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프로레슬링의 신-112화 (112/634)

112.

티파니는 무척 가벼웠다.

‘평소 뭘 먹는 거야.’

하얀 피부에 반짝이는 금발, 나와 전혀 다른 생김새가 새삼 이질적으로 느껴질 만큼 매력적이었다.

“우웅, 시인…….”

“알았어, 알았어.”

내 품에 안긴 그녀는 고양이처럼 몸을 말았다. 나는 곧바로 캠핑 버스의 침실 안으로 들어섰다.

“여기서 자요.”

“그쪽은……?”

“앞에 보니까 따로 있던데.”

“여기서 자지.”

“됐어. 다들 있는데.”

나는 완전히 취한 티파니의 신발과 재킷을 벗겨주었다.

“옷 벗을 수 있겠어?”

“응…….”

“그럼 여기 닫아둘 테니까.”

그래도 처음 같이 마셨을 때보다는 조금 덜 취했으니 괜찮겠지.

그렇게 생각하며 나는 침대 위의 조명을 끄고자 움직였다.

티파니가 팔을 뻗었다.

붙잡혀 당겨졌고, 내 입술에 그녀의 입술이 잠깐 닿고 떨어졌다.

“아, 체리 맛.”

“……뭐하는 거야.”

“일이 아닌 뽀뽀. 이거 생각보다 심장이 두근거리는데.”

“잘 자. 타이거.”

쓰게 웃은 나는 티파니의 이마에 입술을 맞추고 방을 나왔다.

그리고 문을 닫은 뒤, 말했다.

“……왜 숨어있는 거야.”

벽 뒤에 숨어있던 시나와 러셀이 어색하게 웃으며 나왔다.

“아, 아니. 분위기가 너무 좋다 보니 끼어들기가 좀 뭣해서.”

“되게 플라토닉한데. 그런 의미에서 우리 체육관에서 운동이나 하고 올까?”

“……그래.”

그게 낫겠다.

* * *

다음 날 아침.

식사를 끝마친 우리 넷은 곧바로 경기장의 회의실로 향했다.

잔뜩 취했던 티파니는 완전히 멀쩡해져 바트의 앞에서 프레젠테이션을 해나갔다.

그 과정을 옆에서 면밀하게 지켜보며 나는 감탄을 금치 못했다.

어제는 몰랐는데, 제대로 이 일을 준비해왔다는 느낌이 강했다.

바트의 설득에 필요한 최후의 한 조각이 어제의 시청률이었고.

“1,800만. 메인 이벤터 둘이 신선하게 대립을 시작했을 때나 나오는 엄청난 시청자 수죠.”

“그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나?”

“세 사람 모두 신선한 이미지니까요. 모두 GCW 출신이고요.”

티파니는 스크린 위에 표를 띄우며 설명을 계속 이어나갔다.

“머천다이즈 판매량 추이를 봐도 상승량이 가장 눈에 띄는 게 이 세 명이죠. 특히 신의 상품은 동기간 내에 트리플H의 판매량보다 약 18배 뛰어올랐습니다.”

“그거야 당연히 헌터는 애초부터 판매량 자체가 많으니까.”

바트가 눈썹을 찡그렸다.

“절대 수치로 비교해보자면 헌터의 판매량이 훨씬 우위지.”

“그래서 준비했습니다.”

표가 다시 바뀌었다.

“데뷔 1년차 헌터의 판매량.”

“저때는 지금보다 회사가 훨씬 작았을 때고.”

“그리고 헌터가 챔피언 로드 각본을 받은 직후입니다. 말하자면 뜨기 시작한 이후죠.”

“…….”

“어느 쪽을 보더라도 신의 수치가 미세하게 높죠. 시대상을 비교해 재정팀에서 측정한 두 선수의 파워 비교는 다음과 같습니다.”

내가 더 높은 수치가 나왔다.

나는 데뷔한 지 1년차에 헌터가 메가 푸시를 받았을 때의 상품 판매량을 훨씬 넘어선 것이었다.

“어떻습니까?”

“그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나?”

“각본이죠, 역시.”

날 돌아보는 티파니.

“또한 선수 개인에게 연기를 자율적으로 맡기는 방향성이 크게 작용했다고 생각합니다.”

그 말을 들은 나는 가볍게 손가락을 들어 발언권을 가져왔다.

“쿵-퓨리 캐릭터의 머천다이즈 판매량은 제 캐릭터의 전체 판매량에서 몇 퍼센트 정도 됩니까?”

“37퍼센트 정도입니다.”

“티셔츠 하난데 저 정도면 확실히 멋진 캐릭터였군요.”

슬쩍 의아해하는 티파니.

하지만 나는 이렇게 말해 바트의 마음을 좀 풀어줄 생각이었다.

“회장님께서 재미있는 캐릭터를 만들어주셔서 멋진 각본이 만들어진 거라고도 볼 수 있겠네요.”

“그런가.”

한숨 놓는 바트.

“예, 정확히 말하자면 회장님과 저의 합작품 같은 거랄까요.”

“그래, 그래서…….”

뻔한 아부를 기분 나빠하지 않고 받아들인 바트가 어깨에 힘을 풀고 티파니를 돌아보았다.

“어쩔 생각인가?”

“신과 시나를 GCW에 출연하게 해주세요. 그리고 저희 팀의 내년도 사업 계획을 입안하겠습니다.”

“내년도?”

“예, 저희 브랜드도 내년부터는 메인 쇼의 합동 페이퍼뷰에 정기적으로 참가하겠습니다.”

“재미있는 안건이군.”

“거기에 하나 더.”

티파니가 싱긋 웃었다.

“앞으로 성장할 가능성이 있는 선수들을 위해 하우스 쇼와 이벤트를 더 개최하고 싶습니다.”

“그게 다 돈일 텐데.”

“예, 분명 돈이 되겠죠.”

멋지게 받아치는 티파니.

곰곰이 생각하던 바트는 이윽고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일단 확인해보지.”

그리고 시나와 나의 GCW 출연 역시도 함께 승인되었다.

* * *

우리 네 사람은 그대로 곧장 비행기를 타고 조지아로 향했다.

나로서는 캠핑 버스를 이용해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아쉽게도 거리가 너무 멀었다.

대충 확인해보니 비행기로는 5시간, 자동차를 이용하면 40시간 정도가 나왔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귀향’은 역시 좋았다.

애틀랜타 국제공항.

수속을 끝내고 나온 우리는 뜻밖의 상황과 마주하게 되었다.

마중을 나온 건 한 명이었다.

바로 바쿠.

폭탄 머리가 매력적인 그는 먼저 티파니에게 웃으며 물었다.

“회의는 잘 끝냈습니까?”

“물론이죠. 잘 풀릴 것 같아요. 밤새 준비한 보람이 있네요.”

“그러게 말입니다! 하하!”

“…….”

다들 어디 숨어있나?

그런 생각을 한 나는 의아한 기분을 느끼며 주변을 살펴보았다.

“무슨 일이냐. 꼬마.”

“아니, 혼자 오셨어요?”

“그럼 혼자지. 다들 지금 쇼 준비하느라 많이 바쁜 상황이거든.”

“그리고 내가 ‘신이 보고 싶다는 이유로 다 같이 우르르 나오면 월급 안 준다.’라고 말했거든요.”

“…….”

그래, 월급은 중요하지.

“저기, 저는요?”

“아, 시나. 너도 왔냐?”

“…….”

시나와 나는 서로 다른 의미에서 아쉬움을 느껴야만 했다.

어쨌든.

바쿠가 몰고 나온 밴에 올라탄 우리는 그대로 GCW로 향했다.

가는 길은 희미한 기억에 얼룩진 상태였다. 그렇기 때문인지 묘하게 들뜬 기분이 되었다.

그 기분은 GCW에 도착해 사람들과 만나자 더 강해졌다.

훈련장 방면으로 들어선 우리를 먼저 반긴 건 옛 동료들이었다.

“이 벨트는 또 뭐야! 자식아!”

“이것이 메인 쇼의 벨트인가. 캬, 이 자식 많이 출세했네!”

“시나도 그렇고. 오히려 출세한 건 시나가 아니겠어?”

“그러게, GCW 때는 와이엇 밑에서 대사도 못 치던 녀석이.”

“자자, 다들 회포는 나중에 푸시고. 일단 각본 회의부터 해야 하니까 자리 좀 비켜주세요.”

티파니의 도움으로 겨우 빠져나온 우리는 그대로 사무실로 향해 할리와 팀장들을 만났다.

하지만 변한 건 없었다.

다들 왁자지껄하게 우리를 한바탕 환영해주고, 티파니가 그걸 말리고.

그렇게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자리에 앉은 시나와 나는 이내 그것이 착각임을 깨달았다.

할리와 함께 가장 상석으로 간 티파니가 활짝 웃으며 다음과 같이 말했던 것이다.

“두 사람 다, 여기가 우리 구역이라는 사실은 알고 있겠죠?”

“예?”

“좀 굴욕을 당해줘야겠어요.”

“어떤 굴욕이죠?”

나는 흥미를 느끼고 물었다.

“두 사람이 기세 좋게 GCW에 쳐들어왔는데 우리가 기다리고 있다가 반격을 하는 거죠.”

“약간 ‘나 홀로 집에’처럼?”

“그것도 좋겠는데.”

내 의견을 들은 할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위험한 건 영상으로 빼서 안전하게 촬영하고. 웃기고 굴욕적인 걸 경기장에서 쓰면 되겠네요.”

옳은 이야기였다.

‘자기 구역’에서 러셀을 띄워주는 건 나쁜 판단이 아니었다.

GCW의 이미지도 올라갈 테고, 관객들의 반응 역시 더 좋겠지.

러셀이 우리와 링 서바이벌에서 동등하게 붙기 위한 빌드 업.

이번 주의 GCW 쇼는 그런 목적을 가지고 진행되는 것이었다.

“그렇게 하면 되겠네요.”

“저도 재미있을 것 같습니다.”

나와 시나가 고개를 끄덕이자 할리가 한숨 놨다는 듯 웃었다.

“일단 플랜부터 이야기하고 곧장 촬영에 들어가도록 하지.”

메인 쇼에 올라간 선수가 자신이 거쳐 왔던 하부 리그를 무시하는 건 곧잘 있는 일이기 때문일까.

하지만 나는 그게 참으로 건방진 짓거리라고 생각했다.

선수가 겟 오버 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주변의 도움이 필요하다.

일은 함께하는 거니까.

나는 항상 다른 선수들을 존중하고, 결과적으로 나를 포함한 모두가 이기는 길을 추구했다.

단지 거기에서 가장 많이 가져가는 게, 실력적으로 가장 우수한 나일 따름이었다.

거기다 이번 잡은 내게 나쁜 것만도 아니었다.

결국 GCW가 더 커질수록 나와 티파니 맥센이 회사에서 갖는 발언권 역시 강해질 테니 말이다.

서로가 윈윈인 상황.

방송에서 굴욕을 당하더라도 결국 이기는 것은 우리 모두였다.

* * *

그동안 성장을 거듭한 GCW는 내가 있던 시절보다 상황이 더 나아졌다.

경기장도 1만석 규모로 옮겼고 퀄리티 역시 전보다 진일보했다.

그런 상황에서 쇼에 참가한 나는 완전히 구시대의 인간이었다.

새로 고용된 카메라 감독이 링 위의 내 모습을 멋지게 촬영했다.

[SIN! SIN! SIN! SIN! SIN!]

일만의 관객들이 아이콘의 귀환에 아낌없는 환영을 보내주었다.

그게 무척 좋았지만, 아쉽게도 내 상태는 엉망진창 그 자체였다.

백스테이지에서 달걀에 맞고, 폭죽을 피해 도망쳤다. 신발을 잃어버려 레고 조각을 밟게 되었다.

그 모든 영상이 경기 사이사이에 흘러나간 뒤, 분장을 마친 내가 링 위로 도망쳐 나온 것이었다.

나는 마이크를 쥐고 소리쳤다.

“러셀!!”

관객들이 웃음을 터뜨렸다.

“제기랄! 이 비겁한 자식! 감히 이런 더러운 공작을 준비해놔?!”

나는 발바닥에 붙어있던 레고 브릭을 떼어내 아무렇게나 던졌다.

“아프잖아! ……시나는 대체 어디에 있는 거야? 설마 죽었나?”

“……죽기는 누가 죽었다고 그래.”

“시나!”

나는 관객석 사이로 나오고 있는 시나를 깜짝 놀라 돌아보았다.

녀석 역시 엉망진창이었다.

“야! 너 팔에 화살이……!”

“이거 가짜야.”

시나가 장난감 화살을 팔에서 뽁 뽑았다. 관객들이 폭소하는 가운데 녀석은 진지하게 말을 이어나갔다.

“잘 들어, 신. 더 험한 꼴 보기 싫으면 여기서 당장 나가야 해.”

“이렇게 당한 걸 갚아주지도 못하고 도망치자고?! 너나 가!”

“이런 함정은 장난에 불과해. 우릴 습격하기 위해 GCW 놈들이 모두 단합해서 숨어있다고.”

“제기랄……!”

나는 분통을 터뜨렸다.

GCW의 관객들은 그런 우리를 흥미진진한 얼굴로 지켜보았다.

거기에 맞춰 시나와 나는 주변을 경계하며 전개를 기다렸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키이이잉- 하고 음악이 흘러나왔다.

러셀 하트의 테마.

[Yeeeeeeeeeaaaaahhhhh!!]

관객들이 엄청난 환호를 보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역시 이곳에서는 나와 시나의 인기가 러셀보다 훨씬 적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여기는 조지아였고, 조지아의 챔피언은 러셀이니까.

러셀은 GCW의 선수들을 대동한 채 링 앞까지 걸어왔다.

나와 시나는 그들을 경계했고 러셀은 피식 웃으며 입을 열었다.

“두 사람이라면 당연히 고향으로 돌아올 거라고 생각했지.”

“애들 장난질이냐?”

“두 사람이 지레 겁을 먹고 돌아가는 걸 원했지. 하지만 역시 그렇게 되지는 않았군.”

GCW 선수들이 링을 포위했다.

“그렇다면 엉덩이를 걷어차 쫓아내는 방법이 훨씬 낫겠어.”

공격이 시작되었다.

이전에 합을 맞췄던 대로 링 위로 한 명씩 들어오는 선수들.

나와 시나는 서로의 등을 맡긴 채 그들을 차례차례 쓰러뜨렸다.

싸움이 시작되자 관객들은 우레와 같은 환호를 보냈다.

바비, 셰무스, 심지어 윌까지.

나와 시나는 녀석들을 정신없이 상대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사이로 들어온 러셀을 보지 못했다.

“커흑?!”

배를 걷어차인 뒤, 아래로 숙여진 내 머리를 러셀이 붙잡았다.

투콰앙-!

깔끔하게 들어가는 DDT.

그렇게 시나까지도 제압한 러셀은 한동안 GCW 선수들과 함께 우리를 최대한 짓밟았다.

그리고 적당히 두들겨줬다고 생각했는지 선수들을 뒤로 물렸다.

“여기는 GCW야! 우리 구역에 와서 날뛰는 걸 내가 가만히 보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나?!”

[YES! YES! YES! YES! YES!]

“링 서바이벌에서도 마지막에 서있는 건 바로 이 조지아의 챔피언인 러셀 하트가 되겠지! 패배할 각오나 해두라고!”

호기롭게 외친 녀석은 마이크를 들고 링 아래로 내려갔다.

GCW 선수들이 나와 시나를 비웃으며 입장로 뒤로 물러갔다.

숨을 몰아쉬던 나는 그들을 향해 다시금 이빨을 드러냈다.

“도망치는 거냐……!”

“그렇게 생각하던가. 더 싸우고 싶으면 우유나 씻어내고 와.”

뭐?

순간 의아함을 느낀 나는 뭔가 덜컹대는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조명 위쪽.

미리 준비하고 있던 두 명의 직원이 우유통을 밑으로 쏟았다.

촤아악!!

차가운 우유가 온몸을 덮쳤다.

거기에 맞은 시나와 나는 링 위를 나뒹굴며 쇼의 마지막을 화려하게 장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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