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프로레슬링의 신-132화 (132/634)

132.

럼블 매치가 시작되기 직전.

링 아나운서인 릴리 가르시아가 청량한 목소리로 말을 시작했다.

[다음에 이어질 메인이벤트는 30인 럼블 매치입니다!]

WWF의 목소리.

그런 그녀의 말에 관객들이 자리에서 일어서 환호를 보냈다.

그대로 럼블 매치에 대한 설명이 이어지고 원래대로라면 1번 선수가 나올 차례였다.

그래, 나 말이다.

하지만 그 대신 입장로 위에 걸린 스크린에서 영상이 나왔다.

고릴라 포지션 안.

[Yeeeeeeeeaaaaaaahhhh!!]

스크린에 나온 내 얼굴을 본 사람들이 환호성을 보내주었다.

가볍게 몸을 푼 뒤, 커튼을 걷고 밖으로 나가기 직전.

누군가 날 불렀다.

[신!]

의아해 돌아보는 나. 화면 바깥에서 스테이시가 나타났다.

사람들이 다시 환호를 보냈다.

[왜 1번이에요?]

[내가 자청했어. 존 마이클스의 기록을 깨보고 싶어서 말이야.]

[정말 못 말리는 사람이라니까.]

그렇게 말하며 다가온 스테이시가 자연스럽게 내게 키스를 했다.

[Wooooooooooooooooo!]

……여러 의미로 좋아하는 사람들.

역시 남녀 간의 이야기는 어디서든 호응을 얻는 법이다.

잠시 굳어져 있던 나는 자연스럽게 스테이시의 허리에 손을 두르고 잠시 키스를 즐겼다.

영상만 보자면 무척 달콤해보였으나 실상은 꽤나 달랐다.

스테이시가 촬영을 하던 도중 몇 번이고 웃음을 터뜨려 저게 열두 번째 만에 오케이가 났던가?

그러더니 끝나고 나서 ‘키스 잘하네. 일부러 NG 낸 것도 있어.’라면서 나를 놀리고 말이다.

어쨌든.

키스가 끝나고, 음향감독이 나를 향해 손가락을 들어올렸다.

영상 속의 나는 계속해서 스테이시와 대화를 이어나갔다.

[이건 무슨 뜻이야?]

[승리의 주문.]

[하, 서큐버스의 저주로군.]

[우승해서 내 호텔 방으로 오면 저주를 풀어줄게요.]

[좋아, 어디해볼까.]

그리고 나는 우리를 촬영하고 있던 카메라를 잡고 밀어냈다.

영상이 그렇게 끝났고.

“고!”

음향감독이 완벽한 타이밍에 큐 사인을 질러주었다.

‘좋았어.’

나는 양 뺨을 찰싹 때린 뒤 곧바로 커튼을 걷고 밖으로 나왔다.

성가와 뒤섞여 천천히 시작되는 정신 나간 덥스텝의 조합.

기존의 생각을 부숴버리겠다는 내 생각에 더없이 들어맞았다.

[Yeeeeeeeeeaaaaaaahhhh!]

관객들이 미쳐 날뛰었다.

15만 명의 인간들이 누구 하나 가릴 것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내게 엄청난 환호를 보냈다.

“좋아! 이 새끼들아!!”

나는 소리를 버럭 지르며 입장로의 좌우를 오가며 사람들의 반응을 한껏 끌어올렸다.

사람들은 내 음악을 따라 허밍하며 폭발적인 반응을 보냈다.

만족해 웃은 나는 곧바로 입장로 중간으로 돌아갔다.

링까지 이어진 긴 길의 앞에서 주먹을 쥐고 번쩍 들어올렸다.

투콰콰콰콰콰콰콰쾅!!

형형색색의 불꽃이 내 등 뒤로 날아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화약의 냄새와 함께 피어오르는 연기. 그게 카메라에 잡힌 내 모습을 완전히 가려주었다.

나는 연기를 쳐내며 앞으로 나갔다. 내 앞을 가로막고 있던 모든 것을 박살 내며 환호를 받았다.

이들은 날 사랑한다.

나는 이들의 마음을 쥐락펴락할 수 있는 실력을 가지고 있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내가 역대 최고의 프로레슬러였다.

[SIN! SIN! SIN! SIN! SIN! SIN! SIN! SIN! SIN! SIN! SIN!]

나는 긴 입장로를 내달려 그대로 링 위로 올라갔다.

링 중앙에 날 맞이하기 위해 서있던 릴리 가르시아가 살짝 놀라며 뒤로 물러섰다.

그리고 활짝 웃은 나는 그녀의 허리를 붙잡고 잡아당겨 다시 한 번 승리의 주문을 받아냈다.

[Oooooooooooooohhhhh!!]

관객들이 다시 미쳐 날뛰었다.

잠시 망설이던 릴리 역시도 어느새 자연스럽게 내 허리를 잡고 밑으로 내려가…….

아니, 누나. 잠깐만요.

엉덩이를 왜 만져?!

거기다 혀까지……?!

위의 두 가지는 각본에 없었다.

하지만 릴리는 자기가 원했다는 듯 적극적으로 혀를 넣어서는 마치 전자동 거품기처럼…….

이 이상의 묘사는 생략한다.

좀 당황한 채 키스를 한 나는 아주 미묘하게 표정이 무너졌다.

입술을 떼자 릴리 가르시아는 각본을 넘어서 킥킥 웃어댔다.

“누나는 원래 이렇게 해.”

……이게 누나의 힘인가.

영점 몇 초 정도 당황해 서있던 나는 다시금 연기를 이어나갔다.

관객들은 조금 전의 키스로 날 좀 더 거대한 선수로 인식했다.

WWF 안에서 최고의 미녀라 불리는 두 사람의 마음을 얻는 그 스스로도 매력적인 플레이보이.

그것이 바로 나였다.

[This is awesome! This is awesome! This is awesome!]

입장만으로도 어썸 챈트가 터져 나왔다. 좋은 경기의 종반부에나 터져 나오는 ‘개쩐다’는 챈트가.

하지만 이건 시작에 불과했다.

재킷을 벗어던진 나는 그대로 코너에 기대어 서서 2번 선수가 등장하는 것을 기다렸다.

그는 물론.

키이이이이잉-!

[Yeeeeeeeeeeeaaaahhhh!!]

러셀 하트다.

그 음악을 들은 것만으로도 사람들은 다시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는 어이가 없다는 듯 입장로 위를 바라보았다. 카메라가 그런 내 얼굴을 똑똑히 찍었다.

해설자들도 완전히 난리가 나서 러셀과 나의 라이벌리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겠지.

GCW 챔피언 벨트를 반납하고 마침내 위로 올라온 무적 선역.

그가 나타나자 사람들의 환호는 전보다 훨씬 더 커졌다.

잠시 당황해 서있던 나는 이내 러셀을 향해 미소를 지었다.

우리는 이렇게 다시 만났다.

킹스 럼블의 링 위에서.

자신의 재킷을 벗고 링 위로 달려올라온 러셀이 날 바라보았다.

“멋지게 해보자고!”

“하, 기운도 좋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의 앞이라서 좀 흥분을 한 걸지도.”

어깨를 으쓱한 녀석이 자세를 잡고 싸울 준비를 마쳤다.

나는 거리를 벌리며 잠시 탐색전으로 들어가려고 했다.

땡땡땡!

공이 울리며 시작된 럼블 매치.

그 순간, 나는 방향을 바꿔 러셀을 향해 돌진해 들어갔다.

럼블 매치는 처음부터 각을 재고 자시고 하는 경기가 아니다.

특히나 링 위의 숫자가 적을수록 더 빠른 템포를 보여야만 사람들의 반응을 모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건 두 선수 간에 아무런 접점이 없을 때의 이야기였다.

빠르게 돌진한 나는 러셀의 앞에 멈춰서 그대로 말을 걸었다.

“잘할 수 있겠냐?”

“너야말로.”

피식 웃으며 대답하는 녀석.

관객들에게는 이런 우리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기 때문에 단순한 심리전으로 보일 터였다.

나는 순간 반응하지 못했던 러셀을 가볍게 조롱한 것이었다.

우리는 링 위에서 몸과 표정만으로 이 모든 것을 표현했다.

[Uuuuuuooohhh!]

굉장한 반응을 보이는 관객들.

그러자니 반대로 다가온 러셀이 다짜고짜 내 뺨을 후려쳤다.

쫘악!

[Uuuuuuoooooohhh!!]

다시금 반응이 이어졌다.

뺨을 때린다는 건 남자 간의 싸움에 있어서 최악의 모욕이다.

피식 웃은 나는 러셀을 향해서 마구잡이로 주먹을 휘둘렀다.

녀석 역시 지지 않고 반격했다.

난타전이 이어지면서 경기는 순식간에 달아오르기 시직했다.

러셀의 등장은 충격적이었다.

하지만 그에 뒤지지 않을 정도로 내 위상 역시 받쳐주었다.

즉, 우리의 라이벌리는 그 자체만으로 사람들이 즐겁게 받아들인다는 이야기였다.

그렇기에 초반에는 우리 둘을 중심으로 럼블 매치가 풀려나가는 것이 일반적인 방식이었다.

그것이 경기를 보는 사람들이 집중하기에 좋기 때문이었다.

여기에서 3번은 비교적 위상이 낮은 선수가 나와 빨리 탈락하며 럼블 매치의 룰을 보여준다.

그리고 4번은 중간급.

5번은 다시 아래.

6번, 7번, 8번.

그중에서 위상이 좋은 선수가 한 명 나와 다시 분위기를 끌어올리고 그렇게 경기를 이어간다.

위상이 높은 선수는 물론 쉽게 탈락하지 않기 때문에 링 위에 선수들은 계속해서 쌓이는 식.

하지만 우리는 조금 달랐다.

오늘의 럼블 매치는 전적으로 모두가 한 번씩은 환호를 받아낼 수 있는 구성이었다.

러셀과 나의 싸움이 계속 이어지는 동안 어느새 90초가 지나고 카운트가 시작되었다.

[10! 9! 8! 7! 6! 5! 4! 3! 2! 1……!]

빼애애애애앰-.

버저가 울리는 소리와 함께 타부리의 일본풍 음악이 이어졌다.

관객들은 거기에 딱히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타부리는 고작 그런 정도의 선수인 것이었다.

링 위로 올라온 그는 러셀과 나의 협동 공격에 순식간에 얻어터져 링 위에 벌러덩 쓰러졌다.

원래대로라면 여기에서 타부리가 탈락하는 게 일반적인 그림.

하지만 그사이 다시 90초가 지나고 마이노의 음악이 나왔다.

[Yeahh-!]

거기에서 일어난 약간의 환호.

아직도 타부리&마이노의 태그 팀을 기억하는 이들이 많았다.

거기에 응하듯 위로 올라온 마이노는 러셀과 나를 동시에 공격하며 타부리를 구해주었다.

“크윽?!”

나는 갑자기 빨라진 두 사람의 공격에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러셀 역시도 두 사람의 합동 공격에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그럼에도 위상의 차이는 명백했다.

나는 몸을 옆으로 비틀어 달려오는 마이노의 가랑이 사이와 어깨를 붙잡고 넘겨버렸다.

투콰앙-!

스쿱 파워 슬램.

깔끔하고 재빠른 동작에 사람들이 크게 환호를 보내주었다.

러셀 역시도 저먼 수플렉스로 타부리를 넘겨 간단히 제압했다.

하지만 두 사람을 상대하느라 힘이 빠졌던 우리는 각자 로프에 기대어 숨을 몰아쉬었다.

그리고 5번 선수로 로우 카더인 J-트레인이 등장했다.

거구를 뒤흔들며 위로 올라온 그는 자리에 쓰러진 타부리를 일으켜 세워 넘기려고 했다.

하지만 바로 그 순간.

푸화아아아악!!

“끄허억?!”

그 입에서 독무가 분사되었다.

그린 미스트.

그 정체는 그냥 물에 식용 색소를 탄 것이었지만, 프로레슬링 세계에서는 강력한 무기였다.

그린 미스트는 시야를 잠시 멀게 하고, 레드 미스트는 안구에 화상을 입히며 블랙 미스트는 영구적인 시력 손상을 일으킨다.

거기에 블루 미스트는 상대방을 잠에 빠뜨리며 옐로 미스트는 마비를 시키는 등의 무척 복잡한 뒷 설정이 있지만…….

모두가 변태적인 일본 레슬링에서나 쓰이는 것으로 우리는 그냥 그린 미스트만을 사용했다.

실제로 식용 색소를 탄 물을 머금고 뿌리는 것은 순간 시야를 멀게 만들기 때문이었다.

“크아아아악-!!”

고통에 몸부림치며 뒤로 돌아서는 J-트레인. 그런 녀석을 향해 하나의 육탄 전차가 돌진했다.

투콰앙-!

더 고어.

단순히 힘차게 달려들어 상대를 어깨로 들이받는 기술이었다.

미식축구 기술인 ‘스피어 태클’에서 착안해 일반적인 상황에서는 스피어라는 이름으로 불렸지만.

마이노가 쓰는 것은 ‘고어’라는 이름이 붙을 정도로 유명했다.

크게 떠오른 J-트레인이 엄청난 소리와 함께 바닥에 떨어졌다.

“우오오오오오오오!!”

포효하며 일어서는 마이노.

호쾌한 기술을 본 사람들이 과거를 떠올리곤 환호를 보냈다.

그 역시 한 명의 레슬러였다.

환호를 받았고 사람들에게 충분히 어필할 수 있는 남자였다.

단지 각본을 받지 못한 채 회사에서 버림을 받았을 뿐.

하지만 지금 이 자리에서 그는 과거의 마이노였다.

고어 하나로 사람들의 뇌리에 영원히 새겨진 사나이.

[Gore! Gore! Gore! Gore!]

나는 자리에서 일어선 타부리와 마이노가 제각기 서로를 바라보며 웃는 모습을 확인했다.

내가 다 기분이 좋다.

사실 여기에서 저 멋진 기술을 내가 맞아줄 수 있다면 더 기분이 좋았겠지만.

헤이건이 말려서 참았다.

러셀과 나는 이제부터 한 시간이 넘는 시간 동안 링 위에서 싸워야 하기 때문이었다.

그렇기에 나는 근육을 자랑하며 방심하고 있던 마이노에게 힘차게 플라잉 니 킥을 먹였다.

쩌억-!

러셀 역시 방심하고 있던 타부리를 공격했고, 우리는 동시에 두 사람을 3단 로프 위로 넘겼다.

그리고 쓰러진 J-트레인을 공격하는 대신 우리 둘이서 치고받으며 다시 싸우기 시작했다.

아무리 식용색소라도 눈을 뜨는데 시간이 좀 걸리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6번 선수가 나오기 위해 다시 카운트가 시작되었다.

관객들이 힘차게 카운트를 외치기 시작했다.

[10! 9……!]

좋아, 분위기는 좋다.

이 럼블을 이어가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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