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
언더독 현상.
약자가 성공하기를 바라는 심리를 뜻하는 사회과학 용어다.
어째서 그런 게 존재하는가?
그에 대해 여러 의견이 존재하지만, 나는 사람들이 약자에게 ‘공감’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세상을 사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약자이기 마련이다. 절대적인 강자는 극히 소수의 인간이었다.
회사의 부장님도 집에 들어가면 잡혀 살 수도 있는 게 인생이다.
언제나 승리하는 인간은 둘 중 하나다. 정말로 천재이거나, 남들이 미친 줄 알고 물러서거나.
그렇기에 그들은 모두 고독하기 마련이다.
즉, 대부분의 인간은 누군가에게는 지게 되어 있다. 거기에서 공감이 발생하는 것이다.
승패가 존재하는 프로레슬링에서도 간간히 쓰이는 각본이었다.
바트가 좋아하는 형태의 이야기는 아니라서 회사 측에서 대놓고 사용한 적은 없었지만 말이다.
쉽게 말하자면 언더독은 회사가 아닌, 팬들이 만드는 각본이었다.
팬들의 응원을 받고 결국 챔피언에 등극하는 언더독 선수들.
뻔한 이야기지만, 감동적이다.
그리고 나는 그 이야기가 윌에게 딱 들어맞는다고 판단했다.
공장 노동자 출신.
소속된 IPW에서도 그다지 두각을 드러내지 못한 못난이 선수.
여기서 중요한 게 있다.
분명한 장점.
다른 선수들에게 없는 환상적인 부분이 한 가지 있어야만 했다.
‘아니면 나처럼 뭐든지 잘한다던가.’
윌은 그게 바로 공중기였다.
탑 턴버클에서 뛰어올라 720도 스플래시를 먹일 수 있는 레슬러는 역사상 손에 꼽을 정도였다.
20분간의 사투 끝에 지친 상태에서 실수 없이 그걸 해낸다?
‘그건 나라도 못하지.’
뭐, 그럴 마음도 없지만 말이다.
나는 그런 게 아니더라도 분명한 장점이 있는 선수였으니까.
어쨌든.
앞서 말한 장점이 윌을 분명 사랑 받는 선수로 만들어줄 것이다.
나는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렇게 시작된 쇼.
나와 시나는 각자의 신인을 대동한 채 락커룸에 앉아있었다.
오프닝이 끝나자 열화와 같은 환호와 함께 쇼가 시작되었다.
1년에 한 번만 볼 수 있는 쇼라서, 이곳에 온 영국인들은 기본적으로 즐길 준비가 되어있었다.
먼저 준비된 영상이 나갔다.
WWF의 백스테이지 아나운서인 테리가 먼저 설명을 시작했다.
[영국의 뜨거운 열기가 버닝콩과 함께하고 있습니다! 이런 자리에는 걸맞은 인물이 있어야겠죠! 여러분, 바트 맥센입니다!]
관객들이 환호를 보냈다.
바트는 일단 악역이었지만 그런 것을 뛰어넘을 정도로 프로레슬링 팬들에게는 존중을 받았다.
그렇기에 그가 각본으로서 밉상 짓을 하지 않으면 기본적으로 환호가 나오는 캐릭터였다.
양복을 입고 오랜만에 버닝콩에 모습을 드러낸 바트 맥센. 그에게 인터뷰어가 질문을 던졌다.
[오랜만에 오셨군요. 바트. 영국을 즐기신 소감은 어떠신가요?]
[환상적인 나라야. 이런 곳에서 우리 쇼가 사랑을 받고 있다니 정말 큰 영광으로 느껴지는군.]
[그러고 보니 영국의 선수들과 만나기도 하셨다고 들었는데요.]
[멋진 선수들이 많더군. 그래서 한 가지 아이디어를 떠올렸지.]
[그게 뭔가요?]
[유럽의 최고는 누구인가.]
바트는 크게 강조해 말했다.
그리고 설명이 이어졌다.
[영국!]
환호하는 관객들.
[프랑스!]
야유.
[독일!]
야유.
[스페인!]
야유.
[신중한 과정을 거쳐 선발된 국가대표 네 사람! 그중 오직 단 한 명만이 계약서를 받는다!]
그렇게 설명이 이어졌다.
CG팀에서 혼신의 힘을 다해 제작한 영상이 흘러나왔다.
네 명의 WWF 슈퍼스타가 멘토.
그들이 각자 한 명의 유럽 출신 신인을 맡아 4주 간 육성한다.
인터넷과 전화로 선수에게 투표할 수 있으며 4주간의 경연 후 최종 우승자는 WWF에 입성할 수 있는 기회를 얻는다.
‘나쁘지 않군.’
확실히 전생보다 더 나은 방식 같았다. 투표로 돈을 더 벌어들일 수 있다는 점도 멋지고 말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화면에는 미리 촬영된 우리의 모습이 나왔다.
어두운 조명 아래.
헌터와 나, 시나와 JBL까지.
네 명의 선수들이 각각 모습을 드러낼 때마다 관객들은 크게 환호를 보내주었다.
그리고 카메라가 전체를 잡고, 어둠 속에서 걸어 나오는 네 명의 신인 선수들을 보여주었다.
이어지는 광고 타임.
우리가 나갈 시간이었다.
“좋아. 가볼까.”
내가 말을 꺼내자 진지한 얼굴로 영상을 시청하던 나머지 세 사람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개중 유럽 신인 두 명은 열광적인 환호에 반쯤 질려 벌써부터 안색이 창백해져 있었다.
‘뭔가 조언을 해줄까.’
그렇게 생각하자니 한발 앞서 시나가 그들을 격려해주었다.
“너무 긴장하지 마. 네가 오늘 맡을 역할에만 집중하도록 해.”
“네, 넵.”
“열심히 하겠습니다!”
나는 시나를 보며 생각했다.
‘성장했군.’
겁에 질린 신인들을 돌봐주다니.
선배다운 멋진 모습이었다.
광고가 이어지는 동안, 우리는 고릴라 포지션으로 움직였다.
그나저나.
‘참 멋진 세그먼트였어.’
확실히 WWF는 현장 공연과 생방송이라는 영역에 있어서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의 기술력을 보유했다.
제한된 시간 내에 바트 맥센과 영상을 통해 스토리를 쳐냈고, 그걸 관객이 받아들이도록 만들었다.
그럼에도 회사에서 그동안 지켜온 ‘룰’만큼은 결코 어기지 않았다.
시청자들에게 사죄하지도 않았고, 다른 레슬링 단체에 관해서 언급하는 것 역시 하지 않았다.
이 모든 게 WWF의 세계관, 다시 말해 ‘WWF 유니버스’를 지키기 위한 일종의 케이페이브였다.
‘당당하게 가는 거지.’
그리고 그게 맞는 방법이었다.
마치 이 방송이 처음부터 기획된 것인 양 행동해야 했다.
그래야 사람들도 안심하고 시청하지.
링에 오르기 전.
나는 그 마음을 되새겼다.
* * *
관객들의 반응은 열광적이었다.
특히나 나와 윌이 등장하자 곧장 자리에서 일어섰을 정도였다.
간단한 이유였다.
커튼을 걷고 나간 나는 준비해둔 영국 깃발을 힘차게 휘둘렀다.
[Yeeeeeeeeeeeeeeah!]
벌써부터 거나하게 맥주를 마시고 취한 영국인들이 깃발의 움직임에 맞춰 파도처럼 흔들렸다.
애국심의 힘은 대단했다.
우리는 사람들이 구분하기 쉽도록 일부러 깃발을 들고 입장했다.
내 아이디어였고, 그게 통했다.
이번 쇼에서는 우리가 주인공이었다. 그리고 그것이 시사하는 바는 무척 중요한 것이었다.
첫 인상.
아마 윌의 모습이 다소 볼품없더라도 충분히 커버가 될 테지.
그리고 그렇게 되었다.
사람들은 영국 출신의 윌에게는 어마어마한 환호를 보내주었다.
그게 다른 선수들이 픽한 덩치들과 함께 서도 꿀리지 않을 정도의 박력을 만들어주었다.
사람들의 응원을 받는 선역.
적어도 미국인들은 이 녀석에게 큰 기대를 가질 터였고, 우리는 그것을 바로 보여줄 생각이었다.
그래야 언더독이 효과가 있다.
쇼의 첫 번째 경기.
시나와 윌이 맞붙었다.
내 주문은 단 한 가지였다.
그리고 그건 아마 다른 어떤 선수의 부킹도 뛰어넘을 터였다.
나는 링 아래에 윌의 매니저로서 함께하며 경기를 지켜보았다.
윌은 ‘당연히’ 시나의 상대가 되지 못했고 계속 공격을 당했다.
그리고 시나가 윌을 공격할 때마다 사람들은 야유를 보냈다.
[Booooooooooooo~!]
물론 시나가 악역이긴 한데.
그래도 랙다운의 가장 핫한 신인 중 하나가 저렇게 일방적으로 야유만 받는 상황이라니.
‘애국심이란 게 참 대단해.’
어쨌든 경기는 그 뒤로도 내가 생각한 대로 무난하게 흘러갔다.
시나는 자신의 온갖 시그니처 무브를 선보이며 윌을 공격했다.
반격이 없지는 않았지만, 윌의 공세가 이어지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그만큼 서로 위상 차이가 있음을 보이겠다는 것이었다.
이런 부킹이 이어질 터였다. 신입들 간에는 물고 물리지만 WWF 선수들에게는 쪽도 못 쓰는.
그렇기 때문에 나는 윌을 언더독으로 부킹하기로 한 것이었다.
‘어차피 질 테니까.’
헌터가 뽑은 덩치 큰 놈은 진다면 그 타격이 어마어마할 터였다.
막상 강해 보이는데 실속은 없는 것으로 여겨질 테니까. 그런 면에서 윌은 그와는 정반대였다.
호리호리한 체격.
뭔가 못 미더워 보인다.
하지만 응원이 나온다.
그걸 이용한다.
10분 간 경기의 마지막.
윌을 흠씬 두들겨 패며 참교육을 해주던 시나가 잠시 방심했다.
그 틈을 노려 윌이 반격했다.
DDT.
정면에서 상대의 머리를 겨드랑이 사이에 끼우고 쓰러지는 업계의 기본과도 같은 기술이다.
‘그조차 좀 어설프군.’
어떻게 보자면 윌은 압도적인 재능 하나로 살아남은 선수였다.
이제 와서 알 것 같았다.
윌의 불안한 낙법은 ‘실력 부족’이었다. 끝까지 고쳐지지 않았고, 그 사실을 포장한 것에 불과했다.
놀라울 정도로 가볍고 유연한 몸 덕분에 부상을 당하지 않았고 버텨낼 수 있었던 거겠지.
그게 아니었다면 아마 분명히 링 위에서 죽었을 터였다.
부웅-!
순간 그런 소리가 들린 듯했다.
압도적인 박력.
탑 턴버클 위로 올라간 윌이 힘차게 회전하며 떨어져 내렸다.
투콰앙!
그리고 시나를 완전히 박살 냈다.
순간 링 위에 쓰러져 있는 녀석의 눈이 휙 돌아간 걸 보았다.
공중기를 받아내는 것은 그만큼 어려운 일이었다. 윌은 곧바로 쓰러진 시나 위에서 커버에 들어갔다.
1, 2……!!
겨우 벗어나는 시나.
순간 720도 스플래시의 박력에 몰입해있던 나는 그제야 겨우 주변의 상황을 살필 수가 있었다.
그리고 뭐.
‘생각과는 전혀 다른데.’
정확히 말하자면 뛰어넘었다.
관객들은 압도적인 기술 하나에 모두 어안이 벙벙해진 상태였다.
그렇기에 경기장은 고요해졌다.
순간 당황한 시나가 관객들의 눈치를 살필 정도로 말이다.
‘계획대로군.’
나는 미소를 지었다.
* * *
그렇게 버닝콩이 끝났다.
각 선수들은 맡은 바 소임을 다해 처절하게 신인들을 박살 냈다.
그쯤에서 다들 느꼈을 거다.
자신이 선택을 잘못했음을.
나는 경기 상대로 선택된 신인을 둔중한 바보로 만들어버렸다. 헌터가 선택한 키 2미터의 프랑스인이었다.
그리고 다른 신인들 역시 마찬가지로 꼴사납게 패배했다.
그 차이가 모든 것을 정했다.
버닝콩이 끝나고 다음 날.
오랜만에 호텔로 돌아가 푹 쉰 나는 시간에 맞춰서 일어났다.
미국에서 연락이 잔뜩 왔다.
30여 통의 문자 메시지.
‘소련 놈들을 믿지 마라.’는 아버지의 문자에만 ‘알았어요.’라는 대답을 하고 적당히 넘겼다.
‘……대체 언제 적 소련이야.’
이버지는 군인 출신이셔서 그런지 반공정신이 아주 투철하셨다.
바로 그때, 오늘 만나기로 했던 시나로부터 메시지가 도착했다.
[좀 늦을 것 같다.]
그렇다면 먼저 가있으면 되지.
결론을 낸 나는 곧바로 스포츠 백을 들고 호텔을 빠져나왔다.
목적지는 근처의 헬스장.
이른 새벽이라 사람은 거의 없었다. 나는 혼자서 기구를 독점하며 오늘의 메뉴를 소화했다.
이것만큼은 절대 빼먹지 않았다.
물론 1순위는 휴식이다.
충분한 휴식이 더해지지 않으면 몸은 점점 소모되어갈 뿐이니까.
하지만 나는 이렇게 몸을 최상의 상태로 유지하는 것을 절대로 소홀히 하지 않았다.
거기에 기회가 될 때마다 GCW의 코치들이 가르쳐주었던 대로 다양한 격투기의 단련 역시 거듭했다.
혹시 모를 때를 대비해서.
그렇게 한 시간.
몸이 땀으로 범벅된 것을 느낀 나는 역기를 놓고 일어났다.
그때쯤 하여 시나가 도착했다.
“미, 미안. 몸이 도저히 안 움직여서 침대에 박혀 있다 나왔어.”
“괜찮아. 시간 충분하니까. 너 운동하는 거 도와줄게.”
“넌 벌써 끝냈어?”
“대강은?”
“대체 언제 나온 거야?”
“네가 문자 보냈을 때.”
나는 눈을 가늘게 떴다.
죄책감(?)을 느끼는지 시나는 곧바로 운동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녀석은 내 무게의 두 배 이상을 들면서도 조금만 방심하면 금방 체중이 빠지는 몸이었다.
볼 때마다 감탄이 나오는 엄청난 근육. 나는 거기에 감탄하며 한동안 시나의 운동을 도왔다.
그리고 다시 한 시간.
시나가 메뉴를 거진 소화할 쯤 되어 티파니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티파니?”
[엄청난 결과가 나왔어요.]
“어떤데요?”
나는 피식 웃으며 벽에 기대어 섰다. 이렇게 전화를 걸어올 정도면 결과가 멋지다는 뜻이리라.
투표 결과 말이다.
어제 방송이 끝난 뒤로 지금까지 실시간으로 집계된 유럽 신인 선수들에 대한 투표.
과연 가장 많은 득표수를 얻은 건 누가 될 것인가.
그리고 티파니는 내 기대를 훨씬 뛰어넘는 결과를 전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