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8.
1월 말의 킹스 럼블이 끝난 뒤, 버닝콩에서는 크게 열 가지의 대립이 진행 중이었다.
실버백 대 카인의 월드 챔피언을 두고 진행되는 대립.
신 대 그렉 하트의 인터컨티넨탈 챔피언을 둔 대립.
레볼루션 대 하디 보이즈의 태그 팀 챔피언 대립.
러셀 하트 대 랜스 오튼의 대립.
그 외에도 수많은 선수들이 페이퍼뷰를 향해 하나의 이야기를 빌드 업 해가는 시즌이었다.
2월 말의 ‘콜드 블러드’를 향해서 차곡차곡, 천천히 말이다.
하지만 선수들의 위상이 다른 것처럼 모든 대립이 방송과 쇼에 출연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중요도가 낮은 대립은 격주로 진행되거나 방송에 나가지 않는 다크 매치에서 시행되었다.
각본진은 회장인 바트 맥센과 매주 쇼의 구성을 짜며 그에 관해서 대화를 나누고는 했다.
어떤 대립이 반응이 좋으니 좀 더 비중을 줘보자던가, 아니면 구리니까 방향성을 틀어서 좀 띄워보자는 식으로.
그리고 그 일은, 1년 전까지만 해도 무척 쉬운 일이었다.
적당히 회장님께서 좋아하시는 선수를 밀어주자고 하고 멋진 연출을 고려하면 그만이니까.
거기에 좀 요새 들어 촌스럽다 싶은 슬랩스틱을 가미하기만 하면 그야말로 금상첨화였다.
하지만 이제는 아니었다.
신이 데뷔한 뒤 1년, 각본 팀장의 이마는 5cm나 더 늘어났다.
줄어든 머리숱처럼 그가 겪고 있는 스트레스는 상당했다.
신의 영향이었다.
그가 없었을 때는, 그냥 적당히 바트의 입맛에 맞추기만 하면 괜찮은 시나리오가 나왔다.
바트 역시 아예 감이 없지는 않았고 그냥저냥 나쁘지 않은 쇼를 승인할 정도는 됐다.
그렇기에 적당히 무난하게 각본을 썼던 그였는데.
신은 그걸 바꿔버렸다.
따라서 좀 불편한 것이었다.
“메인이벤트에서는 실버백과 카인이 대립을 진행할 예정입니다.”
“나쁘진 않군. 정확히 어떤 식으로 진행이 되는 거지?”
“실버백이 누구든 좋으니 나와서 붙자고 한 다음에…….”
“거기 마이노가 나오는 건 어떤가? 스피어 vs 고어. 실버백이 단숨에 승리하는 거지.”
“아, 옙.”
각본을 수정하게 되었다.
원래 계획은 여기서 바티스타가 나와서 나름 분전을 펼쳐 실버백의 인정을 받는 것이었는데.
그리고 실버백이 먼저 퇴장할 때 나타난 카인이 바티스타를 박살내면서 실버백의 화를 돋우고.
그런 게 아무런 효과도 없는 실버백 띄우기로 변질되어버렸다.
이런 식이었다.
바트는 모든 이야기를 자기 생각보다 더 쉽게 만들고자 했다.
각본 팀장은 최근 들어 거기에 대한 스트레스를 느끼게 되었다.
역시 신의 행동 때문이었다.
그는 자신이 가진 모든 걸 발휘해 각본을 이끌었다. 그리고 그건 언제나 멋진 반응을 낳았다.
킹스 럼블에서 그렉 하트를 탈락시키고, 대립을 시작해 순식간에 멋진 드라마를 만들어냈다.
전설 대 도전자.
하지만 현재 챔피언은 신이다.
그렉은 사실, 말년에 그다지 대립다운 대립을 못하고 있었다.
희대의 테크니션이던 그는 더 이상 바트가 생각하는 ‘디 가이’ 감이 아니게 된 것이다.
하지만 그렉은 언제나 팬들의 사랑을 받는 존재였고, 그를 중요하게 쓰지 못하는 것에 대해서 각본 팀장은 아쉬움을 느꼈다.
그보다 앞서는 욕구가 회장님의 기분을 맞춰주고 최대한 오래 이 회사에서 일하는 것이라, 금방 머릿속에서 지워졌지만 말이다.
그래도 작가는 작가다.
멋지게 드라마를 펼치는 신을 보고 있자면 그는 다양한 생각에 휩싸이게 되는 것이다.
나도 저렇게 하고 싶다.
분명히 여기서는 구린 실버백 대 카인의 대립이 아니라 신의 대립을 띄워주는 것이 맞다.
신은 메인 쇼에 올라온 내내 자신의 실력을 보여주며 팀장을 그런 식으로 계속 괴롭혔고.
남자의 머리숱은 그렇게 하루하루 빠져가고 있는 중이었다.
그 뒤로도 각본 회의는 계속해서 진행이 되었다.
종이 위의 내용을 읽어 내려가던 바트는 쇼 중후반에 위치한 인터컨티넨탈 챔피언십 대립을 보고는 각본진에게 물었다.
“대립 말이야. 좀 더 미국인을 살리는 방향으로 가야겠지?”
“신, 말입니까?”
그렉 하트는 캐나다 출신의 프로레슬러였다. 그러므로 바트가 말하는 것은 분명히…….
“아니 ‘눈으로 보기에’ 미국인 같은 사람 말이야.”
“…….”
“챔피언은 이번에 그렉한테 넘기는 걸로 하자고. 그러는 편이 사람들도 더 좋아하겠지.”
“저, 저기. 회장님.”
“응?”
“굳이 그러실 생각이시라면 그렉보다는 차라리 이번에 메인 쇼로 올라온 러셀이 더 낫지 않겠습니까? 실력도 좋은 친구던데.”
“아니, 그렉이 이번에 은퇴를 번복하겠다고 해서 말이야.”
“예?”
팀장의 눈이 휘둥그레 뜨였다.
그렉 하트라면 분명히 올해의 레슬 임페리움을 끝으로 은퇴하기로 이야기가 되어있을 텐데?
받아들이기 힘든 상황이었다.
지금 회사에서 가장 핫한 선수가 그렉에게 져서 타이틀을 잃는 부킹을 명령하다니 말이다.
그렇다고 타이틀을 잃은 신이 월드 챔피언 전선에 투입되는 것도 분명 아닐 텐데 말이다.
‘역겹군.’
거기다 뒤를 이은 바트의 발언은 모두를 경악하게 만들었다.
“계약서에 도장을 찍을 때까지는 좀 중용을 해줘야지 않겠나.”
“보스…….”
“물론 그 이후로도 그렉은 메인 전선에서 뛰겠지만 말이야.”
분명 거짓말이다.
이 이야기가 그렉에게 새어나갔을 때를 대비해 들어두는 보험. 그 이상으로는 느껴지지 않았다.
그렇다면 대체 왜 쓰지도 않을 선수를 왜 돈으로 묶어두는가?
더군다나 그렉 하트의 연봉은 메인 이벤터 급으로 천만 달러는 가볍게 넘어가는데 말이다.
사실, 간단한 이유였다.
바트 맥센은 자신의 만족을 위해 그렇게 돈을 쓰는 것이었다.
그렇게 그렉을 묵혀두다가 누군가 밀어주고 싶은 선수가 생기면 대립에 투입할 수도 있고.
캐나다인 악당 vs 미국의 영웅.
마치 소년들이 액션 피규어를 모으는 것과 비슷한 심리였다.
단지 바트 맥센은 그걸 현실의 돈으로, 현실에서 할 뿐이었다.
그렇게 만든 자신의 인형극을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남자.
작게 한숨을 내쉰 각본 팀장은 옆에 놓아둔 공책에 바트의 피드백을 천천히 적어 내려갔다.
‘신이…… 패배한다.’
이런 기묘한 각본에서 믿을 수 있는 것은 단 하나밖에 없었다.
바로 그렉 하트 본인이 챔피언 등극 각본을 거절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팀장은 아마 정신이 제대로 박힌 그렉이라면 분명 거절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 분명 그럴 터였다.
* * *
고요한 락커룸.
그렉 하트는 각본 팀장의 이야기를 듣고는 눈썹을 치켜떴다.
“챔피언?”
“예, 그렉. 일단 바트의 명령은 그런 식이기는 한데요.”
“그렇게 하지.”
“예?”
“하겠다고.”
그렉은 쉽게 대답했다.
갑작스러운 이야기를 들은 팀장은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그렉이라면 분명히 거절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가 알고 있는 그렉은 바로 그런 남자였다.
희대의 테크니션.
프로 의식도 출중하고 다른 선수들과의 관계도 원만한 남자.
바른 말을 너무 잘해서 때로는 적을 많이 만들기도 했었던.
그런 그렉이.
“챔피언은 오랜만이군.”
이 각본을 받아들인다고?
이해할 수가 없었다.
신, 러셀 하트, 숀 시나, 랜스 오튼은 회사의 미래로서 애지중지 키워야 할 인재들이었다.
시나를 뺀 셋이서 인터컨티넨탈 챔피언을 중심으로 대립만 해도 앞으로 1년은 너끈할 텐데.
“무슨 문제라도 있나?”
“아, 아닙니다.”
그렉이 의아한 듯 바라보아 적당히 얼버무리고 나왔지만.
팀장은 도저히 방금 일어난 일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었다.
대체 그렉이 왜?
고민에 빠진 그때였다.
“예, 예…….”
복도 저편에서 들려오는 익숙한 목소리. 고개를 돌린 팀장은 타이밍이 참 좋다는 생각을 했다.
신이었다.
누군가와 통화를 하고 있는 그를 본 팀장은 뭔가에 홀린 사람처럼 천천히 다가갔다.
“……그럼 그렇게 하시죠. 예, 촬영에 늦지 않게 도착하겠습니다.”
각본 팀장을 알아본 신은 이내 곧바로 전화를 끊었다.
대화도 다 했거니와, 그의 표정이 어딘가 싸늘했기 때문이었다.
WWF 본사에서의 일을 마치고 왔더니 이게 대체 무슨 일인지.
잠시 고민하던 그는 일단 자신을 구원자라도 되는 양 바라보고 있는 팀장과 악수를 나눴다.
“신. 감사합니다, 하나님.”
“무슨 일 있어요?”
“그게……. 음, 일단 자리를 좀 옮겨서 이야기를 하죠.”
팀장은 주변을 살피고는 사람이 없는 락커룸으로 그를 인도했다.
‘각본 관련해서 뭔가 문제가 생긴 모양이로군.’
그것도 아주 심각한 문제가.
그렇게 결론을 내린 신은 이어 팀장으로부터 지금까지 있었던 일에 대해서 설명을 들었다.
바트와의 회의.
결정된 각본.
그렉의 반응.
팀장은 신이 진지하게 자신의 이야기를 듣는 것을 보았다.
뜻밖에도 그는 인터컨티넨탈 벨트를 잃게 되었음에도 딱히 부정적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왜일까.
거기에 대해서 팀장이 의문을 느끼자 신이 입을 열었다.
“뭐, 벨트는 되찾아오면 되니까요.”
“그, 래요?”
“예, 제가 만족할 만한 각본이라면 벨트를 내주는 건 별로 이상할 것도 없는 일이긴 한데요.”
신은 빙긋 웃어 보였다.
“보아하니 이번 각본에는 그런 부분이 없는 모양이로군요.”
귀신같은 캐치였다.
“이번에 그렉이 재계약을 하게 되서 그로 인해 바트가 벨트를 잠깐 쥐어주기로 한 거죠?”
“아니…….”
거기까지는 설명 안 했다.
팀장은 귀신이라도 본 듯한 얼굴이 되었다. 거기에 신은 쓰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재계약을 한다는 것 자체는 그렉에게 직접 들은 거예요.”
“거기에서 바트가 벨트를 넘겨주기로 한 이유를 유추해낸 겁니까? 그것만 해도 대단한데요.”
“뭐, 선수 생활을 하다 보면 누구나 다 알게 되는 거죠.”
“당신 이제 2년차잖아!”
마치 20년 이상은 WWF에서 근무했던 것 같은 통찰력이었다.
“……설마 여기서 그렉이 왜 그런 건지도 알겠다거나?”
“대충은 예상이 가요. 나름대로 근거도 있고 말이지.”
“뭐, 뭔가요?”
팀장은 이제 완전히 홈즈의 추리를 듣는 왓슨처럼 의자에 앉아 신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킹스 럼블에서 그렉의 매치가 어땠는지, 기억나요?”
“바티스타하고 붙었죠.”
“그거 경기 그렉이 짰죠?”
“그걸 어떻게…….”
“그리고 플레어하고 싸웠겠지?”
“아니, 무슨…….”
척척 맞추고 있다.
머릿속에 있는 정보를 토대로 말한 신은 이내 한숨을 내쉬었다.
“그 양반, 그런 테크닉적인 부분에서 에고가 참 세다니까.”
“에고?”
“고집이요. 자기 자아가 너무 세니까 불협화음이 나는 거야. 그러니까 남들하고 싸우는 거지.”
“하긴…….”
팀장은 납득했다.
소문으로 듣고 직접 찾아가서 확인한 것이었지만 그때 플레어는 분명히 이렇게 말했었다.
[그 개자식은 예나 지금이나 자기가 최고라고 생각한다니까! 좀 나아진 줄 알았더니 전혀 변한 게 없어! 아주 개자식이야!]
“……그렇다면, 그렉이 이번에 벨트를 순순히 받겠다고 한 것도 킹스 럼블 사건의 연장선이다?”
“킹스 럼블 때 경기는 원 사이드하게 진행되었어요. 평소 그렉이 사용하던 방법이 아니죠.”
“그러네요. 확실히 그렉은 자기 자신만 돋보이게 경기를 짜는 선수는 분명히 아니었는데.”
“하지만 뭔가의 이유로 욕심이 생겼다. 그래서 재계약을 해서 선수 생활을 이어가기로 했다.”
“그걸, 어떻게 하죠?”
“뭐……. 일단 그렉이 왜 갑자기 그렇게 됐나 알아봐야죠. 남자가 나이를 먹으면 여성 호르몬이 많이 나온다던데. 그것 때문에 뭐 감수성이라도 풍부해진 건가.”
“…….”
“어쨌든, 이 일은 좀 천천히 시간을 두고 보는 게 낫겠어요.”
싱긋 웃으며 이야기한 신은 그대로 팀장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 위로의 말을 건넸다.
“고생 많았어요. 나머지는 제가 알아서 해보죠.”
입사한 지 2년차인 신인에게 이렇게 마음의 위로를 받을 것이라고는 전혀 상상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