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1.
좀 긴 이야기를 하자.
존 마이클스.
본명, 마이클 존 리킨보텀.
하트 브레이크 보이.
별명 자체가 ‘메인 이벤터’.
디 베스트 오브 베스트.
디 헤드라이너.
수많은 수식어로 불렸던, 내 개인적인 욕망만으로 따지자면 역대 최고의 선수.
그의 커리어는 다른 일반적인 선수들과는 무척이나 달랐다.
일반적인 선수들은 20대 초중반에 데뷔해 로우 카더 생활을 거치고 괜찮다고 판단되면 푸시를 받아 태그 팀을 거치게 된다.
그리고 태그 팀이 깨진 뒤, 선역이나 악역으로 분리되어 솔로 커리어를 이어나가는 게 보통.
그중 2선 챔피언을 거쳐 메인 챔피언에 이르는 선수는 극소수였다.
그렇게 해서 일반적인 선수가 푸시를 받아 메인 챔피언에 오르는 것이 대략 30세 전후.
그리고 존 마이클스가 첫 월드 챔피언에 오른 것이 1996년.
그의 나이 31세의 일이었다.
레슬 임페리움 12.
당시 챔피언이던 그렉 하트에게 겁 없이 도전한 애송이, 텍사스 출신의 덩치 작은 미소년 꼬마.
그것이 존 마이클스였다.
외부에는 물론 부풀려서 나갔지만, 실제 키가 대강 180cm 정도에 체중은 90kg 정도인 프로레슬러로서는 상당히 왜소한 체격.
사람들은 그에게 안 될 것이라 말했고 단순히 여성들에게 팔아먹기 위한 ‘Boy Toy’로 생각했다.
보이 토이.
직역하면 소년 장난감. 의역하면 ‘미’소년 장난감이라는 뜻이다.
여성 쪽을 이렇게 부를 때는 ‘트로피 와이프’라고들 말하지.
어쨌든, 당시 마이클스는 그런 편견에 굴하지 않고 노력했고 결국 인정을 받게 되었다.
자신과 마찬가지로 왜소한 체격으로 월드 챔피언의 자리에 올랐던 선배, 그렉 하트를 쫓으며.
그런 배경을 바탕으로 성사된 경기. 그렉은 겁 없이 도전하는 꼬마를 무참히 몰아붙였다.
……여기서 잠시 현실의 이야기를 하자면, 그때 그렉은 마이클스를 믿어준 유일한 선배였다고 한다.
어쨌든.
60분간의 아이언맨 매치 끝에 승리를 손에 넣은 텍사스 미소년은 자신의 오랜 꿈을 이루어냈고.
몰락했다.
WWF 메인 챔피언 감이 아니다.
그런 세간의 평가에 부응하기 위해 그는 경기마다 필사적으로 몸을 날려댔으며.
부담감과 고통을 잊기 위해 쓴 진통제와 약물에 중독되어 점점 망가져갔다.
하지만 반응은 점점 떨어졌다.
당시 바트 맥센이 마이클스에게 캡틴 로건과 같은 ‘무적 선역’ 기믹을 주문했기 때문이었다.
섹시 보이 기믹으로 인기를 얻고 있던 마이클스에게는 맞지 않는 옷을 입은 것과도 같았다.
그렇게 월드 챔피언으로서 마이클스는 처절할 정도로 실패했다.
그는 바트 맥센 대신 모든 책임을 뒤집어쓰고 벨트를 뺏겼다.
선역이었던 그가 이카로스처럼 날개를 잃고 추락하던 날.
바트 맥센은 비열한 버전의 다이달로스처럼 모른 척했고.
관객들은 벨트를 다시 빼앗은 그렉을 보고 태양처럼 웃었다.
존 마이클스는 바로 다음 날 이어진 주간 쇼에서 턴 힐을 했다.
그리고는 바트의 손길에 가려 보이지 않았던 자신의 재능을 마음껏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는 당시 로우 카더였던 절친, 트리플H와 함께 ‘Degrade X’라는 스테이블을 만들어 활동했다.
그들은 순식간에 관객들로부터 엄청난 반응을 이끌어냈다.
아직도 기억이 났다.
[D-X! D-X! D-X! D-X! D-X!]
관객들의 엄청난 챈트와 함께 터지는 녹색의 조명과 폭죽.
그들은 쇼 전체를 훔쳤다.
온갖 악동 짓을 통해서 악역임에도 사람들의 사랑을 받았고, 마이클스의 주가도 다시 상승했다.
문제는 거기에서 발생했다.
그렉은 프로레슬링이 가진 전통적 가치를 숭상하는 사람이었다.
그는 언제나 어린 소년들의 모범이 되기 위해 분골쇄신했다.
하지만 반대의 마이클스는 그런 가치를 훼손하는 각본을 짰다.
그렉의 개인사까지 들먹이며 모욕했고 두 사람의 대립은 점점 현실로까지 번져갔다.
그리고 회사에서는 마이클스의 편을 들어주었다.
마이클스의 DX는 EZW와 함께 ‘태도 불량 시대’의 전조였다.
그렇게, 마이클스에게 벨트를 빼앗긴 그렉은 더 이상 회사가 필요로 하는 존재가 아니었다.
마이클스는 다시금 회사의 탑-가이가 되었고 ‘사랑 받는 악역’으로서 활동을 지속했다.
자, 여기에서 다들 아마 의문을 느낄 것이다.
태도 불량 시대의 주인공은 락콜드 스티비 스틴인데 왜 마이클스가 주인공이 되는 거냐고.
이에 대한 답은, 마이클스가 챔피언이 된 이후 당한 치명적인 등 부상으로부터 기인한다.
테이커와의 캐스켓 매치.
상대를 링 옆에 놓인 관에 넣으면 승리하는 경기에서 마이클스는 링 밖으로 던져지며 그대로 관의 모서리에 등을 부딪혔다.
결과는 참혹했다.
그때를 회상하며, 미래의 자서전에서 HBB는 이렇게 이야기했다.
‘불에 달군 칼로 척추를 계속해서 쑤시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나는 전보다 더 약물에 의지했다.’
사실 상, 그때 존 마이클스의 선수로서의 생명은 끝났다고 봐도 과언은 아니었다.
그렇기에 회사에서는 당시 그렉 하트의 잡을 받고 거하게 자라난 락콜드를 밀어주기로 한다.
불행한 마이클스는 그렇게 락콜드에게 시대를 넘기고 은퇴했다.
마지막에는 가장 친한 친구였던 트리플H마저 그에게 등을 돌릴 정도로 망가져 추태를 부렸다지.
……여기까지만이라면 나도 마이클스를 가장 존경하는 선수로 꼽지는 않았을 것이다.
문제는 이후였다.
2005년 레슬 임페리움 이후.
그렉이 은퇴하자 마이클스는 기다렸다는 듯이 선수로 복귀했다.
치명적이었던 등 부상이 완전히 회복되지는 않았음에도 그는 무려 7년을 더 뛰고 전설로 남았다.
인성도 훨씬 나아졌다.
아들이 태어난 것으로 인해 약도 완전히 끊고, 개신교에 귀의한 존은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었다.
그는 후배들에게 귀감이 되었고 관객들에게는 사랑을 받았다.
‘비록 내가 기억하는 선에서 그렉과 화해는 하지 못했지만.’
자신의 은퇴 다음 날 복귀한 그를 보고 그렉이 완전히 마음의 문을 닫아버렸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전생과 달리 이번에는 그렉이 먼저 용기를 냈다.
아주 약간의 변화였지만, 그로써 모든 게 바뀌게 될 것 같았다.
이게 나 때문이라면 정말이지 엄청난 일이 벌어지는 것이었다.
실제로 다들 그런 반응을 보였다.
먼저 티파니.
[……그렉이 존을요?]
“일이 그렇게 되었군.”
[당신…… 지금 대체 무슨 일을 하고 있는 거예요?]
“아니 뭐, 잘 모르겠는데.”
[존 마이클스와 그렉 하트가 화해를 한다고? 둘이 락커룸에서 치고 박고 싸우던 게 아직도 내 뇌리에 생생한데!]
“그렉이 뭔가 은퇴할 때가 되니까 생각이 많이 나나봐.”
[……정말로, 당신은 매번 절 놀라게 하네요.]
“그 정도야?”
[예, 사실 저는 그 두 사람이 사이가 좋았던 시절도 봐와서 계속 안타까웠었거든요. 아마 관계자들은 다들 당신이 그렉에게 무슨 짓을 했나 궁금해할 거예요.]
그 말이 맞았다.
소문이 언제 퍼졌는지 그 시절의 그렉과 마이클스를 기억하는 수많은 이들이 연락을 해왔다.
[고맙네. 자네는 정말이지 엄청난 일을 해낸 것이야.]
닉 플레어.
[그 둘을 화해하게 할 정도면 이라크와 미국의 사이도 네가 중재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시몬스.
[마이클스 그 녀석은 최악이었지만 그렉도 잘한 건 아니지. 네가 정말 고생이 많았다.]
테이커.
말하자면 그렉 하트와 존 마이클스의 화해는 그 시절을 버텨온 모두가 바라던 일이었다.
스테로이드 파동 시절의 WWF는 정말로 힘들었지만, 그렉과 마이클스를 얼굴로 삼아 어떻게든 쇼를 이어가던 시절이니까.
그러므로 그때의 선수들이 두 사람의 마지막에 얼마나 안타까워했을지 대충 상상이 갔다.
나 역시도 그랬다.
말했듯, 그렉과 마이클스는 내가 아는 한도 내에서는 서로 끝까지 화해하지 못했다.
그렇기에 변화한 이번 삶에서 두 사람의 징검다리 역할을 맡아줄 수 있다는 것은 내 개인적으로 무척 영광스러운 일이었다.
말했듯 우리는 가족이며 형제다.
팬들을 즐겁게 만들고 돈을 벌기 위해 다 함께 노력했다.
‘그렉과 마이클스도 그랬겠지.’
때문에 나 역시도 개인적으로 두 사람이 화해를 했으면 했다.
그 시절의 프로레슬링은 모두가 힘든 시기였지만, 그럼에도 분명히 멋졌으니까.
안 좋은 결말을 끌고 가는 것은 여러모로 좋지 못한 일이었다.
* * *
영화 촬영을 마친 뒤, 나는 그대로 텍사스로 이동했다.
감정을 잘 추스르지 못하는 그렉 대신 나와 함께 사랑(?)의 메신저 역할을 맡은 러셀 하트는 전화로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일단 전화는 해뒀고 그쪽에서도 알겠다고 하긴 했는데. 좀 머뭇거리는 눈치더라고.]
“그럴 만도 하지. 원래 어른일수록 화해는 어려운 법이니까.”
[우리는 싸우지 말자.]
“……?”
얘가 왜 이래.
어쨌든 그렇게 되었다.
나는 텍사스에 가서 마찬가지로 좀 감성에 빠져 있을 마이클스를 데리고 캐나다로 갈 예정이었다.
그렇게 한참을 달려갔다.
소떼를 치는 카우보이가 멀리서 캠핑 버스를 바라보고 있었다.
마이클스는 현재 이곳에서 레슬링 도장을 운영하며 가족들과 시간을 보내고 있다고 했다.
‘정겨운 풍경이군.’
스파게티 웨스턴 영화에나 나올 법한 평야를 지난 나는 러셀이 전해준 주소지로 도착했다.
하얗고 널찍한 저택.
주변에 다른 집들은 대부분 멀찍이 떨어져 있다.
미국 시골은 대체로 이런 분위기였다.
넓고, 황량하고, 아무것도 없고.
죽어가는 나무 몇 그루 사이로 멀찍이 회전초가 데굴데굴 굴러가는.
그런 풍경.
버스에서 내린 나는 약간 긴장이 되는 걸 느끼며 집 앞으로 가 천천히 초인종을 눌렀다.
그러자니 들려오는 목소리.
……가 어쩐지 좀 불길했다.
[누구야?!]
망상에 시달리는 노인과도 같은 목소리였다. 나는 최대한 친절한 어투로 나를 소개했다.
“러셀의 소개로 온 신이라고 합니다. 존 마이클스 씨…….”
투콰앙!
폭음이 터졌다.
초인종에 손을 댄 자세 그대로 있던 내 얼굴 옆으로 나무 파편이 거세게 스치고 지나갔다.
버팔로, 카우보이와 함께 텍사스인들의 가장 강력한 무기.
바로 샷건이었다.
[당장 꺼져!!]
이런 미친!
개신교에 귀의했다며?!
나는 당혹스러운 기분을 느끼며 저택으로부터 멀리 빠져나왔다.
그리고 심장이 두근거리는 걸 느끼며 러셀에게 전화를 걸었다.
“야! 이 미친놈아!!”
[왜, 왜 그래?]
“이야기 다 했다며! 지금 나 총 맞을 뻔했다고!!”
[……아니, 전화로는 분명히 알겠다고 했는데.]
“어떻게 하냐고!!”
[기, 기다려봐. 삼촌한테 한번 여쭤볼 테니까. ……삼촌? 삼촌!]
잠시 전화기 너 머에서 소리를 질렀던 러셀이 이내 돌아왔다.
[틀렸어. 너와 전화한 이후로 방 안에 틀어박혀서 나오질 않아.]
“아니 미친, 여드름 난 사춘기 꼬마도 아니고 이게 뭔데!”
[하하, 사춘기 꼬마는 조카한테 하키채를 던지지 않아.]
“…….”
도대체 이 영감들을 어떻게 하면 좋은 것일까.
고민하고 있던 그때였다.
저 멀리, 저택의 문을 열고 한 중년의 여성이 모습을 드러냈다.
의아함을 느끼자니 그녀는 이내 캠핑 버스 쪽으로 다가왔다.
“괘, 괜찮으세요?”
“누구시죠?”
“아, 저는 존의 부인인 레베카 리킨보텀이라고 해요.”
“아, 바, 반갑습니다. 신입니다.”
리킨보텀은 분명히 존 마이클스의 실제 성씨였다.
“죄송해요. 전화를 받더니 남편이 갑자기 신경질적으로 변해서. 뭔가 두려워하는 것처럼…….”
“아니, 나치라도 쳐들어왔냐고.”
황당해 말을 내뱉자니 레베카는 죄책감을 느끼는 얼굴로 손에 들고 있던 프라이팬을 보여주었다.
“일단 기절시키긴 했거든요. 이 틈에 어서 안으로 와주세요.”
“…….”
난 분명히 프라이팬의 모서리가 찌그러져 있는 것을 보았다.
텍사스란 이런 곳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