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9.
쇼는 성황리에 막을 내렸다.
그리고 내 아이디어로 링 서바이벌 각본의 방향성이 정해졌다.
버닝콩이 탑독 악역.
랙다운이 언더독 선역.
그렇게 해서 성립된 각본은 업계에서 꽤나 큰 반향을 낳았다.
지금까지 링 서바이벌은 그저 브랜드 간 대진에 의미가 있었다.
하지만 내가 낸 각본은 그 이상의 것을 낳으며 하나의 이야기로서 큰 다양성을 만들어냈다.
여기에 대해 뉴스레터의 기자들은 다음과 같이 평가를 했다.
[이번 주에 깨달았어. 시나는 확실하게 턴 페이스를 할 때야.]
[맞아. JBL에게 테이커의 복수를 하러 간다고 할 때는 확실하게 쇼의 젊은 주인공 느낌이었지.]
[그러는 와중에 테이커는 화가 잔뜩 나서 링에 나와 선수들에게 싸울 시간임을 역설力說했지.]
[그거 하나로 랙다운 하루 각본이 뚝딱. 이 얼마나 멋진가.]
[랙다운에 있는 내 친구 ‘폴’이 말해준 바에 따르면 그런 각본을 제시한 게 또 신이라던데.]
[또? 하, 그 친구는 진짜 업계를 완전히 물 먹이는군.]
[그래?]
[그렇잖아. 기존의 패러다임을 바꾸면서 언제나 더 죽여주는 걸 내놓지. 이걸로 아마 시청자들은 랙다운을 응원하게 될 거야.]
[원래 링 서바이벌은 전반적으로 선수들 반응을 보는 의미가 강했거든? 그런 면에서 보자면 훨씬 더 좋아지게 된 셈이지.]
[악역을 선역 롤로 굴려볼 수 있으니까. 이건 진짜 기존 업계에서 전혀 없었던 방식이지.]
[그리고 확실해졌어. 숀 시나는 다음 레슬 임페리움에서 유니버스 챔피언에 올라야만 한다고.]
[푸하하! 그전에 신이 월드 챔피언을 먹는 게 먼저라고.]
[근데, 이게 생각해보면 참 웃긴 말이야. 우리가 데뷔한 지 1년째인 신인을 ‘월드 챔피언’ 전선에 넣어야 한다고 주장하다니.]
[평균적으로 신인이 메인 이벤터가 될 때까지 적어도 5년은 걸리는데 말이야.]
‘틀린 말은 아니지.’
하지만 맞는 말도 아니다.
신인이 단기간에 메인 챔피언에 오르는 것은 흔하지 않았지만 아예 없던 일도 아니었다.
애초에 신인에게 월드 챔피언을 주지 못하는 이유가 그만한 실력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역으로 말하자면, 실력이 있다면 좋은 각본으로 당장 띄우는 거고.
2001년에 데뷔해서 2003년에 회사를 나간 브룩 레스너가 데뷔 직후 메인에 오른 사례였다.
갓 데뷔한 신인이었던 그는 곧바로 테이커와 같은 위상으로 유니버스 챔피언을 두고 싸웠다.
그래도 사람들은 거기에 대해서 아무런 야유도 보내지 않았다.
설득력이 있기 때문이었다.
레스너는 아마추어 레슬링 최강자 출신에, 거의 대부분의 능력치가 만렙을 찍은 괴수였으니까.
키 196cm, 체중 130kg, 체지방률 10% 초반을 마크하는 비스트.
힘도 좋고, 기술 구사도 잘하고, 경기도 잘 뛰었다.
유일한 단점은 모기 같은 목소리였으나 폴 헤이건이 직접 매니저로 나서며 그 단점을 커버했다.
따라서 나 역시 자격이 있다고 생각했다. 내 반응은 전성기의 레스너에 뒤지지 않았으니까.
‘오히려 나는 말도 잘하니까 더 재미있는 각본을 만들어낼 수 있지.’
이번 각본 역시 멋지게 성공시켜 회사 내에서 인정을 받자.
그렇게 생각한 나는 기운이 도는 걸 느끼며 더 액셀을 밟았다.
차량은 고속도로를 타고 목적지인 시애틀을 향해서 질주했다.
중간 지점에서 하루 자고, 다음 날 아침.
출발하려던 나는 티파니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신, 아직 도착 안 했어요?]
“어디를요?”
[시애틀이요. 우리도 각본 참여하게 되면서 여기 오게 됐는데.]
“……미리 말해주지.”
[뭐에요. 원래 이런 건 몰래 짠! 하고 나타나야 기뻐해서, 응?]
“무슨 말인지 모르겠는데.”
피식 웃으며 그대로 렌트카에 올라타 열쇠를 꽂고 돌렸다.
하지만 어제가 좀 추웠기 때문인지 시동이 쉽게 걸리지 않았다.
가볍게 혀를 차고 일단 차에서 내렸다. 그러자니 티파니의 의아해하는 목소리가 뒤따랐다.
[무슨 일 있어요?]
“별건 아니고, 추워서 그런지 차 시동이 지금 안 걸리네요.”
[무슨 찬데 그래요?]
“이게 어디 차더라.”
[자기 차도 몰라요?]
“빌린 차예요. ……아, 걸렸군.”
단순히 예열 플러그 문제였나.
나는 곧바로 운전을 시작했다.
때문에 그사이에 티파니가 하는 이야기는 사실 반쯤 흘려들었다.
[차가 필요했군요……. 흠.]
* * *
그렇게 시애틀에 도착했다.
고물 렌트카에서 내린 나는 어안이 벙벙한 채 고개를 들었다.
이상한 게 눈앞에 서있었다.
“모터 홈……?”
아니면 ‘캠핑 버스’라고 불리는 거대한 차량이 나를 반겨주었다.
일반적으로 시내를 다니는 버스보다 훨씬 두껍고 큰 사이즈.
그 안에 각종 살림살이며 조리기구, 샤워 시설까지 갖추어놓은, 그야말로 모터 달린 집이었다.
그 바로 앞에 선글라스를 쓴 채 서있던 티파니 맥센이 당황한 날 보며 자신만만하게 웃어보였다.
“어때요?”
“…….”
“많이 놀랐어요? 이거 파는 곳이 없어서 본사 회장님한테까지 전화했지 뭐야.”
티파니가 내 팔을 잡아끌었다.
얼결에 버스에 올라탄 나는 내부 구조를 보고는 더 경악했다.
완전히 호텔이나 다름없었다.
WWF에서 오랫동안 일한 메인 이벤터들이나 탈 법한 차량이었다.
미래의 시나나 오튼, 아니면 현재의 테이커 정도 되는 인물들.
내가 인디 시절에 애덤과 타고 다니던 트레일러 카는 이거에 비하면 거의 똥통 마차 수준이었다.
“여기에 기사님 한 분 모시고 여행하면 편하지 않겠어요?”
“아니, 그…….”
“거기다 안전해요. 침입자를 감지하면 자동으로 침실을 패닉룸으로 만드는 시스템도 있고. 천장에는 태양열 충전기도 달아놨죠.”
머릿속이 새하얗게 물들었다.
진짜, 어.
그동안 내가 힘들여 미국 전역을 이동했던 게 생각이 났다.
좁은 렌트카 안에서 몇 시간씩 차를 몰고 겨우 중간 지점에 도착해 호텔을 찾아서 투숙하고.
사과폰이라도 있었으면 그냥 미리 예약해버릴 텐데! 라고 생각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지.
그런데, 음.
이런 캠핑 버스라면. 으음.
티파니가 웃고 있다.
“좋아요?”
그렇게 물은 그녀는 다시금 내 팔을 끌고 안쪽의 침대로 향했다.
나는 완전히 정신을 놓은 채 그녀에게 밀쳐져 털썩 드러누웠다.
재킷을 벗은 티파니가 내 옆에 털썩 드러누워 팔을 벌렸다.
“침대도 넓죠?”
“…….”
“운전수 하나 고용하면 힘들이지 않고 다닐 수 있겠죠?”
“저기, 티파니.”
“왜요?”
엎드린 채 다가온 그녀는 눈을 반짝이며 내 얼굴을 바라보았다.
나는 냉정하게 대답했다.
“이건 못 받아요.”
“왜요?”
“솔직히 말하죠. 진짜 너무 갖고 싶은데, 내가 너무 받기만 하면 당신에게 너무 미안하잖아요.”
“100만 달러밖에 안 해요.”
“……내 연봉보다 많거든?”
“저한테는 아니에요. 너무 부담스럽게 생각하지 말아요. 내가 당신에게 받은 것에 비하면 이런 버스는 아무것도 아니니까.”
“시계도.”
“……거기까지 따지지 말지?”
“아니, 그런데 내가 뭘 해줬다고 그래요? 정말로 부담스럽…….”
“나에게 목표를 줬잖아요.”
“목표?”
“이건 바트 맥센의 돈이 아니에요. 내가 가진 주식의 배당금을 투자해서 벌어들인 돈이지.”
티파니는 차갑게 말했다.
“내가 가진 WWF 주식의 15퍼센트. 거기에서 매해 떨어지는 배당금이 400만쯤 되요. 나는 그걸 따로 주식 투자로 계속 불려왔고.”
“주식이 그렇게 돈을 벌어?”
“주식이 돈을 잃는 지름길이란 건 개미들에 한해서죠. 거기다 나는 그런 사람들이 모르는 정보를 여럿 확보할 수 있으니까.”
“부르주아로군.”
“타이거 다음에는 날 그런 별명으로 부르는 거예요? 타이거.”
티파니는 슬그머니 내 팔뚝을 가져가더니 거기에 머리를 뱄다.
“그냥……. 당신은 내 꿈이 뭔지 다시 직시하게 해주었으니까.”
“이런 관계가 아니었어도 버스를 줬을 거다?”
“아니, 아니었다면 그냥 연봉 좀 더 챙겨주는 정도였겠지.”
“…….”
“나는 가져야만 베푸는 여자에요. 신. 당신은 그걸 몰라선 안 되지.”
“끄응.”
“왜, 잡혀 살 것 같아?”
“아니, 솔직히 나도 내가 해준 게 뭔지 잘 감이 안 와서.”
“사실 나도 그렇게 생각해요. 그냥 당신 덕분에 요즘 살맛이 난다는 거지. 그리고 재수 없게 들리겠지만, 나에게 있어서 100만은 부담 되는 돈이 아니거든.”
티파니가 눈을 감았다. 그 단정한 외모에 순간 눈길이 갔다.
“당신도 그렇듯, 나도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한 거죠. 다른 사람 눈치는 보지 말아요. 난 당신을 통해 모든 걸 가져갈 테니까.”
“어떤…….”
“이 회사를 가질 거예요. 그리고 내가 원하는 걸 만들 거야.”
“옛날의 락커룸?”
“네, 그때는 정말…… 모든 게 너무 즐거웠는데. 하지만 나는 바보에 너무 어려서…… 다들 힘들어 하고 있다는 사실도 알지 못했죠…….”
거기까지 이야기한 그녀는 어느새 색색 숨을 쉬며 잠에 빠져들었다.
나 역시 팔을 빌려준 채 가만히 눈을 감았다.
고요한 캠핑 버스.
확실히 죽여주는 시설이다.
이런 걸 거절하면 바보겠지.
……그러니까 그냥 받자.
렌트카로 다닐 때는 솔직히 말해서 컨디션 관리가 힘들었다.
이게 있으면 몸도 더 좋아지고 그만큼 멋진 모습을 보여줄 수 있겠지.
나 역시 목표가 있다. 그걸 위해서 부담감은 잠시 내려놓자고.
‘같이 여행하기에 괜찮은 양반들 몇 명 모아서 같이 다니고.’
그렇게 해서 차량 유지비를 나눠 낸다면 실질적으로 나는 이 차를 거의 공짜로 타게 되겠지.
바로 그때였다.
[와, 뭐야. 이거?]
누군가 바깥에서 탄성을 내뱉는 소리가 이어졌다. 나는 티파니가 깨지 않게 슬쩍 귀를 가려줬다.
[야, 이런 버스 한 대만 있으면 진짜 여행하기에 편하겠는데!]
……좀 익숙한 목소린데.
눈썹을 찡그리자니 이어 누군가 허락도 없이 안으로 들어왔다.
‘어?’
그 모습을 본 나는 정말로 흔치 않게 당황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바쿠, 할리, 러셀.
GCW의 동료들이었다.
“……??”
“어, 신이잖아~!”
나는 너무 놀라 저도 모르게 티파니를 반대편으로 밀어냈다.
“후끼약?!”
이불에 돌돌 말린 그녀가 쿵! 하고 떨어졌다. 나는 심장이 세차게 뛰는 걸 느끼며 벌떡 일어났다.
“아니, 셋 다 여긴 왜……!”
“어? 일 때문에 왔지.”
“소식 못 들었어?”
다가온 러셀이 날 와락 끌어안았다. 나는 식은땀이 삐질삐질 흐르는 걸 느끼며 뒤를 돌아봤다.
“으, 으으……. 뭐예요?”
이불을 뒤집어쓴 채 자리에서 일어서는 티파니.
러셀이 날 보더니 다 이해했다는 듯이 씨익 웃어 보였다.
아니, 네가 생각하는 그런 거 아니야. 인마. 정말로 아니라고.
내가 복잡한 얼굴로 바라보자 러셀이 뒤돌아섰다. 나는 그를 따라 나가며 문 옆에 붙어 있던 버스의 방범 장치를 가동시켰다.
철커덩! 쾅!
침실은 패닉룸이 되었다.
“근데 이거 네 캠핑카냐?”
“죽이는데~.”
“할리, 여기 봐요. 샤워 시설도 아주 죽여주는데요. 거품 목욕까지 가능한 욕조가 포함되었다고.”
“와, 해보고 싶은데!”
그사이 러셀 선생님께서 은혜를 베푸셔서 할리와 바쿠의 시선을 잔뜩 끌어주고 계셨다.
콩콩, 티파니가 패닉룸의 문을 두드려서 나는 말을 속삭였다.
“이, 일단 안에 있어요.”
[다들 온 거 아니에요?]
“우리 둘이 지금 침대 위에서 있던 거 알면 뭐라고 생각하겠어?”
[아~.]
“아니, 근데 대체 뭐에요? 왜 갑자기 다들 여기에 있어?”
[아까 전화로 말했잖아요. 우리도 일 때문에 여기에 와있다고.]
“난 그게 할리나 바쿠도 있을 거라고는 전혀 생각 못했지!”
[러셀이 온 거예요.]
“뭐?”
[이번 링 서바이벌에 러셀도 참가할 예정이거든요.]
“…….”
나는 순간 할 말을 잃었다.
고개를 돌리자 거품 목욕을 체험하기 위해 셔츠를 벗고 있는 바쿠의 모습이 보였다.
그는 자신의 가슴을 부끄러운 듯이 가리며 날 돌아보았다.
“아, 써도 되냐?”
“…….”
오늘은 왜 이렇게 예기치 못하게 좋은 일이 많이 벌어지지.
* * *
이러한 일이 없지는 않았다.
버닝콩, 랙다운에 이어 제3의 브랜드가 링 서바이벌에 참가해 삼파전이 되는 경우 말이다.
하지만 그건 2020년쯤에 벌어지는 일이었다. 그때쯤 생겨난 산하 브랜드가 성장했기 때문이었다.
‘MXT였지.’
브랜드 간의 선역, 악역을 구분지어 대립하는 것 이후로 또 한 번 일어난 링 서바이벌의 변화.
사람들은 이 제3브랜드의 등장에 크게 열광했고, 그 해의 링 서바이벌은 MXT가 승자가 되었다.
러셀의 링 서바이벌 참가는 어찌 보면 그 예고편과도 같았다.
‘나쁘지 않겠어.’
티파니 맥센이 직접 추진한 이 프로젝트는 바트의 승인을 받고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문제가 하나 남았다.
과연 현재 GCW 챔피언인 러셀 하트는 어디를 상대할 것인가.
같은 메인 챔피언인 월드 챔피언, 유니버스 챔피언과 삼파전?
아니면 GCW 시절 함께 했던 동료인 신, 숀 시나와 붙는다?
어느 쪽도 매력적인 경기였다.
다들 그에 관해 이래저래 말이 많은 가운데, 나는 어렵지 않게 답을 내릴 수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