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프로레슬링의 신-107화 (107/634)

107.

쇼는 성황리에 마무리되었다.

이대로 나는 시나와 함께 이동해 랙다운에 합류할 예정이었다.

시나가 오늘 그랬듯이 나 역시 랙다운에 출연해 링 서바이벌의 대립을 진행할 예정이었다.

그리고 3주차에서는 랙다운의 선수들이 떼거지로 나와 버닝콩을 습격하고 4주차에서는 반대로 버닝콩이 랙다운을 습격하는 각본.

매년 비슷한 각본이었으나 링 서바이벌은 항상 인기가 좋았다.

브랜드 대전이라는 특별함과, 선악을 가리지 않고 선수들이 뭉쳐서 싸운다는 로망 때문이었다.

때문에 현재 각 브랜드에서는 5대5 제거 매치에 나설 선수들을 선별하는 각본이 진행 중이었다.

그리고 나는 바로 그 각본에 난입해 랙다운 선수들과 시나를 도발하고 나올 예정이었다.

물론 전부 각본의 이야기였고.

실제의 나는 마트에서 시나와 함께 한참 이동하는 동안에 먹을 주전부리를 물색하고 있는 중이었다.

한동안 지금 내 몸 상태와 체력을 고려해 맛있고 몸에 덜 무리가 가는 간식을 뽑고 있자니.

시나가 옆에서 뭔가 엄청나게 커다란 트위즐러를 가지고 왔다.

트위즐러.

미국인이 좋아하는 젤리맛 고무다. 아니, 고무맛 젤리였던가.

“이거 하나로 퉁 칠까?”

“뭐야, 그게?”

“4미터 트위즐러.”

“…….”

“이거라면 운전하다 졸 염려는 없겠지. 게다가 고무맛이야!”

“아, 정말로 그런 맛이 있군.”

“고무맛은 아무 맛도 안나서 내가 제일 좋아하는 맛이야!”

“알았으니 평범한 걸로 가져와.”

“응…….”

시무룩한 시나가 터덜터덜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나는 피식 웃은 뒤 냉장고를 확인했다.

에너지 드링크인 비스트. 여러 종류 중 무설탕 버전의 칼로리와 성분을 확인하고 네 개 챙겨들었다.

그 외에도 졸음을 쫓는 껌이나 시나가 말했던 대로 트위즐러도 몇 개 집어 계산을 끝마쳤다.

10시간 이상의 장거리 운전이었다. 거기다 늦은 밤이라서 최대한 조심하려고 이러는 것이었다.

운전은 오래하다 보면 반사적이 된다. 처음에는 좀 긴장을 하다가도 길게 뻗은 고속도로에서 액셀을 밟고 있으면 어느 순간 정신이 딴 데 가있는 경우가 있다.

지금 산 주전부리들은 바로 그걸 예방하기 위한 것이었다.

가볍게 종이봉투를 손에 든 우리는 주차장으로 이동했다.

우리를 앨라배마까지 데려가줄 차는 바로 시나의 트럭이었다.

닷지 램.

조수석에 타자, 렌트카와는 차원이 다른 안락함이 느껴져 인상적이었다.

“언제 산 거야?”

“한, 석 달쯤 됐나?”

“죽여주는데.”

시트가 이렇게 깔끔한 차량은 오랜만이었다. 시나는 곧바로 운전을 시작해 주차장을 빠져나갔다.

소음도 거의 없고 카 오디오도 적당히 귓가를 간질이는 게, 정말 죽여줬다.

“나도 살까.”

“나쁘지 않아. 이번에 피아트에서 픽업 서비스도 실시했거든.”

“픽업?”

“뭐, 비행기로 이동하거나 할 때 이 차를 내가 원하는 위치에 가져다두는 시스템이야. 가격도 싸고 차를 가지러갈 부담도 없지.”

“멋진데.”

그런 서비스가 있다면 확실히 프로레슬러에게 좋을 것이다.

우리는 어디로 운전을 해서 갔다가도 또 일이 생기면 비행기를 타고 날아갔으니 말이다.

그런데 일을 마치고서 거기에서 바로 내 차를 타고 또 이동할 수 있다?

그거라면 굳이 불편하게 싸구려 렌트카를 고집할 이유는 없지.

나는 싱긋 웃으며 말했다.

“하나 배웠군.”

“하하, 그거 다행이네. 내가 너에게 뭘 가르쳐줄 수 있다니.”

“그런 것도 있어야지 않겠어?”

“맞아. 나도 나름대로 요새 성장했으니까. 테이커 선배가 나를 아주 귀여워해주신다고.”

“그래? 테이커는 분명 후배들 신경 안 쓰기로 유명할 텐데.”

“어라, 알아?”

“어, 플레어가 말해줬어.”

구라였다.

“겉으로 보기에만 그렇지, 한번 친해지면 멋진 선배인 걸 알 거야. 아, 저번에 너 레슬링 하는 거 보더니 죽여버리겠다고 으름장을 놓던데.”

“…….”

멋진 선배와 날 죽이겠다는 말이 도저히 매치가 안 되는데요.

“나중에 같이 레슬링을 해보고 싶다는 걸 좀 거칠게 표현하신 거지. 남자들은 다 그렇잖아?”

“그런, 가.”

“어쨌든 JBL 선배도 그렇고, 이번에 랙다운에서 다들 널 기다리고 있어. 하하! 더즐리 선배가 야구 배트에 못을 박고 있던데, 날 웃기려고 그런 농담까지 해주실 줄은!”

“아니, 시나. 뭔지 몰라도 그거 농담 아니야. 진짜로 후려칠 인간이야.”

“응? 하지만 신, 못 박힌 배트로 머리를 치면 죽을 텐데.”

“총도 살살 맞으면 안 죽어.”

“그건 그렇네!”

호쾌하게 웃는 시나.

나는 당장에라도 다시 우리 집인 버닝콩에 돌아가고 싶었다.

하긴, 그쪽 선배들은 나에 대해서 잘 모를 테니 한번 군기를 바싹 잡아보고 싶은 마음이 있겠지.

나는 그렇게 운전을 이어가는 시나에게 계속해서 말을 걸었다.

유럽 투어 이후로 그다지 오랜 시간이 지나지는 않았으나 우리는 몇 년 만에 만난 친구처럼 이야기를 나누며 회포를 풀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우리 사이의 한 사람이 생각났다.

“러셀은 언제 올라온대?”

“아마 내년쯤이 아닐까? 그 자식 요새 인기 장난 아니던데.”

“별명이 무슨…… 라이징 아이콘이라고 했던가. 그런 별명으로 관객을 설득할 수 있는 건 지금 이 업계에서 놈이 유일하겠지.”

그리고 미래의 숀 시나 정도.

“대체 어떻게 그럴 수 있나 몰라. 나는 솔직히 말해서 그렇게 착한 선역은 소화 못할 것 같아.”

아니, 무슨 소리야. 네가 역대급으로 그걸 잘 소화하는 선순데.

나는 그렇게 말하고 싶은 걸 꾹 참으며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착하고 정의로운 캐릭터인 만큼 그걸 재미없다고 치부하는 사람들 역시 많을 텐데 말이지.”

“그러게. 오히려 요즘 사람들은 할 말 다하고 자기 신념 있는 악역에게 더 환호하는 것 같아.”

“시나, 너처럼?”

“내가 테이커랑 대립할 때 얼마나 큰 야유를 먹었는지 몰라?”

“그건 테이커잖아. 그 양반이랑 대립하면 누구든 야유 받지.”

“그렇게 보면 선역이란 게 참 어려워. 내가 선역이었다면 테이커랑 대립해서 야유를 받았을 때 모멘텀이 확 꺾였을 거야.”

시나의 말이 맞았다.

악역은 환호를 받아도 어느 정도는 괜찮았지만, 선역은 야유를 먹는 순간 기세가 확 꺾였다.

러셀처럼 정의를 최대 가치로 내세우는 선역은 특히 그랬다.

정의라는 신념은 다소 추상적인 면이 있고, 그렇기에 심술궂은 관객들이 야유를 할 가능성이 컸다.

그걸 억제하기 위해서는 선수의 무대장악 능력과 더불어 각본의 방향성이 섬세하게 작동해야만 했다.

거기다 시대적 상황이나 그를 띄워주는 상대 역시도 중요했다.

한술 더 떠, 아예 현실에서 선수의 사생활까지도 검증을 받아야 하는, 성공 자체를 요행이라고 생각할 정도의 어려운 기믹이다.

시나는 놀랍게도 그 기믹을 메인 쇼에서 10년 이상 사용했다.

포기하지 않고, 언제나 정정당당하게. 시나는 자신의 그런 모습을 사람들이 납득하게 만들었다.

쉬는 날은 하루도 없이 위시메이커 재단을 통해 난치병에 걸린 아이들과 만나면서 말이다.

현실의 슈퍼히어로. 그건 숀 시나였기에 가능한 캐릭터였다.

‘러셀의 성공은 냉정하게 봤을 때 소규모 단체라 가능한 거고.’

그럼에도 대단한 결과기는 했다.

내가 멋진 각본으로 띄워줬던 만큼, 러셀은 그 후로도 자기의 역할을 설득력 있게 잘 끌어왔다는 말이니까.

녀석이 올라와서 함께 일하게 될 순간이 무척 기대가 됐다.

나는 창문에 턱을 괸 채 미소를 지었다. 트럭은 슬슬 시내를 빠져나와 고속도로로 진입했다.

시나가 선곡한 음악은 2004년대에 유행한 스눕-덕의 랩이었다.

이때 당시 메가 히트를 친 노래라 따라서 흥얼거리자니 시나가 내게 말을 걸어왔다.

“무슨 생각해?”

“응?”

“티파니?”

“……뭐?”

“티파니 맥센.”

“아니,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아?”

설마 플레어가 말해줬나?

입이 싼 영감이라고 생각하며 잠시 눈썹을 찡그렸던 나는 상상치도 못한 대답을 들었다.

“전에 보니까 둘이 훈련장에서 분위기 좋던데. 그래서 둘 사이에 무언가 있지 않았나 싶었거든.”

“…….”

이 바보는 내가 티파니와 개인적인 연락을 주고받기 전에 이미 그런 생각을 한 모양이었다.

뒷걸음질로 밟힌 개구리가 된 상황. 나는 얼굴이 후끈거리는 것을 느끼며 입을 열었다.

“너한테만 말하는 거야.”

“아, 진짜? 친구니까?”

“닥쳐. ……티파니랑은 요새 좀 개인적인 안부를 주고받는 사이야.”

“요새?”

“그래, 네 예상과 달리 유럽 투어에서 돌아오고 그렇게 됐다고.”

“허어, 왜 그렇게 된 건데?”

“말하자면 복잡한데…… 뭐, 전부터 멋진 여자라고는 생각해왔어.”

“그렇긴 하지. 확실히 얼굴도 헐리우드 배우 못지않게 예쁘고. 쇼에서는 좀 굴욕을 당하지만.”

“그게 좋았던 거야. 헐리우드 배우라면 그런 굴욕은 절대 당하려고 하지 않을 테니까.”

“이여~ 좋았다~?”

“……나 차에서 내린다.”

눈을 가늘게 뜨며 말하자 시나는 낄낄 웃으며 음악을 껐다.

그런 녀석에게 나는 잠시 고민하다 티파니와 관련된 내 이야기를 실컷 늘어놓았다.

* * *

그렇게 도착한 랙다운.

쇼가 시작하기 전날, 나는 시나와 함께 락커룸에 방문했다.

보통 전날에는 마지막으로 전체 각본을 확인하기 위해 선수들도 경기장에 있는 경우가 많았다.

선수가 필수적으로 참여할 것은 아니었으나, 그래도 확인해두는 편이 좋은 것만큼은 확실했다.

버닝콩 같은 경우에는 그 참여 여부를 선수 자율에 맡겼지만.

랙다운은 정반대였다.

바로 테이커가 있기 때문이었다.

캐스켓-테이커.

80년대 후반, 다시 말해 캡틴 로건과도 함께 뛰었던, 현재 경력 27년차인 WWF의 최고참.

이후로 그는 40년이 넘는 경력을 가진 선수로서 업계의 전설로 남는다.

비록 기믹이 ‘장의사’, ‘사이비 종교 교주’, ‘죽음에서 돌아온 폭주족’ 같은 거라 업계의 아이콘 레벨까지 이르지는 못했지만.

실제로는 아이콘들에게마저 존경을 받는 게 바로 테이커였다.

그는 철저하게 배운 대로 일을 했고, 고지식할 정도로 어떤 규범에 맞추는 것을 좋아했다.

그리고 랙다운의 고참 선수들 역시 그걸 존중해서, 버닝콩과 달리 하나의 팀처럼 움직였다.

따라서 랙다운의 락커룸은 인상적인 조직력을 갖고 있었다.

내가 시나와 함께 안으로 들어서자 모두가 날 돌아보았다.

테이커 한 명을 제외하고.

키가 2미터를 넘는 빅맨.

현재는 폭주족 기믹이라서 가죽조끼에 청바지, 두건으로 머리를 감싼 배드애스한 모습이었다.

나는 전생의 그를 떠올리며 다가가 가장 먼저 인사를 건넸다.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테이커. 저는 버닝콩의 신입니다.”

그는 높은 프로 의식의 소유자였고, 무뚝뚝했지만 또한 깐깐해 자신과 같은 선수를 선호했다.

싹싹하고 노력하며 프로 의식이 강한, 시나 같은 스타일 말이다.

락커룸 가장 안쪽에 있던 그가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섰다.

이렇게 마주하니 엄청난 위압감이 느껴졌다. ……슬프게도 나는 전생의 테이커와 이렇게 마주서본 경험이 단 한 번도 없었다.

그가 악수를 청했다.

“만나서 반갑군. 애송이.”

“업계의 전설과 이렇게 마주할 수 있게 되어서 영광입니다.”

“그래, 네 경기는 잘 봤다.”

이런 태도가 먹힌 것인지 테이커는 내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나는 싱긋 웃으며 이어 랙다운에 있는 선수들을 돌아보았다.

“신이라고 합니다. 이번 주 촬영 잘 부탁드립니다. 선배님들!”

“나는 구면이지?”

“예, JBL. 오랜만입니다.”

나와 함께 유럽 투어에 참가했던 JBL이 내게 인사를 건넸다.

남부 출신 졸부 악역 캐릭터답게 하얀 카우보이모자를 쓰고 있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성질이 더럽고 후배들을 괴롭히길 좋아하는 성격이라, 이번에는 홈그라운드에서 과연 날 어떻게 대할까 신경을 좀 썼는데.

‘이 정도면 괜찮겠군.’

시나가 차에서 내게 이야기했던 건 선배들 사이에 으레 떠는 허세와도 같은 말이었던 모양이다.

그 밖에도 랙다운 선수들은 내게 적의를 표현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선수들이 다 날 흥미롭다는 눈으로 바라봐서 어쩐지 기분이 좋아지는 것을 느꼈다.

그만큼 WWF 내의 내 입지가 무시 못 할 정도로 커졌다는 뜻 아닌가.

내일 나는 이 랙다운에 깜짝 등장해 링 서바이벌에서의 대립을 심화시킬 예정이었다.

‘시나가 버닝콩에 나와서 그랬던 것처럼 나도 대충 링에 난입해서 입이나 좀 털어주면 되겠지.’

그래서 화가 난 랙다운의 크루가 버닝콩을 습격하는 거고.

하지만 자세한 각본은 아직 듣지 못해 과연 내용이 어떻게 전개되는 것일까 좀 궁금했다.

바로 그때였다.

락커룸의 문이 벌컥 열리며 퉁퉁한 남자가 안으로 들어왔다.

내 눈이 휘둥그레졌다.

‘폴 헤이건?’

업계의 혁명가라고 불리던 천재적인 매니저이자 프로모터.

나에게 다가온 그는 두툼한 몸을 흔들며 양 팔을 펼쳤다.

“자네가 신이로군!”

그러더니 날 꽉 끌어안았다.

“헤, 헤이건 씨?”

“제기랄! 이 천재! 악마! 괴물! 온갖 수식어를 다 갖다 붙여도 자네의 그 솜씨에는 비견할 수 없지! 이 빌어먹을 개자식!”

거친 욕설을 내뱉은 그는 흥분해 내 뺨에 키스마저 했다.

나는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고 잠시 굳어졌다. 헤이건의 입에서는 초콜릿 무스 냄새가 났다.

일단 하나는 확실했다.

“랙다운에 온 걸 환영하네!”

업계의 이 천재 프로모터는 내 엄청난 슈퍼 팬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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