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0.
GCW의 합류로 인해 각본은 원래 예정에서 훨씬 더 벗어났다.
하지만 확실하게 나아졌다.
이게 WWF의 방식이었다.
우리는 언제나 더 나은 방향이 생기면 그 길을 따라 움직였다.
‘그걸 정하는 최종결정권자가 바트 맥센이라 좀 그렇긴 한데.’
이번에는 잘 풀렸다.
러셀의 합류로 인해 GCW는 좀 더 대중들의 관심을 받을 수 있게 될 터였고, 각본 역시 좋았다.
GCW를 키우고자 하는 티파니 맥센이 과거의 적수였으나 챔피언인 러셀과 함께 올라온다니.
사람들이 좋아할 수밖에 없는 이야기. 거기에 그것은 여러 가지 가능성으로 뻗어갈 힘이 존재했다.
내년에는 정말 미래에 그랬던 것처럼 GCW도 링 서바이벌에 정기적으로 참가할지도 모르지.
어쨌든 일이 그렇게 흘러가는 만큼 일정은 더 타이트해졌다.
옛 동료들과 재회한 다음 날.
나는 러셀, 티파니와 함께 주차장에서 사람을 기다리고 있었다.
랙다운 팀의 선수들이었다.
오늘은 그들과 함께 백스테이지 세그먼트를 촬영할 예정이었다.
그런데 도착이 좀 늦었다.
자연히 대화의 흐름은 러셀의 추궁(?)으로 이어졌다.
“언제부터 그런 거야?”
“……아니.”
당황해 옆을 돌아보자 티파니는 시선을 피하고 있는 상태였다.
“둘이 분위기가 나쁘지 않다는 건 인지하고 있긴 했는데.”
여기서는 대답을 잘해야 한다.
당사자인 티파니 님이 바로 옆에서 듣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를 어쩐다.
적당히 너무 부정도 긍정도 하고 싶지 않은 상황이었지만 티파니의 의사가 어떤지 모르는 걸.
그렇게 생각한 나는 이내 슬그머니 티파니의 손을 쥐었다.
차가운 손을 내 코트 주머니로 당기며 슬쩍 눈빛을 보냈다.
새침하게 바라보는 눈을 보자니 이제 적당히 대답해도 되겠지.
“서로 알아가는 단계야.”
“허어.”
다행히 손을 잡았기 때문인지 티파니는 이런 애매한 대답도 용서를 해주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러셀은 눈치가 빨랐다.
“손이 제법 차갑나보네.”
“……야, 인마.”
“푸하하하! 네가 당황하는 모습은 처음 봐서 되게 재밌는데!”
녀석은 호쾌하게 웃었다.
거기에 당황해 뭐라 대답하려던 순간, 주차장으로 차가 들어왔다.
거대한 픽업트럭이었다.
그 안에 타고 있는 건, 나와 SNL에 함께 출연한 빅 죠였다.
지난 번 랙다운에는 감기가 심하게 걸려 참가하지 못했더라니.
“신! 티파니!”
“죠, 몸은 좀 어때요.”
“아~ 괜찮아.”
죠는 거대한 픽업트럭 안에 프레스 햄처럼 구겨져 있었다.
그 뒤로 도착하는 선수들 대부분 긴 여행으로 지친 모습이었다.
그런 상태에서 그들은 짐을 챙겨서 경기장 안으로 들어갔다.
그렇게 대부분의 선수들이 도착하고 마지막으로 거대한 캠핑 버스가 주차장 안으로 들어왔다.
그 안에서 내리는 테이커의 얼굴을 본 티파니가 앞으로 나섰다.
“삼촌!”
……삼촌?
살짝 의아해 바라보자 테이커는 티파니를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아가씨, 오랜만입니다.”
“하하! 잘 지내셨어요?”
“즐겁게 일하고 있습니다. 한 번쯤은 랙다운에 또 와주시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안 오시더군요.”
“일이 바빠서니 이해해주세요.”
“오, 아가씨!”
“아가씨!”
테이커의 뒤를 따라 내린 랙다운의 고참 급 선수들이 티파니와 즐거운 듯 인사를 나누었다.
앞선 선수들과 달리 그들은 얼굴이 다들 좋아보였다. 그것을 본 나는 납득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버스는 필요하겠어.’
그렇게 촬영 준비가 끝났다.
* * *
가장 첫 번째 촬영은 바로 테이커가 나를 습격하는 씬이었다.
그 뒤를 이어 랙다운 선수들이 나타나 버닝콩의 백스테이지를 습격하는 장면을 찍을 예정이었다.
경기장 내부의 복도.
카메라 감독이 나와 우리에게 각본에 따른 연기 지도를 했다.
세그먼트에 나올 인물은 나, 테이커, 마지막으로 러셀까지 셋.
“신, 복장은 좀 어때요.”
“든든합니다.”
나는 지금 안감을 덧댄 가죽 재킷을 하의와 고정해둔 상태였다.
거기에 청바지 안쪽에도 가죽을 덧댄 바지를 더 입어서 행여나 있을 사고에 미리 대비를 했다.
“일단 신이 출근을 합니다. 그리고 테이커의 바이크를 발견해 불길한 기운을 느끼고 멈춰선 찰나, 테이커가 뒤에서 기습하는 거죠.”
카메라 감독은 바이크가 세워져 있는 복도 방면을 가리켰다. 바닥이 푹신해 보여서 안심이 됐다.
“그리고 고무 로프로 다리를 묶은 뒤 저쪽 방향으로 끌고 한 바퀴 달리시면 됩니다. 카메라도 다 대기하고 있으니 바로 들어가죠.”
그렇게 촬영이 시작되었다.
“큐!”
감독의 외침에 문 뒤에 서있던 나는 천천히 안으로 들어섰다.
카메라와 직원들, 선수들이 모두 나의 촬영을 지켜보고 있는 상황.
난 거기에 대해 신경을 끄며 주변을 확인했다.
그리고 이내 선글라스를 슬쩍 내리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게 뭐야?”
불길하게 서있는 검은 할리.
그 앞으로 다가간 나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불안감을 표시했다.
그리고 다음 순간.
“끄헉?!”
뭔가 등을 세차게 내리쳤다.
나뒹굴며 쓰러진 내 앞으로 성큼성큼 다가온 테이커가 분노를 터뜨렸다.
그는 손에 들고 있던 빠루를 내던졌다. 땡그랑! 하는 날카로운 소리가 빈 오디오를 채워주었다.
“이 새끼가 내 애마를……!”
“크헉?!”
그 손에 이끌려 일어난 나는 그대로 벽에 다시 내동댕이쳐졌다.
테이커는 날 무자비하게 짓밟더니, 이내 내 다리에 고무 로프를 휘감았다.
바닥에 쓰러져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던 나는 그 사실을 알아채지 못했고.
부르릉-!
불길한 소리에 눈을 떴을 때 테이커는 이미 바이크의 스로틀을 힘차게 당긴 뒤였다.
“안 돼……!”
등이 힘차게 당겨졌다.
다리부터 거대한 청소기에 빨아 당겨지는 듯한 큰 충격이 찾아왔다.
가죽을 덧댄 엉덩이와 재킷에서 불길한 소음이 나기 시작했다.
이를 악문 나는 머리를 들며 달리기 시작한 바이크를 향해 손을 뻗으며 연기를 계속했다.
스쳐지나가는 풍경.
테이커는 있는 힘껏 속력을 높였다. 다행히도 커브가 깊지 않아 몸이 ‘뒤집어지는’ 최악의 사태 같은 건 발생하지 않았지만.
“크아아아아아아악!!”
나는 있는 힘껏 비명을 내지르며 내 고통을 과장해 연기했다.
그렇게 경기장 한 바퀴를 다 돌고 돌아온 나는 준비되어 있던 매트리스 벽에 충돌해 겨우 멈췄다.
“끄윽…….”
“컷!”
감독이 기분 좋게 소리쳤고, 기다리던 선수들이 내게 다가왔다.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머릿속이 빙빙 돌아서 마지막에는 거의 연기하는 걸 잊었다.
그냥 직원들이 내 발에 묶인 고무 로프를 벗겨내는 걸 기다렸다.
그리고 그들 사이로 다가온 테이커가 내게 손을 내밀었다.
“잘했다. 꼬마.”
“대단하십니다, 선배님. 멋진 운전이었어요.”
그는 마지막에 멋진 브레이크를 걸며 옆으로 틀어 내가 매트리스에 잘 충돌할 수 있도록 도왔다.
나는 그의 손을 잡고 일어나며 이야기했다. 테이커는 아마 보기 드물게 미소를 지었다.
“널 죽일 순 없으니까.”
촬영은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그 뒤로 선수들이 모여 락커룸 앞에서 한바탕 서로 주먹질을 해대며 싸우는 걸 촬영했다.
오디오가 번잡한 가운데, 테이커는 내가 마음에 들었는지 각 선수들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었다.
“더즐리 저 녀석을 조심해라.”
그는 두툼한 살집을 자랑하는 버바 렉 더즐리를 가리켰다.
그는 더즐리 보이즈라는 가족 단위 태그 팀으로 하드코어한 경기를 즐겨 하는 선수였다.
“저 녀석은 공격을 살살 하는 법이 없어. 만약 같이 일하게 되면 나에게 와서 이야기해라.”
“저도 똑같이 갚아주죠, 뭐.”
웃으며 받아치자 테이커는 아무 말 없이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역시 생각하던 대로의 선수였다.
그는 헌터나 팍처럼 야망이 있다기보다 이 회사와 프로레슬링 자체를 사랑하는 남자였다.
남자끼리 모여서 여행을 하며 생기는 유대감 같은 걸 좋아했고, 그 자리에 함께 있기를 좋아했다.
그렇기에 40년이 넘게 현역으로 있으며 전설을 남긴 거겠지.
그런 생각대로 테이커는 촬영이 끝나자 곧장 더즐리를 불렀다.
그리고 그에게 얻어맞은 버닝콩의 선수, 쟈니 에이스를 불러왔다.
나는 흥미가 생겨 무슨 일이 벌어지나 잠시 지켜보았다.
그는 먼저 더즐리를 바라보며 진중한 목소리로 경고했다.
“더즐리, 동료 선수는 네게 있어 재산과도 같은 거라고 몇 번을 말 하냐. 좀 조심해서 일해라.”
“죄송합니다. 테이커.”
“쟈니, 미안하다. 이 녀석도 나쁜 뜻이 있어서 그런 건 아니니까 크게 담아두지 마라.”
“예, 옙!”
테이커를 사이에 두고 잠시 서로를 바라보던 더즐리와 쟈니가 자연스럽게 악수를 나누었다.
멋진 카리스마다.
더즐리의 자존심을 생각해 자신이 대신 사과를 건네 분위기를 좀 더 부드럽게 만들었다.
‘저건…… 배워둬야겠어.’
역시 제대로 된 락커룸 리더 하나가 분위기를 주도하는군.
덕분에 다들 피곤한 상태에서도 촬영은 큰 잡음 없이 계속되었다.
카메라 감독이 세세하게 선수들의 공격 장면을 하나하나 찍은 뒤, 마지막 촬영에 들어갔다.
내가 다시 고무 로프에 발이 묶여 자리에 벌러덩 드러누웠다.
문 바깥에는 속이 텅 빈 종이 박스와 공업용 알루미늄 파이프가 한가득 쌓여 있었다. 나는 이제 저기에 충돌할 예정이었다.
“큐!”
감독의 신호와 함께 테이커가 천천히 바이크를 몰고 나갔다.
코너를 돌아서 카메라에 찍히며 속도가 높아졌지만 버틸 만했다.
그렇게 큰 문을 빠져나간 테이커가 아까처럼 바이크를 멈췄다.
옆으로 몸이 돌게 된 나는 그대로 종이 박스 더미에 충돌했다.
알루미늄 파이프가 내 몸과 바닥 위로 마구 흩어져 떨어지며 동시에 시끄러운 소리를 냈다.
시동을 끄고 바이크에서 내린 테이커가 그대로 내게 다가왔다.
그는 아까처럼 손을 뻗었으나 이번에는 목을 붙잡혔다.
“사람 잘못 건드렸어.”
“크흑……! 끄윽!”
나는 힘껏 발버둥 치며 테이커의 손에서 빠져나가려고 했다.
절체절명의 순간.
뻐억-!
둔탁한 소리와 함께 충격을 받은 테이커가 한쪽 무릎을 꿇었다.
러셀의 깜짝 등장.
목을 움켜쥐고 기침하던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소리쳤다.
“러셀?!”
“아직 안 끝났어! 신!”
녀석이 철제의자를 들어 다시 테이커의 등을 내리쳤다. 그사이 나는 고무 로프를 풀어냈다.
하지만 테이커도 호락호락한 상대는 아니었다. 공격을 견뎌낸 그가 러셀의 목을 움켜쥐었다.
“크흑?!”
“넌 또 뭐야!”
그때쯤 로프를 다 풀어낸 나는 달려가 테이커의 등을 공격했다.
러셀과 나는 합을 맞춰 휘청거리고 있는 괴물을 마침내 쓰러뜨렸다. 경기장의 철골 구조물에 처박힌 테이커가 완전히 침묵했다.
지친 듯이 거칠게 숨을 몰아쉬던 나는 이내 한마디를 내뱉었다.
“이런 괴물이…….”
“정말 다행이야, 신. 내가 아니었으면 완전히 박살 났겠는데?”
“그러고 보니 너, 여기는 대체 무슨 일로 온 거야? GCW는?”
“그 GCW 때문에 온 거야.”
“뭐? 왜?”
내가 그렇게 말한 순간이었다.
갑자기 내 목 뒤를 붙잡은 러셀이 날 반대편 철골 구조물에 처박았다.
투콰앙!
“커흑?!”
기습을 당한 나는 고통에 몸부림치며 그대로 바닥에 쓰러졌다.
그러자 뒤쪽에 놓아두었던 GCW 챔피언 벨트를 가져온 러셀이 날 내려다보며 미소를 지었다.
“미안, 신. 하지만 딱히 악감정이 있어서 하는 행동은 아니야.”
결국 마지막 승자는 러셀이었다.
그는 완전히 박살이 난 테이커와 나를 놔두고 자리를 떠났다.
잠깐의 침묵.
“컷!”
감독의 외침과 함께 테이커와 나는 동시에 고개를 들었다.
눈이 마주쳤고, 우리는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웃음을 터뜨렸다.
자리에 드러누운 테이커는 얻어맞은 턱을 매만지며 중얼거렸다.
“제기랄, 너무 심하잖아.”
“이 정도는 해야 캐스켓-테이커를 쓰러뜨릴 수 있겠죠.”
나는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 테이커에게 손을 뻗었다. 그가 그것을 잡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감독 역시 마음에 든다는 듯 우리 두 사람의 곁으로 다가왔다.
“아주 좋았어. 내가 여기에서는 재촬영을 자주 하는 편인데, 두 사람 모두 정말로 멋진 연기여서 그럴 필요가 없겠어.”
“이 꼬마 녀석이 제 앞에서도 겁먹지 않고 일을 잘하더군요.”
테이커가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빠져나갔던 러셀도 어느새 돌아왔고 감독은 그 역시도 칭찬을 했다.
“자네도 아주 좋았어. 역시 자네 캐릭터는 신과 함께해야 확 살아난다는 느낌이야.”
“저도 오랜만에 짓궂은 연기를 할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야야, 그래도 적당히 해야지, 그렇게 세게 던지면 아프잖아.”
“하하하, 말했듯이 악감정은 없었어, 신. 우리 사이를 생각하면 살살 하는 게 더 이상하잖아?”
“확실히 그 말대로군.”
테이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나와 러셀을 번갈아 바라보더니 이내 몸이 근질근질한 듯 서있는 시나를 손으로 가리켰다.
“우리 꼬마가 저러는 걸 보면 역시 신, 러셀, 시나의 트리플 스렛이 가장 좋은 경기가 되겠어.”
역시 통찰력이 있군.
나는 싱긋 웃으며 생각했다.
확실히 기존의 드라마를 끌어올 수 있다는 점에서 그게 나았다.
세그먼트를 이렇게 찍어버린 이상 그게 더 자연스럽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