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6.
“헤이건?”
“오, 신. 내가 가장 좋아하는 버닝콩의 플레이어.”
“…….”
미국인 특유의 과장된 화법과 함께 다가온 그가 내 어깨를 안으며 반가움을 표했다.
150kg은 가볍게 넘길 것 같은 체중이 인상적인 남자.
폴 헤이건.
현재는 랙다운을 총괄하고 있는, 프로레슬링 업계의 ‘반역자’.
그는 과거 EZW라는 단체의 수장으로서 업계에 신선한 충격을 가져다줬다.
하지만 혁명은 실패했고, 그렇기에 나는 반역자라는 이름이 그에게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실패했기 때문에.
능력은 출중했지만 바트와 사사건건 마찰을 빚었던 그는 중용되지 못하고 있는 처지였다.
폴은 싱글벙글 웃으며 나를 사랑하는 연인처럼 바라보았다.
이 사람은 정말로 ‘진짜’라서 프로레슬링을 보고 해피 타임을 가질지도 몰랐다.
“오기를 기다렸네.”
“저요?”
“그래, 지금 내 계획에는 자네의 존재가 필수적이야.”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걸까.
지금 이 시점에서 그가 버닝콩 현장 팀에 올 이유는…….
아.
“킹스 럼블?”
“그래, 바로 그거야.”
헤이건이 씨익 웃어보였다.
“자네가 럼블의 리드 보이가 되어주었으면 해서 말이야.”
“…….”
순간 말문이 막혔다.
“어떤가? 자네가 킹스 럼블의 주도자가 되는 거지.”
“나쁘지 않은 제안이군요.”
나는 씨익 웃었다.
그걸 거라고 생각했다는 듯 헤이건 역시 낄낄대며 웃었다.
킹스 럼블.
WWF의 4대 페이퍼뷰 중 하나.
그 입장객은 20만 관객을 자랑하는 최대 페이퍼뷰, ‘레슬 임페리움’에 뒤지지 않을 정도였다.
오히려 팬 성향이 라이트해질 수록 레슬 임페리움보다 킹스 럼블을 더 선호할 정도였다.
그 이유는 간단했다.
링 서바이벌과 같이 페이퍼뷰 컨셉에 맞춰 1년에 단 한 번만 럼블 매치가 열리기 때문이었다.
30명의 선수들이 참가해 자웅을 겨루는 전통적인 킹스 럼블 매치.
룰은 다음과 같았다.
1번 선수와 2번 선수가 입장하고 경기가 시작된다.
일정 시간이 지날 때마다 다음 선수가 링 위로 올라온다.
3단 로프 위로 넘어간 뒤 링 밖의 바닥에 ‘양발’이 닿은 선수는 럼블 매치에서 탈락한다.
그렇게 해서 30번 선수까지 나오고, 최종 승자가 결정될 때까지 경기가 계속해서 이어진다.
우승자는 그 해의 레슬 임페리움의 1선 챔피언십에 도전할 수 있게 된다.
그런 식이었다.
참 불공정한 룰이었다.
막말로 1단 로프 밑으로 내려가 링 밖에서 팝콘이나 씹으면서 버텨도 성립이 되는 경기였다.
3단 로프 위로 넘어간다 해도, 한 발로 깽깽이를 뛰거나 바리게이트 위에 있다가 점프해서 다시 링 위로 올라와도 인정이고.
그런 불공정함마저 ‘남자들의 싸움’이라는 이유로 포장되는 것이 바로 프로레슬링이었다.
그렇게 야비한 짓을 하면 팬들의 존중을 얻어낼 수가 없다. 하지만 반대로 말하면, 그런 짓을 하나의 드라마로 만들어낼 수도 있다는 이야기였다.
‘정말로 나쁘지 않군.’
나는 그런 킹스 럼블의 ‘리드 보이’가 되어달라는 제안을 받았다.
킹스 럼블은 30명의 선수가 참여하는 만큼 복잡해지기 십상이었고, 각자 자기 각본만 알았다.
올라가서 특정한 행동을 하고 누구 다음으로 누구에게 탈락한다. 같은 식이었다.
거기에서 벌어질 수 있는 혼선을 정리하며 경기의 중심을 잡아주는 게 바로 리드 보이였다.
우승자는 아니지만 경기에서 가장 주목을 받는 선수.
관객들의 환호를 끌어낼 수 있으며, 뛰어난 경기력을 가지고 체력 역시 받쳐주는 베스트 플레이어.
농구로 따지면 포인트 가드.
미식축구로 보자면 쿼터백.
팀의 중심을 꽉 잡아주는 것이 바로 리드 보이의 역할이었다.
존 마이클스나 거트 엔젤, 크리스 젠코 같은 선수들이나 맡을 수 있는 아주 중요한 역할.
비록 우승자는 되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으나, 그래도 데뷔 2년차에 이 정도면 좋았다.
헤이건과 함께 복도를 걷던 나는 주변을 확인하고는 물었다.
“우승자는 누굽니까?”
“그거?”
마찬가지로 헤이건 역시 주변에 듣는 귀가 있는지를 살폈다.
킹스 럼블의 우승자는 극비사항이었다. 도박사들이나 기자들의 좋은 먹잇감이 될 수 있기에.
회사로서도 어떻게든 관객과 시청률을 모으기 위해 마지막까지 비밀로 감추고 싶어 했다.
‘전생에서는 바티스타였지.’
그런 그는 현재 평범한 레볼루션 멤버 A로 지내는 상태였다.
헌터의 부상 때문이었다.
전생에서는 헌터가 부상을 숨기고 자기 자신이 빠진 동안 뒤를 이어줄 사람을 만들기 위해 어떻게든 바티스타를 밀어주었지만.
지금은 아니게 되었고, 따라서 결과는 분명히 변한 상태일 것이다.
왜냐면 바티스타는 분명 재능이 있는 선수였으나, 아직까지 그것을 꽃피우지는 못한 상태였다.
과연 누구일까.
확률이 가장 높은 건…….
그렇게 고민하고 있자니 까치발을 든 헤이건은 내 귀에 대고 한 남자의 이름을 속삭였다.
“숀 시나야.”
“…….”
역시 그럴 거라고 생각했다.
시나는 현재 착실히 랙다운의 ‘탑 가이’에 오르기 위한 수속을 밟아나가고 있는 상태였다.
관객들에게 워낙 인기가 좋아 명목상으로만 악역인 그는 JBL과 오랜 기간 대립 중이었다.
‘전생에도 그렇게 대립을 지속해 결국 레슬 임페리움에서 첫 월드 챔피언을 따냈었지.’
아주 감동적인 대관식이었다.
내부적으로는 시나의 푸시야말로 회사가 던지는 출사표였지만 말이다.
이때 당시, WWF는 사실 꽤나 큰 고민거리가 있는 상태였다.
회사의 ‘미래’를 책임지리라 믿고 메가 푸시를 해주었던 브룩 레스너의 탈단 때문이었다.
개인주의적인 성향이 짙은 그는 데뷔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이 업계에 환멸을 느낀 것이었다.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회사로서는 어떻게든 차세대 스타를 발굴해야만 했다.
하지만 찾는다고 해서 쉽게 찾아지는 것도 아니었다.
랜스 오튼은 태도 문제가 항상 거론되었고, 바티스타는 나이가 36세 정도로 꽤나 많았다.
회사의 탑-가이는 많은 것을 요구 받는 자리였다. 그런 의미에서 봤을 때 시나 역시 부족했다.
일단 레슬링 스킬.
기본적으로 뻣뻣한데다가 경험도 적어, 시나는 그다지 재미있는 경기를 만들지는 못했다.
그리고 프로레슬러로서는 아주 미묘하게 작은 185cm의 키.
하지만 회사는 시나의 성실함이나 퍼포먼스 능력을 높이 사 월드 챔피언에 올려주었고.
그야말로 초대박을 냈다.
‘물론 이건 전생의 일이고.’
지금은 아니었다.
현재 회사에는 탑-가이가 될 재목이 얼마든지 존재했다.
일단 나.
그리고 떨거지들.
여기서 말하는 떨거지들이란, 마음을 고쳐먹은 오튼과 정치질에 당하지 않은 러셀, 마지막으로 그냥 시나를 말하는 것이었다.
모두 나와 비슷한 연배에 같은 시대를 이끌어나갈 선수들.
그중에 회사의 선택을 먼저 받은 것은, 역시나 시나였다.
‘당연하다고 생각하지만.’
오튼의 활약은 이제 막 시작된 참이었고, 러셀은 아직 메인 쇼에 올라오지도 않은 상태였다.
그리고 나는 아직까지 바트의 시험을 받고 있는 처지였다.
따라서 회사로부터 기대를 받고 있는 시나가 선택된 것은 지극히 당연한 섭리기는 했다.
바로 그때, 내 복잡한 표정을 읽어낸 헤이건이 입을 열었다.
“내 1픽은 자네였네. 안타깝게도 바트와 다수의 결정권자들이 미친 소리라고 말했지만.”
“감사합니다, 헤이건.”
“그래도 절반 정도는 믿고 맡겨도 되지 않겠냐고 하더군. 이 경직된 업계에서 고무적인 일이야.”
“그거 참 다행이네요.”
“이번도 좋은 기회야. 자네가 리드 보이로서 링을 휘어잡을 수 있다는 사실을 증명해보게.”
헤이건이 내 어깨를 두드렸다.
역시 그는 내 실력에 대해서 정확하게 꿰뚫어보고 있었다.
그 사실이 좀 어깨를 으쓱하게 만들었다. 나는 앞장서는 헤이건을 따라 사무실로 이동했다.
의욕이 화르륵 타올랐다.
시나의 우승?
축하해줄 수는 있다.
하지만 좀 화가 나기는 했다.
작년의 나는 시나가 랙다운에서 보여주었던 퍼포먼스의 배 이상을 활약했다고 자부했다.
쿵-퓨리로 시작해, GCW를 이용한 각본으로 극적인 상승세를 탔고, 유럽 투어에서 절정에 이르렀다.
그 결과로 WWF 인터컨티넨탈 챔피언까지 차지했다.
헌터가 빠진 뒤 밋밋하던 메인 대립을 제치고 버닝콩에서 가장 주목을 받는 선수가 되었다.
그렇기에 나는 회사의 이번 결정을 납득할 수가…….
없지는 않았다.
‘그래, 시나가 맞지.’
시나는 지금 U.S. 챔피언 자리를 내려놓고 메인 챔피언에 도전하는 각본을 수행하고 있었다.
거기다 회사에서도 작정하고 밀어주기로 결정한 상태였고.
그가 이번 킹스 럼블에서 우승해 레슬 임페리움에서 유니버스 챔피언에 오르는 건 타당했다.
그게 이야기적으로 더 멋진 그림이 나온다는 말이었다.
지금의 내 캐릭터는 메인 챔피언십 전선과는 거리가 멀었으니까.
하지만 그건 ‘이야기적’으로 그렇다는 말이고.
순수하게 모든 능력을 따져봤을 때 우승해야 하는 것은 나였다.
나는 한 가지 결심을 했다.
‘보여주마.’
그들의 선택이 틀렸음을.
이번 킹스 럼블을 이끎으로써.
* * *
나는 헤이건은 이야기가 통하는 남자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런 내 예상은 정확히 들어맞았다.
“아니, 거기에서 타부리가 탈락하는 게 말이나 됩니까?!”
각본 회의실.
한창 킹스 럼블 매치에 대한 토론이 이어지고 있는 가운데, 헤이건은 열변을 토하고 있었다.
그의 프로레슬링에 대한 기본적인 스탠스는 나와 같았다.
‘다 함께 위로 올라간다.’
쇼를 재미있게 만들기 위해서는 모든 선수가 각자 특기를 발휘하며 기대감을 주어야만 한다.
누구 하나 버리는 패가 되지 않도록.
왜냐면, 그렇게 해야 즐거움이 비는 시간대가 없기 때문이다.
물론, 차이는 있을 수 있다.
그렇게 해서 위상이 구분되어야만 스토리가 나오는 것이니까.
하지만 약자는 약자 나름의 방식이 있다. 조금 전에 언급된 타부리가 아주 좋은 예시였다.
타부리.
WWF의 대표적인 로우 카더로, 일본 출신의 프로레슬러였다.
겉으로 봤을 땐 키도 작고 평범한 체격이었으나 확실한 캐릭터로 꽤나 인기를 끌었다.
‘특유의 뻔뻔함과 괜찮은 영어 솜씨로 사내 평가도 좋아 회사에서 오랫동안 일했었지.’
특히, 입에 녹색 액체를 물고 있다가 상대의 얼굴에 뿜는 ‘그린 미스트’는 그의 전매특허였다.
그게 바로 포인트였다.
타부리는 분명 넘버원은 아니다. 하지만 그린 미스트에서만큼은 확실한 스페셜 원이었다.
그 기술 하나로 사람들에게 기억 받는 선수가 되는 것이다.
‘물론 쉬운 일은 아니지만.’
그걸 시험해보기 위해 쇼가 있다. 사우디아라비아의 유전처럼 언제 터질지 모르는 것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최대한 선수들의 개성을 존중해줄 필요가 있다.
그것이 폴 헤이건의 철학.
나는 거기에 절절히 공감했다.
하지만 그 말을 듣고 있는 바트의 충견들은 좀처럼 헤이건의 의견에 동조하지 못했다.
그들은 바트의 입맛대로 이야기를 짜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기준에 의하면 타부리의 역할은 무척 간단했다.
비겁한 일본인이 반칙을 썼지만 멋진 미국의 영웅이 나서서 해치운다는, 뭐 그런 거지.
더럽게 유치한 거.
헤이건의 이야기에 길게 침묵하던 각본팀장이 겨우 입을 뗐다.
“타부리가 럼블 매치에서 대체 어떻게 활약을 하겠습니까.”
“그린 미스트가 있잖습니까!”
“그걸 쇼에서 보여준다고 해서 무슨 반응이 나올까요.”
“오히려 그 시간에 테이커를 한 번 더 찍는 게 낫겠죠.”
“…….”
중간에 끼어들어 논지를 흐리는 작가진의 이야기에 열을 삭히기 위해 입을 다무는 헤이건.
어쨌든 타부리를 띄운다고 해서 테이커 같은 거물이 가지고 있는 아우라가 사라지는 건 아니었다.
잠시 눈치를 살피던 나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90초입니다.”
모두가 날 의아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절대적인 건 아니고. 늘어날 때도 있고 줄어들 때도 있죠.”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건가?”
“이 모든 시간은 전적으로 바트의 선택인데…… 그 이유가 뭔지 생각해본 적 있으십니까?”
“무슨 말을 하는 건가?”
“선수의 등장 시간 간격 말입니다.”
나는 싱긋 웃었다.
“분위기가 쳐졌다 싶을 때 바트가 다음 선수를 내보내서 90초보다 줄어들 때도 있는 거죠.”
그리고 반대로 중요 스팟이 계속 이어지면 90초를 넘어간다.
바트도 쇼의 흐름을 끊는 지시는 내리지 않는 것이다.
“관객들은 그런 시간의 배분을 딱히 신경 쓰지 않습니다. 저희가 해야 하는 일은 결국 그들을 즐겁게 만드는 거니까요.”
“결국…….”
“선수 배치와 구성을 적절하게 한다면 아마 90초 이전에 나가게 되는 선수는 거의 없을 겁니다.”
나는 자신만만하게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