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
탑 턴버클 위로 올라가있던 윌 오 스피디가 힘차게 뛰어올랐다.
그는 믿기 힘들 정도의 유연성을 보이며 공중에서 회전했다.
두 바퀴 반.
720도 스플래시가 턴버클 앞에 놓인 매트에 힘차게 내리꽂혔다.
에어리얼 히트맨.
그 명성에 걸맞은 공중기였다.
링 위에 서있던 티파니의 몸이 충격에 휩쓸려 순간 비틀거렸다.
얼른 그 등을 받쳐 중심을 잡도록 도와준 나는 싱긋 웃어 보였다.
“어때요?”
“굉장, 하네요.”
흐트러진 옷매무새를 가다듬는 티파니. 그녀의 시선이 자리에서 일어서는 윌에게로 향했다.
“하지만 역시 쇼에 내보내기에는 좀 부족한 게 아닐지.”
“어떤 부분에서요?”
“일단 너무 말랐는데요.”
185cm에 70kg.
체지방율 20% 정도.
확실히 평범한 체격이었다.
WWF의 메인 쇼에서 활동하는 선수들은 대부분 10%대의 체지방률을 유지하는 게 보통이었다.
아니면 아예 몸을 크게 불려서 위압감 있는 체형을 만들던가.
확실히 그런 면에서 봤을 때 윌은 너무 마른 체격이기는 했다.
그렇게 생각하자니, 티파니가 슬그머니 내 셔츠를 걷어 올렸다.
그녀는 그 아래에 숨어 있던 내 탄탄한 복근을 툭툭 건드렸다.
“이 정도는 되어야죠.”
“……뭐하십니까.”
“우리 ‘상품’이 건재하게 있는지 한번 확인을 해본 거죠.”
“성희롱입니다.”
“고소하세요.”
새침하게 받아치는 그녀.
어이가 없어 가만히 있자니 자리에서 일어나있던 윌이 말을 걸어왔다.
“저, 여기 있는데요.”
“……? 알고 있어.”
“아니, 떨어뜨렸으면 곱게 보내주시지, 왜 앞에서 제 몸을 평가하시는가 해서요…….”
“너 붙었는데.”
“네?”
“그렇게 되면 직접적으로 평가를 해도 괜찮게 되는 건가?”
“어, 음. 글쎄요.”
“오히려 감사해야지. 이쪽은 업계의 정점에서 십 년 넘게 수많은 선수들을 만나본 전문가야.”
나는 티파니를 가리켰다.
근데 이 양반, 대체 언제까지 내 복근을 만지려는 것일까.
“이런 사람에게 솔직한 평가를 받을 수 있는 기회는 많지 않아.”
“…….”
“그냥 적당히 좋은 말만 하고 돌려보내거든. 어차피 나와 일할 선수가 아니니 그러는 거지. 그런 의미에서 솔직한 평가를 듣는다면 한번 곱씹어보는 게 좋아.”
“아, 알겠습니다.”
올해로 딱 20살.
윌 오 스피디는 사회인으로서는 좀 부족했지만, 그래도 내 말을 이해할 정도의 지능은 있는 듯했다.
나는 복근을 계속 만지작거리는 티파니의 손을 떼놓고 윌과 본격적인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각본이 구체화되며 여러 선수를 선발하는 것보다는 한 명씩 선발해 멘토 시스템으로 쇼를 진행하는 게 낫겠다는 말이 나왔다.
다들 그렇게 선수 하나씩을 선발했고, 내가 택한 것은 영국 출신의 윌 오 스피디였다.
그리고 다들 그런 내 결정을 내심 비웃는 듯한 눈치였다.
바트가 통과를 시켜 직접적으로 딴죽을 걸지는 못했지만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너에 대한 평가는, 물론 보다시피 최악이다.”
“그, 그렇습니까.”
“하지만 그걸 포장하는 게 내 역할이고. 좋은 결과를 내기 위해서라도 너에 대해서 이해를 해둬야겠지.”
나는 미리 준비해뒀던 대로 윌과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일단, 낙법부터.”
“낙법……이요?”
“그래, ‘정석적’으로 해봐라.”
내가 그렇게 말한 이유는 윌의 철학이 담긴 낙법은 업계인들조차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난 알고 있었다.
따라서 그에 관해 미리 이야기를 좀 나누어둬야 할 것 같았다.
“멋진 낙법이군.”
“……남들은 다 욕하던데요.”
“그래도 나름 생각이 있어서 그런 식으로 낙법을 친 거지?”
그렇게 나는 윌을 이해하는 척하려고 했으나 돌아온 대답은 예상과는 전혀 달랐다.
“……아닌데요.”
“응?”
“그, 이유는 뭔지 모르겠지만 평범하게 낙법을 치려고 해도 이런 식으로 되어버려서 말이죠.”
“…….”
“역시 잘못된 건가요?”
“글, 쎄에.”
일단 이 친구에게 자신의 장점을 좀 알려줘야 할 것 같았다.
윌 오 스피디는 내 예상대로라면 4주 뒤, 영국을 대표하는 슈퍼스타가 될 것이 분명하니까.
* * *
그로부터 이틀이 지났다.
월요일 밤의 버닝콩이 방영될 때까지 남은 날짜는 단 하루.
순차적으로 당면한 문제를 해결한 우리는 결국은 모든 준비를 끝마쳤다.
긴급하게 홈페이지를 만들어 바뀔 쇼의 내용을 관객들에게 알렸다. 그리고 환불을 시행했다.
놀랍게도 2만석 중 157석이 환불된 것 외에 영국 관객들은 우리 쇼를 보러와 주기로 했다.
각본 팀에서는 내가 제시한 아이디어를 바탕으로 최대한 현실적인 내용의 각본을 짜냈다.
전생에는 분명 오디션을 진행하는 방식이었지만, 내 설명 때문인지 전혀 다른 각본이 나왔다.
멘토 시스템.
WWF 선수가 한 명씩 데리고 쇼를 진행해 그중 한 명만이 WWF와 계약하게 되는 형식이었다.
‘이게 더 낫군.’
아무래도 내가 예시 삼아 말했던 멘토라는 말이 영향을 끼쳐 이런 각본이 나온 모양이었다.
어쨌거나, 각본이 그렇게 된 만큼 회사에서는 각각의 국가에서 한 명씩 선수를 선발해왔다.
나는 말했듯 영국 출신의 선수, 윌 오 스피디를.
헌터는 커리어 초기의 기믹이 프랑스 귀족이었던 만큼 프랑스 출신의 선수를.
JBL이 스페인 출신의 선수를 데려가고, 마지막으로 시나가 독일 출신의 선수를 가져가게 되었다.
그렇게 결론이 난 뒤, 사무실에는 뭔가 불편한 침묵이 감돌았다.
방금 막 앞서 말한 각본 기조에 대한 이야기가 막 끝난 상태였다.
다들 네 명의 WWF 선수와 유럽 신인 넷으로 세 시간의 쇼를 꾸려갈 수 있을지 불안해했다.
그런 와중, 헌터는 자기 자신의 철학을 고수하는 태도를 보였다.
극도로 자기 보신주의적인 면모를 곧장 드러낸 것이었다.
“그래서 내가 이기나?”
“각본을 지금 제작 중이니 자세한 내용은 곧 확인할 수 있을 걸세.”
“그러면 수정 시간이 빠듯할 거 아니야. 그래서 내가 이기냐고.”
“팀장님, 잠깐 괜찮을까요.”
내가 슬쩍 끼어들었다.
“아, 그래. 신. 무슨 일인가.”
팀장의 목소리에 살짝 안도감이 흘렀다. 나는 다른 세 선수들의 시선을 받으며 입을 열었다.
“저희가 유럽 신인들을 상대로 이기는 건 당연한 일이겠죠?”
“그렇겠지.”
“즉, 헌터가 물어본 건 최종적으로 WWF에 트라이아웃 되는 선수가 누구냐는 거겠죠.”
“맞나?”
팀장이 되묻자 잠시 침묵하던 헌터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우리는 첫 주차의 버닝콩에서 각자 다른 선수의 유럽 신인을 상대로 경기를 가질 예정이었다.
“이렇게 하는 건 어떻습니까? 첫 번째 경기는 네 선수 모두 승리하는 거죠. 물론, 챔피언에 따른 시간 차이는 있겠습니다만.”
“……월드 챔피언이 좀 더 빠른 시간에 이겨야한다는 거군.”
“그런 거죠. 헌터는 지금 WWF의 간판인 만큼 유럽 신인과 대등하게 붙는 건 말도 안 되죠.”
“확실히 근거 있는 말이로군.”
“거기에서 또, 신인들이 단순히 패배만 해서는 시청자들이 흥미를 갖지 않겠죠. 그렇기 때문에 한 번은 이기게 해줘야 합니다.”
“어떤 방식으로?”
“서로 비겁한 수를 쓰고 조언도 하는 거죠. 다행히 저희 네 명 다 그럴 수 있는 캐릭터들이고요.”
여기서 선역은 나뿐이었지만, 나조차도 상대가 레볼루션이라 그렇지 악역에 가까운 성향이었다.
“WWF 선수들의 도움을 받아 유럽 신인이 승리를 챙긴다. 이건 꽤 즐거운 서프라이즈겠죠.”
“잠깐.”
트리플H가 눈을 부라렸다.
“내가 진다고?”
“카운트아웃이나 롤 업으로 지는 정도는 괜찮지 않습니까?”
“WWF 월드 챔피언이? 유럽 땅의 이름 없는 신인에게?”
“이 이상은 부킹의 문제지, 아직 더 따질 필요는 없습니다.”
“건방진 새끼…….”
“저보다 더 좋은 아이디어를 내보시던가요. 못 하겠지만.”
“자, 자자. 진정하고.”
팀장이 우리를 말렸다.
그리고 그가 먼저 돌아본 것은 헌터가 아닌 바로 나였다.
“계산을 좀 해보지.”
메인 챔피언이 5분 경기.
2선 챔피언이 10분 경기.
“두 번째 경기는?”
“WWF 선수들이 각자 자기 신인들을 위해 난입하는 부분까지 포함해서 10분 정도면 되겠죠.”
“그래, 그렇겠지.”
내 말을 완벽히 이해한 팀장이 부드럽게 미소를 지어보였다.
“총 여덟 경기. 세그먼트 시간까지 포함하면 충분히 쇼가 나오겠군.”
“그렇겠죠.”
“좋아, 일단 해산하지. 자세한 게 정해지면 곧장 연락하겠네.”
그러므로 가까운 곳에 있어라.
팀장은 그 말을 생략했다.
우리는 실제로 요 며칠 퇴근도 하지 못하고 경기장에서 먹고 자고 씻으며 쇼를 준비 중이었다.
헌터와 JBL이 먼저 밖으로 나갔고, 팀장이 내 앞으로 다가왔다.
“신.”
그가 내 어깨에 손을 얹었다.
“고마워. ……솔직히 이런 뻔한 말밖에 할 수가 없군. 자네가 없었으면 우리 모두 죽었을 거야.”
“우리 모두가 그걸 알고 있기 때문에 퇴근도 못하고 일하는 것 아닙니까? 정말 대단한 건 직접 지휘하시는 팀장님이죠.”
“그래, 자네 명령으로.”
“그럴 의도는 아니었습니다만.”
“크흐흐, 아니야. 확실히 자네 같은 상사가 있으면 좋겠다는 이야기가 요즘 돌고 있어서.”
“에이, 아닙니다.”
“앞으로도 이런 아이디어 있으면 가감 없이 말해주게. 우리보다 각본을 더 잘 만드는 것 같아.”
그렇게 이야기한 팀장은 껄껄 웃으며 그대로 사무실을 나갔다.
남은 건 시나였다.
재회는 며칠 전에 했지만 서로 바빴던 터라 제대로 인사를 나누는 것은 지금이 처음이었다.
“신.”
“시나.”
녀석과 나는 일단 가볍게 포옹했다. 시나를 만나는 건 오랜만이라 그런지 무척 반가웠다.
녀석은 미래의 아이콘이지만, 동시에 나와 GCW 시절부터 동고동락해온 친구이기도 했다.
시나 역시 나와 만난 게 반가운 듯 활짝 웃으며 말을 걸어왔다.
“그동안 어떻게 지냈어?”
“나야 보시다시피. 이렇게 될 거라고는 예상 못했지만 말이야.”
“맞아. 갑자기 전염병이 돌아 선수들이 격리될 거라고는…….”
“어떻게 보면 우리로서는 굉장한 기회를 받게 된 셈이지.”
“그래?”
“안 그렇다고 생각해?”
“잘, 모르겠어.”
시나의 표정이 살짝 굳어졌다.
그게 좀 신기했다.
이때 당시 GCW의 연습생으로 있던 나는 랩퍼 기믹으로 랙다운에서 자신의 커리어를 써나가는 시나를 보며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직접 알게 된 이 당시의 시나는 아직 성장하는 도중의 선수였다.
고민도 많았고, 엄청나게 노력했으며, 항상 불안한 마음을 꾹꾹 삼키면서 경기에 임했다.
하지만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그는 정말로 멋진 레슬러였다.
결국 끊임없는 노력과 매사에 성실하게 임하는 성격 덕에 시나는 스타가 된 것이다.
‘전생의 내가 부끄러워지는군.’
물론, 나는 처음부터 아무런 기회도 받지 못하고 무시를 당하기는 했지만.
그럼에도 시나의 이 성실한 성격은 무척 존경할 만한 부분이었다.
“일단 열심히 하려고. 너나 윗선에서 지시하는 대로 말이야.”
“꼭 그래야 해?”
“물론, 거기에서 나의 생각도 중요하지만 말이야. ……너는 왜 이게 큰 기회라고 생각하는 거야?”
“그야 물론, 출연할 기회가 많아지니까. 4주 동안 각본의 중심에서 활약할 기회는 흔치 않다고?”
“하지만 이 각본이 먹히지 않으면 아무 소용 없는 짓이잖아.”
“회사를 믿는 거지. 내 눈도 믿고. 그리고 리스크는 생각하지 않고 최선을 다하는 거야.”
“역시 넌 정말 대단해.”
시나가 감탄을 했다.
“넌 GCW 시절부터 나에게 정말 많은 영감을 주는 선수야. 솔직히 가장 존경하는 선수지.”
“그거 영광이군. 숀 시나에게 그런 이야기를 들을 줄이야.”
“내가 뭐라고. 고작해야 운 좋게 U.S. 챔피언을 딴 게 전분데.”
아.
이 시절의 시나는 아직 그렇게 까지 대단한 선수는 아니지.
하지만 나는 그가 미래에 어떻게 될지를 알기에 솔직히 감격스러웠다.
어쨌거나 미래에 발매될 시나의 자서전에는 내가 가장 존경하는 선수라고 남을 테니까.
“신, 미안한데 한 가지만 더 물어봐도 될까?”
“뭐든지.”
“네가 선발한 영국 선수는 봤는데. 뭘 보고 뽑았나 해서.”
“흐음.”
“물론 나는 네 안목을 믿지만…… 너도 알잖아? 사람들 반응이 좋지만은 않다는 거.”
“나 같은 언더독에게는 언제나 뒤따르는 반응들이지.”
“그래서 궁금했어. 넌 항상 남들을 뛰어넘는 생각을 하는데 이번에는 대체 무엇일까 싶어서.”
“사실 별건 아니야.”
“그래?”
“너도 생각해보면 쉽게 떠올릴 수 있을 그런 컨셉이야. 시나.”
“흐음…….”
시나가 고민에 잠겼다.
그 역시도 헛으로 선수 생활을 해오지는 않았다. 그렇기에 얼마 지나지 않아 답을 내렸다.
“언더독?”
바로 그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