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프로레슬링의 신-127화 (127/634)

127.

각본팀장은 내 말에 반박하지 못하고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그럼 어디 해보게나.’

그래서 그렇게 하겠다고 했다.

나는 폴 헤이건과 담당 작가와 함께 곧장 회의실 하나를 잡고 각본을 짜기 시작했다.

갑작스레 최중요 각본을 짜게 된 작가는 많이 긴장한 눈치로 내게 데이터를 하나 보여주었다.

“여기, 출전 선수 명단입니다.”

“한번 확인해보죠.”

헤이건이 기세등등한 채 나를 바라보고 있는 상황.

나는 곧바로 윗선의 분류에 따른 선수 명단을 살펴보았다.

가장 먼저 메인 이벤터.

그렉 하트, 부커-리, 캐스켓 테이커, 카인, 거트 엔젤.

다섯 명.

두 번째로 하이-미드 카더.

신, 숀 시나, 빅 죠, 록밴댐, 레이 미스테리우스.

다섯 명.

미드-카더.

랜스 오튼, 닉 플레어, 게이브 바티스타, 잭 하디, 크리스 젠코.

다섯 명.

로우-카더.

타부리, J-트레인, 맥 하디, 햄튼 벤자민, 찰스 할리, 마이노, 니코, 버바 렉 더즐리, 디콘 더즐리, 올랜도 조슨, 스캇 투 하티, 하드코어 말리.

총 열두 명.

어라?

“왜 세 명이 비죠?”

“아직 못 정했다는데요.”

“이런…….”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거기다 그 아래에는 더 가관이었다. 나는 순간 헛웃음을 쳤다.

“출전 순서는 대체 어떤 미친놈이 이딴 식으로 짠 겁니까?”

“바트일세.”

“환상적이군.”

나는 말을 바꿨다.

그리고 다시 바꿨다.

“환상적으로 구리네요. 헤이건.”

“왜 그렇게 생각하지?”

헤이건이 흥미로운 듯 뒤뚱거리며 내 앞으로 다가왔다.

“아니, 뭐. 그냥 선수 위상에 따라 나오는 거 아닙니까?”

바트의 구성은 이런 식이었다.

처음에 나와 크리스 젠코가 나와서 맞붙고 3번으로 타부리가 나와서 경기에 끼어든다.

“하이 미드이자 리드 보이인 저와 버닝콩의 테크니션인 젠코로 분위기를 끌어올리고 로우 카더인 타부리를 대충 넣은 거잖아요.”

그딴 안일한 생각이 쇼를 망치는 것이다. 바트는 단지 선수 위상에 따른 구분으로밖에 킹스 럼블을 구성하지 못했다.

그런데 말이다.

“여기서 잘 보면 리코나 스캇 투 하티 같은 친구들이 또 가까이 배치되어있다는 말이죠.”

“그들이 왜?”

“좀 나쁜 말을 하겠습니다.”

나는 눈썹을 찡그렸다.

분명히 있는 구성이지만 선수들에게는 대단히 실례인 말이었다.

원래는 워커라는 말을 써야 한다. 어린이 여러분도 쿵-퓨리 같은 선수를 만나게 되면 참고하자.

“자버잖아요. 그리고 그 뒤에 바트의 픽인 테이커가 나온다.”

이건 말인즉슨 테이커의 환호를 띄워주기 위해 리코와 스캇을 갈아 넣겠다는 이야기였다.

“이게 말이나 됩니까? 둘 다 훌륭한 선수들이잖아요. 스캇 투 하티는 ‘더 웜’이라는 아주 훌륭한 기술도 가지고 있는데.”

“내 말이 그거야!”

헤이건이 소리쳤다.

“킹스 럼블! 15만의 관객 앞! 그들이 외치는 더 웜 챈트! 이걸 안 쓴다는 건 미친 소리지!”

“그렇죠. 분명히 관객들도 즐거워할 만한 요소입니다.”

나는 그 말에 동의했다.

무려 15만의 관객.

그 어떤 프로 스포츠에서도 쉽사리 동원하기 힘든 수치였다.

표 역시 비쌌고.

따라서 관객들은 그만한 표 값을 하는 쇼를 원하는 것이었다.

15만 명의 대합창.

모두가 한마음 한뜻으로 쇼의 일부분이 되어 보내는 반응.

그걸 기획하는 것이 바로 이 회사가 해야만 하는 일이었다.

“일단 세 명부터 정하죠.”

“생각해둔 사람이 있나?”

“물론이죠. 이렇게 세 사람 외에는 전혀 안 떠오르던데요.”

“말해보게.”

진지한 눈의 헤이건.

하지만 내가 말한 세 사람의 이름을 들은 그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미친놈인가?”

“색다른 거죠.”

나는 예전에 봤던 영화의 한 등장인물의 명대사로 돌려주었다.

* * *

내가 선택한 첫 번째 인물은 바로 ‘러셀 하트’였다.

나의 파트너이자 가장 믿을 수 있는 적, 그리고 오랜 적수.

킹스 럼블은 그가 콜 업 되기에 아주 적절한 곳이 될 터였다.

럼블 매치에서는 선수가 등장하기 전에 10초의 카운트가 있다.

그 카운트 동안 관객들은 함께 숫자를 세며 어떤 선수가 등장할 것인지 잔뜩 기대를 한다.

거기에서 링 서바이벌 때 좋은 활약을 펼쳤던 러셀 하트가 나온다면 분명히 그보다 더 멋진 메인 데뷔는 없을 터였다.

이후에도 자주 쓰이는 방식이었다. 현재 시점에서는 내가 처음 제시한 것이었지만.

거기에 대해 폴 헤이건은 정말 멋진 아이디어라며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메인 쇼의 데뷔가 킹스 럼블에서라니! 정말로 멋진 아이디어군! 이건 전통이 될 걸세!]

역시 그의 안목은 틀리지 않았다. 미래에 일어날 일을 훤히 꿰뚫어 보았으니 말이다.

나는 곧바로 티파니에게 전화를 걸어 제안을 이야기했다.

GCW에 있던 그녀는 회의 안건으로 올려보겠다는 이야기를 하며 긍정적으로 반응해주었다.

그렇게 헤이건, 담당 작가와 중국 음식으로 점심 식사를 하며 시간을 보내고 있을 즈음.

[아, 신. 회의 끝났어요.]

티파니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어때요?”

[……예, 러셀을 메인으로 올려 보내자고 결론인 나왔어요.]

“목소리가 안 좋은데.”

[아쉽죠. 아직 2년은 더 너끈히 뽑아먹을 수 있는 인재였는데.]

“하지만 녀석이 버티고 있는 이상 그 누구도 차세대 메인 선역으로서 떠오르지는 못할 거야.”

[그건, 맞는 말이네요.]

“그렇지? 이제 또 다른 선수를 띄우면 되는 거야. 당신이라면 할 수 있을 거라고.”

[……설마 나보고 또 악역 보스 역할을 맡으란 건 아니죠?]

“그것도 재미있겠네.”

나는 싱긋 웃었다.

앞으로 남은 시간 동안 GCW는 또 다시 바빠지게 되었다.

러셀이 벨트를 넘길 각본을 쥐어짜내야 할 테니 말이다.

하지만 거기 사람들은 유능했다. 다 같이 멋진 결과를 내놓겠지.

‘그게 좀 부럽군.’

질투도 났고.

하지만 낙원에 머무르는 인간은 강해질 수 없는 법이다.

러셀의 출전 이야기가 정해지자 나는 옆에서 쿵-파오 치킨을 뜯고 있던 헤이건에게 이야기했다.

그는 반색했다.

“오, 이제 두 명인가!”

“나머지는 말할 것도 없죠.”

“아니, 회사에서 과연 허락을 해줄까가 걱정이기는 한데.”

“아마 해줄 겁니다. 환호를 이끌어내기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하는 게 저희 방침 아니었나요?”

“그건 그렇지.”

“그런 의미에서 두 번째 인물은 그 누구보다 남자들의 환호를 받는 선수가 될 겁니다.”

스테이시 치글러.

나는 남은 두 명 중 한 사람을 바로 그녀로 정해두고 있었다.

역할은 간단했다.

“저는 1번으로 나갈 겁니다.”

“리드 보이라면 마땅히 그래야지. 자네는 링 제너럴이고 마스터 마인드야. 모두가 자네의 계획대로 움직이게 될 걸세.”

“……역시 마이크워크의 달인.”

나는 혀를 내둘렀다.

어떤 요소를 멋진 단어로 표현하는 것만큼은 헤이건을 따라갈 수 있는 남자가 없었다.

하지만 틀린 말은 아니었다.

나는 시작부터 끝까지 킹스 럼블 매치의 모든 요소에 관여할 생각이었다.

“입장 전에 고릴라 포지션에서 스테이시가 절 걱정해주는 거죠.”

“멋지군. 전장으로 떠나는 남자를 배웅하는 여자 느낌으로?”

“예, 하지만 스테이시는 명색이 프로레슬러가 아닙니까?”

“그래서?”

“절 도와주러 나오는 거죠.”

“그때는?”

“그 타이밍을 보기 위해 저희는 스토리를 짜나갈 생각입니다.”

나는 각 선수들의 목록을 보고 출전 순서를 구성하기 시작했다.

모든 선수가 적어도 한 부분만큼은 빛이 날 수 있도록.

웃기는 거도 좋다.

우스꽝스럽게 탈락해 동정표를 얻는 것도 멋진 이야기다.

“일단 2번은 러셀로 갑니다.”

“빨리 나오는군?”

“예, 러셀과 저는 약간 기분 나쁜 파트너 관계니까요.”

“뭐……?”

“거 있잖습니까. 남자끼리 너무 가까워지면 기분 나쁜데, 또 가까워질 수밖에 없는 그런 거요.”

“대충 알겠군. 남자에게는 그런 재수 없는 관계가 하나쯤은 있지.”

“예, 어쨌든.”

나는 계획을 이야기했다.

“스테이시가 절 걱정해줄 때 제가 한마디 하는 겁니다. ‘그 어떤 놈이 나오더라도 나는 박살 낼 준비가 되어 있다.’고 말이죠.”

“거기에서 러셀이?”

“정말 생각하지도 못한 순간이죠. 제가 유일하게 박살 내지 못했던 남자가 나오다니 말이에요.”

“그런가?”

“예, GCW 때 일대일 대결에서는 제가 지고서 끝난 상태죠.”

거기에서 이야기가 폭발한다.

사람들은 나와 러셀을 보고 자연히 이야기를 떠올리겠지.

녀석과 나의 라이벌리가 아니더라도, 링 서바이벌에서의 이야기도 있으니까.

그 환호는 전염되어 러셀은 멋진 데뷔를 하게 될 터였다.

“3번은?”

“여기서는 이제 변주를 주어 스캇 투 하티를 나오게 할 겁니다.”

“호오, 그리고?”

“저와 러셀에게 덤비지만 무참하게 깨지는 거죠.”

“응?”

“여기에서 다음 멤버가 스캇 투 하티의 예전 태그 팀 파트너였던 마이노가 나오는 거고요.”

“하……!”

헤이건이 무릎을 쳤다.

“태그 팀 대 태그 팀이군!”

“올드비 대 뉴비이기도 하죠.”

“정말 대단하군! 드라마야!”

“설득력도 있죠. 오랫동안 일하며 요령을 쌓은 두 사람이 신인 두 명을 교육한다는 식으로.”

“맞는 말이군.”

헤이건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그렇게 각 선수들이 가지고 있는 드라마를 기억해내며 명단을 계속 짜내려갔다.

“잭 하디는 테이커에게 재도전할 이유가 분명히 있죠.”

“두 사람이 붙었던 레더 매치에 관해서 이야기하는 건가?”

“예, 물론 잭 하디는 테이커를 당해내지 못할 겁니다.”

“여기에서 맥 하디가 들어가면 환호를 뽑아낼 수 있겠군.”

“그런 거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맥 하디.

잭 하디의 친형으로 오랜 시간 그와 태그 팀을 해오고 있었다.

잭 하디가 테이커에게 도전할 때도 옆에서 도와주었고.

‘혼자서는 딱히 환호를 받는 선수는 아니지만 잭 하디의 형이라면 이야기는 달라지지.’

잭의 형으로 나오는 맥은 혼자였을 때보다 더 큰 환호를 받았다.

사실 그게 맥 본인에게는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었지만.

‘그게 맥이 가지고 있는 드라마가 될 수도 있는 법이지.’

그러므로 그걸 써야 했다.

나는 헤이건과 함께 머리를 맞대고 출연 순서를 짜나갔다.

아마 이 순서만으로도 좀 아는 사람들은 다 이해를 할 터였다.

선수들 역시 그렇겠지.

자기가 링 위에 올라가 어떤 퍼포먼스를 보여야 할지를 말이다.

여기에 탈락할 순서까지 정해두면 분명히 더 이야기하지 않아도 럼블 매치가 완성될 터였다.

헤이건이 감탄했다.

“이게 또한 장점이군.”

“예, 사람들은 결국 아는 이야기를 좋아하니까요. 선수들이 나올 때마다 링 위의 선수와 비교하며 드라마를 기대하겠죠.”

“멋지군! 정말 멋져!”

헤이건의 뺨이 붉어졌다.

“각 드라마가 펼쳐지며 선수들이 하나씩 탈락한 끝에 종결까지 이어질 거야! 아주 멋져!”

“거기에 이어질 대립까지도 예상할 수 있는 건 어떨까요?”

“음?”

“그런 의미에서 저는 스테이시의 출전을 여기로 하고 싶네요.”

“17번인가.”

“예, 그리고 그렉 하트의 탈락 타이밍이 바로 이 지점입니다.”

“17번이 나온 직후?”

“이게 상징하는 게 뭘까요?”

“……설마.”

“그 설마가 설마입니다.”

럼블에 출전한 스테이시가 그렉 하트의 탈락에 크게 일조한다.

“그리고 그 화살이 제게로 돌아온다. 간단한 이야기죠.”

“그렇다면 일단 그전까지 자네가 그렉을 상대하고…….”

“아니, 제가 그렉한테 한창 얻어터지고 있어야죠.”

“이어서 스테이시가 그렉을? 좀 이해가 가지 않는데.”

“물론, 스테이시가 레슬링 스킬로 그렉을 넘겨버리는 건 반드시 큰 무리가 따르겠죠.”

“그렇다면 어떻게 하지?”

“그렉의 시선을 끌어준 사이에 제가 그렉을 넘겨버리는 겁니다.”

“그리고 이건 어떤가. 자네가 스테이시에게 이곳은 위험하다면서 조심스럽게 안아서 넘기는 걸세.”

“그렉한테 받게 하는 거죠.”

“그런데도 스테이시의 시선은 플레이보이인 자네에게 향하고! 푸하하하! 아주 좋은데?!”

헤이건은 몇 마디 대화만으로 스토리를 떠올리고 크게 웃었다.

“뭐, 이렇게 되면 대충 29명까지는 대충 순서가 짜였군.”

“이제 마지막이 남았네요.”

“그래, 이 남자.”

헤이건은 내가 마지막에 언급했던 양반의 이름을 가리켰다.

“정말 이 남자가 나오리라고는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할 걸세.”

“하지만 그 등장만으로도 어떤 형태의 드라마를 기대하겠죠.”

“그런데 과연 본인이 선뜻 럼블에 나오겠다고 할까?”

“그건 계획을 설명하면서 차근차근 납득시켜보죠.”

난 자신만만하게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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