부분 스무 명 내외의 선수를 보유한 게 특징이었다.
이들은 다른 단체와의 교류도 활발하게 가졌고, 지역 단체의 특성을 살린 운영을 했다.
때문인지, 2만 명을 수용할 수 있는 경기장에 들어온 선수들은 대부분이 긴장한 모습이었다.
그리고 이어진 테스트.
링 위에 설 수 있는지. 외모는 어떤지. 말은 어떻게 하는지.
서른 명 남짓한 선수들이 빠르게 자신을 평가받았다.
나는 2층 관객석에서 그 선수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확인했다.
‘역시 다들 좀 그렇군.’
이들은 나 같은 전문 선수가 아니라 겸업을 뛰는 만큼 대부분 썩 좋은 모습은 아니었다.
덩치도 별로, 키도 별로.
실력도 영 별로.
그럼에도 나는 선발된 선수들을 꼼꼼이 확인하고 있었다.
빛나는 원석이 있긴 있을 터.
“좀 어때요?”
그렇게 있자니 누군가 내 옆에 털썩 주저앉았다.
“티파니.”
“의견을 듣고 싶어서 왔어요. 누구 쓸 만하겠다 싶은 선수 있으면 말해주세요.”
“글쎄요. 아직…….”
그렇게 대답하며 돌아본 나는 이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찾았다.
원석을.
“……윌 오 스피디?”
“예?”
“아니, 음. 잠깐만요.”
순간 놀라 입 밖으로 말이 나왔다.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는 티파니를 무시하고 확인했다.
링 위에 올라선 것은 180 중반 정도 되어 보이는 깡마른 청년.
하지만 저 특유의 인상은 분명히 내가 알고 있는 선수였다.
윌 오 스피디.
영국 단체에서 활동했으며, 큰 키에도 불구하고 공중을 훨훨 날아다니는 하이플라이어 선수였다.
그 비결은 저 마른 몸.
‘그리고 재능.’
하지만 WWF에서 원하는 인재상은 아니었다. 그렇기에 그는 일본 단체로 넘어가 대성했다.
자신의 스타일대로 멋진 경기를 펼치는 그에게는 ‘에어리얼 히트맨’이라는 별명이 붙었고.
일본에서 대성하며 그야말로 전설적인 선수가 되었다.
그리고 그 스타일은 여전했다.
녀석이 쿵! 하고 낙법을 치자 다들 엉망이라고 생각하는 듯했다.
옆에서 티파니도 ‘뭐야, 저게.’라며 순간 어이없어할 정도였다.
하지만 저게 맞았다.
놀라울 정도로 유연한 몸을 가진 윌은 일부러 살짝 아슬아슬하게 떨어지며 위험을 연출했다.
자기 자신이 직접 미래의 인터뷰에서 밝힌 내용이었다.
하지만.
‘저걸 지금 한다고.’
테스트를 보는 건데 자기 철학에 맞춰서 낙법을 치다니.
아무래도 자기 고집이 센 모양이었다. 아니라면 멍청이거나.
어쨌든.
“제 선수는 정했습니다.”
“설마 저 친구는 아니죠?”
“맞아요.”
고개를 끄덕인 나는 낙법 한 번에 떨어진 윌을 가리켰다.
“저 친구입니다.”
가감 없이 의심의 시선을 보내는 티파니 맥센.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그것은 놀라움으로 바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