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프로레슬링의 신-92화 (92/634)

92.

73퍼센트.

고작 하룻밤 만에 전 세계에서 대략 5만 명이 참여한 투표.

윌은 나머지 세 명의 유럽 신인을 압도적인 차이로 물리쳤다.

네 명 중 1위를 기록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했지만, 나 역시 이 정도일 줄은 예상 못했다.

시나가 대단하다며 날 추켜세우는 가운데, 나는 일단 현장팀이 있는 합류 지점으로 향했다.

유럽 투어에서는 미국에 있을 때와 달리 선수들 역시 현장팀과 함께 다음 도시로 이동했다.

아무래도 외국이다 보니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시내버스에서 내리자마자 출발을 기다리고 있던 현장팀의 직원들이 곧바로 나를 반겨주었다.

“신!”

“결과는 들었어요?”

“물론이죠.”

“압도적이던데요. 제기랄, 덕분에 저는 십 달러를 잃게 됐지만.”

“나중에 맥주라도 사죠.”

겉치레나마 좋은 말을 해주었다.

직원 역시 내 말이 농담이라는 것을 알았는지 낄낄대며 웃었다.

그밖에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제 일처럼 내 성공을 기뻐했다.

그리고 존경의 시선을 보냈다.

유럽 신입의 선발과 부킹에는 선수들의 입김이 많이 들어갔다.

그렇기에 남들과 다른 선택을 하고, 그걸 성사시킨 나는 무척이나 대단한 일을 한 셈이었다.

마치 팬들 사이에 있는 것처럼 직원들이 점점 내게 몰려들었다.

자유로운 분위기 속에서 잡담을 나누고 있던 나는 어느샌가 티파니가 다가왔음을 알아챘다.

뭔가 할 말이 있는지 손을 흔드는 그녀. 사람들에게 양해를 구한 나는 인파를 헤치고 나왔다.

“좀 어때요. 타이거.”

“……타이거?”

“그래요. 타이거. 오늘도 사람들의 기대에 충실히 부응했군요.”

타이거.

묘한 별명이다.

모 히어로 만화에서 히로인이 주인공을 그런 식으로 불렀던 게 문득 머릿속을 스쳐지나갔다.

“다 제가 예상한 대로죠.”

“정말 대단하다니까. 다들 경황이 없던 와중이었는데 어떻게 혼자서 그걸 꿰뚫어 본 거예요?”

“오래 일하면 자연히 됩니다.”

“……올해로 3년차셨죠?”

“그렇죠.”

“‘오래’라고요.”

“네, 오래.”

가볍게 너스레를 떨자 피식 웃은 티파니가 앞장서 움직였다.

“아버지께서 찾으세요.”

“바트가?”

“예, 이번 일을 보고 좀 더 물어보고 싶은 게 있는 모양이에요.”

“운이 좋았을 뿐인데.”

“그렇게 말해도 아버지는 분명 자기가 원하는 답을 들을 때까지 당신을 붙잡아두려고 할 걸요.”

“슬슬 출발해야 하지 않나요.”

“그래서 빌린 거죠.”

“……?”

“리무진을요.”

티파니의 시선이 어딘가를 가리켰다. 의아해 돌아본 나는 순간 머릿속이 황량해지는 걸 느꼈다.

차의 중간 부분을 길게 늘인 리무진이 장비를 운송하기 위한 초대형 트럭들의 앞에 서있었다.

“……설마.”

“맞아요. 다음 도시까지 함께 이동하자고 하실 모양이던데.”

머리가 아파오기 시작했다.

* * *

원래대로라면 나는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전용 버스를 통해 런던까지 이동할 예정이었다.

하지만 일이 이렇게 되었다.

분위기 좋은 리무진의 실내.

“멋진 아이디어더군.”

한 대기업의 회장님께서 친히 나를 칭찬해주고 계셨으나 이상하게도 조금도 좋지 않았다.

‘원래 계획대로라면 지금쯤 시나와 포커를 치고 있었을 텐데.’

안타깝지만 어쩔 수 없었다.

일단은 눈앞의 회장님이 무슨 이유로 나를 차에 태우셨는가.

그걸 알아야 할 때였다.

내가 아는 바트는 이유 없이 선수를 차에 태울 사람이 아니었다.

그에게 있어 선수는 도구.

다시 말해, 단순히 자기 호기심을 위해 날 태운 건 아니라는 뜻이었다.

“센스를 타고 났는지 자네가 제안하는 각본은 다 성공하는군.”

“감사합니다.”

“나중에 은퇴하게 되더라도 꼭 우리 각본팀에서 일해주게나.”

“너무 먼 이야긴데요.”

“하하, 그러고 보면 자네는 아직 데뷔한 지 일 년도 안 지났지.”

바트는 가볍게 웃음을 터뜨렸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이내 차갑게 굳어진 시선이 날 꿰뚫었다.

“3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쇼핑몰에서 레슬링을 하던 놈이 이렇게 되다니. 그 누가 알았겠어?”

“……알고 계셨습니까?”

“물론. 나는 신경 쓰이는 상대에 관해서는 무엇이든 조사해두지.”

“아니, 그렇게 악당처럼 말씀하지 마시고. 어차피 제 이력서에 다 쓰여 있었던 사실 아닙니까.”

“……크하하하하하!!”

호쾌하게 웃는 바트.

“그렇게 받아치는 것도 마음에 들어. 남자라면 모름지기 제 할 말은 하고 살아야 하는 법이지.”

바트는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말했듯 그는 유능한 선수가 자신에게 남자답게 할 말은 할 때 가장 좋아하는 경향을 보였다.

다시 말해 나는 바트에게 ‘유능하다’고 인정을 받은 것이었다.

바로 이것이 큰 실마리였다.

‘그런 거군.’

프로레슬링은 수많은 사람들이 함께 준비해도 결국 링 위의 선수가 모든 것을 표현했다.

따라서 바트는 내 심리를 미리 파악해두고 싶어 하는 것이었다.

말하자면 일종의 테스트였다.

충성스러운가, 아닌가.

그간의 행적은 어땠는가.

주변 인물들의 평은 어떤가.

이 힘든 업계에서 10년 이상 버틸 근성과 애정을 가지고 있는가.

업계 내부의 사정을 이해하고 부당한 일에도 협조할 수 있는가.

그 외에도 여러 가지.

왜냐고?

그걸 알아둬야만 내가 ‘투자’를 할 가치가 있는 선수인지 아닌지가 정해지기 때문이었다.

‘대충 알겠어.’

이제 대화를 좀 나눠볼까.

내가 신뢰할 수 있는 철학을 가진 선수임을 바트에게 설명하자.

동시에 아첨꾼은 아닌 이미지로.

그게 가장 좋겠지.

“그런데, 참 재미있어.”

“뭐가 말입니까?”

“자네 말이야. 메인 커리어의 첫 시작이 내 딸을 꾀어내는 거라고는 정말 상상도 하지 못했군.”

“아버지……?”

“그런 신인이 있을 거라고는 솔직히 전혀 예상하지 못했어.”

하지만 이게 문제였다.

바트는 입사 초기부터 너무 정치적으로 영민한 면모를 보이는 나를 경계하고 있는 것이었다.

“운이 좋았습니다.”

“운? 난 그런 말은 안 믿네.”

“어떻게 보면 회장님도 운으로 그 위치에 오르신 것 아닙니까?”

“내가?”

“예, 좋은 집안에서 태어난 것부터가 말하자면 운이라고 할 수 있죠. 동시에 운이 좋아 프로레슬링 사업에 큰 흥미가 있으셨고요.”

“더 말해보게.”

티파니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하지만 나는 전혀 개의치 않고 바트에게 계속 내 생각을 말했다.

“환상적인 시대를 만든 것도 모두 운이었죠. 로건 같은 멋진 선수들이 수두룩하게 나오지 않았습니까.”

“확실히 그 친구는 카리스마 하나만큼은 역사상 최고였지.”

“전 정반대였습니다.”

“방금은 운이 좋았다면서?”

“GCW의 재능 있는 선수들, 아니면 ‘아가씨’께서 손을 뻗어주신 게 운이었죠. 하지만 보시다시피 저 자체로는 운이 없습니다.”

“보시다시피……라고.”

“예, 전 회장님께서 좋아하시는 백인이 아니지 않습니까?”

“글쎄, 딱히 백인만을 선호하는 건 아니긴 한데 말이야.”

입에 침도 안 바르고 말한다.

“단지 기호가 그렇단 거죠. 대중들 역시도 그렇기 때문에 아쉽다고 말씀하셨던 것 아닙니까?”

입사 초기.

바트는 내 인종이 아쉽다는 걸 대놓고 표현했었다.

“그랬었나.”

“예, 그래서 저는 남들보다 배는 노력할 수밖에 없는 겁니다. 이건 명백히 운이 별로인 거죠.”

“그 더러운 운을 메꾸기 위한 노력이 바로 내 딸을 꾀어낸 거다, 이렇게 말하고 싶은 건가?”

“반대로 제가 재롱을 떤 것에 가깝다고도 볼 수 있죠. ‘아가씨’께서 그런 저를 흥미롭게 여겨 기회를 주신 것 아닐까요?”

“그거 재미있는 발상이군.”

“그리고 저는 그 관심을 놓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을 뿐입니다. 납득할 만한 성과를 내놓아야 계속해서 기회가 생기죠.”

“거기다 노골적이야.”

“저는 상품입니다. 당장 내일 회장님이 방출 통보만 해도 다시 준호-킴으로 돌아가게 되죠.”

그게 사실이었다.

SIN에 대한 저작권은 모두 회사 소속이었다. 물론 비슷한 기믹을 다른 단체에서 쓸 순 있겠지만.

WWF의 슈퍼스타, ‘신’은 이곳에 있어야만 성립되는 존재였다.

“그런고로, 저는 매일 밤마다 죽을 만큼 고민하고 노력해서 최선의 결과를 내놓으려고 합니다.”

“이번 일도 그렇다는 건가.”

“예, 절 믿고 밀어준 회사에 대한 나름의 책임감 같은 거죠.”

전 세계에 최고의 프로레슬링 컨텐츠를 공급하는 초대형 기업.

그 안의 권력자들.

그게 없는 난 아무것도 아니다.

‘이렇게 말해두면 되겠지.’

물론, 실제로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나는 지식도 있고 노력도 소홀히 하지 않았다.

그렇기에 내 성공은 모두가 나를 믿고 따라왔기에 가능했다.

하지만 바트에게는 그와 반대로, 평소 하던 것처럼 다른 사람들에게 공을 모두 돌리듯 말한 것이다.

난 협조적인 인간이다.

약간의 운이 따랐고, 그 운을 잡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나 자신에게는 특별할 게 없지만, 당신이 날 골라준다면 최대한 노력할 것이다.

그게 내 이야기의 골자였다.

그런 내 말을 듣고는 표정이 급격히 썩어 들어가는 티파니.

“저기…….”

“조용히 해라.”

뭔가 이야기를 하려던 티파니의 말을 칼 같이 잘라내는 바트.

그는 이윽고 환한 미소와 함께 내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멋진 말이군. 가끔 그걸 착각하는 선수들이 있는데, 자네는 그럴 걱정이 없어서 참 안심이야.”

“스타가 되어 남들에 비해 꽤 많은 돈을 벌긴 하지만 그게 온전히 제 실력 덕분은 아니죠.”

“역시 자네는 참 걸물이야.”

“칭찬으로 받아들이겠습니다.”

나 역시 미소를 지었다.

일단 잘 통과했다.

* * *

영국 런던.

을씨년스러운 도시.

금방이라도 비가 올 것처럼 공기가 축축한 가운데, WWF 현장 팀은 ‘O2 스타디움’에 도착했다.

겨우 바트의 리무진에서 해방된 나는 일단 경기장 내부로 향했다.

시설의 설치가 이루어지고 있을 때 구조를 파악해두고 싶었다.

‘일반적이군.’

우리 업계에서 사용되는 것은 보통 원형이나 사각 경기장이다.

농구나 축구에서 사용되는 형태의 경기장. 그 한쪽에 입장로를 설치하고 초대형 스크린을 매단다.

입장로 끝, 다시 말해 경기장의 중심에 범프 링을 설치한 뒤, 그 주변에 바리게이트를 친다.

마지막으로 바리게이트와 기존 관객석 사이에 추가로 철제 의자를 설치해 자리를 만든다.

‘범프 링은 작으니까.’

그럴 수밖에 없는 구조였다.

링을 설치한 뒤 조명을 매달고, 안전장치를 깔았으며, 전선까지 연결했다. 수많은 직원들이 힘을 합쳐 그렇게 일을 해나갔다.

그렇게 해서 경기장이 점차 제 모습을 갖춰나가기 시작했다.

저들이 없었다면 나는 텅 빈 경기장에서 혼자 쇼를 해야겠지.

하지만 그런 감사와는 별개로.

‘리무진에서는 거짓말을 했지.’

바트에게는 이렇게 말했다.

내 노력은 결국 날 믿어주는 사람들에 대한 책임감의 발로라고.

하지만 사실 정반대였다.

나는 내 아이디어와 노력, 행동을 통해 사람들에게 협조와 책임감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단순히 말장난일지도 모르지만 그 차이가 시사하는 바는 무척 컸다.

말하자면 우두머리의 문제다.

나는 나를 주체에 두고 행동한다. 바로 그게 내 방식이었다.

정확히는 회귀한 뒤부터 그런 것이었지만.

‘그전까지는 대충 살았지.’

남들이 하라는 대로.

남들이 날 생각하는 대로.

그렇게 수동적으로.

하지만 이제 그런 삶은 안 된다는 걸 알게 되었다.

거기다 나는 남들 앞에서 퍼포먼스를 펼쳐야만 하는 프로레슬러니까.

‘어디까지나 당당하게.’

다시금 마음을 다잡고, 나는 경기장의 확인을 마치고 돌아섰다.

그다음은 백스테이지.

나는 가장 중요한 고릴라 포지션과 화장실, 락커룸의 위치를 세세하게 머릿속에 그려나갔다.

모르는 게 있으면 설비를 옮기고 있던 직원을 붙잡고 물었다.

“저기, 락커룸이…….”

“이 복도 끝에서 좌우로 나오는 방 전부입니다. 오늘 중으로는 네임 플레이트를 설치해둘 거예요.”

일단 그전에 확인해둘까.

샤워 시설이나 그런 게 어떤지 좀 신경이 쓰였으니 말이다.

‘샴푸가 있으면 좋겠군.’

괜히 챙겨오지 않아도 되니까.

어쨌든, 직원의 말대로 모퉁이 끝에 다다르자 좌우로 문이 여러 개 늘어서 있는 게 보였다.

방문은 아직 잠긴 채였다.

“…….”

이걸 어쩐다.

직원에게서 열쇠를 받아올까. 아니면 여기는 내일쯤에 다시 와서 확인하는 것으로 할까.

고민에 빠진 그때, 멀지 않은 락커룸의 문이 아주 약간이지만 열려 있는 것이 보였다.

왠지 신경이 쓰여 가까이 간 나는 그 안에서 무척 대하기 껄끄러운 인물을 발견했다.

‘헌터…….’

근데 그 모습이 좀 이상했다.

얼굴은 식은땀으로 흥건했고, 청바지를 벗은 채 근육질의 허벅지에 손을 뻗고 있는 중이었다.

그리고 그 위에 돌연히 압박 붕대를 칭칭 감아대기 시작했다.

‘뭐지?’

락커룸 안의 샤워실에서 사람이라도 죽인 걸까. 아니라면 저렇게 식은땀을 흘릴 리가 없는데.

……그게 아니라면 ‘희박’한 확률로 허벅지에 부상을 입었거나.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