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0.
말했듯, 프로레슬러는 선수 생명이 꽤나 긴 편에 속했다.
우리가 실제로 몸을 써서 경쟁을 하지는 않기 때문이었다.
나와 GCW에서 경기를 했던 할리도 환갑을 훌쩍 넘긴 나이.
하지만 그는 경기를 뛰었고 패배했지만 근성을 보여주었다.
거기에서 나온 드라마가 보는 관객들의 마음에 크게 울렸다.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희미해진 전설이 돌아와 자신의 건재함을 과시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기에 나는 나이가 많은 사람도 충분히 가능하다면 레슬링을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단, 그 나이가 안전함에 걸린다면 이야기는 크게 달라졌다.
닉 플레어 같은 경우도 있지만 그는 매니저로서의 역할이 강했고 경기도 많이 뛰지 않았다.
하지만 그렉은 언제까지나 자기 자신을 유지하겠다는 표정이었다.
그래서 신경이 쓰였다.
WWF의 모든 스케줄을 소화하는 풀-타임 레슬러는 엄밀히 말해 수명이 40세 정도까지였다.
경기 한 번이면 몰라도 매주 여러 번 경기를 수행하는 풀-타임은 체력 소모가 극심했기 때문이었다.
‘과연 괜찮을까.’
그렇게 고민을 해보던 나는 깔끔하게 뇌를 비우고 킹스 럼블에만 집중하기로 마음먹었다.
오튼과의 대립은 유머성이 짙었으므로 적당히 끝을 맺었다.
그리고 나는 쇼에 출연해 킹스 럼블을 홍보해나가기 시작했다.
……라고는 하지만 별건 없었다.
단지 링 위에 올라 협의했던 사실에 내가 말하고 싶은 부분을 덧붙이는 것뿐이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킹스 럼블이라고 들었는데. 생각해보면 이 회사는 왕이란 단어를 참 좋아해. 왕 중의 왕인 트리플H 같은 경우도 있고 말이야.”
거기에서 한 호흡 휴식.
그리고 나는 먼 곳을 가리키며한 마디를 내뱉었다.
“모두들, 부상에서 회복 중인 그의 이름을 잠시 불러달라고.”
[Triple H! Triple H! Triple H! Triple H! Triple H! Triple H!]
반응이 올라왔다.
선악을 떠나 헌터는 리스펙을 받는 레전드급의 선수였다.
그렇기에 그의 귀환을 기원하는 건 아주 멋진 퍼포먼스였다.
나는 이제 관객들의 마음 속에 완전히 정착한 선수가 되었다.
특히 유려한 말솜씨에서 나오는 마이크워크는 그 누구도 날 따라오지 못할 정도였다.
그들은 내 이야기를 따라오며 내가 어디까지 성장하고 나아가는지 그 과정 모두를 즐겁게 지켜볼 준비가 되어있겠지.
“그런데, 확실히 그래. 우리가 모두 왕이라면 킹스 럼블 매치는 왕좌쟁탈전인 셈이잖아?”
[Yes! Yes! Yes! Yes!]
“그런 의미에서 봤을 때 너희는 누가 왕이 되는 게 걸맞다고 생각해? 하나씩 이야기해볼까?”
나는 미소를 지었다.
사람들의 환호가 이어지는 가운데, 나는 후보로 거론되는 선수들을 하나씩 말하기 시작했다.
“그렉 하트.”
[Yeeeeeeeaaaaahhh!]
“캐스켓-테이커.”
[Yeeeeeeaaaaahhhhh!]
“이런 건 어때. JBL이 직접 나와서 도전권을 가져가는 거지.”
[Boooooooooooooooo!]
“하하, 역시 그렇군. 실버백은?”
[Boooooooo……!]
현재 실버백은 선역이었으나 너무 뻔한 각본으로 인해 관객들의 야유를 받고 있었다.
‘이건 좀 좋지 않았군.’
이럴 땐 모르는 척 해주는 것이 같은 직원으로서의 예의인데.
“나?”
[Yeeeeeeeeaaaaaahhhhhh!]
지금까지 중에 가장 큰 환호가 나를 향해서 쏟아져 내렸다.
거기에서는 아무리 나라도 조금 눈물이 찔끔 날 것 같았다.
이들은 나를 원한다.
그것을 느낀 나는 힘이 나는 것을 느끼며 계속 말을 이었다.
“그 말을 듣자니 나도 가만히 있을 수만은 없겠는데! 내가 우승하는 모습을 정말로 보고 싶냐?!”
[SIN! SIN! SIN! SIN! SIN! SIN! SIN! SIN! SIN! SIN! SIN! SIN!]
“내가 너희들이 알고 있는 세상을 박살 내주길 원하는 거냐!!”
[Yes! Yes! Yes! Yes! Yes! Yes! Yes! Yes! Yes! Yes!]
아마 지금쯤 백스테이지에서는 당혹감에 난리도 아닐 거다.
그도 그럴 것이 내가 각본과 달리 나 자신을 킹스 럼블의 우승 후보로 밀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마이크워크는 결국 어디로 흐르든 간에 마지막 결론에 이르기만 하면 그만이었다.
나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표정을 굳히고 잠시 정면을 노려보았다. 거기에 관객들은 나를 따라서 똑같이 침묵을 지켰다.
한순간의 집중.
그리고 나는 조심스럽게 한 남자의 이름을 입에 담았다.
“숀 시나.”
관객들은 침묵했다.
나는 그들의 그런 반응에 안심하며 계속 말을 이어나갔다.
“그 녀석이 있지. 현재 랙다운에서 가장 떠오르고 있는 스타.”
그제야 환호가 조금 나왔다.
하지만 관객들은 그보다는 내 심각한 표정에 더 집중을 했다.
“링 서바이벌에서 내가 힘들 게 이긴 상대이기도 하지. 하지만 그 녀석은 현재 더 강해졌어.”
나는 턴버클을 밟고 올라가 그 위에 털썩 주저앉았다.
“왜라고 생각해? 그 녀석은 JBL의 목을 꺾고 레슬 임페리움에서 벨트를 들고 싶어 하거든. 그렇기에 가장 강력한 우승 후보야.”
분위기가 심각해졌다.
하지만 관객들은 분명히 내 이야기에 집중하고 있었다.
“물론 나 역시 그래. 우리는 모두가 이 업계의 정상을 바라보며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자들이지.”
나는 진심을 말했다.
그렇기에 더 사람들의 마음을 울리는 마이크워크가 나왔다.
그들 역시 어딘가에서 목표를 가지고 살아가는 이들이기에.
내 이야기를 들었다.
“그리고 난, 너희의 환호성을 듣고 방금 내 목표를 상기했어.”
관객들이 환호를 보냈다.
나는 턴버클 위에서 일어나 주변을 크게 둘러보았다.
오늘도 나를 보기 위해 이곳에 와준 2만 명의 관객.
“좋아, 산디에고! 너희를 위해! TV 스크린 뒤에서 날 보고 있는 자들을 위해! 나는 숀 시나를 꺾고 킹스 럼블에서 이기고 말겠어.”
도시 이름까지 호명하며 외친 내 마지막 말에 사람들은 오늘 중 가장 큰 환호를 보내주었다.
[SIN! SIN! SIN! SIN! SIN! SIN! SIN! SIN! SIN! SIN! SIN!]
챈트와 환호가 어지럽게 뒤섞이며 경기장이 크게 울렸다.
그 절정 부분에서 내가 손을 번쩍 들어 올린 순간, 힘차게 내 테마 음악이 울려 퍼졌다.
사람들은 쇼가 광고 타임에 들어가고 내가 링에서 나갈 때까지 환호를 멈추지 않았다.
* * *
랙다운 쪽에서도 시나가 나섰다.
녀석은 특유의 불량스러운 입담을 과시하며 내가 먼저 이야기한 바에 대한 답을 늘어놓았다.
그리고 나는 이동 중의 캠핑 버스 안에서 실시간으로 방송되는 그것을 시청하고 있었다.
[신은 분명히 링 서바이벌에서 날 이겼지. 하지만 이번에는 다를 거야. 지금의 그 녀석에게는 나와 같은 간절함이 없거든.]
혀를 내두를 연기력이다.
링 위의 녀석은 평소의 천진하던 모습과는 너무나도 달랐다.
[지금 난 폭발하기 일보 직전이야. 당장에라도 저 빌어먹을 JBL에게서 타이틀을 가져와 의기양양한 얼굴에 침을 뱉고 싶다고!]
[Cena! Cena! Cena! Cena!]
[사람을 움직이는 건 욕망이야! 나는 지금 그 화신이지! 킹스 럼블의 우승자가 되고 말겠다고!]
나는 현실의 시나가 어떤지 알기에 녀석의 저런 행동이 여러 의미에서 무척 재미있게 느껴졌다.
생각해보면 그랬다.
커리어 대부분을 악역으로 보낸 오튼은 사실 무척이나 소시민적인 성격을 지닌 인간이었고.
러셀도 완벽하게 선한 캐릭터와는 어딘가 거리가 좀 멀었다.
분명 좋은 녀석이긴 했지만 그렇게 만화에서 나오는 것처럼 좋은 성격은 아니라는 뜻이었다.
그리고 나.
‘나도 비슷하지.’
아마 나를 아는 인간이라면 좀 의아한 반응을 보일 터였다.
그도 그럴 것이 나는 링 위에서건 밑에서건 자신만만한 태도로 일관해왔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 모든 게 연기였다.
실제의 나는 열등감이 짙은 편이었다. 단지 그것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으려고 하는 편일 뿐.
‘굳이 밝혀서 뭣하겠어.’
또한 그게 가능했기 때문에 남들 앞에서 거만하게 굴 수 있는 것이었다.
나는 열등감이 있는 만큼 남들보다 더 노력했고 미래를 알고 있다는 이점도 가지고 있었다.
말하자면 신은 내가 가진 일부를 극대화시켜 만든 캐릭터였다.
그리고 앞서 말한 친구들 역시 그런 면을 보유하고 있었다.
시나는 가끔씩 놀랄 정도로 냉정했으며 오튼은 잔인했다. 그리고 러셀은 확실히 선한 편이었다.
단지 그런 면을 극대화시켜 쇼의 캐릭터로 만들어낸 것일 뿐.
그런 의미에서 보자면 시나의 캐릭터는 확실히 맞는 옷이었다.
녀석은 확실하게 나의 조언에 맞춰 크게 성장한 것이었다.
버닝콩의 실질적인 에이스인 신에게 지지 않을 정도로 말이다.
‘기대되는걸.’
이번 킹스 럼블은 분명히 엄청난 반응을 낳을 터였다.
* * *
킹스 럼블 당일.
도합 오십 명에 달하는 거구의 사내들이 경기장으로 모였다.
거기에 더해 열 명가량의 디바들과 백여 명에 넘는 두 현장팀의 직원들까지도 포함되었다.
도합 십오만 명에 달하는 관객들이 모이게 될 콜로세움의 안.
스크린도 특수 제작한 초대형을 써 경기장 안으로 크레인 차량 몇 대가 들어와야 할 정도였다.
그렇게 부산스럽게 경기장에 구조물이 올라가고 설치가 이어지고 있는 가운데, 바트 맥센과 폴 헤이건이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경기장 2층의 구석진 자리.
돔 형태의 경기장은 반대편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멀었다.
거기에 링은 코딱지만 하게 보였다. 이곳에 앉는 사람들은 초대형 스크린으로 경기를 보겠지.
어떻게든 싸구려 카메라를 확대해 선수들을 찍으려고 노력하며.
그럼에도 표 값은 100달러가 넘었다. 그것조차 구하지 못하는 이들이 속출할 정도였다.
확실히 재작년에 비하자면 회사는 훨씬 좋은 방향으로 왔다.
그 중심에 서있는 인물이 누구인가는 말하자면 입이 아플 정도로 당연한 사실이었다.
비록 모두가 쉬쉬했지만, 그는 은밀히 자신의 정치력을 발휘하여 회사에 큰 영향을 끼쳤다.
헤이건이 입을 열었다.
“그런 친구가 이번에 우승하는 게 맞는 일이라고 생각하는데요.”
“……이미 정해진 사실을 이제 와서 어떻게 하겠나.”
“단지 제 솔직한 의견을 말씀드렸을 뿐입니다. 보스.”
두 사람의 관계는 미묘했다.
바트는 엄밀히 말해 헤이건의 아이디어를 훔쳐 전 세계적인 대박을 이끌어낸 남자였다.
하지만 바트가 아니었다면 그 아이디어를 그 정도 사업 아이템으로 바꿀 순 없었을 것이다.
폭력과 유혈에 ‘섹스’라는 컨텐츠를 추가해 더 자극적으로 만든 건 바트와 WWF였으니까.
그렇기에 헤이건도 이제 와서는 프로레슬링 일을 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만족하고 있었다.
비록 언제 잘릴지 모르는 파리 목숨 위에서 자기 의견을 피력하고자 노력했지만 말이다.
그래도 바트는 헤이건을 현실적으로는 자르지 못하는 처지였다.
훌쩍 짐을 싼 그가 어딘가로 떠나 WWF에 버금가는 프로레슬링 회사를 차릴지도 모르니까.
옆에 부자를 하나 껴서.
그런 이야기를 믿고 헤이건은 다시 물었다.
“단지 그것뿐입니까?”
“뭐?”
“동양인이라는 이유 말입니다.”
“가장 큰 이유이긴 하지. 사람들이 동양인 월드 챔피언을 받아들일 수 있을까 모르겠어.”
바트는 쓰게 웃었다.
“하지만 신인을 그렇게까지 과도하게 밀어주는 게 내키지 않아서도 하나의 이유야.”
“시나는…….”
“녀석은 한 번 실패를 겪었어. 그렇기에 자기 위치를 보전하고자 엄청나게 노력할 거다.”
“신은 그렇지 않습니까?”
“후, 너도 보는 눈이 없군.”
바트는 날카롭게 눈을 빛냈다.
“그 녀석은 이 회사에 들어오고 나서 지금까지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했어. 그런 놈은 쉽게 질리고 떠날 수도 있는 법이지.”
바트는 아직 신을 신뢰하지 못했다. 아니, 애초에 그가 신뢰하는 사람은 존재하지도 않았다.
프로레슬링을 사랑한다고?
‘그 사랑이 증오로 바뀌면 그 녀석은 쉽게 떠나버릴 놈이야.’
자신과는 달리 말이다.
여기에 모든 게 묶인 자신과 달리 신은 무엇이든 할 수 있었다.
피식 웃은 바트는 신의 모습에서 한 남자를 기억해냈다.
“그 녀석 역시 그랬지.”
“누구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네가 밀어줬던 녀석.”
브룩 레스너.
회사에 있던 2년간 정말 역대급의 푸시를 받았으나 돌연 ‘열정을 잃었다’면서 회사를 관둔 선수.
이후로 미식축구 쪽이나 종합격투기 쪽을 알아보고 있다고 하는데 굳이 알아보지는 않았다.
“그 자식을 위해 2년 간 갈아 넣은 선수들이 몇 명인데.”
“브룩은 선수로서의 외로움에 익숙해질 수 없었던 남자인 겁니다. 신은 그와는 분명…….”
“그 외로움을 견디게 만드는 것이 갈망이야. 그렇기에 신은 아직 위로 올려 보낼 수 없어.”
“궤변이군요.”
시나는 실패를 해봤으니 위에 올라가서도 계속 노력할 것이다.
하지만 신은 실패를 한 적이 없다. 그렇기에 위로 올라가면 분명 열정을 잃고 말 것이다.
그게 무슨 궤변인가.
신이 어떤 실패를 겪어봤는지 모두 알 수 있는 것도 아닌데.
하지만 헤이건은 굳이 그 사실을 입 밖으로 내지는 않았다.
말이 통하지 않는 인간, 그것이 바로 바트 맥센이었다.
또한, 헤이건이 그렇게 느낀 것은 바트가 한 가지 진심을 감추고 있다는 사실에서 기인했다.
왠지 모르게 요새 들어 밤잠을 거르는 일이 많아졌다.
바트는 가끔 생각했다.
신이 월드 챔피언이 된다면.
‘그때가 되면 회사는 더 이상 내 것이 아니게 될지도 모르지.’
그렇게 생각한 바트는 거대한 경기장을 가만히 내려보았다.
대관료만 하룻밤에 수천만 달러가 깨지는 초대형 경기장.
하지만 이 왕국은 그 수십 배의 돈을 하루에 벌어들일 수 있다.
그렇기에 그는 이곳을 떠날 수가 없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