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7.
그렇게 미리 촬영해둔 백스테이지 세그먼트를 중심으로 플레이보이 각본이 전개되기 시작했다.
반응은 생각했던 그대로였다.
첫 경기가 끝난 후의 영상에서는 디바들이 내가 나온 맥진 위민스 화보집을 확인하고 있는 모습이 나왔다.
그녀들은 보란 듯이 표지를 보여주고는 침을 꼴깍 삼키며 페이지를 하나하나 탐독해나갔다.
그리고 이내 관객들이 느끼는 호기심에 대답을 해주었다.
[신이 이 정도였어?]
[오 마이 갓, 이것 좀 봐.]
[이 선명한 초콜릿 복근……. 내가 이런 종마를 몰라봤다니.]
[난 진작 알아봤지. 이전 링 서바이벌 경기에서 셔츠를 뜯어낼 때 그 아래에 있는 남자다운 면모를 말이야.]
[뭐야, 스테이시. 넌 얼마 전까지 오튼하고 분위기 좋았잖아?]
[난 말만 많은 남자는 딱 질색이야. 신은 그렇지 않은 것 같지만. 아니, 많은 편인가?]
[그래?]
[응, 이 단단하고 넓은 어깨로 뭔가 계속 말하고 있잖아? 그 이야기를 좀 들어보고 싶은데.]
요염한 미소와 함께 이야기를 마친 스테이시는 그대로 화면 밖으로 사라졌다.
거기에서 이후의 스토리를 상상한 관객들이 음흉하게 웃었다.
그리고 현실의 스테이시는 그런 영상을 보고는 깔깔 웃어댔다.
“아, 진짜 웃기네! 저거 진짜 내가 연기한 거지만 너무 좀 어색한데? 진짜 여자랑 너무 달라!”
“남자들은 좋아하잖아.”
오튼의 말을 잠시 생각해보던 스테이시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렇게 생각해보면 신은 남자들의 적 같은 게 되지 않나?”
“뭐, 반대로 나에게 몰입할 수 있는 기회라고 볼 수도 있지.”
“몰입?”
“다들 여자에게 인기가 많은 남자가 되고 싶어 하잖아. 근데 현실에서는 이룰 수 없으니까.”
“대리만족이라는 거군.”
“맞아.”
“섹시하고 능력 있어 모든 여자들이 선망하는 남자가 되고 싶은 욕망을 대변한다는 거지?”
“……그래.”
나는 수치심에 얼굴이 새빨갛게 물드는 것을 느끼며 대답했다.
어쨌든 거기서 더 나아가, 나와 같은 동양인 남성이라면 더 큰 대리만족을 느끼고 있을 테지만.
그와는 별개로 나에게는 내 일이라서 창피한 것도 사실이었다.
내 알몸 상반신을 성적으로 찍은 화보가 엄청난 인기를 끌다니.
‘아버지가 보신다면 당분간 집에는 가지 못하겠군.’
물론 필요한 일이고, 나쁜 쪽으로 수치스럽다는 건 아니지만.
뭔가 오그라들어 두드러기가 나는 듯한 기분이라고 해야 하나.
그래도 반응은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여성 관객 중 몇몇이 경기장에 가져온 맥진 위민스 잡지를 힘차게 들어 보일 정도였다.
[신~~~~!!]
일부러 카메라가 그 광경을 잡아 각본의 현실성을 더해주었다.
이후 경기와 대립이 몇 차례 더 이어지고 난 뒤, 쇼의 중반부.
다시 한 번 우리가 만들어둔 백스테이지 세그먼트가 나왔다.
섹시한 원피스를 입은 채 신을 찾아다니고 있는 스테이시.
그 앞에 나타난 것은 타이틀을 잃은 뒤 방황하며 여자에게 집적대고 다니는 랜스 오튼이었다.
[여기 있었네. 스테이시.]
[아, 랜스.]
[괜찮은 바를 찾았는데 일 끝나면 같이 가지 않겠어?]
[미안해요. 랜스. 오늘은 좀 피곤해서. 나중으로 미룰게요.]
[그래. ……그런데 그건 뭐야?]
랜스 오튼은 스테이시의 손에 들려 있던 잡지를 알아차리고는 반쯤 억지로 빼앗아갔다.
[아……!]
[뭐야. 이거 신이잖아? 화보도 찍었어? 와, 뭐야. 이런 걸?]
[도, 돌려줘요!]
[이런 걸 왜 보고 있는 거야? 잡으려면 좀 더 다가오지 그래?]
잡지를 위로 치켜든 오튼은 상반신을 뒤로 빼며 스테이시가 품에 안기는 것을 유도했다.
그것을 본 현실의 스테이시가 한마디를 덧붙였다.
“저러면 딱 ●알을 걷어차 주면 금방 조용해지는데 말이야!”
오튼의 안색이 창백해졌고, 그 옆에 있던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각본도 나쁘진 않겠군.”
“……신?”
“아무 생각도 안 했어.”
“아니, 말했는데…….”
각본은 계속 전개되었다.
오튼의 희롱에 스테이시가 꼼짝 못하고 당하려던 순간이었다.
화면 바깥에선 나타난 내가 오튼의 손에서 잡지를 낚아챘다.
[……뭐하는 거야?]
환호하는 관객들.
나는 뺨이 붉게 물들어 있는 스테이시에게 잡지를 돌려주었다.
[고, 고마워요.]
[신……!]
[다 큰 사내자식이 여자나 괴롭히고, 부끄러운 줄 알아라.]
[네가 무슨 상관이야!!]
[보기에 좀 역겹거든. 네가 진짜 남자라면 그래선 안 되지.]
[네가 뭔데 남자를 논해?]
[챔피언이니까?]
[다시 붙어보던가!]
[좋아, 지금 당장 할까?]
그렇게 경기가 성사되는 것을 본 관객들이 환호성을 내질렀다.
그리고 영상이 끝난 뒤의 광고 시간에도 내 이름을 소리 높여 부르며 기대감을 더 고조시켰다.
[SIN! SIN! SIN! SIN! SIN!]
정확히 내가 예상하던 만큼의 좋은 반응이 나왔다. 나는 싱긋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튼, 나갈 시간이야.”
“……이게 대체 뭐야.”
자리에서 일어서면서 오튼은 충격에 빠진 얼굴로 입을 열었다.
나와 스테이시, 오튼은 일단 고릴라 포지션으로 이동했다.
“아니, 무슨 반응이 이렇게 좋지? 좀 부담되는데…….”
“드라마를 보여줬으니까.”
“드라마?”
“그래, 오늘 버닝콩 시작했을 때부터 지금까지 쇼가 어땠지?”
“그, 글쎄.”
“경기랑 링 세그먼트를 반복했죠. ……그게 뭐 문제라도?”
스테이시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우리 세그먼트는 드라마 형식이었잖아요. 구성이 달랐으니 당연히 집중할 수밖에 없는 거지.”
시작 직전에 구성표를 보고는 괜찮게 흘러갈 것임을 확신했다.
쇼의 구성이 경기와 링 세그먼트의 반복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니까 먹히지.’
내 캐릭터를 크게 띄워주는데다가, 젊은 남녀 간의 이야기라는 점에서 주어지는 포인트도 높았다.
나는 이후의 경기 역시 괜찮게 풀릴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며 고릴라 포지션 안으로 들어섰다.
가장 안쪽에서 쇼를 총괄하고 있던 바트가 날 환영해주었다.
“플레이보이! 오늘 반응이 나쁘지 않더군. 열심히 해보게나.”
“도와주신 덕분이죠.”
‘뜻밖에 좋은’ 반응이 마음에 들었는지 호쾌하게 웃는 바트.
나는 광고가 끝날 때까지 몸을 풀며 입장할 준비를 끝마쳤다.
감정을 잡은 오튼이 씩씩거리며 먼저 링 위로 입장했다.
[Booooooooooooo!]
관객들의 야유가 쏟아졌다.
하지만 이전처럼 정말로 증오해서 보내는 종류의 야유는 아니었다.
사람들이 진심으로 선수를 싫어한다면 여기에 정말 심한 욕이 섞여 쇼가 엉망진창이 된다.
오튼은 압정 범프를 통해 당당히 인정을 받은 것이었다.
‘짜식이.’
꽤나 자신이 붙어서일까, 야유를 유도하는 능력도 나쁘지 않았다.
“신, 준비됐어요?”
직원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나는 스테이시를 잠시 돌아보았다.
“타이밍 잘 맞춰줘요.”
“물론이죠! 힘내요!”
그녀는 경기의 마지막에 등장해 오튼을 유혹하면서 순간 위기에 빠진 날 도와줄 예정이었다.
아마 경기가 끝난 다음 관객들은 다음 주에 전개될 우리 이야기를 정말로 기대하게 되겠지.
내 음악이 울려 퍼졌다.
[Yeeeeeeeeeaaaahhhhh!!]
엄청난 환호 속에 입장로 위로 나선 나는 관객들의 반응을 무시한 채 링 위로 올라갔다.
그리고 먼저 서있던 오튼의 앞으로 다가가 눈썹을 찡그린 채 무어라 말을 내뱉기 시작했다.
오튼 역시도 나와 정면으로 마주 보고 말을 쏟아냈다.
그런 모습을 외부에서 보면 서로에 대한 분노를 터뜨리고 있는 것 같은 모습이 되었지만.
실상은 달랐다.
“반응 괜찮던데?”
“그런 것 같아? 야유가 좀 커서 사실 좀 긴장했었는데.”
“괜찮아. 좋은 야유였으니까.”
“고마워. 긴장이 좀 풀리네.”
“잘 해보자고.”
그렇게 전의를 불태운 우리는 이내 링 위에서 맞붙기 시작했다.
주간 쇼였기에 적당히 템포를 조절하면서 퍼포먼스를 써 사람들에게 즐거움을 주기로 했다.
락 업으로부터 시작해 체인 레슬링으로 번져나가는 경기.
서로의 팔을 붙잡고 꺾으며 몸을 움직이던 나는 오튼의 솜씨가 꽤 나쁘지 않은 것을 알았다.
그렉이나 플레어 같은 전설이나, 러셀 같은 천재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시나보다는 위였다. 같이 일하기에는 좋은 친구였다.
이끌어줄 수 있으니까.
‘좀 더 높여볼까.’
가볍게 혀를 차 오튼을 집중시킨 나는 주먹을 크게 휘둘렀다.
“크윽……?!”
해머링에 기선제압 당하는 오튼. 나는 이어서 몇 가지 기술을 그에게 시도했다.
[SIN! SIN! SIN! SIN! SIN!]
“이게 챔피언이지!”
거기에 잠깐 쉬는 동안 관객들과의 소통을 통해 분위기를 읽고 향후의 플랜을 점검했다.
이다음에는 오튼이 날 공격하도록 되어 있다. 하지만 아직 분위기가 덜 영글었다는 느낌.
“좀 더 끌자.”
우리는 그렇게 관객들의 반응을 더 끌어오며 이것이 마치 큰 경기인 것처럼 보이도록 속였다.
관객들이 보내는 열광적인 환호는 시청자들 역시 즐겁게 만든다.
그 반응을 이끌어낼 줄 알아야 일류 선수라고 할 수 있었다.
우리는 링 아래로 내려갔다.
“예에에에쓰!! 신!”
링과 가장 가까운 바리게이트 앞에 서있던 관객들이 그런 우리에게 더 큰 반응을 보내주었다.
나는 오튼을 바리게이트로 던졌다. 거기에 등부터 부딪힌 녀석이 팔을 걸치고 매달려 축 쳐졌다.
“오튼, 좀 더 힘을 내봐!!”
“이렇게 당하고 있을 거야?!”
심지어 관객들은 야유했던 오튼에게조차 응원을 보내주었다.
남자 여자, 아이 가릴 것 없이 녀석의 등을 툭툭 두드리며 흥분해 응원을 보내주었다.
일상생활에서는 자주 볼 수 없는 떡 벌어진 프로레슬러의 등.
그걸 눈앞에서 본다는 건 생각보다 훨씬 더 사람을 흥분하게 만들었다. 거기에 나는 보았다.
아버지의 품에 안겨있는 조그마한 꼬마의 눈이 경악으로 휘둥그레 물들어 있다는 사실을.
그리고 그 옆에는 내 잡지를 신나게 흔들고 있는 젊은 여성 관객의 모습도 눈에 들어왔다.
순간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나는 쓰러진 오튼의 팔을 잡아 일으켜 세운 뒤 바싹 붙었다.
숨을 몰아쉬고 있는 녀석에게 빠르게 내 의사를 전달했다.
“올라갔다 다시 내려온다.”
“응……?”
잠깐 의아해하는 오튼.
다시 링 위로 올라간 나는 심판에게 조용히 의사를 전달했다.
“아웃 카운트 천천히 세줘요.”
일반 경기에서는 두 선수 모두가 링 밖에서 10초 이상 머무르면 경기가 무승부로 끝났다.
때문에 링 위로 올라왔던 나는 오튼이 눈치 좋게 도망치듯 빠져나가 그대로 뒤를 따라갔다.
“어딜 가, 인마!”
“크윽?!”
녀석과 엎치락뒤치락 힘을 겨루며 아까 그 자리로 다시 던졌다.
콰앙!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바리게이트에 부딪힌 오튼이 늘어졌다.
“꺄아아아아악!! 신!!”
아까 그 여성 관객이 맥진 잡지와 네임 펜을 힘차게 들어보였다.
그 앞으로 다가간 나는 아이디어를 떠올렸던 대로 그녀와 함께 퍼포먼스를 펼치기 시작했다.
펜을 받아 내가 나온 맥진 위민스를 펼쳐 거기에 사인을 하는, 각본을 빛내는 퍼포먼스였다.
“이름이?”
“제시요! 제시!!”
[Yeeeeeaaaaahhhh!!]
관객들이 다 같이 좋아해주는 게 왠지 모르게 기분이 좋았다.
얼굴이 빨개져, 눈에 눈물까지 그렁그렁 맺힌 제시가 날 바라보다 이내 한마디를 내뱉었다.
“사랑해요!! 신!!”
“나도 사랑해.”
씨익 웃으며 말한 나는 펜을 돌려준 뒤, 그 옆에서 어안이 벙벙해져 있는 꼬마를 돌아보았다.
녀석은 자기보다 10배쯤은 큰 내가 정말 무섭게 보이겠지.
때문에 나는 최대한 상냥하게 웃으며 꼬마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채소 많이 먹어라.”
“네, 네……!”
이런 팬 서비스는 스포츠에서 굉장히 중요한 요소였다.
이처럼 좋은 추억을 가진 아이들이 계속 프로레슬링을 보고, 성장해서는 자기 아이들을 데리고 쇼를 소비하는 선순환을 만든다.
지금 이 아이를 데려온 아버지 역시도 80년대에 캡틴 로건과 악수를 했던 꼬마 중 하나였겠지.
그렇기에 나는 캐릭터를 살짝 벗어난, 하지만 딱히 별 상관은 없는 추억을 만들어주었다.
“시인……!”
그때, 오튼이 일어섰다.
우리는 꼬마의 앞에서 마치 두 거신巨神처럼 싸워댔다.
여유를 부리는 내 모습에 분노한 오튼은 자신의 근성을 밑바닥부터 짜내기 시작했다.
경기는 다시 이어졌고, 나는 오튼에게 주도권을 내주고 그 공격들을 접수하기 시작했다.
“제기랄, 너 그걸 본 거냐?”
녀석은 분노해 공격하는 겉모습과 달리 말로는 내가 보여준 디테일에 혀를 내두르며 감탄했다.
그렇게 경기가 계속 이어졌고, 종반부에서 오튼이 기회를 잡았다.
“끄헉?!”
심판이 못 본 사이에 이어진 로-블로. 그것을 본 관객들이 큰 소리로 야유를 보내기 시작했다.
[Boooooooooooooo!!]
오튼은 비열한 웃음과 함께 쓰러진 날 누르고 핀을 했다. 심판이 카운트를 세기 시작했다.
1!!
[Boooooo……!!]
2!!
[Booooooooooooooo!!]
바로 그 순간, 스테이시의 테마가 경기장에 울려 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