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8.
오튼의 시선이 입장로 위로 걸어 나온 스테이시에게 꽂혔다.
동시에 힘이 빠진 것을 느낀 나는 몸을 튕겨 핀을 풀었다.
[Woooooooooooo~~!!]
남성 관객들을 중심으로 스테이시에게 야릇한 환호가 쏟아졌다.
허벅지를 아슬아슬하게 가리는 원피스에 완벽한 금발 미녀.
‘정작 본인은 저런 여자가 세상에 어디 있냐며 깔깔거리는데.’
정말로 멋들어진 연기였다.
어쨌든 시간을 벌었다.
그사이 회복하고 일어난 나는 녀석의 뒤로 로프 반동을 했다.
순간 정신을 차리고 돌아보는 오튼. 하지만 이미 늦은 뒤였다.
쩌억-!
호쾌한 소리와 함께 내 무릎이 녀석의 면상을 스치고 지나갔다.
쓰러진 오튼의 몸을 커버하고 그대로 쓰리 카운트가 이어졌다.
1, 2, 3!!
땡땡땡!!
[Yeeeeeeaaaaahhhh!!]
환호하는 관객들.
엉거주춤한 자세를 취하며 자리에서 일어난 나는 심판에게서 벨트를 받아 링 아래로 내려갔다.
내게 도움을 준 스테이시가 자신만만한 미소를 지으며 서있었다.
“어땠어?”
가벼운 질문을 들은 나는 눈길조차 주지 않고 그대로 지나쳤다.
카메라가 그걸 잡고 스테이시는 어이가 없어 나를 돌아보겠지.
바로 이게 각본의 핵심이었다.
플레이보이지만 여자에게 얽매이지는 않는 캐릭터. 바로 이게 선역으로서 지켜야 할 선이었다.
그리고 반응은 아주 좋았다.
“신, 키스라도 해주지 그래!”
“스테이시가 울고 있다고!”
“신! 사랑해요!!”
바리게이트 뒤쪽의 관객들이 나를 향해 각자 한마디씩을 했다.
개중 꼬마가 하나 보여 나는 녀석에게 주먹을 슬쩍 내밀었다.
꺄르륵 웃은 녀석이 조그마한 주먹을 내밀어 내게 부딪혔다.
‘잘 풀렸군.’
싱긋 웃어 보인 나는 그대로 고릴라 포지션 안으로 들어왔다.
직원들의 박수가 쏟아졌다.
특히나 바트는 나를 향해 엄지를 치켜세울 정도였다. 오늘의 결과가 나름 괜찮았다는 거겠지.
하지만 이게 끝은 아니었다.
오히려 시작에 불과했다.
그 후로도 나는 회사의 전폭적인 지지 아래에 계속해서 오튼과의 대립을 이어나갔다.
링 서바이벌 때 잠깐 멈추고 다시 이어진 우리의 대립은 사람들 사이에서 큰 반향을 낳았다.
각본에 낀 스테이시와 릴리를 중심으로 디바들이 대립의 신선함을 채워주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디바들이 ‘곤란한 일’이 있을 때마다 은근슬쩍 나서서 도와주었고, 그것으로 그녀들의 인정을 받았다.
하지만 그 외에 전혀 다른 속내를 드러내지 않는다는 점에서 그녀들의 사랑을 듬뿍 받았다.
링 위에서 레볼루션과 인터뷰하던 릴리를 위기로부터 구했고.
스테이시에게는 내 경기에 난입하지 말라며 확실히 말했다.
분명 신이란 캐릭터는 승리를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절대 다른 누군가의 도움을 받진 않는다.
그렇게 선을 확실히 그어두는 것을 사람들은 이해해주었다.
신은 지금껏 혼자서 싸워왔다. 그런 일관성이 캐릭터의 개성으로 이어져 환호가 나오는 것이었다.
게다가 화보 촬영 이후로 생각보다 괜찮은 남자라는 사실이 밝혀졌고, 실제로 여성들을 도와주는 모습을 보이면서도 자기가 가는 길을 절대로 포기하지는 않았다.
그러한 면모를 회사의 디바들이 긍정하는 걸 보여줘서 사람들도 그렇게 생각하도록 만들었다.
사실 좀 부끄러웠지만 대강 이런 식으로 이야기가 진행되었다.
“나 지난번에 신이랑 점심 먹었는데. 얼마나 웃겼는지 알아?”
“뭐야, 어떻게 한 거야? 그 남자는 항상 선을 넘지 않잖아.”
“좀 곤란한 척을 했지. 그 남자는 여자의 문제를 정리해주는 데는 도가 텄으니까 말이야.”
“아, 그런 남자가 필요하지. 망가진 배관을 부숴주는 남자!”
“우, 내 배관도 좀 조여 줬으면 좋겠는데. 그 거대한 렌치로.”
“뭐야, 어떻게 알아?”
“지난번에 샤워하는 걸 몰래 봤지~. 자이언트 펭귄 한 마리가 다리 사이에 매달려 있었어!”
키득거리며 이야기하는 디바들.
정말 멋진 연기력이었다.
쇼 안에서는 남자들의 니즈에 맞춘 섹시 심볼. 하지만 현실의 그녀들은 카우 걸에 가까웠다.
말을 타고 달리며 소의 뿔을 잡아당겨 제압할 수 있는 억척이들.
아니, 사실 그 정도 터프함이 없으면 WWF라는 회사에서 계속 일할 수 없는 것이다.
‘실제로 내 렌치를 확인해보기 전까지는 대사 못 친다고 해서 설득하느라고 정말 힘들었지.’
뭐, 그렇게 장난을 치고 난 다음에는 저렇게 완벽한 연기로 내 각본을 도와주었지만 말이다.
어쨌든.
쇼를 본 관객들은 남녀가 제각기 다른 관점에서 즐거워했다.
남자들은 미인들로부터 사랑을 받으면서도 자기 길을 고수하는 내 모습에서 매력을 느꼈고.
반대로 여성들은 내가 보여주는 매력적인 남성상에 주목했다.
이 각본이 먹힌 이유는, 일단 캐릭터의 일관성을 해치지 않는 선에서 확장을 시도해서였고.
두 번째로는 그게 먹히도록 내가 평소에도 엄격하게 몸과 외모의 관리에 최선을 다해왔기 때문이었다.
WWF를 즐기는 대중들은 나에게서 인종의 벽을 느끼지 않았다.
그들은 나를 자신들의 대변자이자 이상형이라고 생각했다.
그럼에도 그런 사실을 인정하지 못하고 반발하는 자가 존재했다.
바로 랜스 오튼이었다.
녀석과 나는 계속해서 신경전을 벌이며 대립을 이어나갔다. 그리고 그게 전보다 더 격화되었다.
1월 3주차의 버닝콩.
오프닝에서 분노한 오튼의 제안으로 ARS투표가 시작되었다.
‘신과 오튼, 둘 중에 더 핫한 WWF 슈퍼스타는 누구인가?’
그리고 이어진 세 시간의 쇼 막바지에서, 우리는 그 결과를 가지고 링 세그먼트를 시작했다.
[SIN! SIN! SIN! SIN! SIN!]
관객들이 기대 속에서 내 이름을 크게 연호했다. 하지만 내 기분은 그다지 좋지 못했다.
전화로 굳이 이런 걸 투표해서 정해야 하나 싶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전부 각본이고 사실은 이 ARS 투표 집계가 꽤나 많이 이루어졌다고 해서 정말 기뻤다.
우리 모두가 그랬다.
다 함께 즐겁게 각본을 준비했으나 링 위에서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그런 감정을 드러냈다.
“오케이, 좋아, 좋다고! 어디 한번 투표 결과를 보도록 하지!”
어이없어 하는 나와 달리 오튼은 잔뜩 흥분해 링 위를 제 안방처럼 돌아다녔다.
“물론 내가 이겼겠지만! 보라고! 내 이 매끈하고 멋진 근육을!”
[Boooooooooooo!]
오히려 이번 각본에서 나르시시즘 악역은 오튼인 것 같았다.
헌터나 플레어의 영향으로 삼각팬티 한 장 달랑 입고 있는 녀석은 멋진 근육을 드러내 보였다.
“넌 어때? 신! ……릴리, 잠깐 여기에 와서 마이크 좀 들어봐.”
링 아나운서인 릴리까지 불러 완전히 어그로를 끄는 녀석.
보디빌더처럼 포즈를 취할 때마다 관객들이 웃으며 야유를 보냈다. 그들로서도 이번 각본은 편하게 즐길 수 있는 것이었다.
“어때……! 릴리!”
“예, 잘 봤고요.”
릴리가 기계적으로 대답하자 관객석에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이어 의미심장하게 웃은 그녀가 구석에 서있던 내게 다가왔다.
“그럼 다음을 볼까요?”
여성 관객들이 크게 환호했다.
“신, 포즈를 취해줄래요?”
묘한 미소와 함께 묻는 릴리.
그 도움은 꽤나 컸다.
현재로서도 오랫동안 회사에 근속했던 그녀였으나 각본 참여는 딱히 하지 않던 상황이었다.
링에서 선수 소개와 안내만 맡고 있던 그녀. 하지만 신과의 인연으로 거의 처음 감정을 드러냈다.
사람들은 환호를 보낼 수밖에 없었다. 신과 릴리의 이야기가 어떻게 될 것인지 궁금했으니까.
하지만 나는 마이크를 잡고 그 산통을 완전히 깨버리고 말았다.
“……꼭 해야 돼?”
“부끄러워요?”
“아니…… 레슬러가 레슬링이나 하면 되지, 왜 굳이 서로 몸 자랑을…….”
“대중들이 궁금해하잖아요.”
릴리가 요염한 미소와 함께 내 셔츠 안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모두가 너무도 알고 싶어 한다고요. 화보에서 볼 수 없는, 당신이 어떤 남자인가에 대한 걸…….”
분위기가 야릇해졌다.
사람들은 내 앞에 다가온 릴리를 침을 꼴깍 삼키며 바라보았다.
이전까지 단 한 번도 사적인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던 만큼, 지금의 릴리는 성적으로 관객과 시청자들에게 크게 어필했다.
하지만 망부석처럼 서있던 나는 이어진 오튼의 공격을 피했다.
[Booooooooooooo!]
분위기를 확 깨버리는 녀석의 행동에 사람들이 야유를 보냈다.
더군다나 선수도 아닌 릴리가 우리 사이에 끼어 있어서 상황은 좀 더 녀석을 악역으로 몰았다.
릴리의 어깨를 감싸 안은 나는 오튼의 공격에서 빠져나왔다.
다시 한 번 여심을 울리는(디바들의 표현이다) 행동으로 환호를 받은 내가 오튼을 노려보았다.
“무슨 짓이야?”
“둘이서 분위기 잡고 뭐하는 거야?! 시간 끌지 말고 얼른 네가 패배하는 결과나 확인하자고!”
녀석은 흥분한 기색을 잔뜩 드러내며 입장로 위의 초대형 스크린을 손으로 가리켰다.
한숨을 내쉰 나는 릴리를 에스코트해 링 아래로 내려보내며 녀석의 말에 동의했다.
“좋아, 마음대로 해.”
두구두구두구두구…….
결과를 알리기 전, 긴장감을 고조시키는 드럼 소리가 이어졌다.
‘2005년의 감성이 느껴지는군.’
쓰게 웃은 나는 빠바암~ 하는 팡파르에 스크린을 돌아보았다.
‘신과 오튼, 둘 중에 더 핫한 WWF 슈퍼스타는 누구인가?’
그런 표제어의 아래로 투표율이 기록되어있는 게 보였다.
신 : 92.7%
랜스 오튼 : 7.3%
“…….”
조작이라지만 결과가 심하군.
원래는 한 85대 15 정도로 하기로 하지 않았던가?
그렇게 생각한 나는 어깨를 으쓱하며 오튼을 바라보았다.
굳어져 있는 녀석을 향해 관객들의 챈트가 쏟아져 내렸다.
[Lo-ser! Lo-ser! Lo-ser! Lo-ser! Lo-ser! Lo-ser!]
“닥쳐! 이 쓰레기들아!”
“오튼…….”
“너도 닥쳐! 신! 이건 조작이야! 아니라면 내가 너 같은 ‘트윙키’에게 질 리가 절대로 없잖아!!”
[Booooooooooooooo!!]
관객들의 야유가 이어졌다.
트윙키.
미국에서 가장 대중적인 과자로, 겉은 노랗고 안에는 하얀 설탕 크림을 넣어둔 게 특징이었다.
그리고 동시에, 백인인 척 행세하는 동양인을 말하는 속어였다.
그렇기에 오튼에게 쏟아지는 야유는 순간 상상을 초월했다.
하지만 나는 웃었다.
이들의 야유가 오튼이 하는 말을 크게 부정했기 때문이었다.
내가 말하지 않아도.
2만의 관객이 내가 ‘트윙키’ 같은 게 아니라고 외쳐주고 있었다.
그렇기에 나는 순간 오튼이 당황할 정도로 약간의 뜸을 들였다.
[Booooooooooooooooo!]
끊이질 않는 야유.
내가 진정시키지 않는 이상 이들은 끝까지 오튼에 대한 야유를 놓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가까이 다가온 오튼이 내게 욕하는 척하며 말을 이었다.
“야, 미안해. 각본이잖아.”
아무래도 내가 진짜로 화가 났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아니, 오히려 내가 미안하다. 마음에도 없는 말을 하게 해서.”
그렇게 말한 나는 그대로 마이크를 쥐고 한마디를 내뱉었다.
예정과는 조금 다른 말.
하지만 이 대사는 분명히 사람들을 환호하게 만들 것이 뻔했다.
“지금 이곳에 있는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것 같은데?”
[Yes! Yes! Yes! Yes! Yes!]
관객들은 내 말에 동의하기 위해 경기장이 떠나가라 소리쳤다.
* * *
쇼는 성황리에 마무리되었다.
락커룸에서 퇴근 준비를 마치고 나온 나는 동료들과 인사를 나눈 뒤 경기장을 떠나려고 했다.
하지만 전화가 걸려왔다.
바트 맥센이었다.
‘무슨 일이지?’
영문을 몰라 고개를 갸웃거린 나는 이내 전화를 받았다.
“예, 보스.”
[잠깐 사무실로 와줄 수 있나?]
“그렇게 하죠.”
퇴근은 미뤄야 할 듯했다.
왔던 길을 그대로 되돌아간 나는 락커룸 바로 옆에 있는 사무실 안으로 들어섰다.
책상 앞에 앉아 있던 바트가 날 보고 미소를 지었다.
“퇴근하려고 했나? 미안하군.”
“아닙니다. 보스가 부르셨는데 와야죠. 무슨 일이시죠?”
“일단, 오늘 멋졌네.”
“감사합니다.”
“내 예상을 벗어난 활약이야. 이렇게 반응이 좋을 줄은 몰랐어.”
나는 쓰게 웃었다.
겉으로는 저렇게 말해도 속으로는 불편한 기분도 있을 터였다.
바트 맥센은 모든 상황을 자기 통제 아래에 두지 않으면 크게 불편해하는 인물이니 말이다.
그럼에 절대 자기 진심을 드러내지 않아서 여러모로 성가셨다.
뭘 바라고 날 부른 걸까.
“시험은 통과한 겁니까?”
“이야기는 들었나?”
“……무슨 이야기요?”
“자네가 출연한 맥진 위민스의 판매량이 올해 최고라더군.”
바트는 자신의 책상 위에 있던 잡지를 가리켰다.
“솔직히 말해 상상도 못했네. 그리고 이해가 안 돼. 지금까지 벌어진 모든 일이 말이야.”
동양인 남자가 맥진 위민스의 초청을 받아 화보를 찍은 것.
동양인 남자가 진행하는 플레이보이 각본이 먹히는 것.
동양인 남자가 여성들에게 인기를 끄는 것.
그 모든 게 미국 동부 출신의 졸부인 바트의 눈에는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이었다.
하지만 시대는 변했다.
단지 그가 인정하지 못할 뿐.
자신의 시대가 간 걸 인정하지 못하고 고집을 부리는 남자.
내게는 바트가 그렇게 보였다.
“그러고 보니 말이야. 오늘 스크린에 나온 결과를 봤나?”
“예, 원래 각본하고 미묘하게 다른 결과가 나왔던데요.”
바트가 피식 웃었다.
“그게 다 이유가 있네. 이쪽 예상하고는 전혀 다른 결과였어.”
ARS 투표의 결과.
비릿하게 웃은 바트 맥센은 내게 그 결과에 대해 말해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