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4.
마지막 경기의 승자는 랙다운의 WWF 유니버스 챔피언인 JBL이 되었다.
그로서 최종 스코어는 5대5.
다만 JBL이 자신의 부하인 올랜도 조슨을 불러 비겁한 방법으로 승리를 강탈해갔기 때문에, 아무래도 그런 면에서 보자면 최종적인 승자는 버닝콩이었다.
하지만 그런 건 사소한 문제가 될 정도로 모든 시합이 좋았다.
개중에서도 최고였던 경기는 물론 우리의 트리플 스렛 매치였다.
우리는 베이직한 틀 안에서 할 수 있는 최대치를 보여주었다.
창의력 넘치는 마지막 스팟까지 더해 압도적으로 2위를 따돌리고 오늘의 베스트를 따낼 정도.
그런 내 생각은 샤워를 마치고 나오자 서있던 두 사람을 보자 곧바로 확신으로 굳어졌다.
그렉 하트.
그리고 캐스켓-테이커.
“틀린 말은 아니었군.”
“그렇죠?”
“확실히 가장 핫한 경기였다. 내 스타일은 이제 완전히 올드해졌다는 게 느껴질 정도였어.”
“당신 실력이면 올드한 게 아니라 장인의 경지 같은 거죠.”
“뭐, 그건 그렇지.”
자신만만하게 웃는 그렉.
“그래도 실버백과 JBL의 경기는 정말 최악이었어. 그 둘도 이제 짬이 찰 만큼 찼는데, 레슬링 실력은 조금도 성장하지 않았다고.”
그러더니 한숨을 내쉬었다.
역시 오만할 정도로 자기 실력에 자부심이 있는 남자다웠다.
‘아마 이걸 두 사람이 듣는다면 싸움으로 끝나지 않을 테지만.’
그래도 솔직한 만큼 그 발언이 가식이 아니란 건 알 수 있었다.
바로 그때, 옆에 서있던 테이커가 그렉에게 웃으며 말을 걸었다.
“선배님은 여전하시군요.”
“선…….”
“그래, 테이커. 나는 언제나 이런 남자였지. 자네 경기도 오늘 좀 보기에 그랬어. 나이 좀 먹었다고 대충 하지 말란 말이야.”
“명심하겠습니다.”
그러고 보니 테이커가 후배지.
나는 잠깐 어이가 없어지는 걸 느꼈다. 테이커가 누구의 후배일 거라고는 생각조차 못했다.
그러고 보면 누군가의 아들이기도 하겠군. 참으로 신기한 일이다.
그런 내 무례한(?) 생각을 느꼈는지 테이커가 말을 이었다.
“랙다운에 와라.”
“예?”
“너와는 한 번쯤…… 같이 일을 해보고 싶으니 말이다.”
“하하, 이 말재주 없는 녀석이 할 수 있는 최고의 극찬이로군.”
“가, 감사합니다.”
“뭐…… 우리 러셀은 아직 좀 부족한 것이 많이 느껴지던데.”
“아뇨, 러셀도 그렇고 시나도 확실히 잘했습니다. 두 사람이 없었으면 해낼 수 없었겠죠.”
“쯧쯧, 우리 두 사람의 눈을 속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냐?”
“…….”
“에이스는 너였다. 네가 두 선수를 그 정도 영역까지 이끌어주었다는 이야기야.”
나는 뺨이 붉어지는 걸 느꼈다.
전생에는 먼발치에서 바라만 봤던 전설들이 내 실력을 인정해주다니. 정말로 멋진 기분이었다.
테이커와 그렉은 내 어깨를 꽉 쥐고 다음과 같이 이야기했다.
“Nice Job, Kid.”
그건 전생에 내가 아닌 숀 시나에게 선배들이 하던 말이었다.
* * *
그 경기가 기점이 되었다.
하드코어 매치는 강한 범프로 눈속임이 되지만 어제와 같은 일반 매치는 전혀 아니었다.
그러므로 나에게 일말의 불안감을 가지고 있던 사람들의 의견은 사춘기가 끝난 소년의 모공 속 여드름처럼 쏙 들어가게 되었다.
회사 내에서는 점차 나에게 메가 푸시를 주는 게 어떻겠느냐는 이야기가 나오기 시작했다.
선역과 악역을 아우르는, 말하자면 제2의 락콜드와 같은 캐릭터로 키우는 게 어떻겠냐고.
그런 사람들의 의견을 뒤로 한 채, 나는 일단 다음 스케줄을 소화하기 위해서 이동했다.
드디어 회사 간의 협약이 끝나 영화 촬영에 들어가게 되었다.
헬 쏘우.
나의 배우 커리어를 시작하기에 손색이 없는 멋진 영화였다.
대략 15시간가량의 주행.
캠핑 버스를 이용해 효율적인 시간을 보낸 나는 상쾌한 기분을 느끼며 촬영지에 도착했다.
펜실베이니아의 필라델피아.
그곳의 한 영화 학교.
주차장에 도착해 버스에서 내리기 직전, 나는 피로해 보이는 운전기사에게 인사를 건넸다.
“고마워요, 잭슨.”
“예, 전 여기 있겠습니다.”
“안쪽 침대만 말고 나머지는 자유롭게 쓰셔도 괜찮아요.”
고개를 끄덕인 그가 길게 하품을 하며 버스 안쪽으로 들어갔다.
그의 도움과 버스 덕택에 나는 일에만 집중할 수 있게 되었다.
‘어디 가볼까.’
가슴팍에서 선글라스를 꺼내 쓴 나는 교정 안으로 들어섰다.
촬영은 미리 조율했던 대로 두 개의 스케줄을 면밀하게 조정된 상태에서 진행할 예정이었다.
그리고 내가 맡을 직쏘는 확실히 그럴 수 있는 역할이었다.
얼굴을 드러내고 나오는 건 영화 마지막의 약 5분 정도뿐.
나머지는 가면을 쓰고 등장하는데, 그조차 한 장면에 불과했다.
그러므로 사실상 영화 촬영은 대부분 내가 참여하지 않은 상태에서 이루어진다는 뜻이었다.
그게 바로 헬 쏘우였다.
‘어쩜 이렇게 일이 잘 풀릴까.’
이쪽과 접촉하게 된 건 순전히 행운이라서 기분이 더 좋았다.
영화 학교의 세트장과 필라델피아의 도심을 배경으로 촬영된 이 영화는 엄청난 대박을 낳는다.
말 그대로 개천에서 용이 나듯 하나의 기준을 업계에 제시했다.
이후로 헐리우드의 자본가에게 착취를 당해 13편의 시리즈를 찍고 완전히 몰락하게 되지만.
내가 맡을 직쏘 캐릭터는 2편까지만 출연하게 되므로 그런 문제와는 완전히 동떨어져 있었다.
그렇게 헬 쏘우에 대한 기억을 떠올리며 걷던 나는 본관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감독과 만났다.
“신~!”
“제이지.”
“링 서바이벌은 정말 잘 봤습니다! 엄청난 경기였어요!”
“감사합니다.”
“아, 음. 일하러 오셨는데 이런 이야기 하기는 좀 불편하신가?”
“그럼 일이 끝나고 실컷 하죠.”
“그렇게 합시다! 이 근처에 괜찮은 식당도 많이 있으니 끝나고 같이 밥이나 한 끼 먹어요!”
다행히 학교가 방학 중이라 날 알아볼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제임스와 함께 안으로 들어선 나는 근처의 교실로 인도되었다.
‘확실히 열악한 상황이군.’
사무실 하나 없이 영화 학교에서 회의를 해야 한다니 말이다.
그런 내 표정을 읽었는지 제임스는 머쓱한 듯 웃으며 말했다.
“이거 면목 없습니다. 제가 졸업한 지 얼마 안 되서 첫 영화는 학교의 지원을 받기로 했거든요.”
“괜찮습니다. 각본이 좋아서 선택한 거라 마다할 이유는 없죠.”
“하하, 사실 이것도 단편이었던 영화를 억지로 잡아 늘린 거라서 과연 괜찮을까 싶었는데.”
“…….”
굳이 안 해도 될 이야기를 사서 하는 성격의 사람인가? 싶었다.
나야 뭐 이 영화가 대박날 거란 사실을 알고 있으니 괜찮았지만.
좀 자신감을 불어넣어주자.
“정말 대단하신데요.”
“예?”
“감독님이요. 저는 솔직히 쓰신 각본을 보고 정말 반했거든요.”
“하, 하하. 아닙니다.”
“아뇨, 진심으로 멋졌습니다.”
나는 싱긋 웃으며 말했다.
소포로 받은 영화의 각본을 분석하고 마지막 씬에서 내 동선을 상상하는 동안 확신이 섰다.
헬 쏘우는 분명 제임스 관의 애정이 듬뿍 들어간 작품이었다.
나도 책임감을 느낄 정도로.
그렇기에 대충할 생각은 없었다.
오늘 나는 촬영팀을 처음으로 만나는 한편, 감독의 부탁으로 카메라 테스트를 위해서 여기에 왔다.
그렇게 대강 이야기를 마친 우리는 자리에서 일어나 조용한 복도를 걷기 시작했다.
관이 웃으며 말했다.
“마지막 씬에서 어떻게 찍을지 한 번 체크를 해보고 싶어서요.”
“아, 그 씬. 확실히 머릿속으로 이미지하긴 어려울 것 같던데요.”
“오, 알아주시는군요.”
“배우가 많이 모이는데다가 영화의 절정 부분에 감정적으로 무척 격양된 상태에서 반전까지도 잡아낼 수 있어야 하는 거니까요.”
“……잘 아시는군요.”
“저희도 중요한 경기는 그런 걸 생각하면서 짜거든요.”
나는 어색하게 웃었다.
연극과 비슷했다.
물론 모든 프로레슬러들이 이처럼 하는 건 아니었지만, 나는 프로듀서 시절 배운 걸 바탕으로 항상 블로킹에 신경을 썼다.
무대 위.
카메라.
관객들의 시선.
링이라는 공간 위.
내가 어떻게 보일지. 또한 상대와 호흡은 어떻게 구성해갈지. 그 모든 걸 체크해야만 했다.
그렇게 전문 용어를 쓰는 나를 보고 감독은 아주 약간 더 날 신뢰하는 눈으로 바라보기 시작했다.
……원래도 이 이상 올라갈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나를 신뢰하며 바라보기는 했지만 말이다.
그렇게 우리는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대화를 나누며 준비된 실내 촬영장 안으로 들어섰다.
“자자, 다들!”
촬영 준비가 한창인 가운데, 제임스 관이 큰 목소리로 외쳤다.
“여기 직쏘 살인마 역할을 맡아줄 신 선수입니다! 다들 인사하고 카메라 한 번 잡아보죠!”
감독이 말하자 여기저기에서 배우를 포함해 대충 스무 명 가까이 되는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그리고 나는 깨달았다.
시선이 마냥 곱지는 않았다.
다들 프로레슬러가 이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직쏘 살인마 역할을 맡게 되자 조금씩 걱정하는 눈치였다.
덕분에 제임스 관은 사람들 앞에서 내 칭찬을 계속 늘어놓았다.
“정말 멋졌다니까요! 직쏘의 마인드를 그대로 이해하는 게……!”
그럼에도 의혹은 풀리지 않는 상황, 한 남자가 슬쩍 앞으로 나서 내게 악수를 청해왔다.
“만나서 반갑네. 신.”
알고 있는 얼굴이다.
영화에서 두 명의 중요 희생자 중 하나인 의사, 조댕의 역할을 맡은 배우였다.
나이도 나보다 많고, 연기에 대해 자부심이 클 테지만 그는 내게 우호적으로 손을 뻗어왔다.
아무래도 이 삭막한 공기를 풀어보려는 거겠지. 거기에서 좀 감동해 나는 악수에 응했다.
“잘 부탁드립니다. 조댕.”
“어이쿠, 내 이름을 아는군.”
“저는 여기에선 직쏘로군요.”
“그래, 혹시 뭔가 모르는 게 있다면 나에게 물어보게나. 이래 보여도 열심히 이 일을 해왔거든.”
“부디 잘 이끌어주세요. 저도 맡은 역할에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그렇게 리더인 조댕과 인사를 나누자 분위기가 한결 편안해졌다.
물론 진짜 리더는 제임스 관이었지만, 조댕은 그와는 달리 정신적으로 사람들을 이끄는 것 같았다.
그런 그의 도움으로 나는 나에게 쏟아지는 의혹의 시선들에 대해 약간의 유예를 두는데 성공했다.
남은 건 카메라 테스트를 잘 해내서 인정을 받는 일뿐이었다.
프로레슬러도 엄연히 무대에서 연기하는 연기자란 사실을.
* * *
더 팍이 말했듯 영화계 쪽에서 프로레슬러 출신의 연기자를 무시하는 건 자주 있는 일이었다.
그리고 그럴 만도 했다.
확실히 일반적인 레슬러는 전문 배우와 비교했을 때 연기의 스펙트럼이 부족한 건 사실이었다.
작품에 따라 팔색조처럼 변하는 이들과는 달리, 고정된 이미지에 따르는 한 가지의 역할만을 계속 맡았기 때문이다.
더 팍은 더 팍이었다.
그렇기에 더 팍으로서의 연기력은 절정에 달한 수준이지만.
거기에서 벗어나면 순간적으로 어색해지고 마는 것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런 평가에서 벗어나기 위해 각본을 받은 뒤로 계속해서 대본 분석을 해왔다.
연기의 기초였다. 내가 프로듀서 시절 연기력이 부족한 선수들에게 누누이 강조했던 거기도 하고.
감독의 의도라던가, 이게 어떻게 보일까를 계속 생각하면서 대사를 어떻게 칠지 고민해두는 거다.
동시에 전반적인 이야기를 파악해서 내 역할이 무엇인지 어떻게 만들 것인지를 구상도 하고.
그런 의미에서 전생에 봤던 헬 쏘우가 큰 도움이 되어주었다.
그렇게, 전생과 달리 감독이 나라는 배우에 맞춰 변주를 준 직쏘 캐릭터를 완벽하게 체득한 나는.
‘한번 해보자고.’
이들을 깜짝 놀라게 할 정도로 멋진 연기를 선보일 생각이었다.
……아 물론, 희망사항이다.
솔직히 좀 긴장되긴 한다.
나는 그걸 언제나 뛰어넘어서 최고의 모습을 보여 왔지만 말이다.
“자, 그럼. 시작하겠습니다.”
바로 그때, 하나하나 지시와 확인을 끝마친 제임스 관이 박수를 치며 우리에게 다가왔다.
“일단 카메라 테스트니까요. 동시에 대본 리딩 하고 앙상블을 맞춰본다는 느낌으로 가보죠!”
깨진 타일.
더러운 욕조와 변기. 파이프관.
저예산으로 제작된 헬 쏘우는 이 세트장이 영화에 자주 나왔다.
그렇기에 영화의 절정 부분을 한차례 맞춰보면서 감독이 생각하는 이미지를 확인하는 작업.
그것이 오늘의 목적이었다.
“자! 그럼, 위치로 가주세요!”
그 말에 의사와 파파라치 역할을 맡은 조댕과 배우B가 각자 반대편 벽에 붙은 채로 앉았다.
그러더니 준비된 족쇄를 차고는 슬그머니 나를 돌아보았다.
“너무 부담 갖지 말고 해.”
“감사합니다.”
조댕의 말에 미소를 지은 나는 곧바로 두 사람 사이에 선 뒤 털퍼덕 바닥에 엎드렸다.
시체로 위장한 살인마.
그 반전이 밝혀지며 모두가 충격에 빠지는 씬이 시작되었다.
직쏘 살인마가 예고한 시간이 점점 찾아오고 두 희생자는 이제 최후의 선택을 해야만 했다.
조댕이 흥분해 소리를 질렀다.
“이제 됐어! 난 내 가족을 구하러 여기서 나가야겠다고!!”
“안 돼!!”
족쇄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사슬이 아닌 다리를 잘라야만 한다.
그 잔혹한 현실을 선택한 조댕이 다리를 자르는 시늉을 했다.
자리에 엎드려 있던 나는 그의 움직임을 면밀하게 느끼며 마지막 순간을 머릿속에 그렸다.
내 캐릭터는 전생의 헬 쏘우에 나왔던 직쏘에서 조금 변화했다.
전생의 직쏘는 암으로 죽어가는 캐릭터로 사람들에게 생명의 소중함을 가르쳐주기 위해 살인 게임을 저지르는 미치광이였다.
하지만 내 직쏘는 달랐다.
정확히는 디테일이 변했다.
얼굴을 포함한 전신에 화상을 입고 끔찍하게 죽어가는 남자로.
전생과 설정이 변했고, 나는 그것을 이해하면서 화상을 입고 죽어가는 남자의 고통을 상상했다.
그리고 이미지해냈다.
전생의 직쏘로부터 도움을 받아 내가 연기해낼 살인마 캐릭터를.
강렬한 연출과 함께 직쏘의 정체가 드러나는 이 씬은 분명히 영화의 가장 중요한 부분이었다.
다른 배우들이 각자 연기를 마쳤고, 드디어 내 차례가 왔다.
모두가 지켜보는 상황.
나는 고통스러운 신음을 내뱉으며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