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
“신, 이쪽으로…….”
“괜찮아요?”
사람들의 말이 이명처럼 들렸다.
“그래, 어, 괜찮아.”
어떻게든 대답했다.
경기가 끝난 뒤, 탈진해 쓰러진 나는 두 사람이 양쪽에서 받쳐줘 겨우 백스테이지로 돌아왔다.
경기를 본 선수들이 복도로 나와 우리에게 박수를 보내주었다.
“고생 많았다!”
“정말 멋진 경기였다, 신!”
“오튼, 좀 하던데. 자식.”
“으, 이 등에 박힌 압정들 좀 봐라. 빨리 들어가서 치료해.”
나쁘지 않은 기분이다.
‘누가 누군지는 잘 모르겠지만.’
너무 힘들어서 그런 것일까. 도저히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슬슬 통증도 올라왔고.
하지만 다들 이해해주었다. 나는 반쯤 정신을 놓은 채 치료 준비를 끝마친 락커룸 안으로 들어섰다.
기다리고 있던 팀 닥터가 내 얼굴을 똑바로 쥐며 물었다.
“엉덩이에 뭐 박혔어요?”
나는 고개를 내저었다.
뭔가 뉘앙스가 이상한 말이라는 생각을 하자니 뒤로 돌아선 닥터가 치료 도구들을 준비했다.
“의자에 앉아요. 일단 철심부터 빼고 소독하고 치료합시다.”
아픔을 각오한 나는 의자에 앉아 치료 과정을 견뎌냈다.
“좀 아파요~.”
좀이 아니었다.
“끄흡.”
나는 이를 질끈 깨물었다.
압정을 빼내고 소독을 한 뒤, 연고를 바르고 테이프를 붙였다.
그 고통을 애써 견뎌내고 있자니 누군가의 시선이 느껴졌다.
티파니 맥센.
“기념사진이라도 찍어둘까요?”
“……됐어.”
재미없는 농담이었다.
안색이 한껏 창백해진 상태로 하는 농담이라서 웃기기보다는 어쩐지 좀 안쓰러웠고 말이다.
“축하해요. 챔피언.”
“고마워.”
“내가 무리하지 말라고 했더니 결코 하네요.”
“안 그러면 모두에게 챔피언으로 인정받을 수 없을 테니까.”
치료는 계속해서 이어졌다.
거의 등 전체에 테이프를 붙인 뒤에는 이마에 찢어진 상처를 봉합하고 그 위에 거즈를 붙였다.
닥터는 익숙한 일이라는 듯 내게 주의사항을 말해주었다.
“당분간 엎드려서 자고, 진통제를 줄 테니까 많이 아프다 싶으면 먹어요.”
“옙.”
“정 아파서 잠이 안 온다 싶으면 보드카라도 마셔서 버텨요.”
“……의사가 그래도 됩니까?”
“아니, 여기는 별의별 미친놈이 다 있다 보니까 적응한 거야.”
덤덤하게 말하는 닥터.
어이가 없어 피식 웃은 뒤, 옆에서 이쪽과 마찬가지로 치료를 끝마친 오튼을 향해서 다가갔다.
“오튼.”
“……고생했다.”
“너도 고생 많았어.”
“하하, 네가 말한 대로 정말 죽을 것처럼 아프지는 않던걸?”
“그렇지? 아마 며칠 동안은 씻지도 못하고 점점 통증이 올라와서 계속 아플 테지만 말이야.”
“…….”
“그래도 오늘 경기는 WWF의 역사에 남게 될 테지.”
“그래, 나도 느꼈어.”
오튼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가 지금껏 어떤 잘못을 해왔는지 좀 알 것 같은 기분이야.”
“그거 다행이네.”
오튼은 처음으로 제대로 된 반응을 받고는 감동한 모습이었다.
확실히 이런 열광적인 반응은 선수에게 그 무엇보다 확실한 동기부여가 되었다.
관객석에 앉아있는 수만.
더 나아가 수백만 시청자들.
그들의 반응은 마약 같은 중독성이 있다. 오튼은 이제야 그 맛을 맛보게 된 것이다.
나와 가볍게 악수를 나눈 오튼은 옆을 돌아보며 싱긋 웃었다.
“그럼, 나중에 보자고.”
눈치껏 빠져주는 녀석.
의료팀도 치료가 끝나자 대충 상황을 알았는지 밖으로 나갔다.
그리하여 넓은 락커룸에는 나와 티파니, 둘만 남게 되었다.
아까는 또 잘만 이야기하더니 사람들이 사라지자 시선을 돌린 채 딴청을 피우는 티파니.
황금빛 머리칼을 귀 옆으로 넘기며 시치미를 떼는 모습이, 솔직히 말해서 제법, 아니, 상당히 귀여웠다.
나는 먼저 말을 걸었다.
“왜 그래? 타이거.”
“……뭐라고요?”
‘타이거’라는 애칭을 들은 그녀의 눈이 잠시 휘둥그레졌다.
“조지아에는 언제 돌아가?”
“안 그래도 밤비행기라서 공항에 가봐야 해요. ……사실 일을 다 마치지 않고서 여기 온 거라.”
“불량 CEO로군.”
“그쪽이 또 무모한 짓을 할 것 같아서 이런 거잖아요? 사람 걱정이나 시키지 말던가.”
“그래서 어땠어?”
“뭐, 가요.”
슬쩍 다가서자 벽에 붙어있던 티파니는 시선을 다시 피했다.
하얀 뺨이 붉은색으로 물들었다.
“경기 말이야.”
“그런 경기 보고 싶지 않아요. 정말 목숨 내놓고 하는 거니까.”
“그래도 이걸 좋아하는 사람이 있으니까 크게 도움이 됐겠지.”
“티켓 판매량이나 시청률이나 뭐 그런 거요? 조금 전에는 자기를 위해 일한다고 했으면서?”
“내 커리어를 말하는 건데.”
“……생각보다 이기적이었네.”
“싫은 건 아니잖아?”
“네, 오히려 좋아요. 이 회사의 부속품이라고 말하는 것보다는.”
“그때 많이 화가 났나 봐?”
“당연하죠. 나는 그렇게 자기 몸을 불살라가며 일하다 사라지는 사람들을 많이 봐왔다고요.”
“어쩔 수 없잖아. 다들 여기에서 무언가를 남기고 싶어 하니까.”
“이해할 수가 없어요.”
“그러니까 전 세계에 방송이 나가는 쇼의 메인 이벤터인 거야.”
나는 쓰게 웃었다.
결국 어떤 분야에서 최상위권의 소수가 되려면 남들이 미쳤다고 여길 정도의 집념이 필요했다.
적당히 평범하게 사는 것도 물론 좋겠지. 그게 일반적인 삶이고 가장 좋은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이 업계에서 내 위에 누군가 서있는 꼴을 보기 싫은데 말이다.
내 말을 잠시 생각해보던 티파니는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메인 이벤터군요.”
“뭐, 아직 세미죠.”
나와 오튼의 경기처럼 말이다.
급으로 따지자면 하이미드 정도. 월드 챔피언에게는 안 되지만, 그 도전자들과는 격을 겨룰 만한.
말하자면 이제 시작이었다.
여기에서 멋진 대립을 통해 날 증명하고 더 위로 올라가야지.
하지만 그전에.
“일단 가면서 이야기할까요.”
“응? 어디를요?”
“여기까지 왔는데 별건 아니지만 저녁 식사라도 대접하죠.”
“경기 안 봐도 괜찮아요?”
“뭐, 봐둬야 하기는 한데 그쪽이 밤 비행기로 가야 한다면서요.”
“……언제 날 생각해줬대.”
새침하게 코웃음 치는 티파니.
하지만 그녀는 순순히 내 초대에 응했다.
* * *
티파니 맥센.
바트 맥센의 딸.
이 거대한 공룡 기업의 후계자.
훗날 트리플H와 결혼하며 전권을 틀어쥐는 미래의 회장님.
그런 그녀에 대한 내 인상은 전생과 현생이 판이하게 달랐다.
전생에는 그냥 적당히 몇 번 스쳐지나간 정도라 그 행적에 대한 희미한 기억밖에는 없었다.
‘그리고 회장이 된 이후로 아버지와 다름없는 행보를 보였지.’
그래서 사실 이번 생애에 처음 만났을 때 좀 의아하기는 했다.
왜냐면, 말이 통했으니까.
20대 초반의 대학생.
아직 어린 나이였지만 티파니는 이해력도 빠르고 비판에 대해서 냉정하게 생각할 줄 알았다.
거기다 이 회사를 가지겠다는, 그리하여 이 업계를 바꾸겠다는 야망도 보였다.
그래서 나는 그런 면모를 잘 이용하고자 했다.
하지만 함께 일을 해오며 느꼈던 그녀의 모습은 내 기억과 전혀 달랐다.
선수들의 의견을 존중하고 배울 줄 알았다. 전생에 느꼈던 것과는 달리, 반대로 아주 괜찮은 사람이었다.
그래서 좀 의아했다.
나이를 먹으면서 고집이 생겨 자기 아버지처럼 변한 것일까.
기업의 회장으로서는 그러는 편이 더 나으니 일부러 스탠스를 바꿔서 영리하게 군 것일까.
어느 쪽이든 지금 당장의 일은 아니니 무시하고 넘겼지만.
티파니를 점점 알게 되면서 둘 다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가 선수…… 그리고 백스테이지에 대한 애정이 있다는 건 분명했다.
누구든 어린 시절의 추억은 대부분 순수한 것이니까.
무엇이 그녀를 변하게 했을까.
무슨 일이 티파니 맥센을 바트의 버전 2로 만든 것일까.
잠시 생각해봤다.
그리고 이내, 나는 트리플H라는 이름을 머릿속에 떠올렸다.
둘은 성격 차이로 중간에 잠시 헤어졌지만 이내 다시 결합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결혼했다.
사실 그래서 티파니 맥센이 내게 보내는 호의에 답하지 않았던 것도 있었다.
저 둘의 결혼은 ‘WWF 유니버스’에도 무척 중요한 일이었다.
둘은 이후 ‘어쏘리티’라는 이름의 권력자 스테이블을 만들어 쇼의 메인 악역으로 활약했다.
내 입장에서는 아무래도 원래 역사의 흐름대로 둘이 결혼하도록 놔두는 편이 여러모로 좋겠다고 판단했는데.
……그런데 이렇게 되었다.
[옷 말해준 대로 입었죠?]
“걱정 마요.”
[시계는? 사서 보냈는데.]
“이, 거요.”
나는 당혹스러운 기분을 느끼며 눈앞의 상자를 내려다보았다.
그 위에는 ‘Patek phillppe’이라는 글과 로고가 새겨진 채였다.
티파니로부터의 ‘선물’이었다.
시계에 대해 잘 몰랐던 나는 적당히 명품에 대해 알 법한 플레어에게 이걸 보여주었다.
그는 잠시 기절했다.
파텍 필립.
전 세계 시계 브랜드 중 넘버원.
돈 주고도 구하기 힘든 시계.
“너무 비싼 걸 보낸 게……?”
[아, 음. 미안. 부담스러웠어요? 미안해요. 내가 이런 건 처음이라서 생각 없이……. 저, 부담되면 돌려보내셔도.]
“아뇨, 딱히 그런 건 아닌데.”
헌터와 만났던 게 아닌가?
관계가 슬쩍 한 단계 올라서자 갑자기 순진한 면모를 보이는 티파니의 모습이 좀 당황스러웠다.
“아, 아무튼. 호의는 감사히 받을게요. 배려해주신 거니까.”
[뭘요. 첫 메이저 방송 출연이니까 멋진 시계 정도는 차야죠.]
“꼭 본방 사수해요.”
[내가 안 하면 누가 하겠어요?]
나는 그렇게 티파니와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대화를 나누었다.
그래, 이렇게 되었다.
내가 티파니에게 마음이 끌리는 걸 딱히 부정하지 않기로 했다.
그녀는 매력적이었다.
이야기도 잘 통했고.
그렇게 한참 대화한 뒤, 전화를 끊자 옆 자리에 앉아 있던 플레어가 허허, 하고 웃었다.
“네가 우리 공주님을 채갈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는데.”
“어, 음. 죄송합니다.”
“아니, 사과를 바라는 게 아니라 그냥 신기해서. 헌터 그 녀석도 결국 공주님 마음은 얻지 못했으니까.”
“……둘이 사귀었던 게?”
“이런 느낌은 아니었지. 헌터는 쫓아다니고 티파니는 미묘하고. 둘이서 실제로 사귀었다는 걸 전혀 몰랐던 사람도 많았어.”
“음.”
“티파니가 처음으로 마음을 표현하는 게 자네 같은데.”
“그, 그런가요.”
“그러니 이런 시계를 선물한 거겠지. 담고 있던 마음이 흘러넘치니 이런 걸 보낸 거야.”
“그래서, 이게 얼만데요.”
“5만 달러.”
……미치겠군.
거의 업계 신인의 연봉 급이다. 이런 걸 그냥 사서 보내다니.
예쁘기는 한데.
이런 걸 받으면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가 없다고 해야 하나.
“귀여워해줘라.”
“……예?”
“만약 티파니가 그걸 바란다면 말이다. 멋진 여자에게는 그에 걸맞은 대우를 해줘야 하는 법이지.”
“허어.”
“내가 50년간 수많은 여자를 만나봐서 알아. 날 믿으라고.”
가볍게 웃는 플레어.
여기서 또 반박하기 어려운 은근한 압박이 있다. 나는 적당히 시선을 돌리며 한마디 덧붙였다.
“멋진 여자죠.”
그래, 멋진 여자다.
원래는 그냥 ‘사람’이었는데, 어느 순간 ‘여자’가 되었다.
나는 티파니를 그런 눈으로 보게 되었다.
이게 괜찮은 걸까 싶지만.
뭐, 일과 병행할 수만 있다면 어느 정도는 내 마음을 따라 움직이는 것도 나쁘지는 않겠지.
실제로 그렇게 되고 있고.
WWF 인터컨티넨탈 챔피언이 된 나는 수많은 언론의 주목을 받으며 유명세를 타기 시작했다.
사실, 당연한 일이다.
동양인 최초……는 사실 아니었지만, 어쨌든 근래에 들어서 나 같은 동양인 스타가 없었던 것이다.
시대는 앞으로도 점차 ‘다양성’을 추구하는 방향으로 흘러간다.
나는 그런 흐름에 맞춰 최초로 대형 방송에 출연하게 되었다.
닉 플레어, 그리고 랙다운에 소속된 선수인 빅 죠와 함께.
선데이 나이트 라이브.
통칭, SNL.
NBC 방송국에서 방영되는 초대형 코미디 프로그램이었다.
그리고 이번에 호스트로 출연하는 사람이 우리를 초대한 것이다.
더 팍.
태도 불량 시대에 락콜드와 함께 슈퍼스타로 활약한 선수.
가히 폭발적이었던 전성기 도중 영화계로 떠난, 그야말로 전설.
바로 그가 ‘WWF 선수가 함께 쇼에 출연한다면 재밌을 것이다.’라며 우리들을 부른 것이었다.
나, 닉 플레어, 빅 죠.
그리고 마지막으로 바트까지.
“아, 여기는 변기가 참 좋군! 우리 경기장은 매번 개판이어서 뚫느라 고생인데 말이야!”
화장실에 갔던 그가 돌아오자 나는 시계 상자를 품에 넣었다.
아무리 그래도 아직 장인어른(?)에게 대놓고 관계를 드러내기에는 좀 미묘했다.
“신, 어떤가. 긴장은 풀었나?”
“……예, 뭐.”
옆에서 플레어가 낄낄 웃었다.
생방송으로 이루어지는 SNL은 미리 촬영된 꽁트를 제외하면 모든 촬영이 실시간으로 이뤄졌다.
우리는 오늘 WWF에서 온 난입자로서 쇼에 출연할 예정이었다.
‘더 팍인가.’
그 만남이 좀 기대가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