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프로레슬링의 신-115화 (115/634)

115.

제임스 관은 눈앞에서 펼쳐지는 연기에 그만 넋을 놓고 말았다.

바닥에 엎드려 있던 신이 자신의 차례가 오자 천천히 일어났다.

그리고 제임스는 자신이 생각했던 직쏘가 서있는 것을 보았다.

그래, 바로 이거다.

고행 끝에 열락을 얻은.

카메라가 그런 직쏘를 여러 각도에서 찍었다. 그는 계속되는 고통에 몸부림치면서도 웃어 보였다.

화상으로 피부가 서서히 죽어가고 있는 그가 느낄 수 있는 현재 유일한 기쁨.

그가 결국 쾌락 살인마에 불과하다는 방증.

관은 잠시 넋을 잃었다.

보통 처음에 배우들이 선보이는 배역 연기는 감독이 생각했던 것과는 좀 다를 수밖에 없었다.

그걸 점차 조율해나가는 작업이 영화 촬영에는 꼭 필요했다.

그렇기에 배우가 1차적으로 각본을 분석하며 캐릭터를 만들고.

이후 대본 리딩을 통해 타인의 연기와 맞추면서 천천히 캐릭터를 잡아나가는 것이었다.

하지만 신의 연기는 달랐다.

생각하는 그대로였다.

“삶은 축복이야. 하지만 역겨운 인간들은 그 소중함을 모르지.”

“으아아아악! 흐아아아악!!”

“열쇠는 그 욕조 안에 있었지. 난 너희에게 기회를 주었다.”

비명을 지르는 희생자에게 자신의 철학을 이야기하며 스스로를 합리화하는 역겨운 살인마.

직쏘.

“게임 오버!”

쾅!

세차게 문이 닫혔다.

연기가 모두 끝난 이후에도 제임스 관은 한동안 그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로 감격했다.

‘이 정도일 줄이야.’

엄청난 캐릭터 해석력이었다.

사실 각본의 반전을 알아차렸을 때부터 진작 예견된 일이었다.

신은 마치 ‘영화를 미리 보기라도 한 것처럼’ 직쏘를 연기했다.

그 디테일 하나하나가 제임스 관의 마음에 아주 쏙 들었다. 그는 미소와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내 페르소나.’

아직 모르는 일이지만 그렇게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감독으로서 할 수 있는 최고의 극찬. 신은 그걸 해낸 것이었다.

“저, 감독님……?”

“어? 어어.”

옆에서 누가 말해줘 겨우 정신을 차린 제임스는 세트장 안으로 다시 들어오는 신을 바라보았다.

다들 시선이 완전히 변했다.

“굉장한데요.”

“정말 멋졌어요!”

촬영팀의 사람들이 한마디씩 이야기했고 조댕과 다른 배우들 역시 신을 둘러싸고 칭찬했다.

그 가운데에서 환하게 웃고 있는 신은 확실한 연기자였다.

* * *

그렇게 첫 작업이 끝났다.

다행히 난 의혹의 시선들을 어렵지 않게 이겨낼 수가 있었다.

다들 난 인정해주었고 앞으로 작업하는데 어려움이 있으면 얼마든지 연락을 달라고 해주었다.

그렇게 훈훈한 분위기 속에 촬영을 끝마친 나는, 감독으로부터 따로 작업할 것을 받았다.

바로 음성 녹음이었다.

영화상에서 직쏘는 자신의 희생자들에게 싸구려 레코더로 녹음된 음성을 들려줘 지시를 내렸다.

전생에는 이 부분을 어떻게 촬영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일의 효율을 위해 이렇게 하기로 했다.

다른 일도 있으니까.

물론 캠핑 버스 안에서는 잡음이 들어갈 테니 녹음 자체는 조용한 장소에서 해야겠지만.

나는 이동하는 동안 각본을 계속 읽으면서 어떤 식으로 작업을 해나갈지 고민했다.

이렇게 되면 남은 촬영은 가면을 쓰고 나오는 것 한 번. 그리고 찍었던 라스트 씬 한 번뿐이다.

그것으로 영화 수익 1억 5천만 달러의 5퍼센트.

어떤 의미로는 복권이 따로 없었다.

* * *

나는 각본에 나오는 대사들을 계속 연습하면서 다음 버닝콩이 개최되는 도시로 이동했다.

루이지애나 주의 뉴올리언스.

겨울에도 비교적 따뜻한 기후, 재즈의 탄생지라는 별칭에 걸맞게 도심은 낭만적인 분위기였다.

일 때문에 왔다는 사실이 다소 안타깝게 느껴질 정도로 말이다.

하지만 경기장에 도착한 나는 곧바로 회의실로 호출을 받았다.

바트의 부름이었다.

‘일에 관해서 물어보려고 하나.’

그 예상은 반만 맞았다.

영화 쪽 일은 단지 본론을 꺼내기 전의 에피타이저에 불과했다.

“촬영이 잘됐으면 좋겠군. 자네가 외부에 이름이 알려지면 우리로서는 나쁠 게 없으니까.”

“회사 측의 일정에는 절대 피해가 가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그래주면 고맙지. 서로 얼굴 붉히지 않는 것이 일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법 아니겠는가?”

“당연한 말씀입니다.”

나는 웃으며 대답했다.

막상 바트는 일이 자기 마음대로 풀리지 않으면 가장 먼저 화를 내는 인간이었지만 말이다.

그래도 나는 그를 다루는 법을 알았기에 지금까지 서로 얼굴을 붉힐 만한 일은 없었다.

잠시 침묵이 이어지던 와중, 바트는 돌연 반대편에 앉은 내 얼굴을 뚫어져라 바라보기 시작했다.

“흐음…….”

“왜 그러십니까?”

“잘생긴 얼굴인가 싶어서.”

“예, 보기에 나쁘지는 않죠.”

“그런가?”

“회장님 눈에는 차지 않을지 몰라도 일반인이 보기엔 충분히 매력적인 외양이라고 생각합니다.”

날카로운 눈매에 우뚝 솟은 코와 괜찮은 얼굴형. 거기에 키도 크고 몸의 밸런스 또한 괜찮아 선수로서 장점이 된다고 생각했다.

나는 자신감을 드러냈다.

그러자니 피식 웃은 바트가 상반신을 내밀며 본론을 꺼냈다.

“자네를 탑으로 밀자는 이야기가 회사에서 많이 돌더군.”

역시 이건가 싶었다.

유럽 투어에서부터 시작되어 링 서바이벌까지 이어진 내 여정.

그 과정을 다 지켜본 사람이라면 분명 나를 인정할 수밖에 없을 터였다.

신은 충분히 메인 이벤터로 올라갈만한 실력을 갖춘 선수라고.

하지만 나는 일부러 다소 무덤덤한 반응을 보였다.

“그렇습니까.”

“얼굴도 반반하고 몸도 좋은데다 실력도 나무랄 곳이 없다고 말이야. 그래서 물어봤던 거지.”

“신인인 저를 그렇게 평가해주신다면 정말 감사한 일이죠.”

“뭐, 내 생각은 다르지만.”

“그렇습니까?”

“벌크가 너무 작아. 링 위에서 위압감을 드러내긴 힘들지.”

“운동 능력을 유지하는 선에서 최대한 키운 건데 말이죠.”

게다가 나는 딱 이 정도가 프로레슬링 팬과 일반인을 아우르는 정도의 몸이라고 생각했다.

“키도 평범한 정도고.”

“일반인보다는 큰 편 아닙니까? 거리에 나서면 저보다 큰 사람은 거의 손에 꼽을 정도인데요.”

“외모도…… 아니, 말을 말지.”

“확실히 말해주십쇼.”

나는 희미하게 벗어나려는 바트를 붙잡았다. 그러자 그는 기다렸다는 듯이 한마디를 내뱉었다.

“동양인이잖나.”

“문제될 거 있습니까?”

“동양인으로서 가장 성공했던 건 스팀보트 한 명뿐이었지.”

“그 양반은 혼혈이잖아요.”

동양인 같은 마스크를 가지긴 했지만 완전히 그렇진 않았다.

“그나마도 인터컨티넨탈 챔피언이 끝이었지. 회사의 메인 챔피언은 한 번도 먹어보지 못했고.”

“그때는 벨트 자체가 그렇게 많이 오가던 시대가 아니었죠.”

스팀보트는 캡틴 로건과 같은 시대에 활동했던 선수였다.

그때는 레슬링 산업이 지금보다 작았고 쇼의 개최 자체도 한 달에 한 번 가지던 그런 시대였다.

그렇기에 벨트를 주고받을 기회 자체가 적어 챔피언이 1년은 기본으로 집권하던 때였다.

바트가 껄껄 웃었다.

“그건 그렇지. 놀랍게도 지금 자네 역시 인터컨티넨탈 챔피언이로군. 스팀보트 같기도 한데.”

“말하자면 전 스팀보트의 핫한 버전이라고 할 수 있겠죠.”

“거만하군.”

“아뇨, 반대로 스팀보트에게 보내는 제 최대의 경외입니다.”

“푸하하하하!”

바트가 웃음을 터뜨렸다.

니키 스팀보트.

‘더 드래곤’이라 불리던 그는 시대에 이름을 남긴 레슬러였다.

난 지금 그런 전설을 내 아래라고 평가하면서, 더욱이 그걸 칭찬이랍시고 이야기한 것이었다.

솔직히 말해 나도 웃겼다.

하지만 말했듯, 나 스스로가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면 실제로 될 수 없는 법.

나는 나 자신이 정말 핫-스팀보트가 될 것을, 그리고 이미 그런 남자임을 믿고 있었다.

한참을 폭소하던 바트는 이윽고 마음을 정한 듯 말을 꺼냈다.

“한번 시험해도 되겠나?”

“어떤 식으로 말이죠?”

“쿵-퓨리 때와 비슷하지. 하지만 계약서의 내용과 관계없이 각본은 전적으로 위임하겠네.”

“……제게 새로운 기믹을 부여하시겠다는 말씀이십니까?”

“그래, 아니 이번에는 기믹이라기보다도 작은 아이디어지만.”

가볍게 뜸을 들인 바트 맥센은 이내 스스로가 생각하기에 가장 어려운 기믹을 내게 요구했다.

“여자들로부터 인기를 끄는 플레이보이 컨셉은 어떨 것 같나?”

“왜 그걸?”

“글쎄, 과제잖나. 자네가 가진 능력을 보기 위해서는 어려운 토픽을 던져야겠지 싶어서.”

“…….”

거기에서 바트 맥센이 가진 인종 차별적인 관념이 느껴졌다.

‘저게 내가 소화하기에는 어려운 기믹이라고 생각하는 거겠지.’

그렇기에 시험이니 뭐니 하는 거창한 말을 쓴 것일 터였다.

하지만 예전에 SNL에 출연했을 때 만났던 코미디언, 앤디 길버그는 나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다.

‘당신이 정말로 섹시하기 때문에 유머가 되지 못했다.’고 말이다.

말인즉슨, 그쪽 작가들 역시 내가 섹시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해 그때의 유머를 짰다는 이야기였다.

편견이었다.

‘동양인 남성은 섹시하지 않다.’

사실 이건, 내가 회귀하기 전까지도 계속해서 있던 인식이었다.

동양인 남성은 성적인 매력이 부족하다고.

하지만 내가 증명하듯, 그건 단순한 편견이었다.

‘어렵진 않겠는데.’

본격적으로 시작된 바트의 시험.

메인 이벤터로 가는 관문.

그 첫 번째 과제는 생각 외로 손쉽게 해결할 수 있을 듯했다.

하지만 확인해둘 게 있다.

“쿵-퓨리처럼 우스꽝스러운 스타일을 원하시는 건 아니죠?”

“그야 물론이지. 인터컨티넨탈 챔피언이 그래서야 쓰나.”

바트는 씨익 웃어 보였다.

나는 필요한 것을 요구했다.

“그렇다면 바트, 플레이보이 기믹을 선보이기 전에 화보 촬영 하나만 잡아주실 수 있을까요?”

“화보?”

“예, 여성 대상 잡지…… 수위는 적당한 걸로 말입니다.”

“시도는 해보지. 그쪽에서 과연 좋다고 할지는 모르겠지만.”

바트는 쓰게 웃었다.

하지만 동양인 남성은 섹시할 수 없다는 바트의 낡은 생각과 세간의 의식은 무척 달랐다.

그로부터 며칠 뒤, 나는 정식으로 화보 촬영 제안을 받았다.

* * *

맥진 위민스.

미국의 성인 여성을 타깃으로 삼고 있는 유서 깊은 잡지였다.

그 표지는 매번 여성들이 좋아하는 남자들을 모델로 내세웠다.

영화배우나 가수, 스포츠 스타.

이 맥진 위민스에 프로레슬러가 출연했던 경우는 한 번뿐이었다.

존 마이클스.

전성기에는 헐리우드의 영화배우와 견주어도 손색없는 외모를 자랑했던 꽃미남 프로레슬러.

그리고 두 번째가 나.

‘나쁘지 않군.’

솔직하게 말하자면 아무 잡지라도 괜찮았지만 판매량이 보증되는 맥진이라면 훨씬 더 좋았다.

그리하여 나는 버닝콩 일정을 마친 뒤 맥진 본사가 있는 뉴욕으로 이동하게 되었다.

으리으리한 건물 안으로 안내받아 들어가자, 나를 맞이한 것은 정장 차림의 한 여성이었다.

날카로운 이목구비에 검은 머리칼을 틀어 올려 묶은, 왠지 유능할 것 같은 이미지.

“사라 콜먼입니다.”

“신이라고 합니다.”

사라는 맥진 위민스의 편집장이라는 모양이었다.

‘나이대도 나와 비슷해 보이는데 대단하군.’

간단하게 자기소개를 마친 뒤, 우리는 곧장 촬영장으로 이동했다.

그러는 사이 나는 전문가에게 내 값어치에 대해 듣게 되었다.

“자신만만한 태도가 강점이죠.”

“그렇습니까.”

“예. 지금까지 미국 매체에는 없었던, 수컷의 매력을 가진 동양인 남성. 그래서 정말로 핫한가? 하고 보다가 빠져들게 되는 마력.”

사라는 안경 너머의 눈동자로 내 상품성에 관해서 논했다.

“몸매도 여러 취향을 아우를 수 있을 정도로 좋죠. 거기다 프로레슬러라는 마초성까지 겸비.”

“가, 감사합니다.”

“그런데 그게 너무 과하지도 않고. 오랜만에 여러 컨셉으로 찍을 수 있을 것 같아서 좋겠어요.”

“기본적으로 레슬러 컨셉이라고 들었는데 말이죠.”

“거기에 맥센 회장님하고 이야기를 좀 더 나눴거든요. 배관공 컨셉이나 목수 컨셉도 좋을 것 같아서 말이죠.”

“…….”

빌어먹을 영감.

“하지만 내가 가장 기대하는 건 사실 좀 다른 컨셉이란 말이죠.”

“그게, 뭡니까?”

“이거.”

잠시 자리에 멈춰선 사라가 나에게 자신의 뿔테 안경을 건넸다.

의아해하다가 그걸 썼다.

슬쩍 웃어 보이는 편집장.

“좋네. 여기에 앞머리 좀 대충 털어서 내려보겠어요?”

“이렇게 말입니까?”

“와일드 앤 댄디. 여자들이라면 환장하는 멋진 컨셉이죠.”

“으, 으음.”

“역시 사립학교 남학생 컨셉이 제일 좋겠어. 때 묻지 않고 순수하고, 교복 입었는데 문란하고.”

“저기…… 그거 심의에는 걸리지 않는 거 맞죠?”

“괜찮아요. 신. 바지는 입고 촬영하기로 약속했으니 말이죠.”

자신만만하게 이야기하는 사라를 보며 나는 쓰게 웃었다.

좋기는 한데.

뭔가를 잃을 것 같은 느낌이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