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프로레슬링의 신-136화 (136/634)

136.

티파니는 한술 더 떴다.

아예 TV쇼 출연까지 잡아서 내가 내년의 큰 목표를 향해서 전진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미국 공영방송국, NBG.

그곳에서 방영되는 위켄드 쇼.

나와 시나, 러셀과 오튼은 바로 그곳에 프로레슬러 특집으로 초대를 받아서 출연하게 되었다.

사회자인 지미 팔콘은 촬영 몇 시간 전 우리를 찾아와 먼저 다음과 같이 이야기했다.

“신! 그리고 시나, 러셀, 오튼.”

확실히 계속 레슬링만 했던 다른 셋에 비하자면 외부에서의 내 이름값이 높은 건 사실이었다.

지난번의 사교계 파티 이후로 각 주간지에서 내 행보를 크게 주목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나는 출연 제의나 인터뷰를 대부분 고사하고 내 몸 값이 높아지는 것을 기다렸다.

사람들이 나라는 남자에 대한 호기심을 더 느끼도록 일종의 뜸을 들인 셈이었다.

그러므로 우리가 위켄드 쇼 같은 대중적인 방송의 섭외를 받은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나를 준다고 하면서 다른 선수들을 끼워 파는 전략이었겠지.’

그게 잘 먹혔다.

문제는 이 위켄드 쇼가 우리 네 사람을 대하는 방식이었다.

앞서 지미가 인사를 건넸을 때 보인 태도가 그걸 드러내주었다.

거기에 질문들도.

이런 토크쇼에서는 방송의 진행 각본 외에도 출연자들에게 할 질문 리스트를 대량으로 적어왔다.

개중에서 마음에 안 들면 걸러내고 나머지는 사회자가 즉석에서 진행하며 묻는 식이었다.

나에게 들어온 질문은 다른 세 사람보다 훨씬 많았고, 대충 다음과 같은 문항들이 존재했다.

나는 그것을 머릿속으로 대충 답변을 정하며 읽어 내려갔다.

잘생긴 얼굴의 비결은?

‘유전자.’

몸매 관리의 비법은?

‘맥주 먹고 늦게 자기.’

이건 물론 장난이고.

이후에는 ‘충격과 고통’이라는 식으로 답변을 하면 좋겠지.

첫 경험은 언제?

‘이건 지우고.’

매력적으로 생각하는 여성은?

‘금발에 눈과 입이 크고 밝게 웃으며 천진난만한 여자.’

나는 그녀를 떠올리며 웃었다.

동양인 남성에 대한 편견을 부쉈다는 반응에 대한 소감은?

‘이건…….’

잠시 고민했다.

뭐라고 답변하면 좋을까.

아니, 답변을 해야 할까?

동양인 남성에 대한 편견은 물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아직 내가 그걸 부순 것은 잘 모르겠다.

마찬가지로 그 아래에 있는, 내가 마치 마틴 루터 킹이라도 되는 양 캐묻는 질문들은 다 지워냈다.

난 동양인 인권운동가가 아니다. 나 자신이 올라가고 싶어서 노력하고 발버둥치는 것뿐이지.

물론 날 보고 용기를 얻은 사람들이 있다면 정말 영광이었지만.

그와 별개로 난 내가 그런 사람의 반열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러므로 다 지우고.

프로레슬링 항목에 올라와있는 질문을 보던 나는 이내 대기실이 우리 넷뿐이라는 것을 확인했다.

“다들 모여 봐.”

내 말에 질문들을 확인하고 있던 세 사람이 내 앞으로 모였다.

우리는 원형으로 둘러앉은 채 천천히 작당모의(?)를 시작했다.

“오늘 방송에서 우리의 이야기를 좀 중점적으로 하고 싶거든.”

“……역시 뭔가 목적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

러셀이 눈을 가늘게 떴다.

“그게 아니면 네가 이런 곳에 우리를 데리고 나올 리가 없지.”

“아니 뭐, 순수하게 우리 루키 네 사람의 이름값이 높아졌으면 하는 건 사실이긴 해.”

러셀의 말에 쓴웃음을 지은 나는 천천히 상황을 설명해나갔다.

“하지만 솔직하게 말해서, 지금 이들이 관심 있는 건 나뿐이야.”

“질문 양만 봐도 알겠네.”

오튼 역시 쓰게 웃었다.

다른 녀석들과 달리 내 질문지는 거의 열 장에 가까웠다. 거기에서 나는 확실하게 깨달았다.

“그러므로 우리가 원하는 걸 얻어내려면 머리를 써야 할 거야.”

“어떻게?”

“우리 네 사람이 WWF에서 갖는 위치를 말하자는 거야?”

“거의 비슷해. 문제는 그 방식이지. 토크 쇼니까 어쨌든 상대 쪽에서 질문을 할 거란 말이야.”

지미 팔콘이 내게 뭔가를 물어보면 나는 그 보따리를 받아서 은근슬쩍 옆으로 넘기는 거다.

“우리가 GCW에서 만났던 거나 뭐, 대충 알지? 자연스럽게 우리 이미지를 동기에 친구로 만들자고.”

“실제로 그렇기도 하고.”

“이걸 사람들에게 알린다는 점이 중요한 거야.”

“저기, 근데 난 아닌데.”

“응?”

“난 아니야.”

아, 그렇지.

오튼은 그냥 바로 메인 쇼에 데뷔한 녀석이었다.

“……뭐 좀 눈물 나는 스토리라도 짜내봐. 시험 당일에 설사 때문에 바로 탈락했다던가.”

“그런 멍청이가 어디 있어.”

여기 있다. 이 자식아.

“그런 스토리랑 우리가 알려지는 게 대체 무슨 상관이야?”

“잘 들어, 오튼.”

나는 심각하게 이야기했다.

“사람들은 스토리텔링에 환장해. 그들은 지금 우릴 가지고 WWF의 미래가 될 네 사람이라고 여기고 있단 말이야.”

“그래서?”

“그 이미지를 굳히자는 거지. 분명 나중에 큰 도움이 될 거야.”

“그래서 오늘 방송에서 케이페이브를 지키지 않는 거구나.”

시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맞아. 오늘 우리는 각본의 캐릭터가 아니라 예명을 쓰는 현실의 프로레슬러로 출연하는 거지.”

“그거…… 매력적이겠는데.”

“무, 무슨 소리야?”

오튼이 고개를 갸웃거리자 러셀이 설명을 덧붙였다.

“사람들이 우리에게 느끼는 이미지를 그대로 가져오자는 거지.”

“그게 대체 케이페이브를 깨는 것과 무슨 관련이 있는 건데?”

“그걸 그대로 쓰면 우리 캐릭터 설정이랑 이질감이 들잖아.”

“그렇다면 안 쓰는 게 낫지 않아? 우리 이야기에 전혀…….”

“예를 들자면 이런 거야.”

내가 예시를 들었다.

캐스켓-테이커는 커리어의 초창기부터 지금까지 ‘한 번 죽음에서 돌아온 장의사 캐릭터’를 밀고 있다.

지금도 그렇다. 바이커 기믹을 쓰고 있음에도 테이커는 ‘한 번 죽었다 살아난 인간’이라는 캐릭터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다.

80년대의 만화적인 기믹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테이커가 정말 그렇다고 생각 안 하잖아?”

“그렇긴 하지.”

“사람들은 테이커를 ‘그런 까마득한 과거의 기믹을 지금까지 쓸 정도로 회사에 오래 있었던 헌신적인 레전드’라고 기억하고 있지.”

그게 그의 캐릭터다.

그렇기 때문에 테이커는 무슨 짓을 하더라도 야유를 받지 못한다는 단점이 존재했다.

“아마 쇼에서 어린아이를 인질로 잡고 성인용 기저귀를 가져오라고 요구하지 않는 이상에야.”

“…….”

“신, 대체 그런 미친 생각은 어떻게 하는 거야?”

“아니…….”

“테이커를 순식간에 똥쟁이에 찌질이 인질범으로 만들었군.”

러셀이 혀를 내둘렀다.

“어, 어쨌든 그래. 이 ‘미래를 책임질 루키’라는 요소는 사람들이 우리 네 사람에게 자연히 큰 기대감을 가지게 만들어줄 거야.”

이제 우리가 무슨 각본을 전개하더라도 사람들은 우리를 WWF의 미래라고 생각하겠지.

그렇다면 회사에서도 자연히 그에 걸맞은 부킹을 해줄 터였다.

“정말 영리한 생각인데.”

시나가 미소를 지었다.

결국 이 ‘루키’란 요소는 우리의 위상을 어느 정도 보호해줄 보호막인 셈이었다.

* * *

지미 팔콘은 10년 이상 이 위켄드 쇼를 맡아온 베테랑이었다.

하지만 이런 경우는, 솔직히 말해서 처음 겪는 일이었다.

“저랑 러셀이 GCW 시절 엄청나게 친하게 지냈었죠. 그렇지?”

“정확히 말하자면 신은 레슬러들의 레슬러였죠. 들어온 지 석 달도 안 되서 모두가 본받고 싶어 하는 선수가 되었다니까요.”

“또 너무 띄워주신다.”

“아니, 진짜라고. 솔직히 말해 네 실력이 질투가 날 정도야.”

“너희도 나쁘진 않잖아.”

“시나는 전혀 아니었지.”

“어쩔 수 없잖아. 원래 나는 분명 배워야 할 입장이었는데.”

지미가 프로레슬러를 쇼에 초대한 것은 사실 처음이 아니었다.

그는 몇 년 전, 당시 WWF의 아이콘으로서 한창 떠오르고 있던 락콜드와 촬영을 했었다.

분위기는 화기애애했다.

하지만 어떤 한 가지에 대해서만큼은 락콜드는 분위기가 순간 그 이름처럼 냉랭해질 정도로 침묵했다.

바로 프로레슬링의 방식.

그 뒤에서 벌어지는 일들에 대해서 그는 조금도 답하지 않았다.

각본이 제작되는 과정이라던가. 아니면 실제로 쇼에서 어떤 식으로 일이 진행되는가에 대해서.

그건 눈앞의 넷도 같았다.

하지만 그들은 그 선의 경계에서 교묘하게 줄타기를 했다.

그 이유를 지미는 어렵지 않게 알아차릴 수가 있었다.

이들은 교묘하게 시청자들에게 자신들의 관계를 알리고 있었다.

생방송으로 진행되는 쇼.

지미는 시청자들이 이상하다고 느낄 정도로 침묵을 지켰다.

왜냐면 이들의 이야기 자체만으로도 흥미로웠기 때문이었다.

네 명의 미남 프로레슬러들이 특수한 직업 활동을 하면서 겪은 관계와 그에 대한 설명.

분명 과장된 일화는 있겠지만.

‘아무리 그래도 설명을 하려고 압정을 자기 손에 박는다고?’

그래도 꽤나 드라마틱했다.

아무리 그래도 진짜로 기업 회장님을 때린다거나 하는 이야기는 말도 안 되는 소리 같았지만.

아니, 어떻게 소속 선수가 기업 회장이 주먹으로 때리라고 해서 때리는 경우가 있단 말인가?

지미는 판단이 빠른 남자였다.

그것이 그를 10년 간 위켄드 쇼에 붙어있게 한 비결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지미는 손에 쥔 질문지를 무시하고 말을 이었다.

“다음 질문으로 넘어가도 될까요?”

“그러시죠.”

“프로레슬러들 간에는 끈끈한 형재애가 있다고 들었는데요.”

“그렇다고 볼 수도 있겠죠.”

“아무래도 네 분의 우정은 더 각별하다고 볼 수 있을까요?”

“죽이고 싶은 사이죠.”

신이 미소를 지었다.

매력적인 그의 모습을 본 몇몇 여성 방청객들이 뺨을 붉혔다.

확실히 대화를 해보니 알겠다.

자신을 매력적으로 보이게 하는 법을 아주 잘 아는 남자였다.

선수들의 중심에 앉은 그는 확실히 다른 아우라가 풍겼다.

다른 이들이 아직 운동선수 특유의 풋내가 있다면, 신은 오히려 그와는 정반대였다.

마치 닳고 닳은 헐리우드 배우처럼 연기를 해나가고 있었다.

그것이 전생의 큰 실패를 겪고 얻게 된 원숙미라는 사실을 모르는 지미로서는, 어떻게 저럴 수 있는지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었고.

때문에 그는 개인적으로도 신이라는 남자에게 흥미를 느꼈다.

“저희는 언제나 함께 이야기하는 시간을 갖습니다. 선배들에게 상담을 할 때도 있긴 하지만.”

“테이커라던가?”

“예, 그는 락커룸의 리더이자 우리 모두의 정신적인 지주죠.”

신은 유창하게 이야기했다.

자신이 이 대화의 중심에 있는 것이 마치 자연스러운 일이라는 듯이 굴면서 말이다.

지미는 묘한 기분을 느꼈다.

물론, 위켄드 쇼에는 다양한 인종과 성별의 사람들이 출연했다.

‘코미디언 켄 조라던가.’

아니면 어디 사업가나 재팬의 영화감독인 아키라 시로사와.

하지만 그런 수많은 동양인 중에서 스포츠 스타는 없었다.

특히나 프로레슬링은 더더욱.

그들은 명확한 실력의 척도가 없기에 경직될 수밖에 없었다.

앞으로 세계화가 진행될수록 그쪽 사업은 쇠락을 겪거나 큰 변화를 꾀해야 한다는 것이 전문가들이 주로 하는 예상이었다.

하지만 지미는 왠지 모르게 그 예상이 틀릴 것 같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눈앞의 남자 때문이었다.

오히려 그가 어떤 단계의 패러다임 시프트를 주도할 것 같다는 느낌이 드는 건 착각일까?

그리고 미국인들이라면 다들 마음속에 가지고 있는 동양인에 대한 편견을 그가 깨뜨리는 것은 아닐까.

더욱이 동양인들 스스로도 가지고 있는 편견 말이다.

그렇게 신의 입담과 다른 선수들의 도움으로 쇼는 별다른 잡음 없이 끝이 났다.

원래의 기획과는 방향성이 달라졌으나, 방송을 마친 지미 팔콘은 묘한 만족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렇기에 자리에서 일어난 그는 가장 먼저 자신을 즐겁게 해준 선수들에게 감사를 전했다.

“고맙습니다. 여러분.”

“저희야말로요.”

“그리고 사과를 드리겠습니다. 솔직히 말해 신을 화젯거리로서 이용하고자 하는 생각이었는데.”

그는 드물게 솔직히 말하며 선수들과 악수를 나누었다.

“이러는 편이 더 나았군요. 정말 흥미로운 이야기였습니다. 시청률도 정말 잘 나왔을 거예요.”

“그렇다면 다행이군요.”

매력적으로 웃는 신.

그 앞에 선 지미는 순간 흥미가 동해 이런 질문을 던졌다.

“그런데, 신. 혹시 한 가지만 여쭤도 되겠습니까?”

“뭐죠?”

“자신의 직종으로 프로레슬링을 선택하신 이유가 굳이 있을까요?”

“재밌으니까요.”

신은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거기에서 지미는 깨달았다.

몇몇 프로레슬러들은 몸이 험하게 혹사되는 이 일로부터 빨리 벗어나고 싶은 경향이 강했다.

부와 명예가 크게 보장되는 헐리우드에 도전한다던가. 아니면 철저하게 관리 받으며 싸우는 격투기 쪽으로 진출한다던가.

프로레슬링은 그전에 단순히 유명세를 얻기 위한 과정으로 쓰는 정도로.

하지만 눈앞의 사내는 아니었다.

그는 오히려 반대로, 프로레슬링을 위해 외부의 유명세를 얻으려고 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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