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
프랑스 파리.
월요일 밤의 버닝콩에 찾아와준 관객들은 정말 상상도 못한 쇼를 오늘 보고 가게 될 터였다.
‘미치겠군.’
링 위.
반대편 사이드에 서있는 건 프랑스의 폴과 스페인의 욘이었다.
몸을 풀고 있는 두 사람을 보며 나는 웃음을 참느라 고역이었다.
땡땡땡!!
링 벨이 세 번 요란하게 울리고, 링 아나운서가 말을 이어나갔다.
“장내에 계신 관객 분들께 알려드립니다. 오늘 신은, 경기의 공정함을 위해 미스테리 파트너와 함께 경기를 진행하게 되었습니다.”
미스테리 파트너.
쇼의 궁금증을 증폭시키는, 전형적이고 아주 좋은 각본 요소였다.
경기 직전까지 정체를 알 수 없는 태그 팀 파트너. 그 이야기에 프랑스의 관객들이 웅성거렸다.
이어지는 건 약간의 적막함.
그것을 찢어내듯 한 사람의 입장 테마가 경기장에 울려 퍼졌다.
부드럽고 느린 박자의 곡.
이어지는 여성 랩퍼의 랩핑.
‘진짜 이게 뭐냐고!’
하지만 죽여줬다.
[Waaaaaaaaaaaaaagh!!]
관객들은 그 노래가 누구의 것인지 알았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선 그들이 입장로를 돌아보았다.
티파니 맥센.
내 미스테리 파트너가 경기복을 입은 채 당당히 걸어 나왔다.
자신의 음악에 맞춰 사람들에게 손을 흔드는 그녀.
그것을 본 나는 생각했다.
‘미친 여자야.’
그리고 멀리 있는 그녀 역시도 나를 피식 웃으며 바라보았다.
정말 멋진 여자다.
나의 계획을 방해하지 않으며 아주 절묘하게 도움을 주었다.
바트 역시 미친 노인네였기 때문에 재미있겠다며 바로 승낙했고, 일은 이렇게 되었다.
하지만 순탄하지는 않았다.
‘고생 좀 했지.’
정신적인 의미로 말이다.
* * *
이 일이 벌어지기 며칠 전.
콰앙!
운동복을 입은 티파니가 그대로 링 위에서 힘차게 낙법을 쳤다.
링 포스트 앞에 서서 그 모습을 지켜본 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괜찮…… 아니, 잘하는데?’
선수 급의 멋진 낙법이었다.
하긴, 몇 년 전까지만 해도 티파니 맥센은 자신이 직접 여성부 경기를 뛰기도 했던 베테랑이었다.
그렇게 낙법을 친 그녀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물었다.
“어때요?”
“키가 어떻게 되죠?”
“172인가 그럴 텐데요.”
“체중은?”
“…….”
“60kg 정도 되어 보이는데.”
“제가 운동을 좀 오래 쉬어서 그거보다는 덜 나가거든요.”
“그래도 키가 크니까.”
“아니라니까요.”
농담은 했지만, 확실히 그래 보였다.
툭 치면 부서지겠다 싶을 정도로 가녀린 체구였다. 이래서야 제대로 경기를 뛸 수 있을까.
‘이게 중요하겠군.’
거기에 설득력 문제도 있다.
남녀의 신체적 차이를 무시하고 치고받는 경기 스탠스를 취한다면 사람들이 몰입하지 못하겠지.
하지만 그런 부분을 날려버릴 아이디어는 얼마든지 존재했다.
“운동 얼마나 쉬었는데요.”
“한…… 2년 정도?”
“확실히 근육이 많이 줄었네요.”
나는 말랑말랑한 티파니의 팔뚝을 만졌다. 확실히 흔적은 있지만 근육이랄 게 거의 없었다.
“어쨌든 난 ‘시간을 벌어주는’ 용도니까 괜찮지 않겠어요?”
“예, 그래도 멋진 기술 하나 정도 구사해주면 다들 좋아하겠죠.”
“뭘 할까요?”
“그전에, 일단 낙법부터 다시 한 번 확인해봅시다.”
“……뭔가 불안한데.”
그 말대로 되었다.
나는 티파니 맥센에게 각종 슬램 기술을 걸며 제대로 낙법을 치는가를 한번 확인해보았다.
일단 바디 슬램.
쿵! 하고 내 허리 높이에서 떨어진 티파니가 숨을 삼켰다.
“괜찮아요?”
“……아프네요.”
“못하겠으면 말하고.”
“그럴 리가.”
피식 웃는 그녀에게 나는 봐주지 않고 여러 기술을 걸었다.
아무리 그녀가 선수로서 활동했다고 해도, 현재 시점에서 남녀 간의 경기 양상은 무척 달랐다.
까놓고 말해, 현재 시점에서 여성 경기는 경기로서 성립조차 되지 못하는 게 대부분이었다.
WWF에서 원하는 여성 레슬러의 인재상이 남성과 다르기 때문이었다.
여성 선수들은 주된 고객인 남성들을 위해 대부분 성적인 매력을 어필하며 경기를 치렀다.
그렇기에 선수로서의 능력보다도 얼굴이나 몸매를 중시했다.
물론 그건 지금만의 일이고, 10년쯤 지나면 여성 선수들도 남성과 엇비슷하게 평가를 받지만.
‘그건 미래의 일이고.’
지금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티파니 맥센은 달랐다.
내가 거는 각종 기술에 아파할지언정 끝까지 낙법을 소화했다.
자칫 잘못 떨어지면 다칠까 나도 살살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연속해서 안정적으로 낙법을 치는 것은 무척 고무적인 일이었다.
그 이유를 잠시 생각해보던 나는 이내 답을 찾아냈다.
‘그러고 보면 티파니는 커리어 내내 남성 선수들의 위험한 기술을 맞아주며 몸을 불살랐지.’
괜찮을 것 같았다.
“나쁘지 않은데요.”
“당신 기술, 아프긴 한데 굉장히 안정적으로 들어가네요.”
낑낑대며 일어선 티파니.
“물론, 실전에서 이렇게 거친 일을 시키지는 않을 거죠?”
“물론입니다. 주간 쇼기도 하니까 적당 적당히 해야죠.”
“무슨 방법이 있을까요? 저는 여자고, 선수도 아닌데 태그 매치에서 대체 어떻게 하면…….”
“권력의 힘을 빌려야죠.”
“권력?”
“거기다 여자니까 상대 선수들도 좀 공격하기 껄끄러워 하는 겁니다. 방심하는 그들에게 한 방씩 먹이고 도망치는 건 어떨까요.”
“나쁘지 않겠네요. 근데 뭘?”
“음…….”
잠시 생각을 해본 나는 이내 두 가지의 기준을 먼저 제시했다.
“화려하고, 강해 보이는 기술.”
“허리케인라나?”
“할 수 있어요?”
“음, 어설프게나마.”
“연습해보죠. 그리고 탑 로프 기술도 하나 넣고. 괜찮겠어요?”
“겁이 없는 게 장점이라서.”
“그럼 탑 로프 크로스 바디를 하나 넣는 걸로 하고.”
그거라면 충분히 임팩트가 있으면서 제법 간단한 기술이었다.
받아줄 때도 나름 편하고.
티파니의 안전을 생각하며 동시에 최대한 쇼에서 퍼포먼스를 뽑아먹기 위한 나름의 전략이었다.
그렇게 두 개의 기술을 정한 우리는 곧바로 연습에 들어갔다.
아이싱을 해서인지 몸 상태는 괜찮았다. 거기다 티파니가 워낙 가벼워 부담도 거의 없었다.
일단 허리케인라나.
상대방의 어깨 위에 정면으로 올라타 다리를 걸고 회전하며 바닥으로 넘겨버리는 기술이었다.
보는 맛도 있고 힘이 적게 들어가 경량급 선수들이 주로 썼다.
“일단 어깨 위로 올라와봐요.”
내 말에 고개를 끄덕인 티파니가 로프를 잡고 반동을 했다.
다가온 그녀의 허리를 잡고 살짝 위로 띄워주었다. 그와 함께 허리를 숙이자 티파니가 내 어깨 위에 정면으로 올라탔다.
시선이 마주쳤다.
“여기서 이제…….”
“뒤로 넘기면서 돌아요.”
“그게 끝은 아니죠.”
“예?”
내가 의아해 바라보자 티파니의 몸이 뒤로 휙 돌았다. 나는 순간적으로 그에 맞춰 회전하며 앞으로 뛰었다.
이렇게 해서 티파니가 다리를 걸고 넘기는 타이밍에 맞춰 그대로 앞으로 구르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놀랍게도 그녀는 앞으로 반 바퀴 회전해 떨어지는 내 위에 다리를 걸고 따라왔다.
쿵!
성공이다.
완벽한 허리케인라나였다.
“어때요? 어때요?”
활짝 웃으며 묻는 티파니.
내 가슴 위에 올라탄 그녀가 그대로 손깍지를 껴 핀을 했다.
“이렇게 해서 허리케인라나죠. 그냥 넘기면 헤드 시저스 휩이고요. 내가 바본 줄 알았어요?”
“아니, 그건 그냥 디테일 차이라서 뭉뚱그려 부르던데.”
“후후, 비테레로 아저씨가 확실하게 구분하라고 했다고요. 거기다 우라칸라나나 프랑켄슈타이너도 제대로 구분할 수 있죠.”
“……대단하십니다.”
“지금 놀리는 거예요?”
“끄흑?!”
티파니가 엉덩이를 한 번 크게 들더니 다시 내 위로 주저앉았다.
“3초 지났어요. 내가 이김.”
“추, 축하드립니다.”
“어쨌든, 어땠어요. 제 기술.”
“멋졌습니다.”
나는 티파니를 힘으로 밀어내며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확실히, 무시할 수만은 없는 여자였다. 기술 시전도 괜찮고, 선수로 쭉 나갔어도 대성했으리라.
그 뒤로도 티파니와 나는 링에서 경기 때 쓸 기술을 연습했다.
탑 로프 크로스 바디.
공격자 측에서 뛰어 피폭자의 몸과 십자가 형태로 겹치며 충격을 주는 기술이었다.
원래부터 난이도 자체는 별것 아닌 기술이었고, 티파니는 자신이 말한 대로 겁쟁이가 아니라 있는 힘껏 뛰었다.
그렇게 계속 연습이 이어지는 동안 나는 한 가지를 떠올렸다.
그러고 보면 티파니가 말한 ‘비테레로’는 1년 전 사망했다.
에디 비테레로.
멕시코의 레슬링 명가, 비테레로 패밀리 출신이었던 레전드 선수.
‘심장 마비였지.’
그때 추모 방송에 일부러 출연해 펑펑 울던 티파니의 모습이 문득 머릿속을 스쳐지나갔다.
아무래도 그때 방송에서 그녀가 보여주었던 눈물은 ‘쇼의 일부’가 아니었던 모양이다.
* * *
티파니의 아이디어는 정확히 핀 포인트를 찌르는 것이었다.
이거라면 내가 생각한 각본을 망가뜨리지 않는 선에서 적당히 쉴 시간을 벌 수 있었다.
결국 내가 가장 걱정하는 것은 피로가 누적되어 경기 중에 실수를 저지르고 마는 것이었다.
그렇게 되면 자칫 나나 상대방이 큰 부상을 입을 수도 있었다.
가장 피해야만 하는, 허나 반드시 따라붙기 마련인 위험 요소.
그 불안이 해소되었다.
짜악!
“윽?!”
누군가 등을 손바닥으로 후려친 순간, 나는 놀라 어깨를 폈다.
폴의 공격에 로프까지 밀려난 직후였다. 티파니 맥센이 갑작스럽게 태그를 한 것이었다.
[Yes! Yes! Yes! Yes! Yes!]
환호하는 관객들.
거기에 손을 흔들어 답해준 티파니가 미들 로프 위를 넘어 링 안으로 들어왔다.
눈빛이 잠시 스치는 순간, 나는 고맙다는 의사를 전했다.
그리고 각본의 연기로서 어이가 없다는 듯 손을 들어 보였다.
사실, 꽤나 지친 상태였다.
하지만 두 선수를 계속해서 압도하고 있었던 나는 각본에서 그걸 드러낼 수는 없었다.
거기에서 티파니가 호기롭게 나섰다. 그래서 나는 실제로 조금 쉴 수 있는 시간을 벌게 되었다.
호흡을 정돈.
뻐근한 팔을 돌리며 아직까지 체력이 남았음을 어필했다.
그리고 링 안을 확인했다.
‘잘 먹히겠지.’
그럼에 나는 약간의 불안을 느끼며 티파니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링 안의 그녀는 내 걱정을 날려버리듯 프로레슬러로서 멋진 연기를 펼치기 시작했다.
관객들의 환호 속에 링을 크게 돌며 자세를 잡는 그녀와 당황해 어쩔 줄 몰라 하는 폴.
선수도 아닌 여자가 나와서 맞붙자고 하는 상황이었다. 당연히 남자라면 저렇게 반응하겠지.
말리지 않느냐는 듯 심판을 돌아본 폴은 이내 한숨을 내쉬며 티파니를 힘으로 몰아붙였다.
그리고 이어진 반응은 내가 생각했던 것과는 조금 달랐다.
[Boooooooooooo!]
‘어라?’
프랑스 선수인데 프랑스에서 야유를 받는 상황이었다.
폴도 정말 당황했는지 순간 고개를 들어 관객을 살펴보았다.
하지만 티파니가 그것을 눈치 채고 폴의 뺨을 후려갈겼다.
각본에는 없던 행동.
하지만 관객들의 마음을 뒤흔들어놓는 한편, 순간 연기를 까먹었던 폴을 일깨우기에는 충분했다.
어이가 없다는 듯 물러선 폴이 이내 분노해 달려들었다.
티파니를 번쩍 들어 내치는 폴.
콰앙!
깔끔한 낙법으로 기술을 접수한 티파니가 가볍게 뒤로 굴렀다.
통증에 순간 비틀거렸지만 그녀는 이내 힘만 믿고 달려드는 폴을 역이용해 턴버클에 박아버렸다.
[Yeaaaaaaaaah!]
환호하는 관객들.
뭐, 실제로 보자면 말도 안 되는 상황이긴 한데, 각본 상으로는 이상할 게 없었다.
프로레슬링은 작은 선수가 재빠르고, 큰 선수가 느리다는 만화적인 공식을 제법 따르니까.
어질어질하며 돌아선 폴에게 로프 반동으로 달려가는 티파니.
이어진 허리케인라나.
기세 좋게 핀까지 이어졌으나, 폴은 금방 거기에서 벗어났다.
하지만 그가 정신을 차리는 사이 티파니는 이미 턴버클을 밟고 탑 로프에 올라선 상태였다.
가녀린 몸이 하늘을 날았다.
폴은 다행히 완벽하게 티파니를 받아내며 그대로 뒤로 넘어졌다.
다시금 커버가 이어지고, 폴은 티파니를 금방 떼어냈다.
하지만 곧바로 일어서려던 녀석은 이내 다리에 힘이 풀린 듯 무릎을 꿇었다.
자신의 힘을 과시하듯 힘차게 팔을 들어 올리는 티파니.
[Tiffany! Tiffany! Tiffany……!]
관객들이 경기장이 떠나가라 환호를 보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걸 바라보고 있던 나는 힘이 점점 돌아오는 걸 느꼈다.
확실히 멋진 여자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