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5.
캠핑 버스 안.
통증과 피로 속에서 누워 있던 나는 라디오 소리를 들었다.
누가 튼 거야.
고개를 든 나는 반대편에 누워 있는 멍청이들을 바라보았다.
“누구냐.”
“난 아냐.”
“크어어…….”
“자는 건 누군데.”
“시나.”
“다 침대 있는데 왜 일로 와?”
“거기 좁아.”
“그럼 내려줄 테니까 사막에서 독수리 떼들하고 자던가.”
“그럼 죽어.”
오튼은 침대 위에 털썩 엎드린 채 웅얼거리듯 이야기했다.
잠든 시나를 빼면 러셀이 진지하게 라디오를 듣고 있었다.
럼블이 끝난 뒤, 마침 네 사람 다 이동 경로가 비슷해 이 녀석들을 버스에 태운 것인데.
왜 이러실까들.
침대는 컸으나 프로레슬러 네 명이 눕기에는 더럽게 좁았다.
그래도 대충 뒤섞였다. 확실히 바깥의 간이침대는 좁으니까.
뭐,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넷 다 빡빡 씻었고, 십오만 관객들의 앞에서 엄청난 쇼를 보였다는 고양감이 아직도 남았다.
이 세 멍청이들과 함께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기분이 들었다.
프로레슬링은 혼자 하는 게 아니니까. 따라서 나는 적당히 이 자세를 받아들였다.
잠든 시나의 배 위에 발을 올리고, 비누 냄새가 날 정도로 러셀과 가까이 붙은 상태를 말이다.
나는 쓰게 웃으며 물었다.
“좀 어때?”
“듣는 중이야.”
“지금까지는 어떤데.”
“평소와 같지.”
러셀이 날 보며 웃었다.
“죽여준다는데.”
그 말이 맞았다.
버스 엔진 소리가 희미하게 이어지는 가운데, 조금 집중하자 라디오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난 오늘이 WWF의 역사에 있어서 중요한 날이라고 봐.]
[무슨 소리야?]
[오늘 파이널 포는 확실하게 WWF의 미래가 될 선수들이었어. 그중에서 한 시대를 만들어낼 아이콘이 나올지도 모르지.]
순간 정적이 흘렀다.
힐끔 눈을 돌리자 러셀과 눈이 마주쳤다. 어색한 침묵 속에 오튼이 한마디를 덧붙였다.
“월급만 잘 나오면 되지…….”
이런 녀석이 전생에는 나와 러셀보다 훨씬 위에 섰었다니.
“크헉!”
나는 오튼의 옆구리를 실수인 척 걷어차고는 계속해서 라디오 방송을 들었다.
[누가 될 것 같아?]
[실력적으로 보자면 신이지. ……물론, 회사 측에서 그걸 가만히 둘까 걱정이지만 말이야.]
[나도 신의 인기는 ‘의외’라고 생각했으니까 말이야. 사실 방송을 보고 있는 대부분이 그럴걸? 자기가 신을 정말로 좋아하게 될 거라고는 생각 못했을 거야.]
[그래, 솔직히 GCW에서 데뷔를 했을 때만 해도 이렇게 단기간에 킹스 럼블의 준우승자가 될 거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지.]
[하지만 해냈어.]
[사내에서 평가가 아주 좋다던데. 오히려 시나가 가르침을 청할 정도라고 하니까.]
[시나는 좀 배워야 하긴 하지.]
[그래, 솔직히 오늘의 우승자인 시나의 레슬링 스킬은……. 말을 말자고. 너무 슬퍼지니까.]
[하지만 확실히 브룩 이후 회사에서 밀어줄 만한 스타이기는 해. 잘생겼고, 성실하고, 힘도 좋고. 심지어는 엄청난 달변가지.]
[옛날의 캡틴 로건을 보는 것 같더군. 로건은 경기를 못한 게 아니라 제대로 안 한 거지만.]
[그냥 나와서 근육 자랑만 하고 미국 깃발만 흔들어도 환호가 장난이 아니었으니까. 나라도 그냥 경기 대충 하고 수당 챙기지.]
[시나도 그런 스타일이야. 그냥 시대가 낳은 천재인 거지.]
[그렇게 따지면 신은 뭔데?]
[신? 왜 갑자기?]
[아니, 그냥 신이 어떤 선수와 가장 닮았는가 싶어서 말이야.]
[락콜드?]
[너무 단편적인 판단 같은데. 혁명가라는 점에서 비슷하지만.]
[그렇다면 누가 있어?]
[……존 마이클스?]
[악역으로서 어그로를 끄는 능력은 둘이 비슷한 면이 있군.]
‘왜 갑자기 이야기가 저래.’
나는 황당해 생각했다.
두 기자는 한동안 내가 어떤 선수와 가장 비슷한가에 대해서 이것저것 떠들어대기 시작했다.
위대한 선수들의 이름이 하나씩은 다 나왔다. 그것을 들은 나는 어이가 없어 피식 웃었다.
저들이 그렇게 생각하는 시점에서, 이미 나는 누구라고 단정 지을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
기자들도 비슷한 결론을 내렸다.
[……확실히 그래. 하지만 신인이 쓰기에는 너무 캐릭터가 깊고 일관성이 있어서 착각을 했어.]
뭐, 틀린 말은 아니었다.
경기복이나 테마, 기술이나 스타일, 피니시 무브까지. 거기에 딱히 오리지널리티는 없었다.
사람들은 날 처음 보면 분명 ‘누군가와 닮았다’고 떠올릴 터였다.
허나 그건 분명 의도적이었다.
그리고 점점 나만의 개성을 드러내며 나는 그들 속에 특별한 선수로 자리 잡은 것이다.
‘알아두면 좋을 테크닉이지.’
익숙한 것을 뒤섞어 쉽게 받아들이게 한 뒤, 점차 개성을 드러내 차별성과 개성을 만든다.
어차피 내 인종의 한계는 나 스스로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기믹을 만들고 각본을 쌓아 올라갈 때, 처음부터 그 부분을 고려하여 세운 전략이었다.
[어쨌든 오늘 럼블은 정말 역대급이었어. 역사적인 의미도 깊고 디테일한 각본도 훌륭했지.]
[신의 플레이보이로서의 캐릭터도 재미있었고. 그 외에도 선수 하나하나가 빛난 경기였어.]
[최근에 신을 응원하는 목소리에서 여자 비율이 높아졌지.]
[화보 때문이잖아?]
[그래, 어쨌든 새로운 시청자층을 확보했다는 점이 고무적이야.]
[파이널 포가 남았을 때가 좋았어. ‘그’ 오튼조차 구리지 않고 아주 멋있어 보였지.]
“내가 회사 잘리면 저놈들 다 총으로 쏴서 죽일 거야…….”
오튼이 흉흉한 말을 했다.
[마지막에 신이 오히려 바트를 환영하면서 더 재밌어졌어. 사실 럼블의 우승자를 생각해보면 좀 이상한 느낌이기는 한데.]
[그렇지. 그 순간 시나보다 신이 더 주목을 받았으니까 말이야.]
[그렉과 테이커를 탈락시키고 그런 역할까지. 사실 상 오늘 쇼의 주인공이었다고 봐야지.]
[1번으로 나와서 준우승. 시나의 우승이 조금 빛바래지 않았나 싶기도 한 활약을 보였지.]
[그러게. 나였다면 바트가 나왔을 때 시나를 중심으로…….]
라디오가 뚝 끊어졌다.
뭔가 싶어 고개를 들자 시나가 라디오를 뚝 끈 것이 보였다.
언제 일어난 거야.
“시나?”
“할 말이 좀 있는데.”
“뭔데 그리 심각해?”
오튼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시나의 눈은 퍽 진지했다.
“누군가는 오늘 신이 한 행동에 대해서 분명히 뭐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나는 그와 정반대야.”
“무슨 말이야?”
“난 신을 지지해.”
시나의 갑작스러운 이야기에 나는 뺨이 화끈거리는 것을 느꼈다.
그래, 분명히 오늘 내가 한 행동은 어찌 보면 선을 넘은 것이었다.
각본을 어기고 다른 행동을 하는 건 프로레슬러의 금기였다.
물론 먼저 넘은 것은 바트였고, 난 어디까지나 그걸 커버하기 위해 디테일을 바꿨다는 식으로 자신을 변호하는 것이 가능했다.
따라서 백스테이지에 돌아갔을 때 그걸 가지고 뭐라고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모두 알고 있을 터였다.
내가 바트의 무시에 반발해 일부러 그를 엿 먹였다는 것을.
바트 자신은 이렇게 된 이상 ‘내가 일부러 신의 진심을 끌어내기 위해 그랬다.’는 식으로 정신 승리를 할 테지만 말이다.
어쨌거나.
시나는 그런 내 의도를 알고 있음에도 괜찮다고 말한 것이었다.
“앞으로도 이와 비슷한 일이 일어나고, 신이 되도 않는 벽에 가로막힌다면 난 기꺼이 희생해줄 수 있다. 그걸 말하고 싶었어.”
“너무 말이 거창한데. 시나.”
러셀이 피식 웃었다.
“요는 그거잖아. 이 녀석에게 받은 만큼, 이 녀석이 우리를 믿어준 만큼 돌려줄 수 있다고.”
러셀이 오튼을 돌아보았다.
“넌 어때?”
“……난 잘리지 않고 정년까지만 회사를 다닐 수 있으면 좋겠어. 연봉 계속 많이 오르고.”
현실적인 녀석이다.
“그래도, 바트의 헛소리에 이 녀석이 멋지게 받아쳐준 건 솔직히 속이 좀 시원했어.”
“창피하게 왜들 이러시나.”
나는 어이가 없어 웃었다.
하지만 여기에서 느꼈다.
이 세 사람은 커리어 마지막까지 내 편으로 있어줄 거라고.
오늘처럼, 나중에 이 녀석들과 계속 여행을 다니고 쇼를 할 수 있으면 즐거울 것 같았다.
* * *
그렇게 킹스 럼블이 끝났다.
멋진 페이퍼뷰 하나는 시청률을 끌어올리는 한편, 회사의 머천다이즈 판매량을 크게 늘린다.
그런 의미에서 봤을 때 럼블의 마지막까지 남은 파이널 포의 판매량은 그야말로 대박을 쳤다.
개중에서 가장 핫한 성장을 보인 건…… 물론 ‘러셀’이었다.
드디어 메인 쇼인 버닝콩에 올라오게 된 GCW의 슈퍼스타.
완벽한 데뷔식을 마친 녀석은 곧바로 사람들의 관심을 받았다.
물론 주목도는 나나 시나가 더 높았으나, 우리는 원래부터 큰 인기를 끌었고. 러셀은 신인으로서 유례가 없는 대박을 쳤다.
그 후 랙다운에 있는 시나를 빼고 오튼, 러셀과 함께 캠핑 버스를 타고 다니게 되었는데.
난 녀석이 실시간으로 광고 제안이나 티셔츠 추가 제작 이야기를 듣는 걸 옆에서 지켜보았다.
어안이 벙벙해 전화를 끊은 녀석은 내게 참 듣기 미묘한 농담을 건네고는 했다.
“메이플 시럽 광고에 나와 달라는 제안을 받았어.”
“……?”
“농담이야.”
가끔 느끼는데, 이 녀석은 개그 포인트가 남들과 무척 달랐다.
어쨌든 그런 식이었다.
회사에서 적당히 중상위권을 오가던 나의 상품판매량은 단숨에 상위권으로 치고 올라갔다.
오튼 역시 부진하던 티셔츠 판매량이 중위권까지 올라왔고, 시나는 더 말할 것도 없었다.
다들 그걸 마냥 좋아하는 가운데, 나는 그 원인을 분석했다.
티파니와 함께.
[오튼의 판매량이 사실 여기에서 꽤나 주목할 만한 부분이죠.]
“나도 그렇게 생각해.”
[러셀처럼 신인도 아니고 당신이나 시나처럼 원래 인기가 있었던 것도 아니잖아요?]
전화 너머의 티파니는 그렇게 자신의 생각을 얘기해나갔다.
[거기다 상승한 건 티셔츠 판매량 하나뿐이죠. 여기에는 분명히 이유가 있을 거예요.]
확실히 그랬다.
나와 시나, 러셀은 각자 다른 제품도 골고루 판매량이 올라갔다.
포스터, 사인, 로고가 그려진 자명종 시계, 칫솔, 컵, 기타 등등.
하지만 오튼은 오직 티셔츠 판매량만이 크게 상승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오튼은 현재 나와의 대립으로 그렇게 이미지가 좋지는 못한데.”
[음, 그다지 강력하거나 매력적인 악역으로서의 이미지는 구축하지 못하고 있다는 말이죠?]
“그래. 얼마 전까지 했던 각본이 나한테 열폭하는 거였으니까.”
[호오, 그러고 보니 킹스 럼블은 꽤나 재미있게 봤어요.]
“……일은 일이라며?”
[혀는 넣지 말라고 했잖아.]
“그건 상대 쪽에서…….”
나는 식은땀이 나는 걸 느꼈다.
잠시 침묵하던 티파니는 이윽고 농담임을 알리듯 킥킥 웃었다.
[그래서, 원인은 좀 알겠어요?]
“대충은.”
[뭔데요?]
“하지만 검증이 필요해. 이건 어디까지나 예상일 뿐이라서.”
[어떻게 할까요?]
“혹시 잡지 인터뷰 같은 것 좀 잡아줄 수 있겠어? 럼블의 파이널 포 모두가 참가하는 인터뷰.”
[한번 알아볼게요.]
“되도록이면 큰 잡지가 좋아.”
그렇게 이야기를 진행시켰다.
나는 내가 생각하는 것처럼 ‘사람들이 우리 네 사람을 묶어서 생각하는가.’를 확인하고 싶었다.
과거에 ‘Four Riders’라는 프로레슬링 스테이블이 존재했다.
닉 플레어가 수장으로 있었던 전설적인 스테이블. 그곳의 정신적인 후계가 레볼루션이었다.
스포츠카와 고급 시계를 모으고 고급 정장을 맞춰 입고 다니며 부와 권력을 과시하는 악역 집단.
그렇게 뭉친 포 라이더스는 쇼를 지배하며 큰 인기를 끌었다.
여기까지는 그냥 추억의 인기 스테이블일 뿐이었다.
하지만 중요한 건 이들로부터 30년 뒤였다.
2010년 중후반.
네 명의 여성 선수들이 회사의 유망주로 떠오르게 되었다.
개중에는 닉 플레어의 딸인 애슐리 플레어가 포함되었다.
그렇기에 사람들은 네 명의 선수를 묶어서 ‘포 라이더스’라는 이름으로 부르기 시작했다.
각본 상으로 네 사람이 우정을 과시한 적이 없었는데도 말이다.
그 이미지는 네 사람의 커리어 내내 큰 도움이 되었고, 심지어 각본으로까지 쓰이기도 했다.
외부에서 생성된 이미지가 실제 선수에게 도움을 준 셈이었다.
그리고 우리도 아마…….
‘마찬가지로 그럴 수 있지.’
럼블에서 확실히 우리 넷이 떠오르는 신성이라고 보여줬으니 그에 따른 피드백이 오는 것이다.
각본 바깥의, 현재 WWF의 전반적인 상황을 통해서 만들어진 우리 네 사람의 캐릭터.
테이커, 그렉, 트리플H, JBL 같은 선배들을 밀어내고 향후 WWF를 책임질 루키들.
‘그걸 활용할 수 있다면…….’
앞으로 선수 생활을 하는데 큰 도움이 될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