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4.
그렇게 시작된 랙다운.
퍼퍼퍼퍼퍼퍼펑!!
화려한 폭죽 쇼와 함께 시원시원한 오프닝 테마가 연주되었다.
피켓을 든 2만여 명의 관객들이 목청이 터져라 환호를 보냈다.
그것을 락커룸의 진동과 모니터링TV의 영상을 통해서 느끼며, 나는 이내 다시 눈앞을 돌아보았다.
긴장한 듯 자리에 서있는 건 윌과 프랑스 출신의 신입이었다.
오늘 내가 상대할 두 선수였다.
나는 어깨를 덜덜 떨고 있는 프랑스 신입을 바라보았다.
“이름이 뭐라고 했지?”
“포, 폴입니다.”
“폴?”
피식 웃은 나는 락커룸 의자에 앉아 있는 헌터를 돌아보았다.
병원에 다녀온 뒤 한결 나아진 듯했지만, 임시방편에 불과했다.
“저 양반 이름도 폴인데.”
“여, 영광입니다!”
“그렇다는데요?”
“……그래.”
고개를 끄덕이는 헌터.
독한 진통제와 항생제의 영향으로 그는 사자가 아닌 치와와가 되었다.
멍하니 있다 가끔 몸을 바르르 떨었고, 소변을 아무데나 흘렸다.
‘……마지막 건 장난이고.’
어쨌든, 뭐.
폴과 윌.
“각본은 숙지했겠지.”
“예!”
“열심히 하겠습니다!”
내가 뛸 경기를 좀 더 흥미로운 방향으로 이끌기 위해, 우리는 몇 가지 요소를 각본에 추가했다.
바로 룰렛을 돌려, 내가 사용할 수 있는 기술을 정하는 것이었다.
타격기.
관절기.
메치기.
공중기.
이렇게 크게 네 개 중 하나만.
굉장히 큰 제한이었다. 그렇기에 사람들은 호기심을 가질 터였다.
‘공중기만으로 경기를 풀어간다고? 대체 어떻게 한다는 거지?’
대충 그런 식이겠지.
분명 어려운 일이기는 했다.
하지만 그걸 해내는 게 일류다.
“좋아. 내 리드만 잘 따라와라.”
그렇게 쇼가 시작되었다.
먼저 룰렛에 대해 설명하는 백스테이지 세그먼트가 이어졌다.
각각 타격기, 관절기, 메치기, 공중기로 나뉜 룰렛을 혼자서 빙그르르 돌리고 있는 나.
그런 내 뒤로 인터뷰어인 테리가 다가와 말을 걸었다.
[신, 아주 멋진 룰렛인데요.]
[오늘 이걸 써서 쇼에서 아주 재미있는 일을 할 겁니다.]
나는 룰렛을 빙그르르 돌렸다.
[유럽 신인들이 생각보다 영 힘을 못 쓰는 것 같아서 말이죠.]
[설마…….]
[예, 저는 앞으로 경기마다 이 룰렛을 사용할 생각입니다. 자세한 건 링 위에서 말하죠.]
내 말을 끝으로 영상이 끝났다.
화면이 다시금 경기장을 비추었다. 고릴라 포지션에 서있던 나는 신호가 떨어지길 기다렸다.
“신, 입장해주세요.”
내 음악이 울려 퍼졌다.
웅장한 일렉트리카라니.
누가 이런 조화를 상상했을까.
하지만 스컬렉스의 천재적인 감각과 GCW 음향 팀장의 원숙함이 더해져 멋진 음악이 나왔다.
나는 관객들의 환호 속에서 룰렛이 세워진 카트를 끌고 이동했다.
링 위에 룰렛을 밀어 넣은 나는 곧바로 마이크를 손에 쥐었다.
“런던의 관객들은 최고로군! 정말 멋진 목요일 밤이야!”
[Waaaaaaaaaaaaaaaagh!]
목청이 터져라 환호하는 관객들.
나는 확실히 현재의 자신이 시나와 엇비슷한 등급임을 느꼈다.
단시간에 미드 카더 레벨까지 오른, 미래가 기대되는 신인.
종잡을 수 없는 악동. 악역과 선역을 오가는 팬-페이보릿.
회장의 후계자로부터 사랑까지 받고 있는 가장 핫한 사나이.
그것이 지금의 나였다.
‘생각해보면 참 웃기는데.’
동양인 남성은 매력적이지 않다는 편견을 깨부순 것이다.
어쨌거나.
내 모습은 영국의 여성들에게도 충분히 통하고 있었다.
[Face F-ck Me! SIN!]
그런 피켓을 든 여성이 나와 눈이 마주치자 비명을 질러댔다.
아주 잠시 황당해하다가 이내 마이크워크를 이어나갔다.
“하지만 선수들은 아니지. 솔직히 말해서 일방적이었어. 프랑스, 스페인, 독일, 그리고 영국.”
[Booooooooooooo!]
“영국은 아니라고? 그건 맞아. 확실히 윌은 좀 더 낫지. 다들 그렇게 생각하고 있더군?”
[Yes! Yes! Yes! Yes! Yes!]
나는 그렇게 관객들과의 대화를 통해 이야기를 이끌어 나갔다.
“하지만 아직 부족해. 그렇기 때문에 이걸 가지고 나온 거야.”
나는 룰렛을 돌아보았다.
“앞으로 유럽 신인들을 상대할 때 나는 이 룰렛을 돌려 나온 기술만을 사용할 생각이다.”
순간 술렁이는 관객석.
“오늘 나와 붙게 될 신인이…… 프랑스 출신의 폴 로앙이로군.”
[Boooooooooooo!]
하지만 내 ‘프랑스’라는 한마디에 다시금 분위기가 달아올랐다.
“이거 원, 내가 룰렛을 잘못 돌렸다 지기라도 한다면 평생 영국 쪽으로는 여행도 못 오겠군.”
내가 그렇게 말한 직후, 트리플H의 입장 음악이 울려 퍼졌다.
왕 중의 왕을 상징하는 형광 녹색의 조명이 시야를 어지럽혔다.
나는 폴을 대동한 채 등장하는 트리플H를 잠시 바라보았다.
유럽 투어가 4주짜리 각본으로 선회하긴 했지만, 어쨌든 그와 나는 계속 적대하는 사이였다.
“자신감이 넘치다 못해 오만할 정도로군. 신. 룰렛을 돌려서 사용할 기술을 제한하겠다고?”
“빌려줄까?”
“아니, 아쉽지만 난 오늘 경기에 나설 생각이 없어서 말이야.”
“뭐?”
“여유가 넘쳐 보이는데, 기왕이면 내 상대인 윌 오 스피디까지도 대신 처리해줬으면 좋겠군.”
“내가 왜 그래야하지?”
“내가 월드 챔피언이니까?”
링 위로 올라온 헌터가 의기양양하게 자신의 벨트를 들었다.
WWF의 로고가 크게 들어간 황금의 벨트. 모든 선수들이 꿈꾸는 최강자의 상징.
“굳이 내가 나설 것도 없지. 랙다운 쪽은 어쩔지 모르겠지만, 나는 좀 쉬어두고 싶어서.”
“그렇다면 이건 어때?”
나는 피식 웃으며 헌터의 황금빛 벨트를 바라보았다.
“만약 4주 동안에 날 이기는 선수가 나온다면 그 친구가 월드 챔피언에 도전하는 건 어때?”
“뭐…….”
“그게 윌이 될 수도 있지.”
[Yes! Yes! Yes! Yes! Yes!]
순간 당황스러워 하는 헌터.
관객들은 내 말에 동의하듯 목청을 높였다. 삽시간에 반격을 한 나는 가볍게 미소를 지었다.
헌터가 눈을 부라렸다.
“……그럼 네가 일부러 지는 거겠지?”
“그럴 리가. 내가 만약에 진다면 난 내 챔피언 벨트를 내려놓지.”
“고작 그런…….”
“무슨 소리야? 이건 위대한 챔피언들을 배출한 태그 팀 챔피언 벨트다. 다들 그렇게 생각하지?”
[Yes! Yes! Yes! Yes! Yes!]
사람들이 미쳐 날뛰었다.
이로서 이야기가 흥미로워졌다.
나는 룰렛을 돌려서 나오는 한 가지 방식의 레슬링으로 신입들을 상대해 승리한다.
만약에 내가 진다면 벨트를 내려놓고, 이긴 신입은 월드 챔피언에 도전할 기회를 얻는다.
“이걸로 어때. 헌터. 네가 남자라면 어디 한번 걸어보라고.”
“이 새끼…….”
“그거 재미있겠네요.”
순간 다른 누군가가 대답했다.
흥미로운 기색을 감추지 않는 여성의 목소리. 관객들이 그 정체를 알아차리고는 환호를 보냈다.
티파니 맥센이 나타났다.
마이크를 든 그녀는 쇼에 걸맞게 꾸며진 자신의 미모를 자랑하며 천천히 링 위로 올라왔다.
표정이 굳어지는 헌터.
하지만 티파니는 일은 일이라는 듯 웃으며 말을 이어나갔다.
“저희는 언제나 관객들이 흥미로워할 만한 선택을 존중하죠. 헌터, 이건 당신 제안이었잖아요?”
“그, 그건 그런데.”
“그렇다면 책임을 져요. 설마 유럽 신인에게 질 것 같아서 이런 말을 하는 건 아니겠죠?”
“……! 그래, 좋아. 원한다면 그 개 같은 짓거리에 어울려주지.”
헌터가 분노를 터뜨렸다.
“하지만 기억해둬. 네가 진다면 당장 태그 팀 벨트를 반납해라.”
“그렇게 하지. ……어디 한번 4주 동안 쫄깃하게 놀아보자고.”
사실 이 시점에서 헌터가 경기에 나서지 않는 건 큰 손해였다.
어쨌든 사람들은 WWF 선수들의 경기가 보고 싶어서 이 쇼에 찾아온 것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좋은 각본 하나가 모든 걸 바꿔놓았다. 사람들은 나와 티파니를 향해 환호를 보냈다.
그 기세를 모아 나는 모두가 보는 앞에서 힘차게 룰렛을 돌렸다.
타르르르르…….
힘찬 소리를 내며 돌아가는 룰렛. 나는 로프에 기대어 서서 그것이 멈추는 것을 기다렸다.
첫 번째는 폴과의 경기.
‘관절기가 나오면 좋겠군.’
일부러 사실감을 위해 경기는 룰렛의 결과를 통해 즉석에서 풀어가기로 정해진 상태였다.
그리고 난 내 운을 믿었다.
폴과는 관절기.
윌과는 공중기.
적당히 힘을 준 룰렛의 회전이 천천히 멈추기 시작했다.
* * *
생각한 대로의 결과가 나왔다.
두 번 돌아간 룰렛은 25%의 확률 두 번을 뚫고 기어코 내가 원하는 결과를 가져다주었다.
폴과의 경기는 오직 관절기만.
윌과의 경기는 오직 공중기만.
나는 그 두 경기를 가지고 있는 기술을 총동원해 풀어나갔다.
‘관절기’는 조금 정적인 기술들이 많았고, 따라서 경기 양상이 좀 지루해질 가능성이 많았다.
그렇기에 나는 일부러 ‘프랑스 신인’인 폴을 가볍게 골려주는 식으로 그 한계를 극복했다.
영국의 관객들은 내가 폴을 가지고 놀듯 쉽게 상대할 때마다 웃으며 크게 반응을 보내주었다.
그리고 그 감정은 TV를 통해 지켜보고 있는 시청자들에게도 분명히 전해질 터였다.
하지만 다음 경기는 정반대였다.
나는 야유를 받았고, 사람들은 윌을 힘차게 응원하기 시작했다.
그런 상황에서 나는 윌을 되는 대로 띄워주며 갖가지 공중기를 사용해 경기에서 승리했다.
그는 특유의 탄력을 이용해 남들과 다른 자신의 재능을 보여주었고, 투표 결과에서도 계속 선두를 유지하며 앞서 나갔다.
그렇게 일주일이 흘렀다.
유럽 투어 2주째의 목요일 밤.
랙다운의 방영이 끝난 뒤, 나는 샤워를 마치고 밖으로 나왔다.
“후우.”
절로 한숨이 나왔다.
예상했던 바였지만, 힘들었다.
근육통에 전신 타박상. 스케줄이 너무 하드해 제대로 된 휴식을 취할 수도 없었던 일주일이었다.
하지만 나는 해냈다.
요 일주일 간, 버닝콩과 랙다운을 가리지 않고 쇼의 메인 이벤터로서 엄청난 활약을 펼쳤다.
‘내가 원하던 거였지.’
그렇기에 힘이 부치는 상황에서도 앓는 소리를 내지는 않았다.
머릿속으로 호텔로 돌아간 뒤의 일을 떠올리며 짐을 정리했다.
내일 이동할 때까지 얼음찜질이라도 하면서 몸을 좀 회복하자.
다음 주는 태그 팀 매치.
거기에서 나는 시나와 JBL의 랙다운 팀과 달리 혼자 둘을 상대하는 핸디캡 매치를 치룰 것이다.
‘프랑스로 이동한 뒤에는 그에 관해서 준비를 해야겠군.’
그렇게 생각한 나는 짐이 든 스포츠 백을 챙겨 어깨에 멨다.
근육통에 살짝 휘청.
하지만 어떻게든 버티고 돌아서려던 순간, 차가운 냉기가 목덜미를 스치고 지나갔다.
“……?!”
“아, 정말 몰랐나 보네.”
놀라서 돌아보자 티파니가 서있었다. 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여, 여긴 왜 있어요?!”
“아니, 주차장에서 기다리고 있었는데 나오지를 않더라고. 그래서 대충 감을 잡았죠.”
아이싱 팩을 던지는 그녀.
그것을 받은 나는 부족하던 무언가가 채워지는 느낌을 받았다.
근육통에는 이게 직빵이었다.
“왼쪽 감아요.”
티파니가 준비해온 아이싱 팩은 한두 개가 아니었다. 잠시 굳어져 있던 나는 이내 피식 웃었다.
셔츠를 벗고 앉은 나는 심한 통증이 느껴지는 팔뚝이며 다리에 아이싱을 하기 시작했다.
티파니에게서는 땀 냄새가 났다.
강한 조명과 폭죽의 화약으로 인해 경기장은 덥기 마련이었다.
그런 와중에도 그녀는 현장팀에서 최선을 다해서 일했다.
회장의 딸, 어찌 보면 편한 포지션인데도 전혀 빼지 않았다.
그렇기에 난 전생에도 그렇고 현재에는 더더욱, 티파니 맥센이라는 인간에게 호감을 느꼈다.
하지만 그녀는 최근에 있던 일로 나에게 좀 화가 났을 터였다.
‘내가 아가씨라고 했거든.’
아직 20대 초반.
좀 꿈에 젖어있을 시기다.
그리고 그 꿈의 대상이라고 할 수 있는 내가 자신의 역린을 건드렸으니 좀 화가 난 거겠지.
그럼에도 티파니는 그 감정을 능숙히 숨긴 채 말을 이었다.
“그 친구들, 영 아니던데.”
“신인들이요?”
“기술 시전이 엉성하잖아요.”
“뭐, 어쩔 수 없죠.”
“그래도 경기가 너무 많아요. 좀 줄이는 게 낫지 않겠어요?”
“리무진에서 바트와 했던 이야기와 결국 똑같은 말인데요.”
“……예?”
“다들 날 믿어주니까 최선을 다 하는 수밖에 없다는 거죠.”
“정말 그렇게 생각해요?”
“그럼요.”
“당신은 상품이라고 했죠. 그 상품이 부서지면 아버지가 무슨 조치라도 취해줄 것 같아요?”
곧바로 분노를 드러내는 티파니.
그녀는 아버지를 싫어했다.
정확히는, 기업의 회장으로서 잔혹한 바트 맥센을 혐오했다.
자신의 선수들을 상품으로서 대하고 가차 없이 내치는 그를.
어렸을 적, 락커룸에서 겪은 선수들과의 좋은 기억이 있어서 그런 아버지를 더 싫어하게 된 것이겠지.
‘아마 WWF를 떠나 대학에 갔던 이유도 그것 때문일 거고.’
그리고 나를 만났다.
티파니는 나를 자신과 함께 바트와 대적할 인물로 점찍었다.
확실히 그렇긴 했다.
우리의 팀은 바트와는 다른 방식으로 쇼를 계속 성공시켜왔다.
따라서 내가 바트에게 숙이고 들어가 그의 철학에 동조하는 태도를 취하자 실망했을 것이다.
이해는 하지만 지금 당장 바트에게 대항할 수 없는 나로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멋대로 생각하는 건 좋은데, 그걸 내게 강요하는 건 원치 않았다.
그 점에 대해 말하려 했지만, 티파니가 더 빨랐다.
“그렇게 둘 순 없어요.”
“예?”
“제가 당신을 보호하겠어요.”
그렇게 말한 티파니는 정말 상상도 못한 아이디어를 내놨다.
내가 상상도 못한 아이디어였다.
……그리고 죽여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