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6.
촬영은 다행히 나쁘지 않았다.
감독을 포함해 모두가 여성이었고, 덕분에 분위기가 좀 편했다.
‘아무리 그래도 남자 앞에서 포즈를 취하는 건 좀 그러니까.’
여자들만 있는 것도 모델의 그런 감정을 의식해서인 듯했다.
남자는 보통 남자 앞에서 성적인 행동을 하는 걸 싫어하니까.
정장 차림으로 촬영을 시작했던 나는 끝날 때쯤 물에 흠뻑 젖은 채 바지만 입고 서있었다.
뭐, 프로레슬링 할 때도 자주 하는 정도의 수위니 괜찮았지만.
와일드 앤 댄디.
그런 컨셉으로 촬영된 화보 사진 몇 장을 기념 삼아 받아왔다.
다시금 버닝콩 팀과 합류하기 위해 달려가는 캠핑 버스의 안.
침대에 누운 나는 그런 사진들을 하나하나 확인해보고 있었다.
뿔테 안경을 쓰고 거칠게 넥타이를 풀어 헤치는 사진이 하나.
물에 흠뻑 젖은 채 이마를 쓸어 올리고 있는 사진이 하나.
그 외에도 내 몸매를 드러낸 사진들이 한가득 있었다.
‘확실히 잘 찍기는 했는데.’
이게 한 달 뒤의 맥진 위민스 표지로 쓰일 걸 생각하자면 어쩐지 좀 부끄럽기도 했다.
물론, 나는 상품이다.
가치를 올릴 수 있을 때 최대한 올리는 건 나쁜 선택이 아니다.
돈도 짭짤하게 받았고, 게다가 여자들이 날 매력적으로 느낀다는 것 또한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단지 좀 부끄러울 뿐.
그리고.
‘좀 미안할 따름이지.’
티파니가 떠올랐다.
잠시 고민하던 나는 화보 사진을 침대 위에 놓고 사진을 찍어 이메일로 티파니에게 보냈다.
내용은 ‘어때요?’라고.
딱히 끔찍한 배신은 아니다.
이게 바로 내 ‘일’이니까.
티파니라면 이해하겠지.
하지만 슬퍼하긴 할 거다.
감정이란 물건이 사람 마음대로 컨트롤되는 건 아니니까 말이다.
전화가 걸려왔다.
[이게 뭐에요?]
“화보.”
[아니, 어디 화보요?]
“맥진 위민스. 이번에 기믹 하나 추가하면서 촬영하게 됐어요.”
나는 당황해하고 있는 티파니에게 대강의 상황을 설명했다.
잠시 침묵하고 있던 그녀는 이윽고 내게 이야기했다.
[잠시만 기다려요.]
“예?”
의아해 되묻자니 전화기 조금 멀찍이에서 소리가 이어졌다.
분명히 ‘지금 맥진 사장한테 연락해서 당장 원본 전부 보내라고 해.’라고 티파니가 이야기했다.
[전화 바꿨어요.]
“원본은 왜요.”
[조용히 해. 쓸 곳이 있으니까.]
“…….”
[어쨌든, 나 오늘 잠 못 자게 하려고 이거 보낸 거예요?]
“아니, 뭐. 정확히는 내가 할 기믹에 관해서 말하려고 했는데요.”
[새로운 기믹이요?]
“저 잡지가 발매되면 플레이보이 기믹을 사용할 계획이에요.”
[……네?]
“예, 바트가 낸 과제죠.”
[플레이보이 기믹은 보통 악역 선수가 하는 게 아닌가 싶은데.]
“그건 나르시시스트고요. 비슷한 것 같으면서도 완전히 다르죠.”
나르시시스트는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기믹. 반대로 플레이보이는 여성을 사랑하는 기믹이었다.
‘플레이보이 역시 선역에게는 다소 맞지 않는 옷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바트가 전폭적으로 지원해준다고 했으니까. 어떻게든 잘 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전혀 감이 안 오는데, 구체적으로 어떻게 할 생각인데요?]
“다른 레슬러들과는 달리 여성들을 즐겁게 만들어주는 거죠.”
[흐음, 평소에 그러듯이?]
“누가? 제가요?”
[재미는 있겠네요. 기존에 없으면서 당신 캐릭터를 좀 더 구체화시켜줄 아주 좋은 각본이야.]
“이해해주…….”
[혀는 넣지 말아요.]
티파니의 목소리가 싸늘해졌다.
* * *
내가 생각했을 때, 이 각본에서 가장 중요한 건 세 가지였다.
첫 번째는 바로 내 외모.
두 번째는 대립할 상대방.
세 번째는 나에게 반해 각본의 감초가 되어줄 여성 선수들.
‘이 시점에서는 디바지만.’
어쨌든 나는 그런 요소 하나하나를 준비해나가기 시작했다.
일단 외모는 뭐, 말하지 않아도 맥진 위민스가 증명해주었고.
다음은 대립 상대.
거기에서 내가 선택한 것은 지금껏 잘 따라와준 녀석이었다.
바로 랜스 오튼.
버닝콩이 개최되는 도시에 도착한 나는 곧바로 녀석을 불러냈다.
우리는 근처 레스토랑에서 저녁을 먹으며 이야기를 나눴다.
“……뭐라고?”
“좀 더 찌질해져도 괜찮겠냐고.”
“그건 왜?”
“날 좀 도와줬으면 해서.”
오튼은 나와의 대립 이후로 별다른 각본을 받지 못하고 붕 떠있는 상태였다.
그렇기에 내 이야기에 흥미를 갖는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하지만 이런 대답이 나올 거라고는 정말 예상도 하지 못했다.
“물론 도와야지.”
“그래?”
“그럼, 난 오튼이야. 아버지와 할아버지가 그랬듯이 받은 건 반드시 갚는 스타일이라고.”
“벨트를 받은 건 나지만.”
“난 선수 생명을 받았지.”
거창하게도 말한다.
“네가 도와주지 않았더라면 난 지금까지도 그 역겨운 야유 속에서 괴로워하고 있었을 거야.”
“요새도 야유기는 한데.”
“재수 없는 짓을 하니까 야유를 받는 거지. 그건 내가 지금까지 받고 있던 야유와는 달라.”
오튼은 그 기쁨을 알게 된 눈치였다. 악역으로서 이야기를 이끌어가며 결국에 패배하는 즐거움을.
“그래, 너라면 충분히 위로 올라갈 자격이 있지. 좋아. 무엇이든지 말만 해.”
“그전에 질문 좀 몇 개 할게.”
“그래, 뭐든지!”
“고등학교 때 너 여학생들 괴롭히고 다니고 그랬었냐?”
“……응?”
“안 했으면 했다고 치자.”
“자, 자자자, 잠깐만!”
오튼이 스파게티를 휘감고 있던 포크를 불쑥 내게 내밀었다.
“그게 무슨 소리야!”
“오튼, 넌 이제 여자들이나 괴롭히는 불량배 역할을 맡을 거야.”
그 앞에서 나는 웃으며 말했다.
오튼은 울며 ‘제발 그만해…….’라고 했지만 난 봐주지 않았다.
그렇게 오튼을 섭외한 뒤, 나는 감초 역할을 맡아줄 여성 두 명을 각각 찾아가 이야기를 나눴다.
현재 시점에서 WWF의 여성 선수들은 ‘디바’라는 호칭으로 불리며 아이캔디 역할을 수행했다.
이때 당시에는 남성 시청자층이 원하는 게 바로 예쁘고 섹시한 여성들이었기 때문이었다.
모델이나 배우 출신이 많았고 경기를 수행하는 능력보다는 연기력이나 외모가 중요시되었다.
때문에 몇몇 사람들은 디바 매치는 필요 없다고 할 정도였지만.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주어진 상황 내에서 항상 최선을 다하는 그녀들은 뭐가 어찌되었건 간에 멋진 동료들이었다.
일단, 내가 가장 처음 찾아간 것은 바로 스테이시 치글러였다.
180이라는 훤칠한 장신에 길고 아름다운 다리 라인을 장점으로 내세워 활동하고 있는 디바.
언제나 찰랑거리는 금발 생머리에 청순하고 아름다운 외모는 그녀의 노력을 반증하는 것이었다.
비록 선수로서는 그다지 두각을 드러내지 못했으나 팬들 사이에서는 전설로 회자되는 사람이었다.
“어, 신. 무슨 일이에요?”
“날 좀 도와줬으면 해서.”
“응? 뭔데요?”
그런 그녀에게 나는 플레이보이 각본에 대해서 설명했다.
한참을 진지하게 듣던 그녀는 이내 긍정적인 답을 들려주었다.
“좋아요. 재미있을 것 같네. 나도 사실 좀 당신하고는 같이 일을 해보고 싶던 참이었거든요.”
“고마워요. 스테이시가 도와준다면 분명히 성공할 거예요.”
“아, 대신 각본 외적으로 하나만 내 부탁 들어줄 수 있어요?”
“……뭐죠?”
“나중에 나 레슬링 좀 가르쳐줘요. 낙법 같은 거 말이에요.”
“그, 그렇게 하죠.”
“고마워요!”
활짝 웃은 스테이시는 손 키스를 날리더니 그대로 사라졌다.
‘여기까지는 됐고.’
다음으로 나는 WWF의 목소리라는 별명으로 유명한 링 아나운서, 릴리 가르시아를 찾아갔다.
링 위에서 선수 소개 등을 맡는 그녀는 당차고 모나지 않은 성격으로 여기에서 오래 동안 일했다.
은퇴한 후에도 레전드들이 초대될 때면 항상 같이 초대되어 그 공로를 인정받을 정도였다.
지금도 10년 이상 근속했으나, 방부제 같은 미모는 그대로였다.
물론 남성 선수들도 언제나 외모를 단련하지만, 여성 선수들의 노력 역시 그에 뒤지지 않았다.
“신~ 우리 꼬마.”
“저를 꼬마라고 부르기에는 그쪽이 너무 젊은데요. 릴리.”
“뭐 어때. 우리 귀염둥이. 누나한테는 무슨 일로 왔어?”
“절 좀 도와주셨으면 해서요.”
“뭐야. 또 각본 참여야? 이러다 계약 조건을 바꿔야겠는데.”
환한 웃음과 함께 내 이야기를 들은 릴리는 이윽고 못 참겠다는 듯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푸하하하하! 그게 뭐야! 나 같은 아줌마보고 정말 그러라고?”
“릴리가 도와주신다면 정말 제가 플레이보이로 보일 겁니다.”
“그래, 좋아! 너하고 엮이는 건 꽤나 재미있을 것 같거든!”
그렇게 모든 섭외를 끝낸 나는 곧바로 신의 새로운 기믹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작가와 함께 각본을 써서 올린 뒤, 결제가 떨어지길 기다렸다.
대답은 약 2분 만에 돌아왔다.
[Do It.]
바트에게서 직통으로 내려온 회신에 나는 어이가 없어서 웃고 말았다.
분명 이거 확인도 안했군.
반응이 잘 안 나오면 나에게 덤터기를 씌우려는 수작이었다.
하지만 걱정은 없었다.
내가 선택한 세 사람과 함께라면 분명히 대박을 칠 테니까.
* * *
물론, 새 기믹과 각본을 준비하는 동안에도 쇼는 계속되었다.
12월 내내 잭 하디와 대립을 진행한 나는 2004년의 마지막 페이퍼뷰에서 챔피언을 지켜냈다.
그렇게 크리스마스를 보낸 뒤, 2004년의 마지막 날이 찾아왔다.
나는 티파니를 파트너로 대동해 올 한 해를 기념하는 행사인 WWF 이어 어워즈에 참가했고.
[2004년 WWF 올해의 신인 선수상. 수상자는…… 신입니다!]
신인상이라는 영예를 안았다.
메인 쇼에서 3년차까지의 선수들을 대상으로 하는 신인상.
기라성 같은 후보들을 제치고 1년차의 햇병아리가 수상하는 것은 정말로 이레적인 일이었다.
하지만 거기에 대해서 이견을 표시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결과로 모든 것을 보여주었으니까.
‘전생에는 시나가 탔는데.’
그리고 2005년에는 오튼.
하지만 두 사람 다 내년이면 3년차가 되어서 이번 생애의 수상은 한 명만 할 수 있게 되었다.
이어진 파티에 참석한 나는 동료 선수들로부터 축하를 받았다.
“네가 탈 줄 알았다, 신.”
“크하하, 이 꼬마 녀석! 부커한테 웃기는 놈이라고 할 때는 대체 뭐하는 자식인가 싶었는데!”
부커와 시몬스를 시작으로 버닝콩과 랙다운을 가리지 않고 많은 선수들이 나에게 다가왔다.
테이커와 그렉 같은 고참들로부터 시작해서, 레볼루션 멤버들이나 쿵-퓨리 기믹 당시에 여러모로 날 많이 도와줬던 워커들까지.
내 성공은 이들의 도움도 컸다.
그렇게 인사를 나눈 나는 마지막으로 시나를 직접 찾아갔다.
미래의 아이콘.
원래의 역사대로라면 오늘 신인상을 수상해야 했을 녀석은 날 보자마자 환하게 웃어보였다.
“하, 아쉽네. 역시 넌 정말 대단하다니까. 나도 올해 꽤나 열심히 했는데 너한테는 안 되겠어.”
나는 거기에서 무어라 말할 수 없는 가슴의 고양감을 느꼈다.
전생에 나는 이 2004년의 시나를 정말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그는 언터처블이었고, 누구도 흉내 낼 수 없을 것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아니었다.
나는 내가 가지고 있는 무기를 가지고 최선을 다해 노력했고, 시나보다 더 나은 결과를 냈다.
물론 이후의 녀석은 지금의 수십 배나 되는 성장세를 보이지만.
그래도 난 자신이 있었다.
앞으로도 내가 가진 지식과 능력을 총동원해 시나나 다른 선수들과 싸워나갈 생각이었다.
물론 그를 위해서는 일단 바트 맥센이 내게 제시한 시험부터 통과해야겠지만.
* * *
1월 2주차의 버닝콩.
오프닝 영상에서 한 여성 직원이 커다란 박스를 선반 위로 올리려고 낑낑거리는 모습이 나왔다.
몇 번이고 박스를 들어 올려보지만 해내지 못하는 여성 직원.
주변의 다른 남자 직원들은 그런 그녀를 무심하게 지나쳤다.
바로 그때였다.
화면 바깥쪽에서 등장한 누군가가 여성 직원이 힘을 들이고 있는 박스를 단숨에 위로 올렸다.
그리고 물었다.
[괜찮아?]
[아, 신…….]
그 말과 동시에 카메라가 위로 올라가며 내 모습을 비췄다.
[Yeeeeeeeeeeeaaaaahh!!]
환호를 보내는 관객들.
조금 유치한 보여주기였지만, 아직은 2004년이었다. 이런 각본이 먹히는 시대인 것이다.
탄흔 재킷에 선글라스를 쓴 나는 여성 직원의 뺨에 붙은 검댕을 닦아주고는 자리를 떠났다.
그리고 카메라는 자리에 남아 떠난 나를 황홀한 듯 지켜보고 있는 여성 직원의 모습을 비췄다.
[꽤나 여자 좀 울리겠는데요.]
해설자의 가벼운 코멘트와 함께 오프닝 영상이 시작되었다.
나는 얼굴이 새빨갛게 물든 걸 느끼며 이내 한마디를 내뱉었다.
“더럽게 유치하네.”
“그래? 난 멋진 것 같은데!”
“자신을 가지라고.”
날 위로하듯 스테이시와 오튼이 양쪽에서 어깨를 툭툭 건드렸다.
그렇게 나의 플레이보이 기믹이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