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1.
점심을 먹고 난 뒤, 한 시.
모든 선수가 자리에 모였다.
주차장과 락커룸 복도 사이에 있는 기자재를 정리하는 공간.
오십 명의 선수들과 열 명의 디바들. 하지만 그 분위기는 생각보다 질서정연한 편이었다.
여덟 시부터 시작될 킹스 럼블에 앞서 마지막으로 전의를 다지기 위해 모였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정작 선수들을 독려하기로 했던 바트가 오지 않았다.
그렉의 고사로 선수들 앞에 선 테이커가 먼저 입을 열었다.
“바트가 생각보다 늦는군. 뭐, 평소에도 있던 일이지.”
거기서 끝이었다.
시나, 오튼, 러셀과 함께 있던 나는 어색하게 웃어보였다.
역시 링 위가 아니면 딱히 말하는 걸 좋아하지 않는 테이커의 성미가 여기서도 발휘가 됐다.
그는 말보다 행동으로 보여주는 걸 더 좋아하는 조금 옛날 남자였고 다들 그걸 존경했다.
조금 묘한 침묵이 이어지던 와중, 테이커가 날 돌아보았다.
“네가 말해라. 꼬마.”
“……예?”
“다들 그걸 원할 거다.”
그렇게 이야기하며 선수들을 다시 돌아본 테이커.
그 말대로, 다들 날 기대한다는 얼굴로 바라보고 있었다.
‘바트는…….’
안 오나.
그렇게 생각할 즈음, 러셀이 내 등을 툭 떠밀었다.
자연히 앞으로 나선 나는 그대로 선수들 사이를 지나쳤다.
이번 킹스 럼블 매치는 출전하는 30명의 선수들이 모두 납득할 수 있는 각본으로 짜여졌다.
각자 빛나는 부분이 한 번씩은 나오는 럼블 매치. 기나긴 WWF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었다.
따라서 락커룸에서 내 평판은 수직으로 치솟을 수밖에 없었다.
그게 전해져 럼블 매치에 나서지 않는 선수들도 모두가 날 호의적으로 바라보게 된 것이었다.
“어, 그러면…….”
“대통령 연설처럼 하라고!”
시몬스의 외침에 어이가 없어 웃은 나는 이내 말을 이었다.
“누구로 할까요?”
레이건! 부시! 워싱턴! 다들 한 마디씩 하는 가운데 나는 굵게 목소리를 깔고 이야기했다.
“오늘 킹스 럼블에서 제대로 한 번 보여주라고들……!”
그 말을 들은 선수들의 반응은 내가 생각했던 그대로였다.
왁자지껄하게 터지는 웃음.
내가 방금 한 것이 바트 맥센의 성대모사였기 때문이었다.
“뭐야, 대통령으로 하라며?”
“바트가 이곳의 대통령이긴 하지! 우리들의 왕이기도 하고!”
남들 앞에서 이야기할 때 먼저 가벼운 농담으로 분위기를 푸는 건 널리 알려진 상식이었다.
그렇게 선수들의 분위기를 끌어올린 나는 타부리를 가리켰다.
“타부리, 그린 미스트를 쓸 때 관객들 반응이 어떻습니까?”
“네? 그야 뭐…….”
“죽여주죠. 마이노의 고어도 그렇고요. 더즐리 보이즈의 3-D나 윌리엄 비걸의 브레스 너클까지. 우리 모두는 사실 큰 반응을 끌어낼 수 있는 존재들입니다.”
나는 내가 스스로 생각했던 바를 선수들 앞에서 이야기했다.
이게 프로레슬링에 대해서 내가 가지고 있는 철학이었다.
“그러므로 오늘 럼블 매치는 죽여줄 게 분명합니다. 왜냐면 이 단체는 세계 최고이고 여기 모인 당신들도 세계 최고거든요.”
선수들은 마치 내 마이크 워크를 들은 관객들처럼 환호했다.
심지어 챈트까지 나왔다.
[SIN! SIN! SIN! SIN! SIN!]
좀 부끄럽군.
어깨를 으쓱한 나는 다음 순간 인기척을 느끼고 고개를 돌렸다.
바트 맥센과 폴 헤이건.
두 사람이 막 모퉁이를 돌아 선수들 앞으로 나오고 있었다.
왁자지껄하던 분위기가 순식간에 냉랭해졌다.
바트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뭐야?”
“이쪽입니다. 보스.”
“자네가 또 선수들에게 묘한 이야기를 한 모양이로군. 내가 오기 전까지만 해도 분위기가 좋았던 걸 보면 말이야.”
“아닙니다.”
“아니긴 뭘.”
피식 웃은 바트는 선수들을 돌아보며 그대로 입을 열었다.
“오늘 페이퍼뷰는 나도 기대하고 있다. 다들 힘내자고.”
선수들이 그 말에 저마다 한마디씩 대답하며 의욕을 보였다.
하지만 당연히 내가 말을 했을 때보다는 좀 분위기가 처졌다.
‘회장님이니까.’
그래서 그런 것이겠지만, 그와는 별개로 뭔가 좀 끓어오르는 말은 아닌 것도 사실이었다.
이 킹스 럼블을 계획하고 만들어낸 것은 사실상 나였으니까.
헤이건의 도움 역시 컸지만 상황을 파악할 줄 아는 그는 자신의 공도 온전히 내게 돌렸고.
때문에 선수들은 지금 이 순간만큼은 나를 바트보다 더 믿음직한 리더로 생각하는 것이었다.
그게 아마 럼블 매치에서 리드 보이로 활약하는데 큰 도움을 줄 터였다.
* * *
킹스 럼블이 시작되었다.
무려 15만 명의 환호.
쇼의 오프닝을 뒤이어 시작된 경기에서 선수들은 평소보다 훨씬 더 좋은 모습을 보여주었다.
락커룸의 분위기가 살아나니 평소보다 더 집중하는 것이었다.
다들 편한 환경에서 즐거워하며 경기를 뛰는 것을 보자 나 역시 자연스레 기분이 좋았다.
바로 이것이 어쩌면 티파니가 꿈꾸고 있는 프로레슬링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모두가 각자의 목표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함께 협력해서 성공이라는 대의를 향해 나아가는 쇼.
‘멋지군.’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이 럼블 매치가 선수들을 하나로 모으는데 큰 힘을 주었다.
럼블 매치는 메인 이벤트였고 나는 느긋하게 선수들과 대화를 나누며 경기를 지켜보았다.
가장 먼저 오프닝이 끝난 뒤 미리 찍어둔 백스테이지 세그먼트 영상이 하나 흘러나왔다.
카우보이모자를 쓰고 있는 텍사스 출신 졸부 캐릭터, JBL.
그 재수 없는 낯짝을 본 관객들이 크게 야유를 보냈다.
[Booooooooooooooo!]
그는 현재 랙다운의 메인 타이틀인 WWF 유니버스 벨트를 보유하고 있는 챔피언이었다.
자신의 부하들을 이끌고 거만하게 움직이던 그가 사무실 안으로 들어섰다.
거기에서 기다리고 있던 건 이 회사의 회장인 바트 맥센이었다.
[건강히 지내셨습니까. 보스.]
[JBL! 오랜만이군. 오늘 테이커와의 경기는 잘 준비했나?]
[제가 이기는 게 당연하죠.]
그런 말에 다시금 야유가 이어졌다. 하지만 영상 속의 JBL은 물론 전혀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는 여전히 그 거만한 얼굴을 유지한 채 말을 이었다.
[그보다, 오늘 킹스 럼블은 누가 이길 거라고 생각하십니까?]
[글쎄……. 워낙 후보가 쟁쟁한 경기라서 나도 잘 모르겠군.]
[제가 여기에서 한 가지 내기를 제안 드려도 괜찮겠습니까?]
[뭐지?]
바트가 고개를 갸웃거리자 JBL은 뒤쪽의 부하가 들고 있던 아타셰케이스를 받아 넘겼다.
그 안은 지폐로 가득했다.
순간 그것을 본 바트의 눈이 휘둥그레질 정도로 말이다.
[시나 이외의 선수가 승리한다면, 이 돈은 당신의 것입니다.]
[……흐음. 재미있는데.]
의기양양하게 웃는 바트.
두 재수 없는 부자는 그렇게 낄낄거리며 악독한 협의를 마쳤다.
‘좋군.’
내 감상은 그러했다.
쉽고 재미있는 복선이다. 이제 관객들은 과연 이후의 이야기가 어떻게 될 것인가 기대하겠지.
그런 상황에서 본격적으로 페이퍼뷰의 경기가 시작되었다.
첫 번째 경기는 그렉 하트와 바티스타 간의 싱글 매치.
젊은 바티스타와 그렉이 시비가 붙으며 성사된 경기였다.
딱히 깊은 대립은 아니었지만 드라마 자체는 이해하기 쉬웠다.
바티스타는 그렉을 ‘노땅’이라며 모욕했고 그렉은 아직 자신은 현역이라며 참교육을 선언했다.
쉽고 간단한, 그러면서 그렉이라는 레전드로 인해 분위기도 크게 끌어올릴 수 있는 매치.
오프닝 경기가 갖춰야할 덕목에 훌륭하게 들어맞았다.
[Grek Hart! Grek Hart! Grek Hart! Grek Hart! Grek Hart!]
경기는 스무스하게 진행되었고, 바티스타와 그 매니저로 나온 닉 플레어는 그렉의 테크닉에 당해내지 못하고 계속 당했다.
경기를 보던 러셀이 말했다.
“꽤 괜찮은데?”
“…….”
“왜 그래, 신?”
“아니, 아무것도.”
경기 자체로 봤을 때는 유쾌한 원 사이드 경기였지만…….
너무 당하는 거 아닌가?
저기서는 좀 그렉이 당해주고 해야 더 재미있고 바티스타를 띄워줄 수도 있을 텐데.
평소 그렉의 스타일이 아니라서 뭔가 좀 의아하기는 했다.
그냥 기분 탓이겠지.
그렇게 생각한 나는 이후로도 계속해서 경기를 지켜보았다.
오프닝 경기가 끝난 이후로는 각각 양대 브랜드의 태그 팀 챔피언 매치가 이어졌다.
‘나쁘지 않군.’
시간이 좀 짧게 배정되어서인지 평범한 퀄리티였으나 그 안에 할 수 있는 것은 다 했다.
그 이후에는 리키타와 트리쉬 스트라토의 디바스 챔피언 매치가 시작되었다.
이 시대의 여성 레슬링은 ‘화장실에 가는 시간’이라고 불리며 꽤나 천시 받는 입장이었다.
회사에서 뽑는 선수들이 대부분 모델 출신이라 레슬링 스킬과는 연관이 없어 그런 것이었다.
하지만 이 둘은 달랐다.
리키타는 데뷔 당시 문설트라는 고난도 기술을 선보이며 관객들에게서 큰 주목을 받았고.
트리쉬 스트라토는 특유의 카리스마와 노력을 통해 성장한 경기력으로 큰 인정을 받았다.
거기에 외양적인 매력 역시 충분해 두 사람의 경기에는 많은 사람들이 환호를 보내주었다.
이 두 사람의 노력이 있었기에 2010년 대 이후로는 경기력을 갖춘 여성 선수들이 나타났다.
그런 사실을 알고 보자 두 사람의 경기는 무척 감명 깊었다.
경기는 리키타가 트리쉬에게서 타이틀을 빼앗아오며 끝났다.
로프 위로 올라간 리키타는 관객들의 축하 속에서 타이틀의 획득을 자축했다.
오랜 고생 끝에 얻게 된 타이틀이고 최선을 다한 결과니 기분이 좋을 수밖에 없겠지.
선수 생활 내내 첨예하게 대립한 리타와 트리쉬였지만, 실제로는 절친한 친구 사이였다.
아마 둘이서 고릴라 포지션에 돌아오면 눈물을 흘리며 서로를 끌어안을지도 모르겠군.
그렇기에 나 역시 리키타의 타이틀 획득이 멋지게 보였다.
이후로는 U.S. 챔피언십과 메인타이틀 두 경기가 남았다.
개중에서도 WWF 유니버스 챔피언 매치는 ‘텍사스 불 로프 매치’라는 기믹 경기였다.
룰은 다음과 같았다.
중간에 종(Bell)이 달린 로프 하나로 양 선수의 팔뚝을 묶는다.
그리고 네 개의 링 코너에 터치할 수 있는 센서를 달아둔다.
이 네 개의 센서를 상대보다 먼저 터치해 울리는 선수가 승리.
하지만 말처럼 쉽진 않았다.
[크윽……! 끄윽!!]
JBL이 어떻게든 링 코너로 가 센서를 울리려고 발악했으나.
그를 상대하고 있는 테이커가 로프를 당겨 공격했다.
[Casket-Taker!]
짝짝짝짝짝!
박수와 챈트를 번갈아 외치는 관객들. 테이커는 거기에 반응하지 않고 잔혹한 공격을 해나갔다.
로프로 JBL의 목을 조르고 코너 위의 센서를 가볍게 터치했다.
그러자 테이커를 상징하는 보라색 램프에 불이 들어왔다.
환호를 보내는 관객들.
여유롭게 돌아선 그에게 이어지는 JBL의 클로스라인 반격.
일어선 JBL이 테이커가 터치했던 코너로 손을 뻗었다.
그러자 보랏빛 램프가 꺼지고 그 옆의 노란색 램프가 들어왔다.
신화 속에 나오는 거인들의 혈투처럼 보였다. 그렇기에 관객들의 반응 역시 훨씬 좋았다.
그런 가운데 테이커의 리드는 거의 완벽에 가까울 정도였다.
JBL도 자신의 찌질한 졸부 캐릭터를 멋지게 드러냈고 말이다.
치밀한 구성과 폭력 아래 이어지던 경기는 결국 부하들이 난입한 JBL의 승리로 끝이 났다.
하지만 링 위에 서있는 것은 테이커였다. 피투성이가 된 JBL은 비참하게 링에서 도망쳤다.
결과를 안타까워하는 관객들.
그런 만큼 그들은 새로운 영웅의 등장을 바라고 있을 터였다.
‘그게 시나란 거고.’
분명히 멋진 반응이 나올 거다.
락커룸 안에 있던 선수들 모두가 내 행동을 기다리고 있었다.
심장이 두근거렸다.
30인 럼블 매치.
1시간이 훌쩍 넘기기도 하는, 프로레슬링에서 평균 시간이 가장 긴 시간에 속하는 경기.
“좋아, 가자고.”
나는 그런 한마디로 선수들의 전의를 끌어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