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프로레슬링의 신-103화 (103/634)

103.

그렇게 각본을 반쯤 갈아엎은 상태에서 방송이 계속되었다.

더 팍은 오랜만에 이쪽 업계의 방식을 접하게 되어서 즐거웠는지 꽁트 중에 애드립을 자주 쳤다.

우리 업계는 관객들의 반응을 보며 진행을 했기 때문에 즉석에서 대사를 치는 경우가 많았다.

물론 SNL 크루들도 프로였기에 그것을 아주 간단하게 넘겼다.

그런 분위기에서 쇼는 다른 호스트 때보다 훨씬 더 유쾌하고 반응도 좋은 상태로 이어졌다.

그렇게 쇼가 끝났다.

관객들이 퇴장하고 스태프들이 설비를 정리하는 가운데, SNL의 총괄 감독이 우리들을 찾아왔다.

게다가 그 옆에는 SNL 크루의 리더인 앤디 길버그가 함께였다.

좀 놀랐다.

코미디 송 그룹인 ‘론 아일랜드’로 유명한 그가 여기에 있다니.

총괄 감독은 바트, 플레어와 따로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 빠졌다.

그런 와중, 앤디 길버그가 먼저 날 알아보고 악수를 청해왔다.

“오, 신.”

“길버그 씨, 영광입니다.”

“당신은 Cool하니까요. 이번 경기 굉장히 감명 깊게 봤습니다.”

“육지 X까도 재밌게 들…….”

아, 그건 나중 노래지.

“예?”

“어, 아닙니다.”

“육지 X까……. 그거 굉장히 멋진 말이군요. 왜 X까는 거죠?”

무슨 이유에선지 그는 품 안에서 작은 노트와 펜을 꺼내들었다.

……에라, 그냥 말하자.

“멋진 요트 위에서 대양을 누비면 육지 X까 소리가 나오겠죠.”

“오오! 그렇군요. 난 보트의 오너다…… 같은 느낌으로, 음.”

길버그가 노래를 흥얼거렸다.

그게 정말로 내가 알고 있는 그의 노래와 유사해서 좀 놀랐다.

그렇게, 나는 현 생애에서 전 세계를 강타하는 명곡, I’m Owner Boat의 영감을 주게 되었다.

어쨌거나.

나는 먼저 입을 열었다.

“멋진 쇼였습니다.”

“당연하죠! 그걸 위해 저희 크루들이 존재하고 있으니까요.”

“하하, 역시 일류답네요.”

“하지만 오늘은 특히 더 멋졌습니다. 여러분이 참여해주신 스케치에서 애드립이 죽여주던데요.”

“저희에게는 항상 관객 반응이 있으니까요. 거기 맞춰서 쇼를 하다 보니 애드립을 많이 연습할 수 있죠.”

“오, 확실히 저희와는 달리 반응이 상반되면 관객들이 가감 없이 그걸 쏟아내니까요.”

“그렇죠.”

“하지만 신, 당신은 언제나 반응을 원하는 대로 이끌고 있죠?”

길버그는 핵심을 찔렀다.

“그런가요?”

“솔직히 그래서 예상과는 달리 웃기지는 않았다는 느낌이죠.”

“흠?”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우리가 출연했던 쇼 중반쯤의 스케치. 그건 더 팍이 너드Nerd 캐릭터로 나와서 나와 죠, 플레어에게 운동을 배우는 내용이었다.

실제로는 몸이 괴물 같이 좋은 팍이 우리에게 운동을 배우며 자기가 더 잘해서 나오는 그 괴리감이 웃음을 주는 스케치였는데.

“당신은 정말로 섹시해버렸죠.”

“어, 음…….”

“제 개인적인 취향이 아니라 사람들의 반응이요. 햄버거를 먹던 죠나 나이가 많은 플레어 같은, 대본이 바라던 웃음의 설득력이 떨어진 거예요.”

원래대로라면 그들의 컨셉처럼, 동양인 남성은 핫하지 않다는 편견에 기대어서 그런 기믹을 짠 건데 말이다.

길버그는 굳이 거기까지 말하지는 않았지만 내게는 그렇게 느껴졌다.

예상과는 달리 내가 ‘진짜로’ 핫해서 개그가 웃기지 않았다고.

하지만 어쩌겠는가.

“제가 운동을 열심히 했죠.”

아무리 그래도 그런 꼴같잖은 개그에 맞춰주고 싶진 않았는데.

의미심장하게 웃으며 나는 길버그와 다시 한 번 악수를 나누었다.

어쨌든 우리 스타일이 이들에게 영감을 준 것 같아 다행이었다.

그러자니, 무대 옆쪽에서 거대한 무언가가 불쑥 튀어나왔다.

더 팍.

야구 재킷을 입은 그는 환한 미소와 함께 우리에게 다가왔다.

그는 바트나 플레어, 죠보다도 먼저 내게 악수를 청해왔다.

“아주 멋졌어, 신.”

“당신도 정말 대단했습니다.”

“헐리우드 짬을 허투로 먹은 건 아니지. 이 정도 연기는 해줘야 거기 샌님들이 알아봐주거든.”

가벼운 농담을 건네는 팍.

듣던 대로 젠틀한 인물이었다.

“나중에 더 이야기할 기회가 있으면 좋겠는데. ……아, 그래. 메일 주소라도 교환해두지 않겠어?”

“물론이죠.”

“이야, 팍이 처음 보는 선수한테 관심을 갖는 건 처음인데?”

“빅 죠, 왜 시비야?”

“이 자식, 그동안 연락도 없다가 혼자 헐리우드 슈퍼스타가 된 게 아니꼬와서 그런다.”

“하하하! 아직 난 풋내기에 불과해. 아직도 배울 게 많은걸.”

“이 업계에서 있던 경험이 쓸모가 있는 게 있었냐?”

“인지도는 도움이 됐지. 거기다 몸을 만들어두는 버릇도. 액션과 범프를 소화하는 부분까지?”

“제기랄, 나도 공포 영화 오퍼가 왔을 때 가보는 건데 그랬군.”

“아, 그거 알아? 그때 우리 둘이 남았던 킹스 럼블.”

“기억나지! 네가 나를 넘어뜨리고 우승했잖아!”

“그때 내 데뷔작 알지? 스콜피온 인베이더. 그 제작자가 그러더군. 우리 둘 중 우승하는 사람을 영화에 캐스팅하려 했었다고 말이야.”

“…………그, 그래?”

“그래! 네가 스콜피온 인베이더가 되서 1년에 천만 달러를 버는 배우가 될 수도 있었던 거라고!”

“우, 우으…….”

빅 죠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하지만 더 팍은 낄낄 웃으며 계속해서 말을 이어나갔다.

“인생이란 게 참 웃겨! 그렇지?”

“그, 그러게요.”

‘분명 호텔 방에서 울겠군.’

나는 의외로 섬세했던 빅 죠의 성격을 떠올리며 가볍게 대답했다.

빅 죠는 역사상 가장 성공한 빅 맨 중 하나였다. 거기다 테이커나 카인과 다르게 코미디 캐릭터도 맡을 수 있는 만능 롤이었지.

사람들에게도 친절했으나, 감수성이 깊어 항상 잘 울고는 했다.

그런 그의 앞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충격적인(?) 발언을 일삼고 있는 팍. 나는 그에 대한 정보를 하나 머릿속에서 수정했다.

약간 눈치가 없다고.

* * *

오늘만큼은 공적인 일이라서 그런지 회사에서 호텔을 잡아줬다.

거기다 더 팍과 같은 호텔.

다시 말해 5성급.

방은 혼자서.

5성급에서 가장 급이 낮은 방이었으나 내가 지금껏 이용해온 그 어떤 호텔보다도 좋았다.

거기다 공짜고.

‘오랜만에 푹 자겠군.’

미국은 언제나 위협으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해야 하는 국가였다.

세간의 인식만큼 모든 곳이 치안이 나쁘지는 않았지만, 조심해서 나쁠 건 없는 법이었다.

때문에 난 치안이 좋지 못한 동네에 있을 때면 언제나 사람이 침입하기 힘든, 중급 정도의 호텔에서 머무르는 걸 원칙으로 삼았다.

동료들과 함께 다니는 게 범죄의 위협으로부터 벗어나는 데 도움이 되기는 했으나, 그것도 결코 완벽한 것은 아니었다.

그렇기에 이 비싼 호텔은 그야말로 나에게 천국과도 같았다.

‘침대 머리 위에 총을 숨겨두고 잘 필요가 없다는 이야기지.’

저녁식사도 아주 괜찮은 것으로 마친 상황. 샤워를 끝마친 나는 침대에 털썩 드러누웠다.

그리고 전화를 걸었다.

끝나고 하기로 했거든.

잠깐의 신호음이 이어진 뒤, 반대편에서 그녀가 전화를 받았다.

[……저기요.]

“응?”

[왜 시계 안 찼어요?]

“어, 너무 예뻐서?”

[예뻐서 안 찼다고요?]

“예, 아껴주고 싶었거든요.”

[맨날 입에 발린 소리만 하지.]

“그러니까 프로레슬러지.”

티파니가 킥킥 웃었다.

[오늘 방송은 잘 봤어요. 여자애들 비명이 장난이 아니던데?]

“그래서 생각보다 덜 웃겼다고 앤디 길버그가 당황하던데요.”

[……나쁜 사람들이야, 정말.]

“뭐 어쩌겠어.”

[그 회사 사버릴까.]

“아니, 거기까지 가진 말고.”

나는 당황해 얼른 말렸다.

그래도 나를 대신해 화를 내주는 게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화를 삭이듯 심호흡을 한 티파니는 다음 질문으로 넘어갔다.

[더 팍은 어땠어요?]

“멋진 남자던데요. 밥도 같이 먹고 이메일까지 교환했는데, 나중에 일 이야기라도 하려고 그러나?”

[……어.]

“왜요?”

[그거 정말로 그럴걸요?]

“응?”

[팍은 인간관계를 함부로 늘리려고 하는 사람이 아니에요.]

조금 흥미가 생기는 이야기였다.

팍은 나와 같은 시기에 업계에서 활동하던 사람이 아니었기에 알고 있는 정보가 극히 적었다.

때문에 이와 같은 티파니의 설명은 나에게 무척 도움이 됐다.

[사람은 좋은데, 명확하게 선을 긋는 부분이 있다고 해야 하나?]

“그런 사람이 메일 주소를 물어봤으면 이유가 있을 것이다?”

[네, 그런데……. 그 사람이 일 제안을 하면 조심하는 게 좋아요.]

“어떤 의미에서?”

[생각이 없거든.]

“……생각이?”

[그 사람은 내가 아는 사람 중 가장 완벽한 사람이었어요. 그러니까 어떤 일이 가진 문제점에 대해서 이해하지 못하는 거야.]

“어…… 예시를 들어줄래요?”

[예를 들면 똥을 먹는 각본을 받아도 자기가 하면 살릴 수 있으니 남에게도 그렇게 하라고 하는 거죠. 그리고 실제로 팍은 당신처럼 그런 걸 성공시켰고요.]

“즉, 구린 오퍼를 전달받아도 아무 생각 없이 넘겨준다?”

[예, 그러니까…….]

바로 그때였다.

띵동-.

초인종이 울리는 소리에 몸을 일으켜 세운 나는 어쩐지 불길한 감각에 눈썹을 찡그렸다.

그리고 그게 맞았다.

문에 달린 렌즈로 바깥을 확인하자 더 팍이 서있었다.

……토끼 잠옷 차림으로.

[누구에요?]

“우리가 이야기하던 사람.”

[아마 오퍼에 대해 이야기하려는 것 같네요. 혹시 괜찮다면 내가 어떤지 검증 한번 해줄까요?]

“그러면 일단 전화 끊고, 이따가 메일로 자료 보낼 테니까 부탁할게요.”

그렇게 정한 뒤, 나는 전화를 끊고 팍을 안으로 맞이했다.

“팍, 무슨 일이에요?”

“신~ 한잔할까 해서. 괜찮다면 내 방으로 같이 가자고.”

“어, 그럼 잠깐만요.”

술을 마신 것 같지는 않은데.

티파니가 말했던 것처럼 정말로 일 이야기가 하고 싶은 건가.

‘영화 출연?’

생각할 시간을 벌기 위해 돌아서서 가볍게 겉옷을 챙겨 입으며, 나는 머릿속을 정리했다.

‘일단 영화에 출연하면 한두 달 정도는 쇼에 나오지 못하겠지.’

그게 과연 현재 위로 상승하고 있는 내 커리어에 도움이 될까.

물론 잘 나가는 프로레슬러들은 어쨌든 한 번씩은 영화를 찍었다. 바티스타 같은 경우도 은퇴한 뒤 영화배우로서 성공하지.

WWF 내에도 산하 스튜디오를 만들어 WWF Films라는 브랜드로 영화를 만들기도 했다.

주로 WWF 슈퍼스타들이 출연하는 B급 액션물이었지만.

‘과연 괜찮을까.’

“뭘 그렇게 심각해? 그냥 한잔하자는 거야. 너무 부담 가지지 말고 같이 가자고.”

“아, 옙.”

고민이 길었나.

나는 곧장 팍을 따라 이동했다.

나를 데리고 엘리베이터에 탄 팍은 카드키를 인식시켰다. 엘리베이터는 곧장 최상층으로 향했다.

그리고 내 입이 떡 벌어졌다.

최상층 전체가 방이었다.

완전히 어디 왕의 궁전처럼 꾸며놓은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내가 놀란 걸 알아차렸는지 팍이 쓰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뭐, 나쁘지 않은 방이지?”

“……여기 얼마에요?”

“글쎄, 오천 달러쯤 줬던가?”

기절하시겠군.

“너무 사치 부린다고 생각하지 마. 버는 만큼 써야 그 돈이 돌아서 사람들이 먹고 사는 거지.”

예전에 티파니가 했던 말과 같은 맥락이었다. 돈이 많아지면 다 이런 생각을 하게 되나?

“제가 그렇게 돈을 쓸 수 있다면 여기를 노숙자 쉼터로 꾸밀 텐데요.”

“푸하하하! 그것도 좋겠네!”

크게 웃음을 터뜨린 팍은 방 안으로 들어가 옆으로 꺾었다.

“하지만 손님이 있어서.”

“손님…….”

올 것이 왔다는 느낌이다.

“일 이야기를 하던 중이었는데 너에게 흥미를 가지더라고.”

안에는 세 명의 남자가 있었다.

다들 위스키며 보드카를 적당히 알아서 마시고 있는 와중, 나에게 화살처럼 시선이 꽂혔다.

‘감독들이로군.’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분위기가 살짝 무거운 걸 느끼고 있자니 팍이 그걸 밀어내듯 쾌활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헤이~ 어때요? 이 친군데, 확실히 봐줄만 하죠? 얼굴도 핸섬하게 생겼고 말이에요.”

팍은 다시 날 돌아보았다.

“인사해. 이쪽은 유진 더글라스, 안토니오 엠부스, 그리고 알렉산더 키무라. 영화감독들이시지.”

“프로레슬러인 신입니다.”

나는 일단 세 사람의 앞에 서서 그렇게 자신을 소개했다.

사실 팍이 설명한 시점에 세 사람의 이름은 전부 까먹어버렸다.

명함 한 장 안 주고 그렇게 이야기하면 나보고 어쩌라는 거야.

역시 일처리가 막무가내군.

그렇게 생각하자니 중앙에 있던 남자가 나에게 말을 걸어왔다.

슬쩍 평가하는 눈동자.

“반갑네, 신. 더 팍이 괜찮은 자질을 가진 선수가 있다고 해서.”

“배우로서, 말인가요?”

“그래, 아시아인 배우에 대한 수요는 언제나 있지만 괜찮은 사람을 찾기는 어려워서 말이야.”

왼쪽에 있던 대머리 사내가 조심스럽게 말을 이어나갔다.

“혹시 옷 좀 벗어줄 수 있나?”

“예, 뭐.”

별다른 저항감 없이 고개를 끄덕인 나는 상의를 벗고 그 안에 있던 내 근육질 몸을 보여주었다.

그러자 시선들이 달라졌다.

매끈하게 드러난 복근과 흉근, 떡 벌어진 어깨. 나는 오랜 노력의 결과로 확실히 매력적인 체형을 가지고 있었다.

“호오.”

“봤죠? 괜찮죠? 경기 뛸 때도 대단하다니까요. 이 녀석, 마이크워크 할 때 얼마나 쩌는데!”

자랑스러워하며 팍은 그대로 나에 대한 칭찬을 늘어놓았다.

솔직히 말해 이 기회가 앞으로 어떻게 될 거라고는 확신하기 힘들었지만, 하나는 분명했다.

난 이들의 마음에 들었다.

‘젖꼭지가 좀 춥군.’

조금 부끄러운 것을 대가로.

하지만 내가 원하는 형태의 ‘마음에 듦’은 절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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