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
유럽 투어는 그렇게 끝났다.
전세기를 타고 미국으로 돌아온 나는 완벽하게 지친 상태였다.
뉴욕에 위치한 J.F.K 공항.
유럽 투어에서 나는 거의 혼자만의 힘으로 버닝콩을 이끌었다.
그 결과.
WWF의 계약서를 받은 건 최종적으로 윌 오 스피디가 되었다.
그는 앞으로 산하 단체인 GCW에서 활동을 시작할 예정이었다.
나는 트리플H라는 거물을 클린하게 잡아냈고, 모두가 경악할 만한 결과를 내고 여기 돌아왔다.
힘들었지만 기분은 좋았다.
멋진 여행을 끝마친 이후와 마찬가지였다. 일단은 근처 호텔에서 잠이나 실컷 자고 싶었지만.
또 이동이 기다리고 있었다.
공항 로비.
바깥이 더워 피신한 나는 선글라스를 낀 채 공항을 오가는 인파 속에 숨어 있었다.
현재 버닝콩, 랙다운 팀이 각자 전용기에서 짐을 내려 차에 싣는 작업을 하는 중이었다.
사람들은 근육질의 동양인을 곁눈질로 흘끔거렸으나 다행히 내 정체에 대해서는 모르는 듯했다.
‘연락은 준댔으니.’
좀 쉬자고 생각하며 핸드폰을 꺼내든 나는 부재중 전화가 엄청나게 많이 와있는 것을 발견했다.
러셀, 러셀, 러셀, 바쿠, 바쿠, 러셀, 바쿠, 할리, 할리, 바쿠.
“오튼, 오튼, 플레어, 부커, 바티, 부커, 그렉, 러셀……?”
이게 다 무슨 일이래.
그렇게 생각하며 일단 문자 메시지를 확인하려던 순간이었다.
“시인~.”
누군가 내게로 다가왔다.
시나였다.
녀석은 민소매 티셔츠를 입었고 자신의 우락부락한 근육으로 사람들의 어그로를 잔뜩 끌어댔다.
왠지 불안해진 나는 선글라스를 밀어 올리며 주변을 확인했다.
다들 수군거렸다.
시나는 몰랐지만.
“여기 있었네! 한참 찾았어!”
“시나, 남들이 알아보니까 밖에서는 본명으로 부르라고 했잖아.”
“오케이, 중!”
“준이라고. 준. July June할 때의 그 June 말이야.”
“쥰?”
“……말을 말자.”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서, 무슨 일이야?”
“아니, 인사하려고 들렀지.”
“인사? 아…….”
랙다운 팀의 출발이 끝난 모양이었다. 그들은 북쪽으로 가는 우리와 정반대로 밑으로 내려갔다.
“같이 일할 수 있어서 좋았어.”
“그래, 몸조심해라.”
“하하, 너도 랙다운으로 오면 좋을 텐데. 여기 선배들도 그렇고 다 정말로 나한테 잘해주거든.”
“…….”
아마 그건 요즘 티파니 맥센께서 꾸준히 감시하기 때문이 아닐까.
어쨌든, 좋아 보이니 됐다.
“11월에 보자고.”
“11월?”
“그래, 그때 열리는 페이퍼뷰가 바로 ‘링 서바이벌’이잖아.”
“아, 그렇지. 그런데 그때…….”
“너는 U.S. 챔피언일 테고.”
“너, 는?”
“글쎄.”
나는 싱긋 웃었다.
잠시 의아해하던 시나의 얼굴이 내 말을 이해하고는 밝아졌다.
링 서바이벌.
버닝콩과 랙다운. 두 브랜드가 맞붙는 4대 페이퍼뷰 중 하나.
챔피언은 챔피언끼리.
벨트가 없는 선수들도 각자 팀을 꾸리거나 급이 맞는 선수를 찾아 맞붙는 초대형 이벤트였다.
미국의 명절인 추수감사절을 전후로 개최되기에 그 관객 수는 보통 10만을 훌쩍 넘길 정도.
거기에 ‘인터컨티넨탈 챔피언’으로 나가는 게 지금 내 목표였다.
그래야만 랙다운의 2선 챔피언이자 U.S. 벨트의 소유자인 숀 시나와 경기를 할 수 있을 테니까.
* * *
하지만 그전에 할 일이 많았다.
‘링 서바이벌’은 11월의 페이퍼뷰였다. 그리고 지금은 9월 말.
9월의 페이퍼뷰는 유럽 투어에서 대립을 진행하지 못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취소되었다.
그렇기에 우리는 당장 4주 동안 쇼를 진행한 뒤, 헌터를 대신할 월드 챔피언을 만들어야 했다.
뿐만이 아니라 각 챔피언의 변동 등과 각본의 정리까지, 정말 할 이야기가 너무나도 많았다.
그런 와중에서 회의실로 나를 부른 바트 맥센은 모두가 보는 가운데 다음과 같이 말했다.
“태그 팀 벨트를 내려놓게.”
“……예?”
“그리고 인터컨티넨탈 챔피언으로서 링 서바이벌에 참가해.”
“놀랐네요.”
“부커에게는 미리 말해뒀어.”
“벨트를 넘겨받는 건…….”
“레볼루션이지. 닉과 바티스타.”
그럴 거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태그 팀 벨트를 빼앗김으로써 인터컨티넨탈 벨트를 두고 벌이는 대립이 시작되는 거야.”
“음, 어떻게요?”
“자네가 아이디어를 내보게.”
“경기의 중요한 부분에서 방해하기 위해 링에 난입한 오튼이 제 바지라도 내리는 거죠.”
“푸하하! 탁월하군!”
아, 썅. 괜히 말했다.
대강 말했던 나는 폭소를 터뜨리는 바트를 보고 당황했다.
그러고 보니 그는 이런 말초적인 유머를 좋아했다. 슬랩스틱이나 방구, 똥, 오줌 같은 개그.
“그래서, 자네 거시기는 큰가?”
“……뭐라고요?”
“거시기가 작은 기믹이라 손가락으로 가리고 뛰어다니는 거면 엄청나게 재밌을 것 같군!”
“경험담이신 거 같군요.”
“푸하하! 그럴 리가! 내 바지 안의 샷건은 정말 명품인데!”
“제 아폴로 11호도 그런데요.”
“흐음, 이거 확인할 수도 없고.”
“제가 우습게 보여서 뭐가 좋을 타이밍인가 싶기는 한데요.”
“제, 제 생각도 그렇습니다.”
각본팀장이 끼어들었다.
“여기서는 바지를 내리는 게 아니라 헌터를 따르는 오튼이 굉장히 잔혹하게 구는 게 어떨까요.”
“그건 경기가 끝난 다음으로 해도 괜찮지 않나? 챔피언이 된 닉과 바티스타까지도 참가해서.”
“경기 중간에 개그 씬을 연출했다가 잔혹하게 바꾸면 사람들이 적응하지 못할 것 같습니다.”
백번 옳은 말이다.
하지만 옳은 말도 자기 마음에 들지 않으면 넘기는 게 바트였다.
‘이거 좀 긴장이 되는데.’
헌터의 말이 문득 떠올랐다.
메인 이벤터가 되려는 선수는 반드시 바트와 싸워야만 한다고.
알고 있는 사실이었지만 역시 직접 겪게 되자 뭔가 신기했다.
‘헌터가 기대한 것처럼 나도 나와 바트가 직접 부딪혔을 때 나올 시너지가 궁금하기는 했거든.’
하지만 회장님은 딱히 자신의 의견을 관철하지 않고 물러났다.
“뭐, 좋아. 그렇게 진행하지. 신, 나중에 각본 체크에도 참여하게.”
“예, 바트.”
그렇게 ‘업무 지시’가 내려왔다.
그 뒤로 회의 주제가 다음으로 넘어갈 기미가 보였고, 나는 눈치껏 사무실에서 빠져나왔다.
일단 1주차에 태그 팀 챔피언 경기를 가져 레볼루션의 플레어와 바티스타에게 벨트를 빼앗긴다.
‘그리고 그 원인이 오튼이 되어서 대립을 시작하게 되는 건가.’
나쁘지는 않았다.
하지만 문제는 오튼이었다.
녀석과의 대립을 멋지게 성공시키기 위해서는 조건이 필요했다.
‘그걸 좀 이야기해둬야겠어.’
그렇게 생각한 나는 뒤늦게 핸드폰에 대한 사실을 기억해냈다.
그러고 보니 다들 나한테 수십 통씩 부재중 전화를 걸었지.
바쁘고, 피곤해서 잊었다.
‘일단 그 첫 번째가 오튼인가.’
나는 곧장 전화를 걸었다.
뚜르르, 뚜르르르르…….
[어, 어. 신이냐?]
“지금 어디야?”
[지금 어디냐니! 당연히 경기장에 있지! 너야말로 어디야? 전화도 안 받고 이 나쁜 자식……!]
“잘 됐네. 주차장으로 와.”
[다들 네가 헌터를 이긴 걸로 난리도 아니라고! 일단 본인한테서 듣긴 했는데! ……아, 닉하고 바티도 보고 싶다는데 같이 가도 돼?]
“아니.”
단호하게 이야기한 나는 전화를 끊고 곧장 주차장으로 움직였다.
‘대충 알겠군.’
사람들이 왜 나에게 전화를 했는지 말이다. 문득 버스 안에서 졸면서 들었던 라디오가 떠올랐다.
뉴스레터의 기자들이 유럽 투어를 정리한 특집 방송을 내보냈다.
그 대부분이 나에 대한 칭찬, 그리고 헌터가 마지막에 잡을 해준 이유를 예상하는 내용이었다.
[신이 메인 이벤터로 올라가는 첫 걸음이라는 건가. 근데 생각보다 너무 빨리 올라가는데?]
[그럴 능력이 있는 친구이긴 하지. 이야기를 들어보니 회사 내의 반발도 생각보다 덜 하다는군.]
[네 ‘정보원’은 영 못미더운데.]
[그래도 아예 내부 정보가 아니라 그냥 회사 내부에 떠도는 분위기 같은 거라서 믿을 만하지.]
[그건 그런가. 대체 무슨 이유로 반발이 없다는 건데? 메인 쇼에 데뷔한 지 이제 1년차인 신입이 벌써 메인 이벤터로 올라가는데.]
[어, 그 건방진 랜스 오튼마저도 신의 팬이라고 해서 말이야.]
[……역시 네 정보원은 못 믿겠어. 어떻게 그 양아치가 그래?]
[아니, 나도 못 미더워서 되물어봤지. 그런데 평소 다른 선수들에게는 쓰레기처럼 굴던 놈이 신 앞에서는 얌전한 양이라나.]
나는 그 이유를 안다.
‘오튼이 나는 믿어주거든.’
비슷한 처지에 있는 신인이기 때문일까. 녀석은 내 앞에서만큼은 어깨에 힘을 풀고 행동했다.
하지만 상황은 정반대였다.
녀석은 아직도 ‘안 좋은 의미’에서 야유를 받고 있는 악역이었다.
반대로 나는 팬들이 ‘좋은 의미’에서 환호를 보내는 선역이고.
오튼은 나를 보고 배워 그런 반응을 어떻게든 바꾸려고 했으나 아직까지는 큰 무리가 따랐다.
거기에 대해 생각하며 주차장에 도착한 나는 얼마 지나지 않아 달려 나오는 오튼을 발견했다.
“신!”
달려온 녀석은 이내 곧장 내 어깨를 잡고 끌어안으려고 들었다.
그것을 슬그머니 뒤로 빠져 피한 나는 주변을 확인하며 물었다.
“혼자 온 거 맞지?”
“그래, 야야. 바이러스 다 나았어. 괜찮으니까 좀 안아보자.”
“……이거 왜 이래.”
“오랜만에 보니 반가워서 그렇지. 유럽 투어는 아주 잘 봤어.”
녀석이 하도 달라붙어 나는 가볍게 ‘브로 피스트’를 해주었다.
환하게 웃은 오튼은 이내 밖으로 나가는 내 옆을 따라왔다.
“네가 헌터를 이길 줄은 몰랐어. 그거 대체 어떻게 된 거야?”
“그쪽에서 말 안 해주든?”
“음, 다리가 다쳤다는 말만 하고는 입을 다물어서. 닉은 뭔가 이해한 것 같았는데 나는 영…….”
“내가 유럽 투어 동안에 도와줬으니까 그 은혜를 갚은 셈이지.”
나는 복잡한 헌터의 심리를 설명하는 대신 짧게 함축했다.
“아~ 그거 역시 네가 도와준 거구나. 헌터가 경기에 영 나서지를 않아서 괜찮은 건가 싶었는데.”
“아마 반년 이상은 빠져야 할 거야. 근육이 심하게 찢어져서 아마 제대로 걷지도 못할걸.”
“우, 우리는 그럼 어떻게 되지?”
“너희?”
“레볼루션 말이야.”
“너는 어떻게 하고 싶은데?”
“나? 어, 음. 글쎄.”
“내가 스스로 생각하라고 했지.”
“그, 그랬었지.”
“그게 얼마나 허황되었던 간에 안 비웃을 테니까 말해봐.”
“……레볼루션은 계속 유지되었으면 좋겠어. 솔직히 아직 내가 솔로로 나설 때는 아닌 것 같아서.”
자신감이 영 없는 녀석이다.
“네가 지금 인터컨티넨탈 챔피언이잖아. 좀 더 자신을 가져.”
“그거 너한테 넘어간다며.”
“그럼 그걸 기회로 삼아야지.”
“어떻게?”
“너 아픈 건 잘 참는 편이냐?”
“남들만큼은……?”
“좋아. 오튼. 이건 내 아이디어인데. ……일단 커피부터 시키자.”
근처 프랜차이즈 카페에 들어온 다음, 나는 일단 에스프레소를 시켰다.
오튼 역시 나를 따라하려는 것인지 에스프레소를 주문했다.
“내가 살게.”
“그럼 잘 마시지.”
오튼 녀석은 나보다 연봉도 훨씬 많이 받아서 딱히 거절하지 않고 호의를 받아들였다.
거기다가 이번 각본은 녀석의 고민을 단숨에 날려줄 테니까.
그에 대한 대가라고 생각한다면 오히려 엄청 싼 셈이었다.
“그래서 신, 무슨 이야기야?”
“일단 내가 이번 달에 너와 대립해서 인터컨티넨탈 챔피언을 넘겨받게 되는 건 알고 있지?”
“알고 있어. 축하해.”
“…….”
시나도 그렇고 이 녀석도 그렇고. 왜 다들 이리도 순진한지.
“그 대립에 관해 이야기하고 싶어서 부른 거야. 이번에 네 문제를 해결할 수 있으면 좋겠거든.”
“내 문제?”
“팬들에게서 인정받지 못하는 거. 난 그게 큰 문제라고 봐.”
“나도 그렇게 생각해. 이 이유가 대체 뭐일까? 왜 다들 날 싫어하지? 게다가 그게 악역으로서 좋은 반응이 아니라니 대체…….”
“네가 금수저라 그래.”
“금수저?”
“그래, 어디 한번 네 커리어를 처음부터 상세하게 짚어볼까?”
레볼루션의 일원으로 데뷔.
3대째 프로레슬러인 집안 출신으로 잘생긴 외모와 큰 키로 처음부터 어마어마한 푸시를 받았다.
덕분에 WWF의 각종 베테랑들과의 경기에서 승리하며 ‘레전드 킬러’라는 별명을 가지게 되었다.
“이게 네가 관객들에게 나쁜 의미로 욕을 먹는 이유 첫 번째.”
“두, 두 번째도 있어?”
“물론이지.”
나는 환하게 웃었다.
경기의 부킹은 최대한 단순하게. 위험한 스팟도 대부분 선배들이 하고 이미지를 보호받는다.
“이게 두 번째.”
“……세 번째는?”
“그냥 금수저라서.”
“왜…….”
“금수저다운 부킹만 받잖아. 처음부터 중요 각본을 받고, 부상을 우려해 위험한 짓은 안하고.”
나는 자그마한 에스프레소 잔을 손에 쥔 상태에서 이야기했다.
사람들은 바보가 아니었다.
대부분의 대중은 프로레슬링을 각본이 존재하는 쇼로서 즐겼다.
하지만 그 각본 밖에서 이질감을 느끼게 되면, 그 혐오감을 가감 없이 드러내고는 했다.
“사람들은 너를 ‘하는 건 없이 받아먹을 줄만 아는 멍청이’라고 생각하는 거야. 악역…… 아니, 선수로서 좋은 반응은 결코 아니지.”
각본을 벗어난 나쁜 야유였다.
“그걸…… 어떻게 하지?”
“그래서 조금 전에 아픈 거 잘 참느냐고 물어봤던 거야.”
“……뭘, 하려고?”
“압정 같은 거.”
내 말을 들은 오튼의 안색은 0.5초 만에 새하얗게 질려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