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프로레슬링의 신-106화 (106/634)

106.

이야기는 잘 풀렸다.

제임스 관은 내 편의를 최대한 봐주기로 했고, 동시에 나를 영화의 살인마 역으로 캐스팅했다.

다행히 그가 아직까지 직쏘 역할을 누구에게 맡길지 디테일을 잡지 않아서 따낼 수 있었다.

그가 봤을 때 나는 시놉시스 하나만 보고 살인마의 의도를 명확하게 이해한 사람일 테니까.

동시에 직쏘 살인마를 내게 맞춰서 좀 변경해보겠다고 말했다.

전생의 헬 쏘우에서 직쏘는 깊은 병에 걸려 있는 노인이었다.

그렇기에 삶을 소중히 여기지 않는 자들에게 그것을 가르쳐주고자 이런 짓을 벌이는 캐릭터였다.

따라서 내가 직쏘를 맡았을 때 어떤 캐릭터가 될지가 기대됐다.

영화사에 깊은 족적을 남기게 될 제임스 관의 상상력이 더해진다면 분명히 멋진 캐릭터가 나올 것 같았다.

이제 내게 남은 건 그 사실을 바트에게 말해두는 것뿐이었다.

제임스가 소속된 회사에서 공식 문서가 오는 걸 기다리고 있을 수만도 없는 노릇이니 말이다.

11월 초순.

회사에서는 한창 월말에 개최될 페이퍼뷰인 ‘링 서바이벌’에 대한 이야기가 오가는 중이었다.

버닝콩과 랙다운에 소속된 각 챔피언들과 각 선수들이 맞붙어 승자를 가리는 브랜드 대전.

레슬 임페리움, 킹스 럼블, 섬머 수플렉스와 함께 WWF 4대 페이퍼뷰로 분류되는 초대형 이벤트.

4대 페이퍼뷰는 버닝콩과 랙다운이 함께 개최하는 게 특징이었다. 그렇기에 시청률과 티켓 판매를 위해 다들 최선을 다했다.

그런 상황에서 희대의 워커 홀릭이신 바트 맥센 회장님은 언제나 밤을 새가며 일을 하셨고.

따라서 나는 내가 편한 시간에 그를 찾아갈 수가 있었다.

그게 언제냐고?

새벽 두 시다.

똑똑.

[들어오게.]

경기장 한쪽의 사무실.

바트는 아직까지도 들어오는 온갖 자료들을 확인하고 있었다.

나는 솔직히 말해 이 양반이 쉬는 모습을 한 번도 보지 못했다.

내가 출근을 하면 언제나 그보다 먼저 경기장에 도착해있었고.

항상 세세한 부분까지 사원들에게 하나하나 지시를 내렸다.

그렇게 일에 미쳐 살며 사람들을 컨트롤하려고 했다.

그리고 중요한 곳에서 고집을 부려 꼭 일을 그르쳤다.

최근에는 기세가 좋던 부커-리 대신 자기가 좋아하는 실버백에게 월드 타이틀을 넘긴 거라던가.

덕분에 실버백은 한껏 역반응을 받았고 바트는 그걸 또 부하들의 실수로 돌리며 화를 냈다.

게다가 지금은 새벽 두 시.

신경이 한창 날카로워져 있을 시기, 바트는 눈썹을 찡그린 채로 나를 바라보았다.

“……신?”

“잠깐 괜찮습니까?”

“무슨 일이지? 자네, 퇴근도 안 하고 이 시간에 웬일이야.”

“보스가 일하고 있는데 사원이 먼저 돌아갈 수는 없죠.”

“……정말 매번 그랬다면 내 심금을 울렸겠다만.”

“헬스장에서 몸을 만들면서 외근을 뛰고 있었으니 봐주시죠.”

“크크크, 역시 자네는 정말 말 하나는 잘한단 말이야.”

바트가 자리를 권했다.

“뭐 좀 마시겠나?”

“프로틴 셰이크 있나요?”

“그럼, 있지.”

……농담이었는데.

하지만 무를 순 없었다.

바트도 자기 몸 관리에는 언제나 철저했고, 사시사철 보디빌더 같은 엄청난 근육질을 자랑했다.

그렇게 나는 보드카 대신 단백질 셰이크를 받아 자리에 앉았다.

바트는 또 특유의 두려울 정도의 통찰력을 내게 보여주었다.

“자네를 생각할 때마다 느끼는 건데, 나이보다 훨씬 완숙해. 수십 년 먼저 살아본 사람 같아.”

“……감사합니다.”

“그래서 무슨 일로 왔지? 별거 아니라면 각오는 해두게나.”

“굉장히 바쁜 시기에 이런 이야기를 꺼내서 저도 죄송합니다.”

“무슨 이야긴데 그래?”

“이번에 영화 출연 제의를 하나 받아서 해볼까 생각 중입니다.”

“…….”

침묵하는 바트.

그는 굉장히 고깝다는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회사 측에 정식으로 이야기가 온 것도 아닌데, 갑자기 나한테 와서 영화에 출연하겠다고.”

“정식 요청은 며칠 뒤에 올 겁니다. 저와 감독이 따로 만나서 이야기를 나눴던 거죠.”

“드와이트 존슨. 그 자식이 자네에게 손을 쓴 게로군.”

“비슷합니다.”

“벨트는 어떻게 하려고? 챔피언인 상태에서 영화 촬영에 다녀올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그래, 이게 정상이지.

지금 내가 하는 말은, 솔직히 바트의 입장에서 듣기에 굉장히 괘씸하게 느껴질 터였다.

내가 챔피언을 먹은 지 그야말로 얼마 되지도 않은 시기.

한참 쇼에서 활약해야 할 챔피언이 갑자기 영화를 찍으러 가겠다?

회사와 협의도 없이?

기껏 믿고 벨트를 줬더니만 이런 식으로 뒤통수를 쳐?

……라고 생각하겠지.

하지만 나는 거기에 대해서 천천히 설명을 시작했다.

“그걸 협의해야 해서 감독하고 먼저 이야기를 나눈 겁니다.”

“어떤 협의?”

“쇼에 출연하면서 동시에 영화 촬영을 하는 것입니다.”

“단역인가?”

“살인마입니다.”

“하!”

바트가 웃음을 터뜨렸다.

“왜 우리 선수들은 나가면 살인마 캐릭터만 맡는지 모르겠군.”

“하지만 뭐, 저 같은 아시아 사람이 살인마였던 경우는 없죠.”

“쿵푸 머더러인가?”

“아쉽게도 그냥 머더러입니다.”

나는 가볍게 씨익 웃었다.

어쨌든, 이걸로 대충 바트가 제일 화가 났던 부분은 넘어갔다.

“각본이 정말 대박을 칠 것 같아서 거절하기는 싫었고, 회사 일에도 지장을 주고 싶지는 않아서 이런 선택을 하게 됐습니다. 다행히 그쪽에서도 제 일정에 맞춰주겠다더군요.”

“고해성사라도 하는 것 같군.”

“사실 정식 요청서가 왔을 때 말씀 드리는 게 맞겠지만, 보스는 제게 항상 인생에 대해서 가르쳐주고 계시지 않습니까?”

“……멋진 말이군.”

당연하지. 당신이 한 말이니까.

나는 쓰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러니 사전에 미리 보고하는 게 맞다고 생각했습니다.”

이건 바트 맥센이 다른 레슬러들에게 항상 하는 말이었다.

그는 돈으로 묶인 관계를 넘어서서, 뭔가를 가르쳐주려는 듯 선수들을 자기 자식처럼 대했다.

‘사실 위선이지만.’

아니면 그냥 미친 인간이라 자기는 정말 그렇게 생각할지도 모르지.

뭐 어쨌든, 나는 바트의 그런 부분을 이해하고 일부러 말하러 왔다는 듯이 이야기한 것이었다.

“일단 그렇습니다.”

“영화감독이 누군가.”

“제임스 관입니다.”

“제임스 관? 누구야, 그게.”

“신인입니다. 이번이 처음으로 영화를 만드는 것이고요.”

“그쪽은 거절하고 내가 괜찮은 감독을 섭외해줄 수도 있는데. 키무라 알렉산더라고 아나?”

그 이름이 왜 또 나와.

“말씀은 감사하지만 안 그래도 바쁘신 회장님께 신세를 질 수는 없죠. 제 욕심도 있고. 그런 만큼 스케줄은 꼭 준수하겠습니다.”

“뭐, 어찌되었든 WWF로서는 돈을 벌게 되는 셈이라는 건가.”

“예. 로열티 같은 부분도 확실하게 이야기를 해두었습니다.”

“흐음.”

고민하는 제스처를 취하는 바트.

사실 이렇게 되면 회사로서는 진짜 로열티만 버는 셈이었다.

촬영도 쇼에 방해가 되지 않는 선에서 한다고 내가 말했으니까.

그럼에도 그는 철저하게 따졌다.

“그쪽이랑 계약할 때 스케줄표를 먼저 확인해둬야겠군. 혹시나 나중에 헛소리가 나오지 않도록.”

저렇게 철저한 모습에는 솔직히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었다.

* * *

그렇게 영화사와 WWF 간에 협의가 이루어지는 한편, 나는 회사 일도 계속해서 진행하고 있었다.

바로 숀 시나와의 대립이었다.

11월 2주차의 버닝콩.

나는 새하얀 벨트에 금색 플레이트가 인상적인 인터컨티넨탈 챔피언 벨트를 들고 링에 올랐다.

링 서바이벌은 브랜드 간의 대립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선역과 악역의 구분이 잠시 희미해진다.

다 떠나서 상대 브랜드와 맞서기 위해 뭉치자는 느낌이 컸다.

“그래서…… 이렇게 되었는데.”

선글라스에 탄흔 재킷.

한쪽 어깨에 벨트.

그런 내 모습은 솔직히 말해 그 누구도 반할 정도로 멋있었다.

객관적인 사실이다. 티파니한테 물어봤더니 그렇게 답했으니까.

“나도 좀 이상하다고 생각하기는 했어. 그 멍청하던 숀 시나가 U.S. 챔피언이라니 말이야.”

[SIN! SIN! SIN! SIN! SIN!]

역시 내 생각이 맞았다.

같은 상황에서 오튼이 말하면 야유를 먹겠지만, 난 아니었다.

말인즉슨, 현재 쇼에서 사람들의 호감도는 ‘신>시나>(넘을 수 없는 벽)>오튼’이라는 뜻이다.

그렇기에 나는 일부러 좀 악역 때의 조롱하던 컨셉을 살렸다.

챔피언으로 등극한 이후에 자신감이 생겼다는 설정이었다.

“그 자식, GCW 시절에는 내 뒤꽁무니만 졸졸 따라다녔는데. 아니, 사실 당연한 일이지. 랙다운에서는 벌어질 수 있는 일이야.”

2만이 넘는 관객들은 모조리 내 이야기에 집중하고 있었다.

설령 그게 영양가라고는 하나도 없는 욕일지라도.

그냥 이들은 내가 하는 말 하나하나를 눈으로 볼 수 있다는 게 기쁜 것이었다.

그리고 거기에 맞춰 내 이름을 외칠 수 있다는 것까지도.

“월드 챔피언, 실버백! 태그 팀 챔피언 레볼루션! ……솔직히 재수 없는 놈들이지만 능력만큼은 인정해. 그도 그럴 것이 ‘닉 플레어’잖아. ‘바티스타’고 말이야.”

그리고 슬슬, 나는 시동을 걸어 폭발적으로 말을 쏟아냈다. 이게 오늘 쇼에서 내 역할이었다.

나는 버닝콩이 이길 것임을 확신하고 우리 측의 선수들을 한껏 띄워주기 위해 여기에 나왔다.

링 서바이벌 각본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맡게 된 셈이었다.

그리고 이걸 통해 나는 현재 버닝콩에서 가장 마이크워크를 잘하는 선수로 인정받게 되었다.

“여성 챔피언! 리나! 듣자하니 랙다운은 챔피언도 없다지? 그리고 그 외, 남성 팀은 말할 것도 없지. 나를 그렇게 밀어붙인 랜스 오튼이 가장 신인이니까 말이야.”

그리고 관객들은 오튼의 이름이 나왔음에 큰 환호를 보내주었다.

‘인정을 받았군.’

아까 나왔을 때도 아주 좋은 야유가 나왔던 걸로 봐서는 확실히 경기가 먹혔다는 느낌이었다.

“이 자리에 있는 모두에게 묻겠어! 버닝콩이 링 서바이벌에서 랙다운에게 질 거라고 생각하냐!”

[NO! NO! NO! NO! NO! NO!]

“내가 과연 숀 시나 같은 멍청이에게 질 거라고 생각 하냐!!”

[NO! NO! NO! NO! NO! NO!]

“좋았어! 역시 템파의 관객들은 정말 멋진 놈들이야! 그런 너희들을 위해서 오늘 내가……!”

바로 그 순간이었다.

내 말을 잘라냄과 동시에 관객석 한쪽에서 환호가 터져 나왔다.

평소 순진한 성격과는 정반대로 험악하게 찡그린 얼굴.

미식축구 저지와 7부 바지. 농구화를 신고 벙거지 모자를 쓴, 랩퍼에 가까운 차림새.

[Cena! Cena! Cena! Cena!]

관객들이 그 예기치 못한 등장에 깜짝 놀라 환호를 보내주었다.

숀 시나.

허리에 U.S. 챔피언 벨트를 찬 그가 바리게이트를 넘어 버닝콩에 무단으로 침입한 것이었다.

나는 어이가 없다는 듯 웃으며 링 주변을 맴돌기 시작한 시나를 내려다보았다.

마치 황야에서 결투를 벌이기 위해 서있는 두 카우보이처럼.

그런 광경에 관객들은 SIN과 CENA의 이름을 번갈아 외쳤다.

그나저나, 역시 대단한 놈이다.

랙다운에서 나처럼 수많은 대립을 성공시키며 녀석은 악역임에도 불구하고 팬들의 사랑을 듬뿍 받는 악동 캐릭터를 구축해왔다.

그리고 반대에는 내가 있다.

같은 GCW 출신.

그때 시나보다 더 잘나갔으나 버닝콩에서 레볼루션의 비열한 계략으로 좀 고생을 했던 나.

그것을 알기 때문에 링 위로 올라온 시나는 내가 손에 쥔 마이크를 빼앗아 당당하게 말했다.

“안녕, 쿵-퓨리.”

난 이마를 짚었다.

폭소를 터뜨린 사람들이 이내 쿵-퓨리를 연호하기 시작했다.

솔직히 나는 제법 티셔츠 판매량이 높아 쿵-퓨리를 좋아했지만, 신이라는 캐릭터에게는 흑역사였다.

시나는 다짜고짜 그 부분을 건드리며 시비를 건 것이었다.

거기에 그는 거침없이 랩 스타일로 마이크워크를 이어나갔다.

좀 등신 같은 캐릭터 설정이지만, 그래도 지금은 많이 희미해진 편에 속했다.

“그래, 확실히 네가 GCW에서는 잘 나갔지. 친구도 배신하고, 다시 배신하고. 챔피언 되고. 근데 그건 그때의 일이잖아? 넌 빅 리그에 와서 나처럼 되진 못했어.”

“잠깐, 잠깐, 잠깐.”

나는 마이크를 다시 받아 시나의 말을 잠시 멈추게 했다.

그리고 말했다.

“너도 와이엇 패밀리였잖아?”

“…….”

“우리, 잠깐 서로의 명예를 위해 옛날 일은 덮어둘까?”

“……그래, 그러자고.”

관객들이 폭소했다.

시나가 먼저 손을 뻗었고 우리 둘은 가볍게 악수를 나누었다.

[Yeeaaaaaaah!!]

환호하는 관객들.

극적으로 타결된 협상은 코미디의 한 요소로서 활용되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우리는 동시에 각자 들고 있던 마이크를 휘둘러 상대를 공격했다.

나는 공격을 피했고, 시나 역시도 공격을 피해 서로 거리를 벌렸다.

너무나 갑작스럽게 벌어진 상황에 관객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의도한 바였다.

분위기가 급속하게 식었고, 나는 웃으며 마이크를 손에 쥐었다.

“넌 나한테 안 돼.”

“무슨 소릴 하는 거야. 빅 리그에 강한 건 바로 나라고.”

시나도 시나 나름대로 나를 디스하며 반응을 이끌어냈다.

링 서바이벌.

인터컨티넨탈 챔피언, 신.

U.S. 챔피언, 숀 시나.

과연 승자는 누구일 것인가.

……솔직히 나도 궁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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