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프로레슬링의 신-140화 (140/634)

140.

어떻게 보자면 다시금 각본과 현실이 이어지게 된 셈이었다.

나는 그렉을 은퇴시킨다.

왜냐면 그를 존경하고, 또한 친구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렉은 이번 생애에서 최초로 내 재능을 알아봐준 레전드였다.

거기에 무급 휴가를 쓰고 GCW에 와서 우리가 올라가는 데 도움을 주기도 했었지.

하지만 아무리 그렉 하트 같은 레전드 선수라도 노화는 피할 수 없고, 언젠가는 선수 생활이 반드시 끝나기 마련이었다.

그것은 당연한 섭리였다.

본인은 인정하지 못했지만 그렉의 레슬러로서의 삶은 끝났다.

그는 늙었고 탈모도 왔다. 미간에는 주름이 졌고 살은 붙었다.

체력은 떨어졌고, 조금만 경기가 길어져도 헉헉거리며 힘들어했다.

물론, 모든 레슬러가 좋은 타이밍에 은퇴하는 것은 아니다.

은퇴할 타이밍을 잡지 못하고 커리어를 이어가다 몸도 마음도 망가진 선수가 한둘이 아니었다.

나는 그렉이 그렇게 해서 멋진 커리어가 손상되는 것을 지켜보고 싶지는 않았다.

뉴스레터에서 말했듯이, 깐깐한 프로 의식을 가지고 있는 그렉이니만큼 여기서 더 커리어를 이어나가는 것은 모순된 행보였다.

자기 욕심을 부리며 후배들의 앞길을 막는 현실, 그런 상황에서 링 위로 올라가 정의와 성실함에 대해서 말한다면?

‘분명히 역반응만 나오겠지.’

그건 정말 비참한 일이었다.

그러므로 그렉은 이번 레슬 임페리움에서 반드시 은퇴해서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야 했다.

나는 그걸 돕는다.

그것이 바로 위켄드 쇼에서 말했던 프로레슬링의 형재애였다.

그렇게 마음을 정한 나는 가장 먼저 바트 맥센을 찾아갔다.

그는 이 회사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의 최종 결정권을 가지고 있는 유일한 인간이었다.

따라서 그렉의 계약을 멈출 수 있는 건 본인 이외에는 오직 이 양반밖에 없다는 말이었다.

하지만 솔직히 말해, 나는 바트가 자신의 선택을 번복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분명히 지금 이 자리에서 내게 역겨운 말을 쏟아내겠지.

돈으로 사람을 사는 게 얼마나 즐거운가에 대해서 말이다.

늦은 밤.

사무실에 마주 앉은 직후, 바트는 먼저 이야기를 꺼냈다.

“벨트를 잃는 게 불만인가?”

“그건 아닙니다.”

“그렇다면 또 오늘은 무슨 제안을 하려고 내게 찾아온 건가?”

“그렉의 재계약 조건이 궁금해서 그런데. 말해주실 수 있나요?”

“아니.”

바트가 싱긋 웃었다.

한 방 먹였다는 표정이다.

그렉을 핑계로 삼아 내게서 벨트를 빼앗아갈 수 있게 되어서 의기양양한 표정이었다.

바트는 뜻밖에도 나와의 관계를 하나의 ‘대결’이라고 생각하는지 굳이 자기가 가진 모든 파워를 발휘하지는 않았다.

어느 정도는 내게 창작의 자유를 보장해주었고, 그게 나로서는 도움이 되고 있는 셈이었다.

그가 말했다.

“미안하지만 당사자도 아닌 사람에게 그런 사실을 알려줄 수는 없지. 당연한 일 아닌가?”

“그건 그렇죠.”

“벨트를 빼앗겨 기분이 좋지 못한 건 내 이해하네만. 그렉도 재계약을 하게 된 이상 다시 벨트 전선에 넣어야 하지 않겠나.”

“그럴 거였으면 메인 전선에서 싸우는 게 맞지 않나요?”

“글쎄, 활동하다보면 나중에는 그렇게 될 수도 있겠지.”

“글쎄요.”

나는 쓰게 웃었다.

“그렉이 그런 하드한 스케줄을 소화할 수 있을까요?”

챔피언의 스케줄은 일반 선수보다도 훨씬 더 혹독했다.

“그렇겠지. 하고자 하는 마음만 있으면 못하는 법은 없어.”

“진통제와 약물에 빠져 몸이 망가지는 게 훤히 보이네요.”

“그건 그렉이 감수할 문제지.”

“……당신, 정말로 프로레슬링을 사랑하는 것 맞습니까?”

“당연하지. 그러니 그렉을 천만 달러 연봉을 주면서까지 계속 데리고 있는 것 아니겠나?”

“정말로 프로레슬링을 사랑하신다면 이제 슬슬 놔줘야죠.”

이건, 선수를 하나의 부품으로 보기 때문에 발생하는 문제였다.

쇼에 출연해 멋진 스토리를 써나가는 것 자체는 굉장히 좋아하지만, 그게 끝난 이후에는 아무런 관심도 없는 것이었다.

간단히 말해, ‘신’에게는 나름의 관심이 있지만 인간 김준호에게는 관심이 없다는 이야기였다.

망가지면 그냥 버리면 된다고 생각하겠지.

“뭔가 오해를 하고 있군.”

바트가 씨익 웃었다.

“내 하나 묻겠네. 만약 당장 내일 경기에서 목 부상으로 프로레슬러로서 뛸 수 없다는 진단을 받는다면, 은퇴하겠나?”

“…….”

“아니겠지. 네 연인이 울고불고 말려도 자네는 링에 오를 거야. 왜냐면 거기에 중독되어있으니까.”

사람들의 환호.

자신의 행동으로 인해 모두가 미쳐서 날뛰는 상황.

“은퇴한 셀럽이 마약에 손을 대는 경우가 종종 있지. 왜라고 생각하나? 15만 명에게 환호를 받는 건 그것보다 더 짜릿해서야.”

“무척 오랜만에…… 이치에 맞는 말씀을 하시는군요.”

“자네는 그걸 포기하지 못할 거야. 그래서 은퇴하지 못하고 링 위에서 계속 싸우다 죽겠지.”

“그럴지도 모르죠.”

“그런 자네가 그렉에게는 은퇴를 하라고? 그렉도 남자야. 남자는 꿈을 먹고 사는 생물이지.”

꽤나 장황한 연설을 늘어놓는다.

나는 그런 바트의 앞에서 계속해서 입을 다문 채 놔두었다.

어디 한번 떠들어봐라.

“오히려 잔혹한 건 자네야. 난 꿈을 위한 자리를 그렉에게 계속 마련을 해주는 것뿐일세.”

“……분명, 남자가 꿈을 먹고 산다는 건 틀린 말은 아니죠. 저 역시 어린애 같은 꿈이 있고요.”

한 시대의 아이콘.

레슬 임페리움의 메인 이벤터.

WWF 월드 챔피언.

나는 회귀한 뒤로 계속해서 그런 허구의 것을 쫓고 있었다.

하지만 바트가 모르는 사실로 인해, 나는 그 헛소리에 제대로 반박을 해줄 수가 있었다.

“그렇게 꿈을 먹을 때, 어떤 식기를 사용하는지 아십니까?”

“시적인 말을 하는군.”

그건 당신이 먼저 했잖아.

“바로 현실이죠. 현실이라는 포크와 나이프가 없으면 꿈을 먹을 수 없는 거예요.”

“손으로 먹으면?”

“여기가 인도라면 몰라도 미국에서 그런다면 야만인이나 매한가지라는 소리를 듣겠죠.”

그렇게 해서라도 꿈을 좇고 싶어 하는 사람이 분명 있기는 했다.

나 역시도 그런 쪽이고.

하지만 명확히 전제해두자.

이건 내 이야기가 아니다.

그렉의 문제고, 그렇기 때문에 나는 그를 ‘설득’하려는 것이었다.

“정신을 차리고 돌아갈 때입니다. 가족이라던가, 연인에게…….”

“만약 티파니가 은퇴하라고 한다면 자네는 그렇게 하겠나?”

“네?”

“그냥 이건 순수한 호기심이야. 아버지로서 그렇다고 하지.”

“……아버지로서 물어보시는 거지만, 걸맞은 질문은 아니군요.”

티파니에 대해서 모르고 있다.

“그럴 여자가 아닙니다.”

딱 잘라서 대답한 나는 적당히 말을 끊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기분이 역겨워진 나는 곧바로 인사를 마치고 사무실을 나왔다.

끝까지 의기양양했던 바트의 얼굴을 곱씹으며 생각에 잠겼다.

‘그래, 어디 한번 해보자고.’

거리낄 건 없었다.

바트가 버러지 같은 마인드로 그렉을 붙잡았다는 걸 알았다.

그리고 그걸로 날 엿 먹였다고 착각을 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절대 그렇지 않았다.

그렉은 지금 객관적인 시야를 잃고 있는 상태였으나, 그걸 도와줄 사람은 분명히 존재했다.

바로 ‘가족’이다.

경기장을 빠져나온 나는 일단 곧바로 캠핑 버스로 돌아갔다.

그리고 그곳에서 기다리고 있던 그렉의 ‘가족’과 대화를 나눴다.

물론 러셀이었다.

녀석은 날 보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어땠어?”

“좀 싸우고 왔지.”

“……너도 참 대단해.”

“그래?”

“아무리 그래도 바트는 우리 보스잖아. 그런데도 넌 하고 싶은 말은 다 하는 것 같아서.”

“별건 아니야.”

나는 쓰게 웃었다.

바트는 한 기업의 보스로서 권위를 내세우기보다는 매사에 이기고 싶어 하는 마음이 더 컸다.

그렇기에 싸움의 방향을 잘만 유도한다면 문제될 것은 없었다.

동양인으로서 과연 나는 챔피언 자리에 오를 만한 재목인가.

바트는 그게 아니라는 걸 밝혀서 내게 이기고 싶어 했다. 그러므로 해고는 절대 꿈도 못 꾸지.

그랬다간 자기가 지는 거니까.

이번 일도 비슷한 맥락이었다.

어찌 보자면 바트와 나는 그렉의 처우를 두고 맞붙게 되었다.

그리고 나는 이제 슬슬 생각했던 바를 실행할 생각이었다.

“그쪽은 어때?”

“다 이야기해뒀어. 당연히 다들 노발대발하면서 당장 삼촌에게 돌아오라고 난리를 피웠지.”

“그렉은 뭐래?”

“날 노려보면서 ‘넌 날 이해해줄 거라고 생각했다.’라고 하던데.”

“그래?”

“절대 아니지.”

러셀은 눈썹을 찡그렸다.

“삼촌은 이대로 두면 너와 싸우기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불태울 거야. 지금까지 쌓아왔던 것도 모두 다 버릴 각오로. ……그걸 가만히 두고 볼 순 없지.”

러셀도 나와 같은 의견이었다.

“괜찮을 거야. 그렉도 가족들과 이야기를 하다보면 자기가 돌아갈 곳이 있다는 걸 분명 깨닫겠지.”

나 역시도 그랬었다.

전생에 나는, 20여 년의 WWF 커리어를 끝마친 뒤 내가 너무 늦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거의 연락을 드리지 않던 동안 부모님의 병세는 깊어질 대로 깊어져 있었고, 결국 회복되지 못하고 돌아가셨다.

그리고 장례식에서 나는, 내가 돌아갈 곳이 이제는 정말로 사라졌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지금 다시 생각해도 현기증이 날 정도로 최악의 기억이었다.

가족이란 의미는 그만큼 각별했다. 어찌 보자면 꿈을 잡아주는 가장 보편적인 현실인 셈이었다.

거기다 그렉은 아내도 있고 토끼 같은 자식도 둘이나 있다지.

분명히 알아차릴 거다.

* * *

4주차의 버닝콩 촬영 전까지는 돌아와야 했으므로 그렉과 러셀은 곧바로 캐나다로 향했다.

그동안 나는 하트 패밀리에게서 좋은 소식이 돌아오길 기다리며 다른 스케줄을 소화했다.

영화 촬영장.

오늘은 직쏘가 영화상에 등장하는 씬을 촬영할 예정이었다.

제임스 관이 준비해준 대로 분장실에서 옷을 갈아입고 나온 나는 화장대 위에 놓아둔 핸드폰 액정에서 빛이 나는 걸 발견했다.

누군가로부터의 전화.

다가가서 확인하자 뜻밖의 인물이 전화를 걸어온 게 보였다.

‘그렉?’

의아함을 느끼며 전화를 받자 반대편에서 무척 음울한 사내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신이냐.]

“예, 그렉.”

[잠깐 통화할 수 있나?]

나는 시간을 확인했다.

아직 촬영까지는 좀 남았다.

“괜찮을 것 같아요. 무슨 일이죠?”

[일단, 너에게 사과를 먼저 하고 싶군. 내가 정말 미안하다.]

일이 잘 풀린 모양이었다.

미소를 지은 나는 그렉의 자존심도 약간 살려주기로 했다.

“아니에요. 저야말로 너무 심하게 이야기한 것 같아서 죄송했습니다. 서로 이야기해서 잘 풀어나갔어야 하는 문제인데.”

[가족들과 이야기를 해보고 깨달았다. 나는 역시 더 이상 남아있을 수 있는 사람이 아니야.]

“슬픈 일이지만요.”

[그래서 말인데, 혹시 괜찮다면 캐나다로 와줄 수 있겠나?]

“예?”

왜 갑자기 이야기가 그렇게 돼.

[솔직하게 말하지. 최근에 널 보면서 내가 잘 알고 있는 한 선수를 떠올렸어. 내가 좀 이성을 잃었던 것도 바로 그 때문이고.]

“그게 누구죠?”

[내 레슬링 커리어에서 유일하게 후회되는 일을 만든 남자.]

“…….”

누군지 알 것 같았다.

나는 침묵하는 그렉을 앞에 두고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존 마이클스군요.”

[그래, 마이클스. 그 녀석.]

그렉은 푸욱 한숨을 내쉬었다.

두 사람은 분명 커리어 초반에는 절친한 선후배 사이였다.

그렉이 선배로서 갓 입사한 마이클스의 재능을 알아보고 이끌어주며 친해졌다고 들었다.

서로가 그 당시 덩치가 작은 레슬러에 속했기 때문에 그걸 계기로 더 친해졌다고 들었다.

하지만 선수로서 자리를 잡아가며 두 사람은 서서히 반목하게 되었다.

자극적인 것에 중점을 두던 존 마이클스와, 반대로 고전적인 가치를 숭상하던 그렉 하트.

그 결말은 마이클스의 승리로 끝났다. 하지만 그는 시대의 주인공이 되지는 못했다.

선수 커리어에 치명적인 등 부상을 입고, 락콜드에게 잡을 해준 뒤 업계를 쓸쓸히 떠났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자니 그렉이 큰 결심을 마친 듯 말했다.

[그 녀석을 부를까 한다.]

“……캐나다로요?”

[그래, 은퇴하기 전에 마지막으로 만나서 화해를 하고 싶어.]

“과연 와줄까요.”

[그 녀석이라면 분명 와줄 거다. 원래 나이를 먹게 되면 증오란 건 희미해지기 마련이니까.]

그렇게 심한 단어를 붙여야 할 정도로 서로를 싫어했던 걸까.

“알겠습니다. 갈게요.”

[고맙다. 신.]

전화가 뚝 끊어졌다.

나는 한동안 가만히 서서 끊어진 전화기를 내려다보았다.

‘일이 이렇게 되는군.’

전생에 존 마이클스는 그렉 하트가 은퇴한 직후 회사에 복귀해 10여년을 더 활동했었다.

즉, 전생의 두 사람은 아마 평생 화해하지 못했을 것이다.

지금과 같은 그렉의 심경 변화가 없었으니까. 서로가 큰 접점도 갖지 못했고.

‘회사가 힘들던 때, 시대를 지탱하던 두 전설의 화해를 내가 이끌어 내다니.’

그게 무척 기분이 좋았다.

게다가 난 개인적으로 마이클스의 팬이기도 했으니까.

그를 이번 생애에서 만나는 게 무척 기대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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