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5.
결국 제이나는 내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고 그대로 게임을 포기했다.
그로서 자연히 기권패로 WWF의 승리가 선언되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프레디 헬버그는 단 한 번의 실전을 뛰기 위해 수개월 이상을 훈련하는 프로 격투기 선수였다.
심지어 데뷔 경기를 앞두고 있는 만큼 절대로 위험천만한 스턴트를 할 수는 없는 것이다.
‘뭐, 물러나지 않았다고 해도 분명히 내가 이겼겠지만 말이야.’
테이블 위에 유리 조각이 흩어져 있는 상황에서 집중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으니까.
기꺼이 그런 일을 해낼 수 있는 인간은 끽해야 프로레슬러 정도겠지.
어쨌든, 자기 자존심이 구겨지는 것조차 감수한 제이나의 판단에는 찬사를 보내주고 싶었다.
‘바트였다면 시켰을 텐데.’
그 인간이라면 자기 자존심을 위해라면 종합격투기의 링 위에 프로레슬러를 올릴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진다면 그 선수에 대한 관심을 영원히 끊어버리겠지.
기업가란 자존심이 강한 생물이었고, 바트는 그게 거의 정신병 수준으로 심각했으니 말이다.
그렇기에 나는 제이나가 나름대로 좋은 사장이라고 생각했다.
티파니의 머리에 샴페인을 부은 것도 다 떠나서 보자면, 좌중의 관심을 끌기 위한 좋은 행동이었다.
단지 상대가 나였을 뿐.
‘그게 유일한 실수였지.’
AFC 팀이 스테이지에서 내려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 스눕-덕이 웃으며 내 앞으로 다가왔다.
그는 말보다 앞서 먼저 나에게 주먹을 내밀었고 우리는 가볍게 브로피스트를 주고받았다.
“맨~. 넌 정말 미친놈이야.”
“저한테 200만 달러짜리 샴페인을 두 병이나 던져준 당신이 더 미쳤죠.”
“괜찮아. 다이아몬드만 챙길 수 있다면 술 자체는 싸구려니까.”
그는 낄낄거리며 웃었다.
자연스럽게 스눕-덕에게 바통을 넘긴 나는 티파니와 함께 스테이지를 내려왔다.
약간 과열되었던 분위기는 게임이 끝나자 원래대로 돌아왔다.
다들 우리의 대결에 할 말이 많은지 분위기는 다소 혼잡했다.
그것을 끊어내듯 턴테이블의 스크래치 사운드가 이어졌다.
대충 ‘위끼-윅’ 정도.
뭔가 싶어 멈춰서 돌아보자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킨 스눕-덕이 마이크에 대고 말했다.
“제기랄, 방금 게임은 오늘 본 것 중에 가장 터프한 장면이었군.”
덤덤하게 감상을 이야기한 그가 이어 나를 손으로 가리켰다.
평소 심드렁한 태도로 유명한 스눕-덕이 이렇게 말할 정도면 달리 해석할 것 없이 정말로 그렇다는 의미였다.
“모두들 멋진 깡을 보여준 신에게 박수를 보내달라고.”
스눕-덕이 표한 리스펙에 사람들이 내게 환호를 보내주었다.
가볍게 손을 들어 반응한 나는 이내 호텔 안으로 들어왔다.
그러자니 나에게 스포트라이트를 돌리기 위해 줄곧 침묵하고 있던 티파니가 킥킥 웃었다.
“포인트 제대로 땄는데요.”
“스케줄 때문에 적당히 하고 돌아갈 생각이었는데 말이야.”
“그럴 수도 없게 되었네요.”
“그러게.”
나는 쓰게 웃었다.
이제 상처를 치료하고 나가면 말 그대로 ‘무수한 악수의 요청’이 쏟아지는 것이 아닐까.
다소 부담스러운 기분을 느꼈지만 이 기회를 피할 순 없었다.
티파니의 머리에 샴페인이 쏟아지는 모욕을 ‘감내’하고 얻어낸 환상적인 결과였으니까.
물론, 나는 제이나의 쇼가 환상적이라고 평가를 내렸다.
하지만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다.
‘그 새끼…….’
열이 받기는 했다.
이를 빠득 갈며 고개를 든 나는 이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누군가 다가오고 있었다.
의약품이 든 상자를 손에 든 프레디 헬버그, 그리고 그 옆에는 제이나 화이트였다.
나는 눈썹을 찡그렸다.
시가를 문 채 다가온 제이나가 내 팔꿈치를 힐끔 보았다.
“치료가 필요하겠군.”
“……?”
“프레디가 의학부 출신이거든. 한번 믿고 맡겨보지 그러나.”
“무슨 꿍꿍이지?”
“여기는 파티장이 아니야. 그냥 완벽하게 날 물 먹인 자네에 대한 찬사라고 생각해주게.”
나는 옆에 서있던 티파니와 눈짓을 주고받았다. 할 말이 있었는지 그녀가 먼저 나섰다.
“그럼 미스터 화이트, 저희는 잠깐 빠져서 대화라도 나눌까요?”
“……뭐, 상관없네.”
두 사람이 모퉁이 뒤쪽으로 사라졌다. 나는 머뭇거리며 서있는 프레디를 돌아보았다.
“정말 의학부 출신?”
“믿어주시죠.”
“그쪽도 날 존중하는 건가?”
“차이를 좀 알게 되었죠.”
“나도 좀 느꼈지.”
싱긋 웃은 나는 근처의 의자에 앉아 프레디에게 치료를 부탁했다.
녀석은 의료 상자를 열고 내 팔꿈치 상태를 살피기 시작했다.
우리가 막 호텔에 들어왔을 때 마주친 걸로 보자면 다른 꿍꿍이는 없는 듯했다.
“다행히 상처가 심하진 않네요. 유리가 박힌 것도 없어 보이고.”
“몇 잔 더 할 수 있겠는데.”
“혹시 이런 것도 기술이 있습니까? 유리 조각 위에 아프지 않게 착지하는 법이라던가.”
“하나님께 빌면 돼.”
“……하긴 그렇겠군요. 테이블 위의 유리 조각은 어떻게 조작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말입니다.”
소독약이 따끔했다.
프레디는 흥미롭다는 듯 내 상처를 살펴보며 계속 말했다.
“정말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팔꿈치를 올려놓으시던데. 그때 좀 느꼈습니다. 프로레슬러는 정말 대단한 사람들이구나, 하고요.”
“뭐, 그쪽이야말로 그렇지 않아? 난 종합격투기 선수들이 느끼는 실전의 부담감은 장난 아닐 거라고 생각하는데.”
“익숙해졌습니다.”
“나도 그래. 거기다 그쪽 몸을 보자면 정말 하루도 빼놓지 않고 단련한 게 느껴지고.”
“같은 생각을 하셨군요. 저도 당신의 몸을 보고 정말 괴물 같은 퀄리티라고 느꼈는데.”
“패션 근육이야. 당신 같은 실전형이랑은 비교할 수가 없지.”
“시치미 떼지 마시죠. 스포츠 의학적인 관점에서 봤을 때 절대로 패션 근육은 아닙니다.”
“……설마 전공이 의학이 아니라 스포츠 의학인 건가?”
“뭐, 비슷한 겁니다.”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한다.
“어쨌든 이 정도면 평소에 격투기도 하셨던 것 같은데요.”
“쇼의 현실성을 위해서 그래도 어느 정도 배워두기는 했어.”
“그럼 아까 펀치는 일부러 맞아줬다는 이야깁니까?”
“쇼를 만들기 위해 일부러 피를 보일 필요가 있었으니까. 이쪽 용어로는 블러드잡이라고 하지.”
“……역시 그랬군요. 왠지 감촉이 다르다 했더니. 대단합니다.”
순순히 감탄한 프레디는 치료를 끝마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래도 나름 잘했다.
붕대도 무슨 짓을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잘 감아둬서 팔을 구부리는데 불편함은 없었다.
그렇게 벗어두었던 셔츠와 재킷을 입자 상자를 정리하고 일어선 프레디가 악수를 청해왔다.
“오늘은 멋졌습니다. 신.”
솔직하게 자기감정을 표현한 녀석이 상자를 가져다두기 위해 복도를 가로질러 사라졌다.
스포츠 의학을 전공한 선수에게 몸이 좋다는 이야기를 듣다니.
‘나쁘진 않군.’
씨익 웃은 나는 곧바로 티파니와 제이나가 모습을 감춘 모퉁이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러자 대화가 들려왔다.
먼저 제이나.
“딱히 악의를 가지고 한 행동은 아니었다고…… 말했을 텐데?”
아무래도 아까 샴페인을 뿌린 행동에 대해서 대화를 나누고 있는 모양이었다.
“뭐, 그렇다면 다행이네요.”
티파니가 미소를 지었다.
“앞으로도 당신의 무례한 행동에 딱히 다른 의미가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아도 되니까요.”
“……무슨 말이지?”
“애초에 AFC가 몇 년 전에 취한 전략이 그것이었잖아요?”
프로레슬링을 가짜라고 매도하면서 진짜를 보러오라고 하기.
유명한 전략이었다.
그로 인해 AFC는 이전보다 훨씬 더 큰 기업으로 성장했다.
그들 스스로가 유능한 것도 있지만 그 자체가 유의미한 캐치 프레이즈로써 작용된 사례였다.
가짜가 아닌 진짜.
온갖 무술의 장점만이 합쳐져 탄생한 최강자들의 싸움.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는군.”
“뭐, 샴페인을 맞아본 건 처음이지만 작은 기업이 하는 장난이라고 생각하니 너그러워지네요.”
“……전과 많이 달라졌군.”
제이나는 말을 돌렸다.
“몇 년 전에 파티에서 봤을 때는 구석에서 조용히 술이나 마시다 갔던 걸로 기억하는데.”
“아버지가 너도 사교계를 경험해보라면서 데려온 거였어요. 그때 킹스 럼블 하는 날이라서 생방송 놓친 거 엄청 분했는데.”
“킹스 럼블?”
“자기가 디스하는 회사의 최대 이벤트 중 하나도 몰라요?”
“…….”
제이나는 점점 말이 없어졌다.
“뭐, 그때와는 상황이 많이 변했어요. 나도 나름대로 목표가 생기게 되었다는 말이죠.”
“어떤 목표지?”
“……저기, 내가 그걸 말해줄 것 같아요? 정 듣고 싶으면 바지 벗고 춤이라도 춰보던가.”
“하! 맹랑한 아가씨로군.”
“GCW 사장이에요. 그쪽하고 똑같은 위치에 있는 사람이지.”
“금수저 주제에. 사장이라고 다 같은 사장이 아니야.”
“결국 그거였어? 당신이 우리 꼰대를 적대시한 것도 다 돈방석에서 태어난 사람이 싫어서?”
“그럼 네가 그 지위가 없었으면 지금 뭐였겠어? 그냥 대학 다니는 멍청한 여자에 불과했겠지.”
“그런 가정은 무의미해. 당신이 머리털이 빠지지 않았더라면 괜찮게 보였을까를 논하는 거와 같은 수준의 이야기지.”
아, 웃을 뻔했다.
심각해지려는 분위기에 나설까했으나 나는 그런 티파니의 말에 잠시 더 듣기로 했다.
그녀는 누구인지 뻔히 보이는 남자에 대한 말을 꺼냈다.
“내가 존경하는 남자가 한 말이 있는데, ‘이기기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든 해야 한다.’라더군.”
“너에게는 그게 돈인가?”
“머리카락도 있어.”
“…….”
“어쨌든, 난 인생이라는 레이스에서 그냥 적당히 돈만 많은 여자로 살다 죽기는 싫거든. 그래서 한번 싸워보기로 한 거야.”
“과연, 가지고 있던 돈도 다 잃고 망했을 때 그런 소리가 나오는지 보자고.”
“각오는 해뒀어. 나는 이 업계를 선수들 다음으로 사랑하고…… 그렇기에 쟁취하고 말 거니까.”
왕위를.
‘멋지군.’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슬쩍 내다보자 난간 앞에 서있던 티파니가 이쪽의 시선을 귀신 같이 알아차렸다.
“그리고 그 꿈과 함께하는 멋진 파트너가 있거든.”
거기까지 이야기한 뒤, 그녀는 인사도 없이 걸음을 옮겼다.
또각, 또각.
하이힐의 높은 굽 소리.
모퉁이 뒤에 숨어있던 나는 당당히 걸어오는 티파니를 맞이했다.
미리 알고 있던 그녀는 놀란 기색도 없이 내게 말했다.
“갈까요? 파트너.”
파티장으로 돌아간 우리는 새벽에 밝을 때까지 실컷 ‘일’했다.
중간에 스눕-덕이 무대로 불러 춤을 추게 했을 때는 아무리 나라도 적잖이 당황했지만.
그럭저럭 즐거웠다.
* * *
그로부터 며칠 뒤.
“으그그그극……!”
캠핑 버스에서 내린 나는 기지개를 쭉 펴며 정신을 차렸다.
파티에서 정말 취할 때까지 마셔서 그런지 오는 내내 숙취를 겪어 난리도 아니었다.
뭐, 지금은 토마토 수프를 먹어서 깔끔하게 회복했지만.
‘오늘도 열심히 일해보자고.’
싱긋 웃으며 짐을 챙겨든 나는 곧바로 경기장으로 들어섰다.
이틀 뒤에 또 버닝콩 촬영이 있었고, 그때를 위해 오늘은 오튼과 만나 이야기를 나눌 예정이었다.
거기에 각본가에게 각본에 대한 피드백도 전달해두어야 하고.
바쁜 하루를 예감하며 나는 경기장 안의 락커룸으로 들어섰다.
안에 있던 선수들이 날 돌아보고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
“다들 왜 그래요?”
“…….”
“…….”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어봤으나 반응은 돌아오지 않았다.
버닝콩에서 큰 인기를 끌고 있는 태그 팀, 하디 보이즈와 카인, 부커와 시몬스까지 더해.
“뭐에요?”
“너, 파티 갔냐?”
“……예?”
“거기서 여자들이랑 시시덕거리면서 재미있게 놀았다면서?”
“아니, 그게 무슨 소리에요?”
“여기 쓰여 있다고. 꼬마.”
시몬스가 척, 하고 내민 것은 바로 어제 발매한 가십 잡지였다.
거기에 내 얼굴이 나와 있었다.
[여자 눈에 프로레슬링이 좋은 이유에 관하여.]
그런 제목을 차치해두고 일단 나는 링의 모양을 통해 대충 사진이 찍혔던 시기를 감별해냈다.
“링 서바이벌 때군요.”
“파티에서 가장 주목 받았던 남성으로 그 떡 벌어진 어깨는 본 기자의 심장을 두근거리게…….”
며칠 전의 일이라 벌써 잡지 기사가 나올 줄은 몰랐는데.
“……그 매력은 본지의 독자들이 동양인 남성에게 가지고 있는 편견을 깨버릴 수 있을 정도로 훌륭했다. ……이 빌어먹을 자식!!”
“아픕니다. 시몬스.”
“왜 나는 안 데려간 거야! 너만 가서 얼마나 즐겼던 거야!”
나는 그렇게 시몬스를 위시로 한 락커룸 선배들에게 내가 겪었던 상황을 설명해야만 했다.
“기사는 좀 과장된 겁니다. 사실 이렇다 할 일도 딱히 없었어요.”
“그게 정말이야? 멋진 모델 누님들하고 뜨거운 하룻밤은?”
“……없었죠.”
“이 자식이!!”
괜스레 또 다시 분노한 시몬스가 내게 헤드록을 걸었다.
다들 날 질투하면서 놀리는 상황. 하지만 딱히 분위기가 나쁘거나 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들은 프로레슬러로서 멋진 모습을 보여준 나를 보고 대리만족을 느끼기도 했으리라.
바로 그때였다.
문이 벌컥 열리며 생각치도 못한 인물이 안으로 들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