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프로레슬링의 신-119화 (119/634)

119.

“그대로네.”

“네?”

“스크린에 나온 결과가 우리가 ARS를 통해서 세 시간 동안 수집한 사람들의 의견이었네.”

“……놀랍군요.”

“그렇지?”

내 말을 진심으로 받아들이나?

나는 부킹에 따라서 정당하게 나온 결과라고 생각했는데.

이 각본에서 오튼은 정말로 매력적이지 않은 남자로 그려졌다.

시청률을 위한 희생이었다. 그렇기에 이번 각본의 공은 오튼에게 돌아가야 마땅한 것이었다.

그는 찌질하고 뒤끝 있는 구린 남자 역할을 정말 놀라울 정도로 멋지게 소화해냈다.

특히나 디바들을 희롱할 때의 대사나 연기력은 정말로 그런 놈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멋진 쓰레기지.’

그렇기 때문에 이런 결과가 나온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내 외모는 인종과 관계없이 매력적이었다. 사람들은 단지 그것을 받아들인 것에 불과했다.

하지만 바트는 인정하지 못했다.

고집을 부리는 것이었지만 그것조차도 절대 인정하지 않겠지.

‘아직 좀 남았나.’

그렇게 생각한 순간이었다.

주머니 속의 핸드폰이 부르르 떨렸다. 나는 바트와 눈을 마주친 상태에서 천천히 전화를 받았다.

익숙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통화, 괜찮아요?]

“지금 회장님이랑 단둘이서 이야기를 나누던 중이었는데.”

[그러면 더 잘됐네. 어차피 아버지 쪽에도 이야기를 꺼내려고 했으니 말이에요.]

“……?”

[스피커 모드로 바꿔봐요.]

일단 그렇게 했다.

테이블 위에 핸드폰을 올려놓자 바트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누구지?”

“티파닙니다.”

“티파니……?”

그렇게 의아해하는 건 내가 티파니를 ‘아가씨’라고 부르지 않아서 나오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그렇게 티파니가 합류해 세 사람의 통화가 시작되었다.

[여보세요?]

“그래, 티파니 무슨 일이지?”

[오랜만이네요. 아버지.]

“본론부터 말해라.”

[신을 부킹하려고 하는데요.]

“무슨 소리지?”

[피플즈 매거진이라고 아시죠?]

“그래.”

[거기에서 매년 ‘올해 가장 섹시한 남자’를 뽑는단 말이에요. 열다섯 명씩. ……알고는 계시죠?]

“모르는데.”

“…….”

[…….]

역시 프로레슬링에만 관심이 있는 진성 너드다운 발언이었다.

소문에 의하면 바트는 갱스터 무비로 역대급 대박을 쳤던 ‘프라이 페이스’도 모른다고 했던가.

피플즈 매거진은 남녀를 가리지 않고 미국에서 가장 유명한 잡지 중 하나였다.

각종 가십을 다루며 어디를 가든 한 권씩은 비치되어 있을 정도로 대중들이 많이 본다.

‘그런데 내가 거기에?’

순간 의아했다.

물론, 내가 맥진 위민스에 나오면서 순간적으로 미국에서의 유명세가 확 떠오르기는 했지만.

“티파니, 그게 무슨 말이야?”

“……?”

바트가 날 의아해 바라보았다.

하지만 난 무시했다.

[제가 아는 기자 친구가 있는데, 당신을 밀어주면 올해 괜찮은 순위에 올라갈 것 같다고 해서요.]

“그래서?”

[피플즈 매거진의 가장 핫한 남자 순위는 일반 투표와 기자들의 의견으로 종합되어서 나와요.]

티파니는 거침없이 자신의 생각을 피력해 나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미국에서는 매일 수도 없이 파티가 벌어지죠. 기자들도 많이 참석하니 당신을 거기에서 영업하면 어떨까 싶네요.]

순간 미소가 지어졌다.

[목표는 2005년 내내 당신이 가진 섹시함을 어필해 피플즈 매거진의 섹시 가이 순위에서 나쁘지 않은 결과를 내는 거예요.]

“멋진 아이디어로군.”

확실히 티파니가 밀어준다면 나는 성과를 낼 자신이 있었다.

거기에 이건 회사 쪽과 연관되는 일도 아니니까 바트의 허락이 딱히 필요한 일도 아니었다.

마지막으로 올해 나올 영화, 헬 쏘우의 흥행 성적을 생각하자면 분명 순위에 들 수 있겠지.

“잠깐, 잠깐, 잠깐.”

바트가 우리를 제지했다.

그는 책상을 쿵, 하고 내리칠 정도로 크게 분개하며 소리쳤다.

“내 앞에서 너희들만 아는 소리를 하지 마! 내가 그런 일을 허락할 거라고 생각하는 거냐?”

거기에서 순간 화가 치밀었다.

바트는 나를 똑바로 노려보며 핸드폰을 목소리만으로 부술 기세로 말을 이어나갔다.

“프로레슬러가 그런 결과를 내서 뭐해! 당장 내일 각본도 정해져 있지 않은 마당에……!!”

[아버지, 장기적으로 봐주세요. 이건 결국 회사를 위한 길이죠.]

“티파니 마리아 맥센!”

바트는 딸의 미들네임까지 불러가면서 크게 분노를 드러냈다.

여기가 고비다.

나는 바트의 마음을 이해했다.

그는 지금 나의 이름이 통제하기 힘들어질 정도로 커지는 것을 두려워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말했듯이 그는 이 왕국을 통치하는 왕이었다. 대부분 자신이 원하는 대로 결과를 만들어냈다.

하지만 몇 번의 시대적 혁명으로 인해 그것이 크게 무너졌다.

캡틴 로건.

락콜드 스티비 스틴.

2005년까지 두 번의 혁명을 겪은 그는 더 보수적으로 변했다.

자신의 시대를 만들어낸 이들에 의해 바트 맥센은 자기 고집을 꺾어야만 했기 때문이었다.

캡틴 로건은 회사의 어두운 면을 낱낱이 까발렸고, 락콜드는 아예 드라마 자체를 바꿔냈다.

헌터가 말했듯, 그는 락콜드의 이후 그것을 겪기 싫어해 일부러 아이콘의 탄생을 제어해왔다.

간단한 일이었다.

바트 자신의 취향대로 캐릭터를 만들면 귀신같이 망하니까.

옳으냐, 틀리냐. 그런 문제가 아니었다. 바트는 단지 이 왕국을 소중히 생각할 뿐이었다.

말하자면 다들 자기가 만든 드라마의 출연자이며, 자신 역시 그 세계에 갇혀 행복하게 살아가는 것을 원했다.

그렇기에 지금 상황을 불쾌하게 생각한 것이다.

지금 자신의 왕국을 향해 누군가 나뭇가지를 칼처럼 들어 올렸다고.

내가 티파니와 함께 전혀 다른 방식으로 바트의 손아귀로부터 벗어나려는 것처럼 느껴지겠지.

물론, 그건 착각이었다.

나는 업계를 쥐락펴락하거나 떠날 마음이 없었다. 단지 모두가 좋은 결과를 만들고 싶을 뿐이었다.

따라서 나는 꾹 참았다.

뭐가 됐건 나는 눈앞의 이 노인과 끝까지 함께 가야 했으니까.

거기에 더해, 이 레이스에서 이기고 싶은 기분이 드는 것도 사실이기는 했지만 말이다.

‘얼마 전에 자각한 꿈이지만.’

그렇기에 감정을 다스린 나는 또박또박 말을 이어나갔다.

“쿵-퓨리를 기억하십니까?”

“……기억하지.”

“그건 저와 보스의 합작품이었습니다. 인기도 꽤 끌었고요. 저는 저희가 계속 그런 식으로 일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말도 안 돼.”

“저는 회사를 위해 끝까지 헌신할 생각입니다. 저와 티파니를 믿고 한번 맡겨주십시오.”

“내가 널 어떻게…….”

[하아, 제기랄. 아버지. 좀 믿어 줘요. 제가 잘 아니까.]

“사업적으로 만나는 인간을 신뢰해서는 안 되는 법이야!”

[아니, 우리 만나고 있거든요. 사업적이지 않은 의미로.]

티파니가 기세 좋게 말했다.

바트의 안색이 새파랗게 질렸다.

“아니, 그게 무슨…….”

[신은 절대 회사를 배신할 사람은 아니에요. 걱정 마세요. 아버지, 그쪽보다 더 너드니까.]

“…….”

어느새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있던 바트가 자리에 털썩 앉았다.

그는 큰 충격에 휩싸인 얼굴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맥센이, 너와?”

“……마리아죠.”

나는 미들네임으로 정정했다.

이 양반, 이런 와중에도 자기 딸보다 내가 맥센의 이름을 가진 여자와 만나는 걸 더 신경 썼다.

“보스, 믿어주십시오.”

[아버지. 저도 부탁해요. 이건 정말로 큰 기회가 될 거예요.]

“…………빌어먹을.”

그는 한숨을 내쉬며 의자를 돌렸다.

“알겠으니 나가라.”

“바트.”

[신의 푸시를 끊지 않겠다고 약속해주세요. 그때까진 못 나가요.]

티파니가 내 어깨를 잡았다.

순간 그런 생각이 들 정도로 믿음직스러운 한마디였다. 나는 바트의 등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하지만 여기에서는 일단 그 도움을 거절해야 할 순간 같았다.

나는 지금 티파니와 바트의 사이에서 조율을 해야만 했다.

“……티파니, 이따가 연락해요.”

[네?]

나는 전화를 뚝 끊었다.

의아해하며 돌아보는 바트.

줄이 끊어질 것처럼 팽팽했던 긴장감에 생긴 약간의 유격.

나는 입을 열었다.

“저는 어렸을 때 존 마이클스를 가장 좋아했습니다.”

“뭐……?”

“회장님은요?”

“……그 모두를 고용했던 내가 그걸 말할 거라고 생각하나?”

“그전에 있을 거 아닙니까.”

“네가 뭘 안다고.”

“시험해보시죠.”

“……헌터 코왈스키.”

“트리플H의 스승이군요.”

“루 테스.”

“철인 루 테스라면 유명하죠.”

“그래서, 이게 자네의 프로레슬링에 대한 애정을 증명하나?”

“반대로, 증오죠.”

“……?”

“가지지 못한 사랑은 증오가 되어버린다고들 하잖아요. 제게 있어 프로레슬링은 그런 거였죠.”

언제나 그랬다.

전생에는 특히 심했고.

지금도 지워지진 않았다.

“전 아이콘이 되고 싶습니다.”

“내가 그걸…….”

“예, 헌터에게 들었습니다. 락콜드의 시대 이후로 더 이상 아이콘을 만들 생각이 없다고요.”

나는 바트의 앞으로 다가섰다.

“하지만 전 그렇게 될 겁니다. 회장님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언젠가 새 시대를 열 것입니다.”

“말인즉슨 너는 내가 생각하는 ‘The Guy’가 아니란 말이군.”

“그렇겠죠. 전 회장님 머릿속에서 나온 캐릭터가 아니니까요. 미국 어딘가에 처박혀 있다가 여기에 나타난 겁 없는 애새끼죠.”

“……틀린 말은 없군.”

“코왈스키나 루 테스도, 모두들 거기에서 시작했을 겁니다.”

바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리고 그들이 그랬듯 언젠가 회장님도 제 팬이 되시겠죠.”

“…….”

그런 내 말을 듣고 잠시 입을 다물었던 바트는 이내 여봐란 듯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푸, 푸하하하하하하!!”

너무 웃는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잠시 바트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는 조금도 내 눈치를 보지 않았다.

60대 노인의 힘찬 웃음이 고요한 사무실에 울려퍼졌다.

“내, 내가 자네의 팬이 된다고? 난 그 캐스켓-테이커에게조차 팬이라고 말하지는 않았네!”

분명히 바트는 훗날 잡지 기자로부터 받은 질문에서 테이커를 가장 좋아하는 선수로 꼽기는 했다.

하지만 그건 팬이 선수를 보는 눈은 아니었다. 충성심과 꾸준함, 헌신을 이유로 들었으니까.

알고는 있다.

이들 모두를 총괄하고 있는 바트의 입장에서 프로레슬링을 즐기기란 너무도 어렵다는 사실을.

그렇기에 그는 제작자의 입장에서 프로레슬링을 즐기고자 했다.

나와 같은 이유였다.

프로레슬링을 너무 사랑하지만, 더 이상 즐길 수가 없어져 증오로 뒤바뀌고만 것인지도 몰랐다.

‘안타깝군.’

그렇기에 자신의 녹슨 아이디어가 각본의 파괴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계속 자행하는 것일까?

나는 슬쩍 고민에 빠진 채 눈앞에 선 노인을 바라보았다.

한마디로 특정할 수 없는 인물이다. 헌터도 물론 속이 깨나 복잡한 양반이기는 했지만 이 바트 맥센하고는 비교를 불허했다.

“자네가 그걸 한다고?”

“제가 못하는 게 있습니까?”

“미리 말해두지. 나는 구닥다리 늙은이라 다른 인종을 남들과 똑같은 눈으로 볼 수가 없어.”

“제가 그 눈에 끼어 있는 편견을 박살 내드리겠습니다.”

“지금은 불가능하겠지만.”

“예, 그래서 앞으로 좀 더 절 믿어주셨으면 하십사…… 해서 허세를 좀 부려보고 있는 겁니다.”

“……신.”

“네, 바트.”

“나는 비즈니스맨이야. 이렇게 감정이 움직이는 상황에서도 절대 쉽사리 예스를 말하지 않는 인간이지.”

“제가 좋으시다는 거군요.”

“그러니 내가 또 변덕을 부리기 전에……. 내가 절대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을 준비해야 할 걸세.”

“대부는 보셨나 보군요.”

“그게 뭔데?”

“…….”

역시 이상한 사람이다.

쓰게 웃은 나는 대충 인사를 마치고 사무실을 나가려고 했다.

티파니에게 결과를 전해야 할 것 같아 곧장 전화를 걸면서.

신호가 이어지고.

“아, 맞아. 한마디만 더.”

바트가 날 불러 세웠다.

“예?”

[여보세요?]

내 대답과 티파니가 전화를 받은 건 거의 동시의 일이었다.

“내 아집을 넘어서기 위해 내 딸을 ‘먹은 건’ 나름대로 참신한 결정이었다고 생각하네만.”

“…….”

[신? 어라?]

나는 전화를 끊었다.

듣게 할 이야기가 아니었다.

“그로 인해 자네가 앞으로 무슨 일을 하던 내 딸을 먹어 목표를 이뤄냈다는 꼬리표가 붙을 걸세.”

이 새끼, 아버지가 맞나?

“……몇 가지 정정하지.”

나는 순간 머리가 핑 도는 걸 느끼며 바트를 노려보았다.

“먹은 거? 아냐. 꼬리표? 신경 안 써. 당신? 엿이나 먹어.”

바트가 씨익 웃었다.

거기에서 나는 순간 자신이 그물에 걸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모두 이 이유를 물어보기 위해 던진 도발이었던 거다.

“그렇다면 왜 만난 거지?”

“……같은 방향을 보고 있으니까.”

이어진 질문을 쳐내듯 대답한 나는 곧바로 방을 빠져나왔다.

그러자니 닫힌 방문 너머로 호쾌하게 웃는 소리가 이어졌다.

‘빌어먹을 자식.’

등 뒤에서 전해지는 존재감에 절대 마음대로 안 되는 인간처럼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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