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1.
그렇게 시작된 버닝콩.
백스테이지 세그먼트 영상이 모두 흘러나간 뒤, 가장 처음 링에 입장한 것은 러셀 하트였다.
허리에 GCW 챔피언 벨트를 휘감은 녀석은 환한 미소와 함께 링 위로 올라가 반응을 유도했다.
[Yeaahh!]
적당히 호응해주는 관객들.
내가 예상한 대로였다.
처음부터 좋은 반응을 받아버리면 오히려 이후 세그먼트에서 분위기를 올릴 수가 없게 된다.
따라서 테이커를 습격하는 씬을 만든 것이었다. 관객들은 러셀의 등장에 의아함을 느낄 터였다.
‘흐름이 어긋났으니까.’
지난 주 랙다운의 흐름으로 보자면 관객들이 바라는 것은 랙다운 선수들의 시원한 복수였다.
그렇기에 그것을 방해하면서 나타난 러셀에 대해 다들 조금 미묘한 반응을 보여준 것이었다.
테이커가 워낙에 리스펙을 받는 거물급 선수라 그를 공격한 것에 대해 싫어하는 것도 있었고.
그렇기에 시나를 준비했다.
‘WORD LIFE.’
어깨를 들썩이게 하는 랩 음악이 울려 퍼지자 사람들은 피켓을 들어 올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Yeeeeeeeeeeaaaaaaaahhh!!]
반응이 훨씬 좋았다.
살짝 의외일 정도로.
‘저 정도야?’
U.S. 챔피언 벨트를 찬 시나가 특유의 악동 같은 모습과 함께 링 위로 나와 반응을 이끌어냈다.
자물쇠에 사슬을 엮어 목걸이처럼 차고 있는 녀석은 악역이었음에도 사람들의 환호를 받아냈다.
그간 수많은 선수들과 대립하며 커리어를 쌓아왔기 때문이었다.
‘애송이’의 성장은 좋은 드라마다. 시나는 그동안 패배해도 위상이 쌓이는 대립을 해왔다.
그렇기에 두 사람이 마주 서자 사람들은 시나 쪽에 조금 더 힘을 실어 환호를 보내주었다.
[러셀, 러셀, 러셀 하트!!]
[시나.]
[GCW 챔피언이 여기에는 무슨 일로 온 거지? 그것도 우리 쪽 대장까지 공격해가면서 말이야.]
[테이커라면 평화 속에 영면했겠지. 나는 여기에, 하고…….]
[Boooooooooooooooooo!!]
테이커에 대한 모욕을 들은 관객들이 어마어마한 야유를 보냈다.
마이크워크를 이어가기 힘들 정도였다. 러셀이 마이크를 입에 대자 관객들은 더 크게 야유했다.
당황한 듯 관객들을 돌아보는 러셀. 시나 역시도 입을 다물고 그들의 눈치를 잠시 살폈다.
고릴라 포지션에서 지켜보고 있던 직원들이 한숨을 내쉬었다.
프로레슬링에 흔히 있는 일.
허나 이렇게 시간이 끌리면 예정했던 방송을 소화할 수가 없다.
그것을 세그먼트를 줄이거나 중간을 쳐내는 식으로 극복했다.
‘하지만 그건 재미가 없지.’
이것도 내가 예상한 대로였다.
나는 그렇기에, 쇼가 시작하기 전 시나와 러셀을 불러 세세하게 지시를 내려둔 상태였다.
일이 이렇게 되면 시나가 먼저 마이크를 들라고 말이다.
[나와 똑같은 말을 하는군!]
그러자 놀라울 정도로 고요해지는 관객들. 거기에는 시나의 목소리에서 나오는 힘 또한 있었다.
[테이커가 평화 속에 영면했다고? 나도 그러려고 했지! 하지만 그건 불가능했어. 그 남자는 데드맨이니까 절대 죽일 수 없지.]
[Waaaaaaaaaaaagh!]
환호한 관객들이 뒤를 이어 테이커의 이름을 연호하기 시작했다.
[랙다운 역시 그래! 우리는 쓰러지지 않는다! 링 서바이벌에서 승리해 너희들을 내려다보겠지!]
[멋진 이야기로군. 시나.]
러셀이 가볍게 웃었다.
[나도 솔직한 마음으로 랙다운이 이겼으면 좋겠어. 내가 참가할 경기는 빼놓고 말이야.]
[네가 경기에 나선다고?]
[그래, 어느 경기에 참가할 것인지는 아직 정해지지 않았지만.]
러셀의 말을 들은 관객석이 크게 술렁이기 시작했다.
갑작스러운 GCW 챔피언의 링 서바이벌 참전 선언.
거기에 맞춰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내게 신호가 떨어졌다.
“신, 지금입니다.”
“좋았어.”
근질근질하던 참이었다.
내 음악이 시작되었다.
양 뺨을 가볍게 후려친 나는 마이크를 들고 곧장 입장로 위로 나섰다.
관객들은 나에게 시나 못지않은 맹렬한 환호를 보내주었다.
[Yeeeeeeeeeeaaaahhhhh!!]
[SIN! SIN! SIN! SIN! SIN!]
덥스텝의 박자와 함께 이어지는 관객들의 맹렬한 챈트.
하지만 나는 그다지 상태가 좋지 못했다.
테이커의 공격, 그리고 러셀의 마무리까지.
나는 최악의 몸 상태였다.
붕대를 감은 어깨를 움켜쥔 나는 다리를 절뚝거리며 이내 챔피언 벨트를 힘차게 들었다.
“이게 버닝콩의 챔피언이다!!”
[Yeeeeeaaaaahhhh!!]
랙다운에서 악역 포지션을 잡았지만 나는 아직 선역이었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우리를 악역으로 보겠지만 여기는 달랐다.
버닝콩의 관객들은 당연히 이곳의 선수를 응원할 테니까.
“지금 내 링 위에서 뭘 하는 거야? 당장 내려와서 내 앞에 예를 갖추란 말이다! 자식들아!!”
“기운도 좋네.”
“사실 좀 죽을 것 같은데. 너희 두 놈이 왔으니 내가 약한 모습을 보일 수는 없지 않겠어?”
내가 링 위로 올라서자 시나가 벨트를 들고 앞으로 나섰다.
“네 버닝콩은 이제 끝났어.”
영상 하나가 흘러나왔다.
나는 입장로 위에 설치된 초대형 스크린을 의아해 돌아보았다.
[보이냐. 애송이.]
빅 죠와 와이엇이 낄낄거리며 날 비웃었다. 그 아래에는 버닝콩의 선수들이 쓰러져 있었다.
나는 마이크를 들었다.
“이걸로 끝났다고 생각하냐?”
그 순간에 맞춰 그렉 하트와 카인이 난입해 빅죠와 와이엇을 상대하기 시작했다.
격하게 주먹을 주고받으며 카메라 바깥으로 빠지는 네 사람.
나는 러셀을 돌아보았다.
“네 삼촌이 솜씨가 멋진데?”
“그러게.”
“이유나 물어보자. 여기는 대체 무슨 일로 온 거야.”
우리는 세 명의 카우보이였다.
미국 깃발을 형상화한 플레이트가 장착된 U.S. 챔피언 벨트.
GCW의 로고가 크게 새겨져 있는 GCW 챔피언 벨트.
그리고 마지막으로 흰색 재질이 매력적인 인터컨티넨탈 벨트.
1년 전만 해도 GCW에서 서로의 성공을 빌어주던 우리는 이곳에서 다시 적으로 만났다.
러셀이 여유롭게 이야기했다.
“말했잖아. 링 서바이벌에서 이겨서 GCW로 돌아가겠다고.”
“그새 그런 룰이라도 생겼나? 내가 GCW의 챔피언이었을 때는 그런 거 없었는데.”
“너도 ‘좋아하는’ 티파니 맥센의 명령이야. 요새 쇼에서 그녀는 정말 멋진 모습을 보이고 있지.”
“…….”
이 자식이.
예정에도 없는 말을 했겠다.
나는 살짝 표정이 굳어져 러셀을 바라보았다. 시나와 러셀은 낄낄 웃으며 날 놀렸다.
두 사람 다 처음과 달리 이제는 링에 완전히 익숙해진 모습.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게 따지자면 넌 메인 챔피언십에 나가는 게 맞지 않아?”
“글쎄, 그게 맞긴 하지만 나는 우릴 바라봐주는 사람들의 의견을 한번 듣고 싶은데.”
러셀이 선역으로서 관객들을 보며 반응을 유도했다.
“우리 셋은 GCW 동기로, 2년 전에 만나 이곳에 올라올 때까지 계속해서 함께 일을 해왔지.”
“그래서?”
“그럴수록 궁금한 게 있더군. 과연 우리 셋 중 현재 시점에서 가장 강한 건 누구일까?”
러셀이 시나를 바라보았다.
“닥터 Thug인 시나일까.”
나를 돌아보았다.
“아니면 버닝콩을 항상 뜨겁게 달구는 신일까.”
마지막으로 관객들을 향해 벨트를 들어 올리며 소리쳤다.
“그것도 아니면 GCW 챔피언인 나일 수도 있겠지!”
확실히 매력적인 스토리다.
신인으로 처음 만난 세 사람이 각자 챔피언 벨트를 가지고 링에서 만나 겨룬다니 말이다.
사람들은 그런 러셀의 동기를 듣고는 힘차게 자신들의 의사를 표현하기 시작했다.
[YES! YES! YES! YES! YES!]
“어디 한번 붙어보자고! 링 서바이벌에서 말이야!”
[YES! YES! YES! YES! YES!]
“꽤나 재미있는 생각인데.”
앞으로 나선 시나는 싱긋 웃으며 내 쪽을 돌아보았다.
“하지만…… 오늘은 복수를 위해 이곳에 온 거라서!”
녀석이 갑작스레 날 습격했다.
근육질의 시나는 달려드는 것만으로도 그림이 되었다.
벨트를 던진 녀석이 내 얼굴을 후려쳤고, 나는 뒤로 나가떨어지며 한 바퀴 굴렀다.
[Waaaaaaaaagghhh!!]
관객들이 환호하는 가운데 이번에는 러셀이 시나를 습격했다.
배를 걷어찬 뒤 멋지게 뒤로 돌아들어 저먼을 시도했다.
그리고 그대로 뒤편에서 시나의 배에 팔을 둘러 안으며 동시에 내던졌다.
투콰앙!
자리에서 일어서며 러셀이 시나에게 잠깐 한눈이 팔렸고.
나는 그때를 노려 녀석에게 슈퍼킥을 먹였다.
쫘악!
그렇게 서로가 서로에게 시그니처 기술을 한 방씩 먹인 뒤, 나는 쓰러진 두 사람을 링 밖으로 내던졌다.
여기는 버닝콩이다.
그러므로 랙다운 선수들의 습격에 만신창이가 되더라도 가장 마지막에 서있는 건 나여야 했다.
* * *
쇼가 끝난 뒤.
우리는 도시를 떠나지 않고 일단 하룻밤 여기서 자기로 했다.
티파니 맥센의 권유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선수들과 관객들이 대부분 돌아간 가운데, 우리는 저녁을 먹고 캠핑 버스에 도착했다.
시나가 눈을 반짝였다.
“와…….”
“편하게 있어.”
“티파니 아가씨께 감사하지.”
러셀은 그렇게 이야기하고 냉장고에서 비타민 음료를 꺼냈다.
“뭐, 맥센 아가씨?!”
“그래, 그렇게 됐다.”
이렇게 된 이상 놈들 앞에서 뭔가를 숨기는 건 힘들어 보였다.
한숨을 내쉰 나는 체리 맛을 한 모금 들이키며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일단 복기를 했다.
“오늘은 다들 멋졌어.”
“우리 셋이 링 위에서 마주한 게…… 얼마만이지, 러셀?”
“1년쯤 됐나.”
“시나는 캐릭터가 바뀌었고, 러셀은 도전자에서 위대한 GCW 챔피언으로 여기에 왔군.”
“나, 나도 벨트 있어.”
시나가 자신의 벨트를 들었다.
링 아래의 녀석은 역시 사람이 좀 다르다 싶을 정도로 순진했다.
러셀이 미소를 지었다.
“무척 좋은 일이지. 다들 각 브랜드에서 한자리씩 꿰찼으니까.”
“그래서 러셀, 너는 대체 언제쯤 위로 올라오는 거야?”
“내년쯤이 되지 않을까?”
“킹스 럼블에서?”
“아마도?”
고개를 갸웃거리는 러셀.
하긴, 녀석은 현재 GCW의 탑 가이니까 콜 업 여부를 정하는 것조차 쉽지는 않을 터였다.
“어쨌든 경기 잘 해보자고.”
“너희라면 걱정 없지!”
시나의 외침과 함께 한바탕 웃은 우리는 가볍게 건배를 했다.
이후로는 간단하게 이야기를 나누며 티파니가 오기를 기다렸다.
주로 질문이 들어왔는데, 시나와 러셀은 티파니와 나의 관계에 대해 무척 궁금해하는 눈치였다.
원래 이런 건 서로 잘 물어보지 않는 게 이쪽의 관습이었지만.
놈들은 언제나 리더십을 발휘하는 내가 당황해하니, 계속 파고들고 싶어 하는 눈치였다.
“그냥 알아가는 단계라니까.”
“에이, 티파니 쪽은 아닌 것 같은데. 이렇게 멋진 캠핑 버스까지 선물해주고 말이야.”
“아니…….”
나는 슬쩍 시선을 돌렸다.
“정말 멋진 건 그녀겠지.”
“와, 오그라들어.”
“너 미쳤구나?”
“이 자식들이…….”
나는 뺨이 붉어진 채로 투덜거렸다.
솔직히 말했을 뿐이다.
WWF는 그 크기에 비해 선수 복지가 열악한 편에 속했다.
하지만 ‘지금’의 티파니는 전생에 내가 알던 그녀와 다르게, 그에 대한 개혁을 꿈꾸는 듯했다.
나에게 버스를 준 이유도 단순히 애정의 표현뿐만 아니라 그걸 시험하는 측면도 있겠지.
나에게 차를 사줘서 자기 아버지에게 은근히 어필하는 거다.
‘선수들 적당히 굴리고, 굴릴 거면 제대로 쉴 시간 좀 주라고.’
그렇기에 나는 시나나 러셀이 놀리거나 말거나 티파니를 멋진 여자라고 생각했다.
적어도 지금 내가 아는 그녀는 바트처럼 자기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진심으로 이 업계의 미래를 생각하고 있었으니까.
“나중에 뽀뽀라도 해줘야지.”
“에이, 그건 너무 애 같은데요.”
내가 피식 웃으며 말함과 동시에, 티파니가 안으로 들어왔다.
정장을 입은 그녀는 묶은 머리를 풀어 내리며 날 바라보았다.
“우리 실제로 혀도 섞었으면서 뽀뽀가 뭐예요?”
“아니, 그건 일이었…….”
“티파니~!”
“아, 시나. 러셀. 내 부탁대로 안 가고 남아줬군요.”
안으로 들어온 티파니가 내 옆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러더니 지쳤다는 듯 내 품에 기대며 동시에 입을 열었다.
“잘 풀렸어요.”
“뭐가?”
“시청률이요. 오늘 버닝콩 중에 세 사람이서 세그먼트 한 게 순간 시청률이 제일 높았단 말이죠.”
그 말에 서로를 돌아본 우리 세 사람은 다시 건배를 했다.
티파는 계속 말을 이어나갔다.
“이걸 토대로 내일 아버지한테 이야기할 거예요. 신과 시나를 GCW에 하루 출연시키겠다고.”
“흐음……?”
“그쪽도 우리를 도와줘야죠. 우리 챔피언이 나와서 510만이나 되는 시청자가 봐줬는데.”
확실히 어마어마한 숫자였다.
평소 버닝콩의 시청자는 450만에서 480만 사이였으니까.
“세 사람이 가지고 있는 신선한 이미지가 먹힌 거겠죠. 그러니 우리는 신인을 더 키워야 한다고.”
“그러니까 GCW를 더 띄우자?”
“그런 말이죠. 일단 나도 한잔할 테니까 내일 회의에 세 사람 다 참가해주세요.”
자리에서 일어선 티파니가 맥주를 가지고 와 자리에 앉았다.
우리 네 사람은 그렇게 밤까지 오늘의 성공을 축하했다.
티파니는 금방 취했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