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
그렇게 우리는 프랑스를 거쳐 독일과 스페인에 이르기까지, 유럽 투어를 계속해서 이어나갔다.
쇼는 매번 좋은 반응을 얻었다.
유럽 신인들의 성장과 멘토 간의 신경전으로 구성된 스토리는 유럽 투어 동안의 장기 에피소드로서 톡톡히 역할을 해냈다.
과연 가장 많은 인기를 얻어 WWF와 계약하는 건 누구일까.
시나는 유럽 투어 동안 JBL과 맺은 협력 관계를 유지할 것인가.
신은 과연 마지막까지 신인 선수들에게 패배하지 않을 것인가.
헌터는 끝까지 유럽 투어의 경기에 참여하지 않을 생각인가.
“물론 아니죠.”
내가 대답했다.
스페인의 마드리드.
살짝 숨이 막히는 날씨.
경기장의 회의실에 모인 우리는 유럽 투어를 어떻게 마무리 지을 것인가를 이야기하고 있었다.
“저는 헌터가 마지막에는 경기를 보여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내 생각도 그러네.”
바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전에 유럽 신인들 각본을 마무리 지어야 하지 않겠어요?”
티파니의 날카로운 지적.
확실히 맞는 말이었다.
이쪽 문제를 설렁설렁 넘어가면 사람들은 이 4주간의 유럽 투어를 ‘땜빵’이라고 생각할 터였다.
“그 말도 맞습니다. 확실히 그쪽부터 마무리를 지어야죠.”
“지금 가장 많은 표를 받은 게 윌이었지? 82퍼센트로 말이야.”
“예, 외부 자료에는 34퍼센트 정도로 낮춰 발표를 했지만요.”
“잘했군. 접전인 것처럼 포장해야 투표율이 더 오를 테니까.”
“그래서, 윌이 아마 무난하게 우승을 하지 않을까 싶은데요.”
“그럼 그 친구와 신이 버닝콩에서 대결을 펼치는 걸로 하지. 헌터의 경기는 그다음에 이어지고.”
“회장님……?”
“자, 잠깐만요. 혹시 신이 마지막에 지고 윌과 헌터가 월드 챔피언전을 치루는 건 아니겠죠?”
당황한 티파니의 물음에 바트는 껄껄거리며 웃음을 터뜨렸다.
“그야 물론 아니지. 내 선수를 유럽 놈들에게 지게 하다니.”
잠깐 모두를 당황시킨 바트는 그대로 내 얼굴을 돌아보았다.
“그럼 어떻게 되겠나?”
“저와 헌터가 경기를 갖겠죠.”
당연한 대답이다.
나는 지지 않고, 헌터는 경기를 해야 한다면 그것밖에는 없었다.
“그렇지. 거기에서 자네는 그 경기에서는 지게 되겠지만 말이야.”
“회장님.”
바로 그때, 유럽 투어 내내 침묵을 지키던 헌터가 손을 들었다.
“저는 반대로 생각합니다.”
“응?”
모두가 놀랐다.
나 역시도 마찬가지였다.
지금 헌터가 한 말은, 내가 하는 파격적인 해석이 맞다면 이런 의미라고 볼 수 있었다.
내가 신에게 패배하겠다.
‘마약이라도 했나?’
아니 물론, 내가 헌터에게 크나큰 은혜를 베푼 것은 사실이었다.
녀석은 내 덕분에 유럽 투어 내내 휴식을 취할 수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저 인간이 져준다고?’
기대하지 않던 보답이었다.
업계 용어로 ‘잡Job’.
경기나 여타 행위를 통해 상대를 띄우는 일. 헌터는 업계의 그 누구보다도 그것을 싫어했다.
녀석은 왕 중의 왕이라는 자신의 이미지를 처절할 정도로 지키고 싶어 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런 양반이?
져준다고?
나에게?
그렇다면 설마?
순간 정말로 당황했던 나는 어안이 벙벙해져 헌터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의문을 말하려던 순간, 바트 맥센이 먼저 선수를 쳤다.
“그 말인즉슨, 신에게 월드 타이틀을 넘겨주고 싶다는 건가?”
“……그건 아닙니다.”
“그렇지?”
“예, 각본 상으로 협의가 안 된 이야기니까 시청자들이 많이 당황할 겁니다. 그러니 논-타이틀 매치로 부킹하는 게 어떻습니까?”
“그렇다면 벨트는?”
“…….”
“어쩔 셈인가.”
핵심을 꿰뚫는 바트의 질문에 헌터는 곤란한 듯 입을 다물었다.
머뭇거리던 그가 이내 자신의 왼쪽 허벅지 위에 손을 올렸다.
“……좀 쉬면 나아질 것 같았는데, 아무래도 힘들 것 같습니다.”
“수술이 불가피하다는 건가.”
“예, 죄송합니다. 보스.”
“아니야. 자네는 지금까지 챔피언으로서 충분히 잘해줬어.”
쓰게 웃은 바트는 이윽고 어이가 없다는 듯 날 돌아보았다.
“하지만 자네가 잡을 해주고 가는 게 이 친구일 줄은 몰랐군.”
“귀국 후에 바로 수술대 위에 오르고 싶으니 어쩔 수 없죠.”
다들 충격에 휩싸인 얼굴이었다.
그만큼, 헌터가 남에게 잡을 해준다는 것은 무척 드문 일이었다.
그러므로 이 각본이 성사된다면 내가 미드 카더에서 위로 더 올라가는데 큰 힘을 줄 것이었다.
하지만 중요한 게 있다.
“방식은 어떻게 하죠?”
나는 티파니 맥센과 똑같은 이야기를 하며 잠시 뜸을 들였다.
심장이 쿵쿵, 뛰었다.
단순히 경기에서 이기는 것뿐인데, 그 상대가 헌터라는 사실이 내 마음을 이처럼 만들었다.
“롤 업입니까? 아니면 반칙?”
“물론, 평소였다면 그 둘 중 하나의 방식을 썼겠지. 네 위상과 내 위상을 비교해보자면 내가 ‘클린’하게 패하는 건 말도 안 돼.”
아니, 당신은 상대가 누구라도 클린하게 패배하지 않잖수.
그렇게 이미지를 보호하며 자기 커리어를 애지중지하는 주제에.
“하지만 상황이 좀 달라.”
“……그래?”
“나는 부상으로 빠진다. 그렇기 때문에 마지막 잡은 클린하게 간다. 그게 이 업계의 공식이지.”
“맞는 말이군요.”
부상을 당해 쇼에서 빠진다면 돌아왔을 때 마지막 경기를 졌다는 기억은 희미해졌다.
즉, 헌터의 위상은 유지된다는 이야기였다. 그러므로 내가 클린하게 이기는 게 정석이었다.
내가 슬쩍 웃자 고개를 끄덕인 헌터는 바트를 돌아보았다.
“회장님, 저는 마지막으로 이 녀석을 띄워준 뒤 가고 싶습니다.”
“자세히 말해보게.”
“윌과의 경기가 끝난 뒤 제가 등장해서 바로 경기를 가지겠습니다. 거기에서 패배하는 거죠.”
“연속한 경기에서 클린하게 져주겠다고? 아무리 그래도 너무 띄워주는 것 아닌가 싶은데.”
“저는 괜찮다고 생각합니다.”
헌터는 단호하게 대답했다.
살짝 떠봤을 뿐이었는지 피식 웃음 바트는 곧장 결정을 내렸다.
“그럼 그렇게 하지.”
……아무래도 회귀 당시 떠올렸던 생각을 다시 한 번 해야 할 것 같았다.
이거 실화냐?
* * *
회의는 그렇게 끝났다.
나는 윌에게서 승리한 뒤, 지친 상태에서 헌터에게서 승리한다는 초유의 각본을 제시 받았다.
‘거절할 이유는 없지.’
오히려 그동안의 고생을 보답 받는 메가톤급 슈퍼 푸시였다.
그래서 좀 어안이 벙벙했다.
헌터에게 승리하고, 유럽 투어에서 확실하게 결과를 낸 보답……이기는 했지만 좀 뜬금없었다.
멍하니 남들을 따라 밖으로 나온 나를 불러 세운 이가 있었다.
바로 헌터였다.
“잠깐 이야기 좀 할까.”
“어, 돈 드릴까요?”
“뭐?”
“아니, 잡 해주는 대가라던가.”
“재수 없는 자식.”
가볍게 혀를 찬 그가 몸을 돌렸다. 나는 절뚝거리는 헌터와 함께 경기장의 관객석으로 향했다.
아직 설치가 진행 중인 가운데, 그는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콜라가 마시고 싶군.”
“……펍시?”
“그건 구정물이고.”
나와는 정반대군.
하지만 하나는 비슷하다.
“마신 지 오래된 모양이로군요.”
“15년 정도 됐지.”
프로의식이었다.
거기에서 의문이 걷혔다.
“분했겠군요.”
“뭐?”
“내가 당신의 버닝콩을 빼앗고 쇼를 혼자 힘으로 이끄는 게.”
“…….”
“그래서 수술을 결심한 거고.”
“……한 가지 착각하고 있군.”
“뭐죠?”
“나의 버닝콩이 아니야. 바트 맥센과 그 가족의 버닝콩이지.”
“그건 그러네요.”
“그리고 그 답으로는 내가 잡을 해주기로 한 이유는 되지 못해.”
“그럼 그 이유가 뭔데요?”
“널 올려 보내기 위해서다.”
헌터는 진지한 눈을 해보였다.
“버닝콩의 메인 이벤터는 언제나 바트 맥센과 싸워야 하거든.”
“……그렇겠죠.”
“카인은 그걸 못해서 내려갔고, 부커-리 역시 마찬가지지. 그렉 하트는 늙었고, 고집도 강해. 그나마 남은 건 실버백 정도인데.”
“과연 내가 그걸 할 수 있을까, 그걸 보고 싶은 모양이군요.”
“그래. 나는 메인 이벤터가 되기 위해 똥물을 뒤집어쓰고 시체와 관계를 맺는 척도 했었지.”
“좀 역겹군요.”
“하지만 그게 메인 이벤터로 올라간다는 거다. 바트는 온갖 방식으로 네 재능을 시험할 거야.”
“……확실히, 바트는 시청률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하는 남자죠.”
“그래, 이 쇼는 바트의 왕국이니까. 계속 시청률을 끌어 모으고, 선수들을 사 모으고, 돈을 벌고, 그렇게 업계를 지배해 나가는 거지.”
“멋지네요.”
“멋져? 너나 나나 이곳에서는 도구에 불과해. 그걸 깨달은 순간에도 그렇게 오만할 수 있을까?”
“너무 부정적인데요.”
“현실이지.”
“그런 도구에서 벗어나는 방법이 한 가지 있지 않습니까?”
“뭐지?”
“아이콘이 되는 겁니다.”
나는 천장을 가리켰다.
헌터의 눈이 크게 뜨였다.
“락콜드, 캡틴 로건, 그 두 사람은 아예 미국 문화의 상징적인 존재가 되어 이 회사를 넘어섰죠.”
“……바트도 그걸 알고 있지. 그래서 앞으로 그런 선수는 나오지 않게 할 생각인 것 같고.”
“의도적으로 푸시를 중지해서?”
“아마도.”
“하지만 그거 아십니까? 왕 위에는 시청자가 있는 법이죠.”
“……아이콘은 나올 것이다?”
“물론입니다.”
“그게 너고?”
“글쎄요.”
“오만하려면 끝까지 해라.”
아니, 나는 미래의 일을 알고 있어서 이렇게 대답한 것뿐인데.
잠깐 당황하고 있자니, 한숨을 내쉰 헌터는 손가락 끝을 뭔가 아쉬운 듯 까딱거렸다.
“원래대로라면 맥주라도 한잔하면서 할 이야기인데.”
“못 마시잖아요.”
“이해하는군.”
“꿈이 아직 남아있으니까.”
“맞아.”
헌터의 보디빌더 같은 등 근육이 크게 부풀어 올랐다.
“남자는 꿈으로 살아가지.”
“이런 점에서는 통하는군요.”
“그래.”
고개를 끄덕인 그는 긴 한숨과 함께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러더니 내 어깨에 턱, 손을 올리고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티파니를 잘 부탁한다.”
“…….”
그건 헌터가 나름대로 나를 최대한 인정하려고 한 말이겠지.
하지만 오해였다.
아마도.
* * *
헌터는 GCW에 찾아와 했던 제안이 무시당한 뒤로부터 지금까지 계속해서 나를 적대시해왔다.
그리고 나는 그것을 어쩔 수 없는 부작용이라고 생각해 녀석과의 협력 자체를 아예 포기해버렸다.
헌터는 내가 무슨 수를 쓰더라도 회유할 수 없는 인간이었다.
‘같은 야망을 가지고 있거든.’
무슨 수를 써서라도 반드시 정점에 서고 말겠다는 명확한 목표.
이 업계의 최고가 되어 영원히 지지 않을 역사를 만들고 싶다.
헌터와 나는 그 점에서 같았다.
그것만 바라보고 쭉 걸어왔다.
먹고 싶은 걸 참고, 몸을 만들며 피로를 견디고 계속 일해왔다.
회사 내에서 정치를 하며 적을 쳐내고, 아군을 만들어 쇼에서 자신의 역할을 점점 키워나갔다.
그렇게 고생해가며 오른 메인 이벤터의 자리였다. 헌터는 점점 나를 눈엣가시처럼 여겼겠지.
그렇기에, 솔직하게 말하자면 이건 전혀 예상하지 못한 사태였다.
‘이렇게 빠른 시기에 헌터로부터 잡을 받게 될 줄이야.’
내가 지금까지 메인에서 받았던 푸시 중 가장 강력한 푸시였다.
월드 챔피언으로부터 클린하게 핀을 따낸다. 물론 이후 녀석은 부상으로 빠지게 될 예정이지만.
지금 하고 있는 이 경기가 끝난다면, 나는 사람들의 기억 속에 확실한 강자로 매김 될 터였다.
그 결과가 차근차근 다가왔다.
경기의 종반부.
스페인의 관객들이 열광하는 가운데 나와 헌터의 챈트가 번갈아 경기장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SIN! SIN! SIN! SIN! SIN!]
[Triple H! Triple H! Triple H!]
허나 뜨겁게 타오르고 있는 분위기와는 반대로 상황은 심각했다.
3주 동안 체력적으로 한계를 오락가락했던 나와, 심각한 부상을 딛고 나선 헌터의 경기였다.
나는 바닥에 쓰러져 숨을 몰아쉬는 헌터의 상태를 확인했다.
“크윽…….”
“괜찮습니까?”
“걱정, 마. 진행해.”
숨을 헐떡거리면서도 헌터는 각본대로 내 팔을 쳐내고 일어섰다.
괜한 걱정이었던 것 같다.
다리가 박살이 나더라도 할 일은 끝낸다. 그런 면에 있어서 헌터는 분명 멋진 프로레슬러였다.
유럽 투어의 마지막 버닝콩에서 이 녀석에게 승리할 수 있다는 것은 분명히 엄청난 이득이었다.
나와 헌터의 이름이 번갈아 불리는 것만으로도 차고 넘쳤다.
“자, 덤벼! 어서!”
헌터는 부상을 입은 허벅지를 손으로 잡아 억지로 들어올렸다.
눈이 반쯤 맛이 갔다.
나 역시도 한계였다.
그렇기에 찾아온 경기의 마지막 순간은 정말 달콤하게 느껴졌다.
쩌억-!!
날카로운 타격음과 함께 내 무릎이 헌터의 안면을 강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