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프로레슬링의 신-139화 (139/634)

139.

그렉 하트가 은퇴 예정을 번복했다.

그 사실은 이 거대한 회사의 어딘가에 난 쥐구멍으로 새어나가, 끝끝내 세상에 알려졌다.

프로레슬링 관련 기자들이 그 내용을 캐치하고 라디오 방송에서 떠들면서부터였다.

[그렉 하트가 이번에 회사로부터 2년 계약 연장을 제안 받은 모양이야. 본인도 승낙했고.]

[그렉은 지금 신과 대립 중이었지?]

[그래, 지금 한창 둘이서 멋지게 스토리를 진행하고 있어. 인터컨티넨탈 벨트와 과거의 일, 킹스 럼블에서의 사건까지 더해서.]

[과거의 노장과 현재를 살아가는 루키의 대결. 둘 다 선역인데도 불구하고 반응이 잘 뽑히는 아주 멋진 대립이야.]

[사람들은 둘 모두에게 환호를 보내고 있어. 그러니까 누가 이길지 더 궁금해지는 거고.]

[그런 면에서 보자면 난 신이 굉장히 영리하다고 느꼈어.]

[왜?]

[상대가 다른 누구도 아닌 그렉 하트인데 환호를 뽑아올 수 있다는 건 굉장한 일이잖아?]

[하긴, 그렉은 무려 20년을 일하며 리스펙트가 쌓일 대로 쌓인 슈퍼 베테랑이니 말이야.]

[그래서 기뻤지. 그렉이 마지막에 저런 대단한 신인에게 잡을 해주고 떠나는구나 싶어서.]

[하지만 일이 이렇게 되었군.]

[그래, 그렉은 은퇴를 번복했고 이야기는 묘해졌어. 이러다 챔피언 벨트라도 먹는다면……. 정말 상상도 못한 상황이 올 텐데.]

[분명 역반응이 터지겠지.]

[그렉은 지금까지 잘 해왔지만 연식이 너무 낡았어. 요새는 스케줄 소화하는 것도 힘들어서 하우스 쇼도 거른다고 하던데.]

[그렉이?]

[그래, ‘그’ 그렉이.]

[프로 의식이 넘쳐나 방송에 나가지도 않는 하우스 쇼도 풀타임으로 소화했던 그렉이?]

[물론, 당연한 일이기는 해. 노장들은 체력 문제로 인해 하우스 쇼를 걸러 가면서 뛰니까. WWF의 스케줄은 살인적이거든.]

1년에 300일 이상을 여행하며, 일주일에 많을 때는 여섯 번까지도 경기를 뛰는 선수의 삶.

40세가 넘은 시점에서 그걸 견디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했다.

[문제는 그렉이 젊었을 때 그런 노장들의 행동을 특혜라면서 비난하고 싸웠던 선수였단 거지. 기억 나? 제이스 로버츠나 랭 새비지 같은 선수들 말이야.]

[물론 기억나. 그때 꽤 시끄러웠으니까. ……그랬던 인간이 과거 자신의 선배들과 똑같이 굴다니.]

[안타깝고, 거기에 더해 웃기는 일이야. 솔직히 말해서 이제는 좀 내려놔야 하지 않나 싶은데.]

[맞아. 그렉 하트는 레슬 임페리움에서 신에게 잡을 해주고 은퇴를 한다. 그게 맞는 그림이야.]

[그게 이치에 맞지. 관례잖아? 떠나는 선수는 패배하고 간다.]

[그런데 떠나기는커녕 젊은 선수들의 앞길을 막게 되었으니.]

[뭐랄까. 참으로 슬픈 일이군. 영웅의 몰락을 지켜보는 게.]

기자들은 제멋대로 떠들어댔다.

업계 내부의 비밀을 외부로 퍼뜨리고 그로서 돈을 번다. 그들의 기생충 같은 성미가 참으로 잘 드러나는 부분이라 할 수 있었다.

업계 외부에서 그나마 전문가라고 할 수 있는 이들의 방송을 자주 듣는 나도, 이런 부분에 관해서는 언제나 불쾌감을 느꼈다.

‘어쩔 수 없는 부분이지만.’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어쨌든 이런 비밀이 퍼지게 된 이상 아마 쇼에서 역반응을 피할 수는 없을 것 같았다.

굳이 벨트를 따지 않더라도.

이들의 발언으로 인해 그렉에게는 좋던 싫던 한 가지 이미지가 덧씌워지고 만 것이었다.

신인의 앞길을 가로막는 걸림돌.

청산되지 않은 옛 잔재.

회사 내부에서는 그런 분위기에 대해서 쉬쉬했고 그렉 역시 별달리 말은 하지 않았지만.

관객들은 곧바로 쇼에서 피드백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콜드 블러드를 얼마 남겨두지 않은 2월 3주차의 버닝콩.

나와 그렉은 링에서 만나 계속해서 대립을 진행하고 있었다.

지금까지 나는 그렉을 내 앞길을 가로막는 꼰대로 묘사했다.

그리고 그렉은 내가 가는 길이 옳지 않음을 지적하며 맞섰다.

맞는 말이었다.

그렉은 언제나 정정당당하게 싸워 승리를 쟁취하는 남자였다.

하지만 나는 필요하다면 비겁한 수도 개의치 않았고, 럼블에서는 스테이시의 도움을 받아 그렉을 탈락시키는 쾌거를 달성했다.

그게 기폭제가 되어 레슬 임페리움까지 대립을 진행할 예정이었고 그렉도 동의한 사실이었다.

그리고 뉴스레터의 사건이 터지기 전까지 관객들은 우리 둘 모두에게 환호를 보내주었다.

서로가 주관이 뚜렷한 상태에서 그렉의 은퇴식까지 멋진 드라마를 기대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일은 꼬이고 말았다.

“신, 너에게는 명예라는 게 없어. 모름지기 남자라면 맨주먹만으로 맞서 싸워야 하는 법이다.”

[Boooooo……!!]

관객들은 그렉의 마이크 워크에 주저 없이 야유를 보냈다.

이전까지 그렉은 자신의 신념을 마지막까지 고수하는 전설로서 절대적인 리스펙트를 받았다.

그리고 나는 거기에 대항해 겁 없이 전설에게 도전하는 루키 포지션으로서 환호를 받았다.

하지만 그렉이 재계약을 하게 되면서 이야기는 반대로 변했다.

그렉은 더 이상 커리어의 마지막을 불태우는 전설이 아니라 추잡하게 질긴 생명줄을 이어가고 있는 꼰대가 되고 말았다.

현실에서의 상황이 각본에 이렇게 영향을 끼치는 것이었다.

“너는 그걸 모르지. 까놓고 말해서 그 벨트가 너에게 있다는 건 WWF의 수치야. 반드시 그 벨트를 되찾아오고야 말겠어.”

[Boooo……!!]

“그거 넘겨들을 수 없는데.”

나는 그렉의 뒤에 곧바로 대사를 쳐나가 이 야유가 더 이상 커지지 않도록 조절했다.

하지만 이게 어디까지 통할까.

거기다 내가 앞으로 칠 대사들을 생각하자면 이런 역반응은 더 불어날 것이 분명했다.

왜냐면 각본에 준비된 대사들이 지금 그렉에게는 뼈를 때리는 이야기였기 때문이었다.

“내가 이 벨트를 가진 게 수치라고? 그건 당신이 결정하는 게 아니야. 우리를 지켜보는 수많은 사람들이 말하는 것이지.”

나는 벨트를 들어올렸다.

하얀 가죽에 황금색 플레이트가 번쩍이는 버닝콩의 2선 벨트.

이 타이틀 또한 메인 벨트 못지않게 많은 선수들의 목표였다.

“시카고! 다들 어떻게 생각해?!”

[SIN! SIN! SIN! SIN! SIN! SIN! SIN! SIN! SIN! SIN! SIN! SIN!]

무수히 쏟아지는 챈트.

프로레슬링의 성지라고 불리는 도시, 시카고에서의 반응인 만큼 이보다 확실한 것은 없었다.

까다로운 이들마저 만족시켰다는 건 내가 확실히 제대로 내 일을 하고 있다는 증거였다.

“어때? 그렉. 이 정도면 나도 나름 인정받는 챔피언이 아닌가?”

“그렇다면 이들에게 당당해지기 위해서라도 넌 바뀌어야 해.”

[Boooooo……!]

“이들을 대표하는 자가 되고 싶다면 말이지. 내가 이번 콜드 블러드에서 너에게 가르쳐주마.”

야유는 점점 심해졌다.

재계약에 관한 이야기가 퍼진 뒤의 그렉은 더 이상 사람들이 원하는 슈퍼스타가 아니었다.

그리고 그걸 계속 무시하고 선역 마이크워크를 이어간다는 점에서 야유는 계속 심해졌다.

그렇게 세그먼트를 마치고 고릴라 포지션으로 돌아오자, 분위기는 그다지 좋지 못했다.

그렉은 인사도 하지 않고 곧바로 락커룸으로 들어가 버렸다.

‘이거 심각한데.’

잠시 고민하던 나는 그렉을 따라 락커룸 안으로 들어섰다.

다행히 그렉 외에는 아무도 없어 이야기하기 편할 듯했다.

“그렉, 잠깐 괜찮아요?”

“……그래.”

얼굴빛이 좋지 못한 걸로 봐서 그 역시도 알고 있는 것 같은데.

일단 본론을 꺼내볼까.

“오늘 영 별로였네요.”

“알고 있다.”

“은퇴 번복 선언을 사람들이 좋지 못하게 받아들인 모양인데요.”

“그게 아니지.”

그렉이 쓰게 웃었다.

“그들은 내가 널 이길지도 모르는 상황 자체를 싫어하는 거다.”

“…….”

“이번 레슬 임페리움에서 패배하고 은퇴하는 게 내 커리어의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는 거지.”

“그런데, 이번 콜드 블러드에서는 당신이 이기기로 되어 있죠.”

“불만이라도?”

“그건 아니고. 같이 일하는 입장에서 성가시거든요. 역반응 감내는 둘이서 같이 하는 거잖아요.”

“……!”

사나운 시선.

순간 그렇게 날 노려보았던 그렉은 이를 빠득 깨물었다.

“곧, 괜찮아질 거다.”

“근거는?”

“나에게는 쌓아온 커리어가 있어. 사람들은 분명히 날 다시 받아들일 거다. 괜찮아질 거야.”

“콜드 블러드에서 벨트를 땄을 때도 그렇게 반응할까요.”

“…….”

“뭐, 그쪽이 원하고 회사에서도 그런 결정을 내린다면 저로서는 딱히 더 할 말은 없군요.”

고집을 부리고 있다.

어렴풋이 그런 사실을 느낀 나는 일단 자리에서 일어섰다.

방에서 나가기 전, 그렉이 조심스럽게 한마디를 덧붙였다.

“걱정 마라.”

“예?”

“잘 될 거다. 넌 날 믿고 콜드 블러드까지 따라오기만 하면 돼.”

“……아까 링에서 말했죠?”

“뭘?”

“관객들에게 당당할 수 있게 행동하라고. 지금 당신이 그렇다면 별문제는 없겠네요.”

비아냥을 담은 어조로 말하자 그렉은 다시 나를 노려보았다.

무시하고 나왔다.

길게 한숨을 내쉰 나는 이어 천천히 조금 전의 일을 곱씹었다.

‘대충 알겠군.’

전생과 상황이 많이 바뀌었다.

거기에서 대충 답이 보였다.

전생에서의 그렉은 무난히 러셀에게 바통을 넘겨주고 자신의 20년 커리어를 무사히 끝마쳤다.

그런데 지금은 갑자기 전생과 달리 욕심을 부리며 자기 커리어를 이어나가겠다고 말했다.

그 원인은 당연히 전생과 바뀐 부분에서 찾을 수 있을 터였다.

바로 나.

‘부끄럽지만.’

현생의 내가 어떤 식으로든 그렉에게 영향을 끼친 것이겠지.

정확히 무슨 영향인지에 대해서는 그렉을 잘 알고 있는 누군가와 좀 이야기를 해봐야겠지만.

‘역시 그 녀석밖에 없지.’

그렇게 생각한 나는 일단 짐을 챙겨서 캠핑 버스로 돌아갔다.

우리보다 앞서 오늘자의 출연을 끝마친 러셀과 오튼은 이미 버스에 돌아와 있는 상태였다.

“어, 신.”

“오늘 고생 많았어.”

오늘 내 링 세그먼트가 구렸기 때문인지 그들은 날 위로하듯 그렇게 한마디씩을 건넸다.

그렇다면 딱히 설명을 더 덧붙이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러셀, 잠깐만.”

“응?”

“안쪽에서 이야기 좀 하자.”

나는 녀석을 데리고 안쪽의 침실로 들어갔다.

일단 비밀스러운 이야기라 문을 닫고. 돌아보자 러셀이 죄책감을 느끼는 눈으로 날 바라보았다.

“미안, 삼촌이…….”

“무슨 이유가 있을까?”

“모르겠어. 슬쩍 물어봤는데 전혀 말을 안 해줘서.”

“분명 갑자기 고집을 부리는 원인이 있을 것 같은데.”

“요즘 변한 게 하나 있긴 해.”

“뭔데?”

“재계약을 결정한 뒤로부터는 네 이야기를 전혀 안 하더라고.”

“뭐? 그전에는 어땠는데?”

“귀에 딱지가 앉도록 했지. 날 가르쳐주실 때마다 네 경기를 예시로 들 정도로 말이야.”

“……으음.”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역대 최고의 테크니션이라고 미래까지 칭송을 받는 그렉이 내 경기를 교보재로 사용해왔다고.

그리고 이제는 안 그런다니.

‘더 말하지 않아도 알겠군.’

나 역시 전생에 한 번 경험했던 일이기 때문에 알 것 같았다.

그렉은 커리어가 끝나는 것 자체를 두려워하고 있는 것이었다.

차라리 정말 완벽하게 자신의 시대를 만들고 메가 히트를 시켰다면 시원하게 끝냈을 거다.

하지만 시대적 특수성과 불운으로 인해 그렉은 그러지 못했다.

그와, 라이벌인 존 마이클스가 만들어낸 시대는, 솔직히 업계의 침체기로 치부될 정도였다.

분명 누군가에게는 환상적인 시대였으나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그렇지 않았던 그렉의 시대.

그렇기에 그렉은 두려운 거다.

혹시 자신이 잘못된 길을 걸어오지는 않았는지 말이다. 그래서 다시 도전하고 싶어진 거겠지.

그 모든 건 그가 봤을 때 환상적인 실력으로 선수 생활을 이어가고 있는 나의 존재 때문이다.

나도 그랬었다.

이 링 위에서 내가 더 이상 뭘 할 수 없게 되는 게 두려웠었다.

좀 더 버티다 보면 분명 내게도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을 쌓을 기회가 오지 않을까.

‘그런 고민을 했었지.’

자버였던 나조차 그런 감정을 느꼈는데, 그렉은 오죽 할까.

오히려 그는 자신의 실력을 믿는 만큼 훨씬 심할 터였다.

공든 탑은 완성되기 직전에 끝내는 것이 가장 아까운 법이니까.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야.’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나는 그렉을 은퇴시키는 게 반드시 나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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