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4.
그렇게 인사가 끝난 뒤.
방으로 돌아온 나는 일단 아무 고민도 하지 않고 잠을 청했다.
뭔가 생각할 게 많을수록 일단 잠을 자고 난 뒤에 정해야 한다는 것이 나의 평소 지론이었다.
피곤한 상태에서는 냉정한 판단이란 게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경우에는 좀 달랐다.
판단을 확실히 할 근거가 필요했다. 그래서 나는 일단 날이 밝을 때까지 실컷 잠을 잤다.
그리고 일어나, 몸을 씻은 뒤 곧장 호텔 레스토랑으로 향했다.
더 팍에게 일과 관련해서 좀 더 물어보기 전에, 배를 먼저 채워두려는 심산이었지만.
우연이란 게 맞아떨어져 그는 마침 아침을 먹던 중이었다.
샐러드와 달걀로 말이다.
“어, 신……. 자가만.”
“천천히 드세요.”
새벽이라 사람은 적었다.
팍의 맞은편에 앉은 나는 일단 적당히 식사를 주문했다.
‘역시 5성급답군.’
보통 호텔은 조식 뷔페가 일반적인데 여기는 메뉴 하나하나를 주문하면 가져다주는 시스템이다.
김치찌개도 있었다.
시킬 순 없었지만.
그때쯤, 입에 가득 넣었던 달걀을 삼킨 팍이 말을 시작했다.
“음, 좋은 아침.”
“어제는 감사했습니다.”
“하하하, 내가 뭘! 그 기회는 다 네 손으로 잡은 거지, 친구.”
“그래서 건방진 부탁이란 걸 알고서 굳이 여쭤보는 건데요.”
“응, 뭔데?”
“어제 만났던 감독 세 분의 정보를 좀 받아볼 수 있을까요?”
“그래, 뭐.”
“…….”
정말 사람이 순수하군.
다소 무례한 부탁을 그냥 좋다며 들어주고 있으니까.
“아, 맞다. 이번에 만드는 작품 정보는 안 돼. 그건 알고 있지?”
“물론이죠. 커리어 정도만 정리해주시면 저야 정말 감사하죠.”
그렇게 미소를 지은 나는 그대로 팍과 함께 식사를 시작했다.
서로 메뉴는 좀 달랐다.
나는 아침에 에너지를 확보하기 위해서 탄수화물을 섭취했다.
반대로 팍은 식사 후에 에스프레소를 한 잔 마시는 듯했다.
그가 날 보며 미소를 지었다.
“이제 어디로 가지?”
“현장팀에 합류해야죠.”
“크으, 현장팀. 어감 좋군. 나도 옛날에는 그 곡예단을 따라서 전 세계를 떠돌고는 했는데.”
“…….”
“아, 미안. 현역도 아닌 내가 곡예단이라고 말하는 건 실례지.”
“아뇨. 선배님은 저희 후배들에게 언제나 영감을 주시니까요.”
“그거 고맙군.”
“좀 놀랐을 뿐입니다. 보통 업계를 떠나 성공한 선수들은 이때의 일을 잊으려고 하니까요.”
“바보들이지. 내가 업계에서 배운 게 얼마나 많은데.”
“도움이 됩니까?”
“아니.”
그는 단호하게 말했다.
빅 죠에게 말한 것과는 달랐다.
환상을 깨고 싶지 않은 더 팍 나름대로의 배려였다는 것일까.
“연기는 다시 배웠고, 벌크는 빼라고 수없이 욕을 들었지. 최근의 헐리우드는 옛날의 그 마초남 공식에서 벗어나려고 하거든.”
“몸을 안 줄이시는 이유라도?”
“이게 나니까. 아무리 그래도 영혼까지 버릴 수는 없는 법이지.”
“영혼?”
“인간의 안에 있는 감정, 지식, 신념의 종합체. 그리고 그 결과.”
“그 멋진 몸 말이군요.”
“역시 이해하는군.”
그는 자신의 앞에 놓인 달걀과 샐러드 접시를 내려다보았다.
이게 자신의 방식이라는 듯이.
“이걸 버릴 수는 없어.”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래서 사실, 네가 방금 부탁했을 때 꽤 멋지다고 생각했지.”
“왜죠?”
“나와 다른 방식이니까. 그리고 내 앞에서 그 말을 하려면 정말로 용기가 필요했을 거거든.”
“…….”
“그건 네 영혼이 시켜서 한 일이라는 거겠지. 만약 영화를 찍게 되더라도 오늘처럼만 해.”
“명심하겠습니다.”
“쉽게 말해서, 네 영혼을 헐값에 넘기지 말라는 거지. 준호 킴.”
“……?”
“내 정보력을 얕보는군? 나에게는 멋진 팀이 있어서 말이야.”
“허어.”
“하하하, 물론 거짓말이야. 사실 시몬스한테 물어봤어. 자기도 몰라서 직원을 협박해서 알아냈다던데.”
“그렇, 습니까.”
“발음하기 어려운 이름이군. 한국계 2세라면서 왜 존 킴 같은 이름으로는 짓지 않은 거지?”
“어머니랑 통화해보실래요?”
“크하하하! 아니, 미안. 방금은 선을 넘었군. 하지만 이걸로 네 성격이 조금이지만 느껴져.”
팍이 날 바라보았다.
“역겹고 힘든 생활을 해왔겠군. 뭐, 나는 너보다는 좀 나은 편이네. WWF 시절에는 적어도 확실히 회사에서 나를 밀어줬으니까.”
“……헐리우드에서는 아니었다는 말씀이십니까?”
“어제 그 돼지 새끼들이 처음부터 내가 묵는 호텔에 왔겠어?”
그렇게 말한 팍의 표정은 마치 돌진 직전의 황소처럼 굳어졌다.
대충 알 것 같았다.
“그래서 제안을 주신 겁니까?”
“맞아. 전도유망한 후배에게 뭔가 도움을 주고 싶었던 거야.”
고개를 끄덕인 그는 커피를 다 마신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날 스쳐지나가며, 어깨 위에 턱, 하고 손을 얹었다.
“헐리우드는 힘이 돼.”
드와이트 존슨에 대한 인물평을 한 가지 정정해야 할 것 같았다.
티파니 맥센이 말한 것처럼 그는 생각이 없는 게 아니었다.
오히려 해탈한 쪽에 가까웠다.
* * *
나는 곧바로 더 팍에게서 받은 자료들을 티파니에게 전송했다.
연락이 돌아오는 걸 기다리는 사이, 잠깐 시간이 남아 센트럴 파크를 돌아다녀보기로 했다.
머릿속에서 뒤얽힌 생각을 정리할 필요성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센트럴 파크.
맨하튼 섬 한가운데를 떡하니 차지한 역사 깊은 공원이다.
워낙 거대한 만큼 북쪽과 남쪽의 치안이 다르다고 할 정도였다.
그도 그럴 것이 공원의 북쪽은 할렘과 이어져 있기 때문이었다.
‘사실 할렘은 세간의 인식과는 달리 나는 그렇게까지 위험한 지역은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그런 나쁜 편견은 항상 있는 법이고, 벗어나는 것도 어려웠다.
나도 그 피해자였기 때문에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나 또한 인종적인 편견으로 배척을 받았고, 한 번 실패했으니까.
하지만 그런 편견을 가진 걸 뭐라고 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만약 내가 한 말을 믿고 할렘에 살았다가 범죄에 연루된다면?
동양인 레슬러가 데뷔했는데 생각보다 반응이 미적지근하다면?
그 책임은 누가 지느냔 말이다.
사람들은 ‘편견을 버려!’라고 말한다. 특히 미국은 인종적인 문제에 대해서는 언제나 민감했다.
그러나 이건 달랐다.
전자는 사람의 목숨이, 후자는 거대한 회사의 매출이 달려 있다.
그들로서는 선택지 내에서 보다 안전한 걸 고르는 것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다시 이때로 돌아온 이후, 나는 그들이 나라는 사람을 믿을 수 있도록 언제나 한도 내에서 최선을 다했다.
하지만 동시에 매일매일 살얼음판을 걷는 기분이었다. 상자를 열기 전까지는 결과를 알 수 없는 법이니까.
언제나 남들이 경악할 정도로 자신만만한 태도를 취하는 것도 사실은 이걸 감추기 위함이다.
‘겉으로 드러내기에 딱히 좋은 감정은 아니거든. 특히 나처럼 언제나 의심을 받는 사람에게는.’
말하자면 나는 의지와 상관없는 올 인을 계속하는 셈이었다.
지면 모든 걸 잃는다.
기회는 다시 오지 않겠지.
그럼에도 나는 이걸 택했다.
꿈이니까.
내 최종적인 목표는 WWF 월드 챔피언으로 한 시대를 만들어내는 아이콘이 되는 것이니까.
누구든 가지고 있는 꿈.
나에게도 그게 있을 뿐이다.
그런 의미에서 봤을 때 ‘영화’는 내가 거는 가장 큰 배팅이었다.
회귀한 뒤 절대로 낭비하지 않으려고 했던 내 귀중한 시간을 가장 많이 써야 했기 때문이다.
‘아예 다른 도전인 만큼 실패했을 때의 리스크는 없겠지만.’
팍의 소개로 세 명의 감독들을 만났을 때 느꼈던 사실이 있다.
그들은 나를 ‘주연 배우’ 감이라고는 절대로 생각하지 않았다.
그냥 햄버거 사이에 끼워 넣는 작은 피클 정도라고 생각했겠지.
실제로 영화에서도 그랬다.
주인공은 백인 남자.
물론 그게 잘 먹히기는 했다.
더욱이 큰 예산이 투입되는 만큼 최대한 안전한 길을 고르는 것이 가장 합리적인 선택이었다.
더 팍은 그걸 넘어서서 자신의 장르를 만들고 결과를 이뤄냈다.
말하자면 헐리우드의 아이콘이다. ……지금 그렇단 건 아니지만.
‘대단한 양반이야.’
나는 솔직하게 인정했다.
헐리우드는 WWF보다 더 보수적이다. 누구보다도 진보를 표방하는 주제에 우습게도 말이다.
그들의 시상식인 오스카도 백인들을 위한 ‘화이트 오스카’라는 비아냥거림을 매년 들었으니까.
2020년쯤에는 한국 영화 하나가 4관왕을 수상하기는 하지만, 그건 아직 너무도 머나먼 이야기다.
사람들은 백인을 선호한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프로레슬링 관객들은 대부분 보수적이었다. 타 인종에 대해 조심스러워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러나 그들은 내 이야기가 가진 설득력에 반응을 보내주었다.
그래, 난 편견을 박살냈다.
GCW에서 챔피언이 되었고, 메인 쇼에서도 사람들이 사랑하는 선수가 되어 항상 활약했다.
어설픈 일본어를 흉내 내던 동양인 쿵푸맨이 아니라 진짜 프로레슬러, 다시 말해 남자로서.
그렇기 때문에 그런 감독들을 봤을 때, 솔직히…… 그 같잖은 자존심을 부숴버리고 싶었다.
그들이 가진 편견을 부수고, 내가 세상에서 가장 핫한 남자가 될 수 있다는 걸 증명하고 싶었다.
미래에 더 팍이 그러듯이.
숀 시나가 아이콘이 되듯이.
물론, 프로레슬러로서도 난 아직 이루고 싶은 게 너무나도 많다.
바트 맥센을 위시로 한 높으신 분들이 가지고 있는 편견 역시도 아직 완전히 부수지 못했다.
그들은 나를 그들의 머릿속에 있는 새장에 가두어 생각했다.
난 절대 그런 사람이 아닌데.
그 머저리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더 멋지고 크고 단단한 물건을 가지고 있는 게 바로 나인데.
‘그렇지.’
조금 자신이 붙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날 바라보았다.
자신들이 보지 못했던 근육질의 남성미가 넘치는 동양인 남자.
나는 재킷을 벗어 손에 들고는 민소매 차림으로 뛰기 시작했다.
추웠지만 금방 몸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나는 그렇게 투지를 불태우며 점점 속력을 높였다.
‘그래, 어디 해보자고.’
영화판에서 이름을 알리는 건 선수 생활에도 도움이 될 터.
내가 한다고 하면 못할 것은 없다. 나는 프로레슬링에 지금까지 모든 것을 걸었지만, 걸었던 판돈의 수십 배를 되돌려 받았다.
박살 내고 싶었다.
남들이 날 무시하는 만큼.
실력으로 증명하고 싶었다.
남들이 날 평가하는 만큼.
“으아아아아악!!”
나는 크게 고함을 질러보았다. 내 안에서 내가 알아채지 못했던 동기가 넘치는 걸 느꼈다.
그리고 누군가 말을 걸어왔다.
바로 옆.
“까, 깜짝이야…….”
나와 같은 동양인, 나이는 10대 중반 정도로 꽤 어려 보였다.
조깅 중이었는지 가벼운 차림새를 한 그녀가 이내 말을 이었다.
“그, 신 선수, 맞죠?”
“아, 네. 맞아요.”
“어, 죄송해요. 혼자서 조깅하시는데 방해한 것 같아서. 그런데 제가 정말 너무 팬이거든요.”
“괜찮습니다. 사인이라도……?”
“아, 아니, 지금 적을 게 없어서 죄송해요. 사실은 제가 드리고 싶은 말씀이 있는데 괜찮을까요?”
“네, 뭔가요?”
나는 씨익 웃어 보였다.
중요한 순간에 끼어든 팬이었지만 전혀 기분이 나쁘진 않았다.
팬이란 내가 해온 노력이 옳았음을 증명해주는 존재였으니까.
잠시 뜸을 들이던 소녀는 이내 활짝 웃으며 내게 이야기했다.
“감사합니다. 신. 당신 덕분에 마음을 잡을 수가 있었어요.”
“어떤…….”
“운동이요.”
“아, 선수신가요?”
“네, 골프를 하고 있어요. 얼마 전까지는 부상을 핑계로 대고 집안에만 콕 틀어박혀 있었지만…….”
채널을 돌리다 나오는 날 본 소녀는 프로레슬링의 팬이 되었다.
“GCW 시절 영상도 다 찾아봤어요. 그러다 링 위에서 열심히 싸우고 계시는 당신의 모습을 보니 저도 노력하고 싶어져서…….”
“다행이네요.”
“만약에 잘 풀려서 제가 프로가 된다면, 꼭 경기를 보러 갈게요.”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다시 한 번 환한 미소를 지은 소녀가 도로를 따라 달려 나갔다.
어마어마한 속도, 가느다란 몸에서 믿을 수 없는 힘이었다.
‘그런데.’
나는 잠시 멀어져 가는 소녀의 뒷모습을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디서 본 얼굴이라고 생각한 순간, 그 이름이 떠올랐다.
‘미셸 리!’
한국계 2세, 천재 프로 골퍼.
어린 나이에 데뷔해 미국 여자 골프 협회를 뒤집어놓는 큰 활약을 펼치는 선수였다.
실패한 삶을 겪고 있을 때 다른 동양계 미국인 스포츠 선수에 대해 찾아보며 우연히 알게 됐다.
그걸 기억해낸 것도 웃기지만.
‘내 팬이라고?’
어안이 벙벙해져 자리에 멈춰 서 있다가, 씨익 미소를 지었다.
전생에 어땠는지는 모른다.
똑같이 부상으로 좌절하고 있을 때 미셸이 어떤 식으로 일어났는가는 아마 영원히 미지수겠지.
왜냐고?
지금의 그녀는 프로레슬링의 신을 보고 다시 일어났으니 말이다.
내가 편견을 부수면서 이룩해낸 결과가 이렇게 남들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끼칠 수가 있다니.
무척 멋진 기분이었다.
“하아, 제기랄.”
고개를 든 나는 끝없이 펼쳐진 뉴욕 하늘을 보면서 생각했다.
내 꿈은 조금 더 커졌다.
프로레슬러로 성장해 다른 사람들의 반응을 알게 되면서.
나는 내가 올라갈 수 있는 한계치까지 올라가고 싶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