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프로레슬링의 신-102화 (102/634)

102.

사람들이 우스갯소리로 하는 말 중에, ‘아이콘의 조건’이 있다.

WWF의 아이콘은 대머리다.

모두가 그랬다.

단 한 명도 빠짐없이.

캡틴 로건, 대머리.

락콜드, 대머리.

숀 시나, 대머리.

그리고 아이콘에 대한 탐욕을 드러낸 트리플H 역시 커리어 황혼기에는 대머리였다.

그리고 지금 우리가 만나야 할 남자 역시도 대머리가 되었다.

더 팍.

프로레슬링 업계에서 그가 갖는 영향력은 너무도 막강했다.

1990년대 중반에서 2000년대 초반까지라는 지극히 짧은 커리어에서 엄청난 활약을 했다.

나는 그가 자신의 시대를 만들기 전에 업계를 떠나 ‘아이콘’에는 이르지 못했다고 생각하지만, 그 인기와 위세는 앞서 언급한 세 명에 부족하지 않을 정도였다.

프로레슬링 명문가인 아너아이 패밀리 출신의 사모아 사나이.

그것이 더 팍이다.

아버지가 사모아인에 어머니가 흑인으로, 잘생긴 외모와 구릿빛 피부로 큰 인기를 끌었다.

그리고 영화계에 진출해 마초 캐릭터로서 엄청난 인기를 끄는 헐리우드 슈퍼스타가 되었다.

이후로도 WWF와의 관계는 원만해, 간간히 복귀해 경기를 뛰기도 한 멋진 남자.

나와 빈스, 플레어와 죠는 그를 습격하기 위해 여기에 왔다……는 게 오늘의 첫 번째 꽁트였다.

전생에는 나를 대신해 트리플H가 나왔고, 그는 전국에 자기 이름을 각인시킨 뒤 돌아갔다.

한마디로 나에게 또 멋진 기회가 주어진 셈이었다.

그리고 난 자신이 있었다.

메인 무대 뒤편의 복도.

우리가 대본대로 자리에 서자 바트가 한 번씩 돌아보았다.

“다들 준비됐지?”

“예, 바트.”

“준비됐습니다.”

“큐 넣겠습니다!”

촬영 감독이 소리쳤다.

생방송이니만큼 방송 카메라와 모니터링 스크린, 쇼의 시작을 카운트하는 숫자까지 함께였다.

저게 0으로 내려가면 방송이 시작되고 우리는 대사를 쳐야 한다.

그리고 그 방송이 전국으로 나갔다. 한 번의 실수도 용납되지 않는 것이었다.

그것을 이해시키기 위함인지 촬영 감독은 방송 시작이 2분 남은 시점에서 설명을 시작했다.

“대사를 잊었다 싶으면 적어서 표시해드릴 테니까 시간을 끌어주세요. 아무나 대사를 쳐서.”

“옙.”

“레슬러들이시니 그렇게 기대는 안 합니다. 그냥 적당히 사고 안 날 정도로만 해주세요.”

“우리 애들도 연기는 하는데.”

“이건 생방송이라고요.”

그 말을 들은 바트가 허,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그 왼쪽의 플레어와 뒤쪽의 죠 역시 그랬다.

왜냐고?

버닝콩은 1990년대부터 지금까지 내내 세 시간짜리 생방송이었으니까.

생방송에 있어서만큼은 이들 못지않게 익숙한 게 바로 우리였다.

솜씨를 보여줘야겠군.

그렇게 생각한 나는 함께 온 팀원들에게 힐끗 눈빛을 보냈다.

그들이 나에게 맞춰주겠다는 듯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리고 카운트가 0을 가리켰다.

붉은 숫자가 흰색 숫자로 변하며 다시금 카운트가 시작되었다.

5분.

우리는 그 안에 정해진 대사를 치고 오프닝으로 넘겨야 했다.

현장 감독이 신호를 보냈고, 다들 레슬러들을 못 믿겠다는 듯 긴장해 바라보는 것이 느껴졌다.

그리고 원래대로라면 가장 먼저 바트가 대사를 쳐야만 했다.

하지만 먼저 헛기침을 한 뒤 입을 연 것은 바로 나였다.

“바트, 여긴 대체 어디에요?”

경악하는 현장 감독.

하지만 바트는 어깨를 으쓱하며 내 대사를 그대로 받아주었다.

“그야 물론 SNL이지. 코미디 프로그램. 너희 같은 프로레슬러들과는 영 인연이 없는 곳이다.”

원래 대사는 우리가 누군지에 대해 소개하는 내용이었다.

단순했던 대사를 약간 꼬아서 바트가 멋지게 받아준 것이다.

“이런 코미디 쇼에 저희가 왜 나오는 거죠? 여기서 누구를 두들겨 패야만 하는 겁니까?”

“그건 아니고, 오늘의 호스트가 ‘더 팍’이라서 말이야. 그 친구를 응원해준다는 컨셉으로 우리가 오늘 여기에 온 거지.”

“더 팍. 그 친구 헐리우드로 가서 촬영하다 죽었다고 들었는데.”

“플레어, 팍은 죽지 않았어. 분명히 영화를 계속 찍고 있었지.”

“영화에서는 죽었다고요!”

“……죠, 영화에서 죽는다고 현실에서 죽는 게 아니야.”

“그, 그런 거였습니까?”

“몰랐나? 다스 베이거도 영화에서 죽었지만 실제로 살아있지.”

“저 아직 거기까지 안 봤다고요!”

“아, 루크가 베이거의 아들이라는 것도 모르나?”

“끄아아아악!!”

죠를 힘만 센 덩치로 묘사하는 전형적인 코미디였다. 죠는 돈을 주니 좋다면서 하고 있지만.

“어쨌든, 오늘 쇼는 큰 기회야. 나중에 자네들이 호스트가 될 수도 있지. 플레어, 신…….”

“저도요?”

“자네는, 모르겠네. 죠.”

죠가 시무룩해졌다.

“그런고로, 초대 받은 입장으로서 적당히 좋은 일만 하다 가자고. 뭐 물어보고 싶은 거 있나?”

죠가 손을 들었다.

이 양반, 굉장히 씬 스틸러다.

“뭔가. 죠.”

“팍을 패버려도 되나요?”

“아니.”

“뭐, 파이프 같은 걸로 후려치면 좋은 그림이 나올 텐데.”

이쯤에서 나는 원래의 대사를 쳤다.

“파이프 좀 뜯어올게요!”

“안 돼! 죠!”

바트가 말렸지만 빅 죠는 거구를 이끌고 화면 밖으로 나갔다.

거기에서 우리는 대충 한숨을 내쉬며 죠가 돌아올 때까지 기다리는 게 원래 각본이었다.

하지만 나는 대사를 쳐나갔다.

“봐요. 바트. 사람들은 싸움을 원한다고요. 당장 가서 더 팍을 패버리고 링을 장악하자고요.”

“안 된다니까. 신. 그리고 여기에는 링이란 게 없어.”

“뭔 놈의 세트장이 링도 없대요? 아, 대신 파이프는 있군.”

“여기요!”

빅 죠가 파이프를 내밀었다.

나는 그것을 받아서 가볍게 휘둘러보았다. 그러자니 바트가 탁! 채간 후 상황을 정리했다.

“어쨌든 오늘은 안 돼!”

“제기랄~.”

“죠, 플레어, 신. 셋 다 조용히 쇼만 보고 가는 거야. 알겠나?”

“예이, 예이. ……아, 바트.”

나는 촬영 시간이 20초가 남은 것을 확인하고는 말을 덧붙였다.

이건 예정에 없는, 말하자면 더 팍에게 보내는 메시지였다.

“뭔가. 신.”

“만약에 더 팍 쪽에서 싸우고 싶어 하면 어떻게 합니까?”

“그럴 리가.”

“그 양반도 선수였으니까 저와 한번 붙어보고 싶지 않을까요?”

그리고 0초가 되었다.

멀리서 빰빰~ 하며 SNL의 오프닝이 시작되는 소리가 들려왔다.

피식 웃은 나는 어안이 벙벙해 있는 현장 감독을 돌아보았다.

“미안합니다. 감독님. 생방송은 오랜만이라서 좀 긴장했네요.”

“그, 그게 무슨 소립니까!”

“재밌었으니 됐잖아요?”

“끄윽……. 확실히 그건 그렇지만…… 아, 아니! 대본은 죄다 무시해놓고 그게 대체 무슨 소립니까?!”

“불만이면 정식으로 항의하게. 우리는 자네가 선수들을 무시한 발언을 걸고서 넘어질 테니.”

바트의 말을 들은 현장 감독의 안색이 새파랗게 물들었다.

“아, 아니 그게 아니라…….”

프로레슬러라고 무시한 것 같은데, 정도가 있는 법이다. 심지어 여기 온 사람 중 하나는 한 기업의 회장이니까.

바트의 눈빛을 통해 그것을 깨달았는지 감독은 꼬리를 말았다.

피식 웃은 나와 일행은 곧바로 다음 장소를 향해서 이동했다.

두 번째 촬영은 바로 SNL 촬영장의 메인 무대에서 이루어졌다.

우리는 더 팍을 응원하는 것처럼 등장해 또 적당히 꽁트를 할 예정이었다.

‘프로레슬러가 싸움밖에 모르는 불한당으로 매체에 묘사되는 것이 과연 괜찮은 걸까 싶지만.’

뭐어, 코미디 쇼니까 괜찮겠지.

게다가 여기는 미국 대통령도 바보로 만든다는 SNL이었다.

메인 무대 앞에 도착하자 문을 지키고 있던 직원들이 물러섰다.

“신호에 맞춰 들어가시면 됩니다.”

오프닝 음악이 흘러나오며 팍이 무대 뒤에서 걸어 나오기 시작했다.

190이 넘는 키에 트리플H와 엇비슷한 몸집을 가진 근육질의 대머리 남자.

짙은 구릿빛 피부에 멋진 미소와 선한 인상을 가진 사나이.

그것이 더 팍이었다.

수많은 사람들의 환호와 함께 무대 앞으로 나온 그는 모두를 진정시키고 이야기를 시작했다.

[감사합니다, 여러분. 정말로 좋은 밤이군요. 이런 작은 곳에 나오는 건 처음이지만.]

그는 농담조로 자기가 스타임을 어필했다. 관객들이 큰 웃음을 흘렸고 거기에 팍이 대답했다.

[그래도 여러분 같은 관객은 그 어디에도 없을 겁니다. 그렇죠?]

[Yeah!]

사람들이 크게 박수를 쳤다.

순식간에 좌중을 사로잡고 분위기를 끌어올리는 저 능력은 확실히 역대급이었다.

팍은 가볍게 농담을 던지며 관객들을 자기 이야기로 끌어들였다.

그리고 우리는 그가 친 농담 하나가 끝날 때 들어갈 예정이었다.

“지금입니다.”

문이 열리고, 우리는 곧장 대사를 치며 관객석 안으로 들어갔다.

“들어가요.”

“잠깐 지나갑니다.”

그렇게 말하자 뒤를 돌아본 관객들이 크게 환호를 보내주었다.

개중 일부가 ‘신~!’ 하며 나를 알아보고는 손을 흔들어주었다.

무대 위의 팍은 대사를 맞추었던 대로 큰 당혹감을 표시했다.

“뭐야, 너희는?!”

“죠, 이쪽이요.”

“오, 여기면 잘 보이겠는데? 다들 비켜! 여기는 내 자리니까!”

죠는 자리에 앉아있던 SNL 멤버의 어깨를 붙잡고 훌쩍 들어올렸다.

그들은 미리 협의했던 대로 우리 힘에 밀려서 자리를 빼앗겼다.

사람들은 힘으로 억지를 쓰는 우리를 보며 흥겹게 웃었다.

거기에 흥이 난 내가 옆에 앉아 있던 중년 부인에게 얼굴을 바싹 대고 이야기했다.

“나도 내가 섹시한 건 아는데, 엉덩이를 만질 생각은 하지 마.”

“목마른데, 맥주 같은 건 없나?”

“여기는 극장 같은 거예요. 플레어. 맥주 대신 소다를 팔죠.”

“이거 완전히 고문이군. 맥주를 안 파는 게 그야말로 코미디야.”

자연스럽게 SNL을 디스한 우리는 자리를 잡고 털썩 앉았다.

프로레슬러의 거친 이미지를 풍자한 듯한 게 어쩐지 웃겼다.

나는 인터컨티넨탈 챔피언 벨트를 어깨에 맨 채 싱긋 웃었다.

그러자니 무대 위에 서있던 팍과 그대로 눈이 마주쳤다.

헐리우드 스타.

현재는 그냥저냥 주목 받는 신인 레벨이었지만, 향후 그는 미국을 대표하는 배우가 되었다.

‘각종 액션, 코미디 영화 등에 출연하며 자기 커리어를 쌓았지.’

역시 그럴 만한 남자였다.

실제로 멀지 않은 거리에서 눈을 마주하고 있으니 더 팍의 포스는 장난이 아니었다. 어쩌면 트리플H보다 더 강하게 느껴졌다.

“소란이 있었군요. 저 친구들은 제 첫사랑이었던 WWF에서 온 레슬러들입니다. 환영해주시죠!”

박수를 치는 사람들.

날 보며 싱긋 웃은 더 팍이 다시금 말을 이어나갔다.

여기서 우리의 역할은 끝이었다.

이따가 꽁트 때 다시금 출연하기는 했지만 그전까지는 적당히 눈치를 보다 빠져나가면 그만.

나는 가만히 더 팍의 무대장악력을 직접 두 눈으로 감상하려고 했다.

“그래도 저보다는 못하지만요! 저는 세상에서 가장 섹시한 눈썹을 가지고 있고, 이 멋진 미소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건 누구나 다 가질 수 있는 거죠.”

그리고 그 순간, 나도 예기치 못한 일이 벌어졌다.

“저기 위에 있는 멍청한 챔피언도 노력한다면 제 발 끝은 따라올 수 있을 겁니다!”

“……응?”

순간 실수인가 싶었다.

하지만 아니었다. 더 팍은 나를 손으로 가리키며 계속해서 조롱의 말을 이어나갔다.

“하지만 이런 멋진 몸은 만들 수 없겠죠! 저는 세상에서 유일무이한 섹시 가이니까요.”

그 말에 환호하는 사람들.

환호가 가리키는 건 나였다.

‘설마 이거 기회인가?’

그렇지 싶었다.

더 팍은 지금 우리가 애드립으로 백스테이지에서 이야기를 이끌어갔던 대로, 나에게 즉석에서 대사를 쳐낸 것이었다.

상황을 파악한 나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게 지금 누구 앞에서 섹시에 관해 논하고 있는 거야?”

박수와 환호가 쏟아졌다.

순간 목소리가 먹혀 나는 다시 한 번 말을 해야만 했다.

일이 재밌어지고 있었다.

이 NBC와 SNL의 작가진들이 밤새 고민한 각본을 순식간에 폐기물로 만들어버릴 정도로 말이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프로레슬러를 가장 잘 아는 것은, 그 안에서 재미를 끌어낼 수 있는 것은 같은 프로레슬러뿐이다.

그리고 더 팍은 아직 프로레슬러의 혼이 살아있는 사내였다.

“뭐야. 거기 앉아있으라고. 네 냄새가 여기까지 느껴지니까. 말 전용 샴푸로 샤워를 했냐?”

“아쉽게도 너에게 한마디 해주고 싶어서 말이야. 거기다 누가 가장 섹시한지 옆에 서서 비교를 한번 해보면 어떨까 싶은데.”

그렇게 관객석에서 무대로 내려온 나는 어깨 위로 챔피언 벨트를 들어 보였다.

“그야 물론 챔피언이지.”

“경기는 꽤 괜찮더군.”

“꽤? 팍, 너는 보기만 해도 구역질을 할 정도로 하드코어한 경기였어. 아주 섹시했지.”

“피를 흘리고?”

“모두가 날 보고 쓰러졌지.”

그렇게 팍과 함께 대화를 쳐나가던 나는 그 의도를 깨닫고는 약간의 존경심을 느꼈다.

업계는 떠났지만 첫사랑이다.

그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 더 팍은 지금 나와 WWF를 띄워주기 위해 이것을 설계한 것이었다.

그렇다면 이 쇼에서는 내가 다시금 팍을 띄워주며 마무리 짓는 것이 가장 인상적이리라.

“확실히 가까이서 보니 알겠군. 역시 우리 업계가 낳은 최고의 헐리우드 스타다운 몸이야.”

“그래도 현역 선수만큼은 아니지. 내가 봤을 때는 조금 슬림한 것 같지만……. 뭐 어때.”

“네 성공이 우리 선수들의 꿈이 되어주고 있어. 나중에 시간 나면 링으로 돌아와 한판 붙자고.”

“하, 나보고 WWF에서 가장 핫한 신인과 붙으라고? 이거 꽤나 핫한 헤드라인이 되겠는데!”

그렇게 이야기한 팍이 손을 내밀었고, 우리는 악수를 나누었다.

[SIN! SIN! SIN! SIN! SIN!]

[Pocky! Pocky! Pocky!]

나와 더 팍의 이름을 연호하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번갈았다.

싱긋 웃으며 돌아본 나는 춤을 추며 챈트를 유도하는 죠와 플레어의 모습을 발견했다.

역시 우리가 협력 하나는 일품이지.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