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프로레슬링의 신-93화 (93/634)

93.

나는 망설임 없이 문을 열고 락커룸 안으로 들어섰다.

“헌터.”

“너…….”

만약에 녀석이 등 뒤에서 살인에 사용한 슬래지 해머를 꺼내든다면 도망칠 준비도 마쳤다.

……아니, 이런 헛소리를 해도 헌터를 앞에 두었다는 짜증스러운 기분은 잊을 수가 없군.

하지만 뭐 어쩌겠는가.

헌터가 허벅지에 붕대를 감는 모습을 본 순간, 어떤 사실 하나가 머릿속을 스쳐지나갔는데.

미래의 일이었다.

분명 이 시기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헌터는 부상으로 8개월 정도의 장기 결장을 하게 된다.

‘허벅지 근육이 찢어지면서 뼈에서 떨어졌다고 했지.’

헌터는 자신의 커리어 내내 허벅지와의 인연이 좋지 않았다.

헤어진 전前 여자친구처럼.

그 후로도 툭 하면 저 부위가 고장을 일으켰고, 2개월, 3개월 결장을 하며 커리어를 빼먹었다.

그 시작이 바로 이것인 듯했다.

‘걸어 다닐 수 있는 걸 보면 아직까지는 버티고 있는 듯한데.’

그래도 식은땀을 뻘뻘 흘릴 정도면 꽤나 심각한 것 같았다.

허벅지에 붕대를 칭칭 감아대던 헌터가 이내 날 다시 노려보았다.

“……뭘 그렇게 보고 있냐.”

“많이 아파요?”

“아니, 꺼져.”

으르렁댄다.

잠시 헌터의 앞에 서있던 나는 바닥에 닿은 그 발끝을 툭 찼다.

“~~~~?!”

만화처럼 괴로워하는 헌터.

‘꽤 심한데.’

전생에 트레이너 생활까지 했었던 나는 스포츠 의학에도 어느 정도의 지식은 갖추고 있었다.

나는 녀석이 괴로워하는 사이 허벅지 상태를 확인해보았다.

피멍이 들다 못해 새까맣게 그을린 듯한 허벅지. 거기다 발끝을 툭 건드렸는데 아파한다는 건.

“이대로 계속 뒀다가는 다리를 절단해야 할걸요.”

나는 최대한 진지한 목소리로 헌터에게 의견을 전했다. 하지만 녀석은 계속 이를 드러냈다.

“네가 무슨 상관이야.”

“봐요. 안에서 피가 고여서 썩고 있잖아요. 허벅지 상처에서 난 피가 염증을 일으키고 있는 거라고요.”

“…….”

“바트에게 말해야겠어요.”

“자, 잠깐!”

“미쳤어요? 그렇게 다치고 계속 레슬링을 어떻게 해요?”

“닥쳐! 내 몸은 내가 판단해!”

“뭐, 저는 당신이 부상으로 빠지면 기회를 잡을 수 있으니까 나름대로 좋은 셈인데.”

“이 새끼…….”

“그렇게 생각하시던가. 아니면 좋은 쪽으로 생각할 수도 있겠죠.”

나는 피식 웃었다.

물론, 그렇게 해석할 수도 있다.

헌터 역시 그것을 경계해서 나에게 계속 으르렁대는 거겠지.

하지만 이건 별개의 문제였다.

이후 8개월 아웃의 문제가 아니라, 만성 통증으로 고생하게 되는 헌터를 가만히 둘 수는 없었다.

이런 걸 알고 있는데 같은 선수로서 가만히 있으면 그거야말로 헌터를 엿 먹이는 짓이었다.

“그거, 의사 찾아가면 죽고 싶어서 환장했냐고 욕먹을걸요.”

나는 차갑게 이야기했다.

어차피 헌터가 나를 경계하는 이상 친절하게 설득하려던 원래의 계획은 무용지물이 되었다.

“진통제 죽어라 먹어대고 있죠? 아무리 붕대로 질끈 동여매도 소용없죠? 요새 퍼포먼스 떨어졌잖아요.”

“그렇지, 않아…….”

그 기분을 모르지는 않았다.

지금 이 순간, 자신이 쇼에서 빠지면 레볼루션은 붕괴할 터였다.

닉 플레어는 선수가 아닌 반쯤 매니저였고, 랜스 오튼은 어렸으며, 바티스타는 아직 부족했다.

그렇기에 그들의 구심점이자 왕 중의 왕, 트리플H가 있어야 완성되는 것이 바로 레볼루션.

그렇기에 나는 말했다.

“일단 의사부터 만나보죠.”

“……이번 주 경기는 어쩌고? 치료를 시작했다간 이 무너진 퍼포먼스조차 유지할 수 없을 거다.”

“일단 안에 있는 피고름부터 빼자고요. 그거 그대로 두면 진짜 썩어서 뼈까지 망가뜨릴 겁니다.”

“경기가…….”

“제가 커버해드릴게요.”

“……뭐?”

“일단 치료가 우선입니다.”

내 말을 들은 헌터는 황당하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뭐, 이해는 한다.

우리가 이렇게 서로를 걱정해줄 만한 사이는 절대 아니긴 하지.

하지만 그건 녀석과 나, 개인 사이의 문제고, 미래를 알고 있는 입장에서는 전혀 이야기가 달라진다.

그 부상이 얼마나 끔찍한지 알기 때문에 알아서 잘 하겠지, 하고 넘어갈 수가 없는 것이다.

“차 받아올 테니까 준비되면 남들 몰래 주차장으로 나와요.”

“너…….”

“뭘 그렇게 놀라요. 병원까지 운전해줄 테니까 같이 가자고.”

그렇게 락커룸을 나온 나는 회사 측에서 준비해둔 승합차를 하나 빌려서 정문까지 운전했다.

시동을 켜둔 채 기다리자 얼마 지나지 않아 헌터가 다리를 절뚝거리며 밖으로 나왔다.

“크윽……!”

차에 타는 것조차 괴로워 보이는 헌터. 하지만 나는 운전석에 앉은 채 가만히 그를 지켜보았다.

상처 입은 사자를 함부로 돕는 것은, 도리어 그를 모욕하는 행위니까.

거기다 귀찮기도 했고.

“가, 자…….”

“그래요.”

나는 곧바로 액셀을 밟았다.

근처 종합병원에 도착해 헌터를 차에 남겨둔 뒤 접수를 했다.

정형외과의 진료실 앞.

근성으로 겨우 여기까지 걸어온 헌터는 1시간 넘게 경기를 한 것처럼 땀으로 흠뻑 젖었다.

‘허벅지 부상 때문에 요새 팬티를 안 입었던 거군.’

여기서 헌터의 명예를 위해 부연설명을 하자면, 속옷이 아니라 프로레슬러로서의 복장을 말하는 것이다.

헌터는 자신의 두툼한 허벅지에 큰 자부심을 가졌고, 대부분 삼각팬티 모양의 경기복을 착용했다.

하지만 그게 최근 들어 허벅지를 가리는 스패츠로 변했는데, 그 비밀이 이제야 밝혀지게 된 셈이었다.

“……그래서.”

헌터가 날 바라보았다.

경계하는 시선이 인상적이었다.

“커버를 쳐준다고 했는데, 그게 대체 무슨 말이냐.”

“당신 경기를 제가 뛰죠.”

“뭐?”

“그럴 명분도 있습니다. 유럽 신인들이 아직 부족하다면서 당신은 나서지 않는 거죠.”

“나에게 좋은 각본이군.”

“월드 챔피언이니까요.”

“내가 아니라 월드 챔피언…… 그쪽을 더 신경 쓰는 게로군.”

“그렇죠.”

“네가 월드 챔피언에 오를 자격이 있는 선수라고 생각하냐?”

“…….”

나는 헌터를 슬쩍 돌아보았다.

여기서 갑자기 시비를 걸어오는데 뭐라고 대답해야 할까.

아니, 저건 시비인가, 아닌가.

그걸 먼저 확인하기 위해 나는 일부러 ‘좀’ 강한 어조로 답했다.

“너보단.”

헌터의 눈이 다시 크게 뜨였다.

고요한 정형외과 앞.

그가 이내 피식 웃었다.

“내가 자격이 없다고.”

“그런 의미가 아니라. 당신보다는 내가 더 그 자격이 있다고.”

“건방진 소리를 하는군.”

“나도 그렇게 생각해.”

“역대 20위 안에는 들어가는 내가 너보다 자격이 없다고?”

“아니지. 내 기준이라면 당신은 역대 레슬러 중 열 손가락 안에는 들어가. 악역이라면 WWF에 한해 넘버원이고.”

“그런 나보다?”

“실력적으로라면 내가 더 위라고 생각해. ……근데 뭐, 내 생각일 뿐인데 당신이 어쩔 수 있겠어?”

“……하, 역시 넌 미친놈이야.”

헌터가 고개를 내저었다.

“처음 봤을 때도 그렇게 생각했지. 내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고 GCW에 남는 길을 택하다니. 단단히 미친놈이라고.”

“결과적으로 득이 되었지.”

“부정할 수 없군. ……한 가지만 내게 가르쳐줄 수 있겠나?”

“솔직하게?”

“그래. 그때 왜 내가 했던 콜 업 제안을 거절했던 거지?”

“나만 바라보는 우리 GCW 식구들은 먹여살려줘야죠. 게다가 저 같은 동양인이 아무런 준비도 없이 올라오는 것은 위험했고.”

“티파니를 네 후원자로 만들기 위해 GCW를 키웠다는 건가.”

“어느 정도는 염두에 뒀죠.”

뭐, 반드시 이렇게 되리란 걸 예상하고서 한 행동은 아니었지만, 가능성은 마음 한편에 두었다.

내 말을 들은 헌터는 이내 납득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얼마 후, 간호사의 부축을 받아 진료실로 들어섰다.

‘역시 자존심 하나는 일품이야.’

그러니까 심각한 허벅지 부상을 오랫동안 억지로 견뎌낸 거겠지.

어쨌든 책임을 지려는 프로의식만큼은 그 누구보다 대단한 인간이었다.

* * *

헌터를 돕는다.

내가 그런 결심을 하게 된 이유는 굉장히 복합적이었다.

일단 같은 선수로서 가지고 있는 최소한의 동료 의식.

그리고 이번 일이 내게 어떤 식으로든 도움이 될 것이라는 확신 때문이었다.

때문에 나는 일단 헌터의 ‘임시 조치’를 도와준 것이었다.

CT 촬영을 하고, 의사에게 혼이 나고, 설득 끝에 무릎에 차있는 핏물과 고름을 주사로 제거하는 시술만 간단하게 실시했다.

왜냐면 어쨌든, 그는 이번 유럽 투어의 마지막 순간에 경기를 뛰어줘야 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걸 최대한 미룬다.

그게 내 생각이었다.

모두가 모인 자리에서 내 의견을 들은 바트 맥센은 흥미롭다는 듯 미소를 지었다.

“너 혼자서?”

“예, 굳이 월드 챔피언이 계속 경기에 참가하는 것도 모양새가 빠진다 싶어서요.”

“JBL의 유니버스 챔피언은?”

“그건 참여해야죠.”

“어째서?”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시나에게는 아직 기술이 부족합니다.”

“자네는 있다는 건가?”

“예. 그것을 보여줄 만한 아이디어도 있습니다.”

“어떤 아이디어인가?”

“제가 유럽 신인들에게 말하는 거죠. 너희들은 ‘기술을 제한하고’ 싸워도 충분히 이길 수 있다.”

“호오…….”

“하, 하지만 신.”

대답한 것은 각본팀장이었다.

그는 갑작스러운 내 이야기에 무척이나 당황한 눈치였다.

정작 욕을 먹은 시나는 ‘그럼! 난 부족하지!’라면서 웃고, JBL도 심드렁하게 있는데 말이다.

“그건 자네가 악역이 될 텐데.”

“……어차피 여기는 유럽이고, 저희는 어쨌든 악역인 게 좋겠죠.”

“아이디어는 나쁘지 않아. 유럽 신인들을 띄워주는 방향성은 그다지 마음에 들진 않지만.”

“패배하기만 하는 선역이 무슨 매력이 있겠습니까.”

“뭐, 자네가 고른 선수라면 그게 오히려 매력이겠지만.”

바트의 일침에 나는 슬쩍 이마가 따끔한 것을 느꼈다.

“헌터가 경기를 좀 쉰다. 그것도 나쁘지 않은 아이디어야. 그럴 만한 이유가 있으니까.”

“능구렁이 같은 영감.”

“뭐라고 했나?”

“아, 생각만 한다는 게.”

나는 낄낄 웃었다.

잠시 눈썹을 치켜떴던 바트 역시 이내 날 보면서 낄낄 웃었다.

나머지 사람들은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고 나의 엄청난 발언에 식은땀을 뻘뻘 흘려댔지만.

“능구렁이는 자네지. 신. 이번 유럽 투어에서 원하는 모든 걸 가져갈 속셈이로군.”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일주일에 메인 쇼가 두 번. 거기에서 두 번의 경기. ‘하우스 쇼’도 두 번 있고. 괜찮겠나?”

하우스 쇼는 메인 쇼에 포함되지 않는 비방용 쇼를 뜻했다.

유럽 투어 도중 원래 내가 일주일에 치러야 하는 경기 횟수는 6회라는 말이다.

그러나 헌터의 것까지 포함하면, 10회를 아득히 넘어가게 된다.

단순히 많아진 경기 횟수의 문제 이전에, 피로 누적은 그 이상으로 심해질 터였다.

하지만 나는 웃었다.

안 될 건 없다고 생각했다.

“당신이 날 믿어주신다면 최선의 결과를 보여드리겠습니다.”

“크하하하하하! 미친 자식!”

호쾌하게 웃음을 터뜨리는 바트.

“좋아! 당분간 헌터는 세그먼트에만 출연하는 걸로 하지!”

“감사합니다.”

“다들 들었지? 그쪽에 맞춰서 쇼의 내용을 좀 수정해야겠어!”

그 말을 들은 각 팀장들이 끙끙 앓으며 사무실 밖으로 나갔다.

선수들만 남게 된 상황. 바트는 우리들을 하나하나 격려했다.

가장 먼저 JBL.

“존, 문제는 없겠지?”

“물론입니다, 보스. 시나가 아직 경기 여러 개를 동시에 뛸 실력이 안 되는 건 확실하니까요.”

“시나, 너무 깊게 받아들이지 마라. 신 저 녀석이 이상한 거니까.”

“무, 물론입니다, 보스. 저도 신에게 많이 배우고 있는 걸요.”

“그리고 헌터.”

마지막으로 바트는 아까부터 침묵하고 있던 헌터를 돌아보았다.

항생제와 진통제의 콤보 세트로 반쯤 의식을 잃은 채 있던 그가 깜짝 놀라 눈을 떴다.

“예, 보스.”

“좋은 동료를 두었군.”

“……예.”

복잡한 얼굴로 대답하는 헌터.

역시, 당연하다면 당연하겠지만 바트는 헌터의 허벅지 부상에 대해서 알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럼에도 그냥 방치해두었다.

왜냐고?

현재 월드 챔피언인 헌터가 부상으로 쇼에서 빠지게 되면 그 피해가 막심하기 때문이었다.

‘악덕 회장 그 자체야.’

그렇기 때문에, 그는 내가 어떤 생각으로 이런 제안을 했는지도 꿰뚫어 보고 있을 터였다.

경기를 많이 뛸 수 있다.

그건 그만큼 쇼에서 중요하게 다뤄지는 선수라는 뜻이고.

GCW에서 ‘역사’를 새겼던 것처럼 내 커리어의 당당한 한 축이 되어줄 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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