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8.
먼 옛날…… 아니, 솔직히 말하자면 그렇게 먼 옛날은 아니고, 대략 한 15년 정도 전이었을까.
EZW라는 단체가 있었다.
Eastern Zone Wrestling.
펜실베이니아 주 필라델피아에 근거지를 둔 이 인디 단체는 한 문제적 인물의 영입으로 인해 그야말로 초대박을 내게 된다.
그게 바로 폴 헤이건이었다.
업계의 혁명가.
그 당시까지만 해도 주류 프로레슬링은 황금시대에 머무르고 있었다. 만화 같은 분장을 한 선수들이 나와 선과 악으로 갈려 단순하게 싸우던 시대였다.
그리고 그때, EZW에서는 하나의 혁명을 업계에 가져왔다.
두 단어로 정리가 가능했다.
테크니션, 하드코어.
WWF의 아이콘인 락콜드의 데뷔도 EZW의 링에서 이루어졌다.
에디 비테레로는 EZW에서 테크니션 레슬링을 처음 구사했다.
폴 헤이건은 그 중심에서 각본을 짜고 캐릭터를 지시하며 선수들에게 많은 것을 가르쳤다.
기존의 프로레슬링 세계관에 맞지 않던 선수들은 자신만의 개성을 뽐내며 업계에 정착했다.
……그리고 놀랍게도 우리 바트 맥센 선생님께서 EZW를 더러운 수작으로 무너뜨리고 날름 구매해서 모두 자기 공으로 포장하셨다.
그리고 태도 불량 시대가 시작되었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하지만 이후에도 WWF에서 폴 헤이건은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현재는 랙다운을 총괄하며 바트에게 결제를 받는 역할을 맡았다.
그런 그가 날 좋아하는 건, 생각해보면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나 역시 그 존재만으로도 업계에 혁명을 일으키는 남자니까.
그런 건방진, 그리고 옳은 생각을 하며 나는 뺨을 붉히고 있는 헤이건을 향해 입을 열었다.
우리는 지금 락커룸을 나왔다.
리더인 테이커까지 합류해 셋이서 사무실 하나를 잡았다.
“일단 여쭙겠는데, 내일 각본을 전달 받지 못해서요.”
“아, 그거! 아직 안 짰네!”
“……예?”
“자네가 랙다운에 난입해 도발한다는 각본은 있지만 자네 아이디어가 듣고 싶어서 말이야!”
놀라울 만큼 현명한 사람이다.
그리고 함께 일하기에 이만큼 좋은 사람이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스쳐지나갔다.
‘아쉽게도 그럴 순 없지만.’
이제 내년이면 입지가 너무 커져서 위험하다고 느낀 바트에 의해 해고될 예정이었다.
그러므로 나는 이 순간을 잘 이용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뭔가, 단 하루지만 멋진 이야기를 짜낼 수 있지 않을까.
그러나 그전에.
“저는 일단 테이커의 이야기부터 듣고 싶습니다. 가장 고참이시니 아이디어가 있으시겠죠.”
“……맹랑한 꼬마로군.”
그가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아, 아빠?
“하지만 됐다. 폴이 널 신뢰하는 것 같으니 나도 네가 어떻게 생각하는지가 궁금하군.”
“각본팀장님이라도…….”
“에헤이, 됐다니까. 버닝콩은 안 그렇겠지만 여기는 선수의 아이디어를 가장 중요시하거든.”
현명한 생각이다.
눈치를 보던 시간은 끝났다.
나는 오면서 대충 생각해뒀던 아이디어를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일단, 링 서바이벌은 선역, 악역의 구분이 희미해지지 않습니까?”
“그렇지.”
“그런 만큼 반대로 브랜드 간 이미지를 통해서 선역과 악역이 구분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 흥미로운 발상이군.”
“이번 링 서바이벌은 탑독 버닝콩 대 언더독 랙다운인 거죠.”
헤이건은 내 제안에 눈을 휘둥그레 뜨더니 이내 웃었다.
“브랜드 간 이미지를 통해 각본을 전개해 나가자는 건가.”
“그렇게 되면 각 브랜드 간 각본을 전개할 때도 도움이 될 겁니다. 시나가 JBL에게 널 싫어하지만 랙다운을 대표하는 챔피언이니 최선을 다해달라고 말한다던가.”
“내일 랙다운에서 확실히 그런 이미지를 구축하자는 건가.”
“예, 월요일에는 제가 절 찾아온 시나를 GCW에서 내 아래에 있던 애송이라고 폄하했었죠. 그걸 이용해 각본을 만드는 겁니다.”
사실, 이건 몇 년 뒤에는 보편적으로 사용되는 각본이었다.
난 그런 방향성을 좀 더 빠르게 이들에게 제시한 것이었다.
“내일 랙다운에서는 제가 테이커를 비겁한 방식으로 습격하는 건 어떻습니까?”
“어떻게?”
“바이크 키를 훔치고, 허둥지둥하던 그를 뒤에서 습격하는 거죠.”
“……재미있군.”
테이커가 짧게 말했다.
“그 정도가 아니라면 제가 테이커를 습격하는 시퀀스는 성립할 수 없을 테니까요.”
“호오, 하지만 테이커는 자기 바이크를 끔찍하게 아끼는데.”
“폴, 그런 설정일 뿐입니다. 쇼를 위해서라면 줘도 괜찮아요.”
“아, 저 바이크 한 번도 안 몰아봤는데 괜찮을까요?”
“……그래.”
테이커의 표정이 굳어졌다.
괜찮은 거 맞나.
“어쨌든, 그렇게 해서 제가 링에 바이크를 끌고 나가 도발하는 겁니다. 그리고 시나가 테이커의 복수를 위해 등장하는 거죠.”
“묘한 그림이겠군. 이전까지 격렬하게 대립했던 시나가 테이커의 복수를 위해 링에 오른다라.”
“턴 페이스의 포석이 될 수도 있겠죠. 전 분명 야유를 받을 테니까요. 그런 상황에서 이전에 테이커와의 대립을 통해 그를 존중하게 된 시나가 복수를 한다는 스토리. 괜찮지 않습니까?”
“이거 원, 생각치도 못하게 우리 선수의 각본까지 정해졌는데.”
“……제가 너무 나선 걸까요?”
“아니, 환상적인 각본이야. 하지만 그렇게 되면 이번 링 서바이벌에서는 버닝콩이 악역이군?”
“그게 좋겠죠. 아니라면 그다음 주에 테이커가 버닝콩에서 절 습격해 오토바이에 매달고 복도를 달리는 씬은 어떨까요?”
“환상적이군! 그거 멋진 그림이겠어! 테이커라면 응당 그 정도 복수는 해줘야 맞는 거겠지!”
“……이 꼬마가 위험할 것 같은데, 꼭 그렇게 해야 합니까?”
“사람들은 테이커 같은 위대한 선수에게 그런 짓을 한 제가 혼나는 장면을 보고 싶어 할 겁니다.”
“…….”
침묵하던 테이커는 포마드를 바른 내 머리를 다시 쓰다듬었다.
그게 그 나름대로 후배를 칭찬하는 방법 같아 나쁘진 않았다.
“좋아! 좋아! 이제 남은 건 바트의 승인을 받는 일뿐이군!”
폴이 신이 나서 소리쳤다.
* * *
역시 혁명가인 폴 헤이건이 수장으로 있는 만큼 랙다운은 보다 효율적으로 일이 진행되었다.
빠른 일 처리를 위해 폴이 바트에게 직접 전화를 걸었다.
그로 인해 생각보다 금방 허가가 떨어져 빠르게 각본이 완성되었다.
그 이후로 선수들과 직원들이 카메라 앵글을 맞춰보거나 하며 일종의 리허설이 이루어졌다.
그 과정에 참여한 나는 생각보다 랙다운이 괜찮은 걸 느꼈다.
바트처럼 편집증적으로 하나하나 확인하는 대신 폴이 직원들을 맡기고 진행하기 때문일까?
하지만 그런 상황을 봐도 딱히 랙다운에 오고 싶은 마음은 들지 않았다.
그 이유는 간단했다.
내가 위로 올라가기 위해 싸워야 할 상대는 바트 맥센이다.
그리고 여기에서는 내가 무슨 짓을 해도 바트가 내 유능함을 알아주지 않을 테니 말이다.
그렇게 버닝콩과는 달리 화기애애한 분위기에서 쇼가 시작되었다.
오프닝 영상이 흘러나간 뒤, 테이커가 분노해 주차장으로 나오는 모습이 화면에 비췄다.
[Yeaaaaaaaah!]
환호하는 관객들.
하지만 그는 답지 않게 크게 흥분한 얼굴이었다. 주변의 직원들을 밀치는 등, 열이 받아 날뛰다가 이내 한 사람을 붙잡고 소리쳤다.
[그 자식 어디에 있어!!]
[예, 예?!]
[그 개자식이 내 바이크 키를 훔쳐갔다고! 빌어먹을 자식!]
바로 그 순간, 테이커의 머리를 기다란 나무토막이 내리쳤다.
화면이 옆으로 돌아 습격자의 모습을 비췄다. 나는 미소를 지으며 열쇠를 들어보였다.
[바로 나야. 테이커.]
“……허.”
오늘 쇼 직전에 촬영한 영상을 보고 있자니, 솔직히 말해서 좀 놀랐다.
내가 저 캐스켓-테이커를 습격에 성공하고, 엿까지 먹이는 각본을 수행하다니.
헌터를 이겼을 때처럼 회사 안에서의 내 위치를 다시 확인하는 것만 같아 기분이 좋았다.
나는 마치 오늘 처음 보는 것처럼 영상을 계속해서 시청했다.
관객들은 나를 향해 GCW 악역 시절처럼 엄청난 야유를 보냈다.
[월요일 날 시나가 했던 것 봤지? 나는 좀 더 멋진 짓을 하고 싶어서 말이야.]
그렇게 중얼거린 나는 피(가짜)를 흘리고 있는 테이커를 몇 번 짓밟고 자리를 떴다.
화면이 테이커를 비췄고, 괴로워하는 그를 뒤로한 채 이내 엔진 소리가 화면을 가득 채웠다.
테이커의 바이크에 탄 내가 선글라스를 쓴 채 모습을 드러냈다.
검은색 할리 데이비슨.
바이크 계의 명품이자 미국 폭주족들의 상징인 바이크였다.
“신, 신호 드릴게요.”
지금 나는 저 영상이 끝나는 순간에 맞춰 링에 입장할 예정이라 바이크를 타고 있는 상태였다.
엔진이 덜덜 떨렸고 이 거대한 머신의 매력이 그대로 느껴졌다.
그런 만큼 걱정도 됐다.
‘어제 테이커한테 대충 배워두기는 했는데 과연 괜찮을까.’
뭐, 별일은 없겠지.
그렇게 생각한 나는 다시 영상을 확인했다. 내가 막 바이크를 몰고 경기장 안으로 들어섰다.
직원이 신호를 주었다.
“5, 4, 3, 2, 1! 지금!”
내 음악이 흘러나왔다.
테이커의 ‘표현’대로 스로틀을 조지고 클러치를 박살낸 나는 그대로 음악을 기다렸다.
고요하던 성가가 덥스텝의 박자를 타기 시작한 순간. 나는 할리를 몰고 커튼 밖으로 달려 나갔다.
[Boooooooooooooo!!]
[Yeeeeaaaaaaaaah!]
야유와 환호가 반반.
관객들은 랙다운에 등장한 버닝콩의 슈퍼스타를 환영하면서도 내 거친 행동은 받아들이지 못했다.
그대로 입장로를 달려 내려간 나는 브레이크를 세차게 당겼다.
할리가 멈췄고, 나는 시동을 끈 뒤 내리기 전 바이크를 끌어안으며 잠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리고 아예 입술까지 맞췄다.
테이커는 이전에 인터뷰에서 말했다. 바이크는 잔소리 하지 않는 애인과도 같다고.
그 바이크를 이렇게 다루는 건 그에게 있어서 크나큰 모욕일 터.
[Booooooo……!]
예상대로 야유가 더 커졌다.
나는 그들을 무시하듯 낄낄거리며 그대로 링 위에 올랐다.
예전에 악역 시절이 생각나 이들의 반응이 정말로 즐거웠다.
그대로 마이크를 쥔 나는 링 위에서 관객들과 호흡을 맞췄다.
“다들 내가…….”
[F-ck you! SIN! F-ck you! SIN! F-ck you! SIN!]
[A-s hole! A-s hole! A-s hole! A-s hole! A-s hole!]
“마음대로 떠들어! 랙다운 겁쟁이들은 여기 안 나올 테니까!”
나는 예전에 존 마이클스가 그랬듯 탑 턴버클에 엉덩이를 대고 그대로 로프 사이에 드러누웠다.
“더 해~ 더~. 나는 여러분의 야유를 들으며 잠이나 자지!”
야유가 좀 줄어들었다.
그래도 다들 내 마이크워크를 듣고 싶다고 원하는 것이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분노 대신 내가 할 이야기에 더 집중을 했다.
피식 웃은 나는 그 위에서 마이크를 쥐고 말을 이어나갔다.
“너희 이건 왜 보러왔어?”
나는 진짜 악역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원래의 캐릭터, ‘무엇이든 하는 뒷골목 출신’이 절묘하게 그 틀에 들어맞았다.
“여기는 2군 쇼잖아. 내가 있는 1군 쇼가 훨씬 더 멋질 텐데!”
하지만 난 관객들을 조롱하거나 하지는 않았다. 말하자면 상황이 날 악역으로 만드는 셈이었다.
테이커를 습격한 것도 적의 전력을 떨어뜨리는 전략 중 하나.
그렇게 보자면 지금 내 행동에 말이 안 될 부분은 없었다.
“월요일에 시나가 그랬듯이, 나는 선전포고를 하러 온 거야. 우리 버닝콩은 링 서바이벌에서 2군 쇼의 멍청이들을 모조리 박살 내고 전승을 약속합니다! 오케이?”
[Booooooooooo!]
“자자, 쇼는 끝났어. 시나의 더럽게 재미없는 경기만 보지 말고 돌아가자고. 집에 가서 내가 나오는 버닝콩을 보고 티셔츠를 사.”
사람들의 야유는 더 심해졌다.
나는 상황을 극한까지 몰아가며 그들의 갈증을 유발했다. 턴버클의 구조물을 떼어내며 얼른 다 끝내고 돌아갈 것을 종용했다.
하지만 시나는 나오지 않았다.
그 뜻을 이해한 나는 피식 웃으며 계속 세그먼트를 이어나갔다.
‘헤이건의 수작이군.’
고릴라 포지션에 있는 그가 나에게 상황을 더 한계까지 몰아붙일 것을 주문한 것이다.
그것을 알아차린 나는 아예 링 아래로 내려가 관객들을 데리고 조련(?)을 하기 시작했다.
이런 순간에 중요한 건 괜찮은 대답을 할 관객을 포섭하는 것.
그런 의미에서 일단 남자는 안 된다. 그냥 재미로 방송에 나가기 힘든 발언을 할 수도 있다.
그런 의미에서 여자도 제외.
여성 노인이나 아이.
그게 최적이었다.
거기다 아이라면 사람들이 우호적으로 느끼기 때문에 최고였다.
나는 바리게이트 바로 뒤쪽에 있는 백인 꼬마에게 다가갔다.
아버지에게 안겨있는 녀석은 시나의 티셔츠를 입고 있었다.
“꼬마 친구, 이번 링 서바이벌에서 누가 이길 것 같아?”
“숀~ 시나~.”
“아니아니, 버닝콩이냐 랙다운이냐. 당연히 버닝콩이겠지?”
“시나~~.”
“오케이, 버닝콩이라는데?”
사람들이 폭소를 터뜨렸다.
여기에서 또 이들의 반응을 우호적으로 만든 나는 계속해서 버닝콩의 힘을 피력해나갔다.
링은 완전히 내 것이었다.
나는 랙다운의 선수들을 하나하나 비하하며 승리를 확신했다.
사람들은 점차 더 갈증을 느꼈고, 그것이 한계에 다다랐다.
나 역시도 이 이상은 좀 위험하다고 생각할 때쯤, 정확한 타이밍에 시나의 음악이 울려 퍼졌다.
[Yeeeeeeeaaaaaahhhh!!!]
지금까지 중에서 가장 큰 환호를 받으며 시나가 나타났다.
그 역시 이번 각본에 대해 잘 이해하고 있는 만큼 사람들의 반응에 손을 흔들며 크게 응답해주었다.
전형적인 선역의 움직임.
‘뭘 좀 아는군.’
나는 싱긋 웃으며 시나가 링에 올라오는 것을 기다렸다.
우리 둘은 월요일과 마찬가지로 다시 대치했다.
하지만 상황은 달라졌다.
이제부터는 내가 악역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