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프로레슬링의 신-143화 (143/634)

143.

그렉 하트와 존 마이클스는 굉장히 오랫동안 대화를 나눴다.

우리는 그동안 하트 부인을 도와서 저녁 식사를 준비했다.

메이플 시럽에 대한 러셀의 농담을 떠올린 나는 주방에 들어가기 전 잠시 피식거렸으나.

……농담이 아니었다.

“아유, 쉬고 있어도 되는데.”

파이 반죽과 끓이고 있는 수프에 메이플 시럽을 쭈욱 짜내고 있는 하트 부인의 모습이 보였다.

“……?”

“할머니, 너무 메이플 시럽 많이 쓰시면 당뇨 온다니까요.”

“괜찮아. 러셀. 이 할미는 이렇게 먹고도 지금까지 튼튼하거든.”

진화론을 눈앞에서 볼 줄이야.

역시 캐나다 사람들은 메이플 시럽의 당분에는 내성이 생긴 게 틀림없는 것 같군.

세상의 편견이라며 쉬쉬하던 게 진짜여서 당황스러운 기분이다.

아무리 그래도 거의 모든 요리에 메이플 시럽을 넣을 줄이야.

내가 좀 당황해하고 있자니 그런 기색을 알아챈 러셀이 물었다.

“한국에서는 어떤데?”

여기서 확실히 짚고 넘어가자면, 이 녀석은 내 부모님이 한국 출신이란 사실을 알고 있어서 이런 질문이 허용되는 ‘친구’였다.

“왜, 우리도 끼니마다 모든 요리에 김치를 넣는 것 같아?”

“물론, 그건 아니겠지. 저번에 김치를 먹어본 적이 있는데…….”

순간 안색이 어두워지는 러셀.

아니, 메이플 시럽 먹는 메이플 맨들이 더 이상한데. 제기랄.

“일상적으로 먹는 건 기껏해야 김치찌개 정도가 아닐까?”

“김치를 수프에?!”

“메이플도 만만찮거든.”

우리는 서로의 식습관을 잠시 혐오하는 시간을 가졌다.

그렇게, 하트 부인의 당뇨병 제조 식단이 무르익어가던 도중.

나는 슬쩍 바깥을 확인했다.

응접실 소파에 앉아 있는 그렉과 마이클스의 모습이 보였다.

두 사람은 아직 서먹서먹한 건지 대화를 계속 이어나가진 못했다.

침묵이 줄곧 이어지는 두 사람의 어색한 분위기를 확인한 것은 나뿐만이 아니었다.

내 밑으로 슬쩍 고개를 내민 하트 부인 역시 잠시 고민을 하듯 턱을 매만지더니, 이내 부엌 찬장에서 뭔가를 꺼내들었다.

……브랜디다.

나는 병 안에 반쯤 남은 황동색의 액체를 불길한 표정으로 바라보다, 참지 못하고 물었다.

“저, 부인?”

“응? 왜 그래요?”

“브랜디는 왜…….”

내 말에 한 차례 호홋, 하고 웃은 부인이 찻잔을 두 개 꺼내선 브랜디를 콸콸 쏟아 부었다.

거의 찻잔의 목까지.

“……”

“술을 한 방울 정도 넣는 밀크티는 대화에 도움을 주니까요.”

삼만 방울쯤 되어 보이는데.

당황한 나를 앞에 두고 호홋! 하고 웃은 부인이 홍차 티백을 넣고 그 위에 우유를 살짝 탔다.

이게 왜 밀크티인 걸까.

“……차라리 분무기에 우유를 넣고 뿌리는 게 어떨까요.”

“호홋! 부탁 좀 할게요.”

부인은 나에게 브랜디(밀크티향 첨가)를 두 잔 내밀었다.

역시 하트 패밀리의 대모다운 호쾌한 해결 방법이었다.

그렇게 두 잔의 차를 내어가자 그렉과 마이클스는 여전히 어색한 분위기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렉은 의욕이 앞섰고 마이클스는 못 따라갔다.

“링에 오를 수 있겠나?”

“그, 그게.”

“우리가 서로에게 가졌던 오해는 링에서 푸는 게 맞지 않나 싶어서.”

“으음…….”

“몸은 많이 나아진 것 같군.”

그렇게 말한 그렉은 차를 한 모금 마시고는 이렇게 말했다.

“섹시 보이가 돌아왔어.”

……엄청난 위력이다.

안에 뭐 코카인 탄 건 아니지?

“선배님처럼 꾸준한 분에 비하면 전 아무것도 아닙니다.”

“어쩔 수 없었지. 불운한 사고였고, 테이커에게나 자네에게나 둘 다 큰 상처를 남긴 일이었어.”

두 사람은 밀크티를 마시며 조금씩 진심을 말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말했듯이, 난 이런 이야기를 링 위에서 하고 싶었네.”

“왜, 죠?”

“우리의 문제는 링 위에서 발생했으니까. 그 해결 역시 링 위에서 하는 게 옳다고 느끼는 거지.”

“…….”

“나는 사람들이 그렇게 기억했으면 해. 너와 나의 시대가 아직 최악으로 끝나지는 않았더라고.”

바로 그때였다.

그 말을 들은 마이클스의 눈에서 뚝뚝, 눈물이 떨어져 내렸다.

“저도, 선배님과 제 시대를 최악으로 끝내고 싶지는 않습니다…….”

“나 역시 마찬가지라네.”

그렉 역시 눈시울이 붉어졌다.

나는 입을 다문 채 생각했다.

어찌 보자면.

참으로 관념적인 이야기다.

가짜로 만들어진 드라마에 시대니 뭐니. 거기에 과도할 정도로 몰입하는 두 사람도 이상했다.

하지만 그 두 사람의 이야기가 아직 끝난 게 아니기에, 이것은 하나의 상품이자 역사로서 성립하는 것이었다.

나와 러셀.

하트 패밀리의 사람들.

캐나다, 미국, 나아가 대륙, 이어서 전 세계의 프로레슬링 팬들.

10년이 넘게 이어진 WWF의 생방송 드라마를 봐온 시청자들.

그들 모두가 이 이야기를 듣는다면 절대 웃으며 넘기진 못할 터였다.

그렉과 존의 시대는 확실히 그것만으로도 가치가 있었다.

하지만 전생에서 그 끝은 정말 최악이었다.

벌어진 관계.

신념의 대립.

존 마이클스의 부상.

그렉 하트의 외면.

은퇴.

그리고 시간.

상처.

나는 지금부터 그것을 천천히 봉합해나갈 생각이었다.

그리고 보여주려고 한다.

처형의 달인, 그렉 하트의 이야기는 여기에서 끝난다고.

그 누구보다 멋지게.

그리고 아마.

이걸 본 바트 맥센은 지금까지 중에 가장 길길이 뛸 것이다.

“후우.”

길게 숨을 내뱉어 두 사람을 집중시킨 나는 이야기를 꺼냈다.

“WWF로 돌아가죠.”

“뭐? 무슨…….”

“또 어떤 멋진 생각을 보여줄 생각이지? 카우보이.”

“뭐, 별건 아니고.”

나는 두 영감이 모를 이야기를 곧바로 입에 담았다.

“인터넷을 활용해보죠.”

나에 대해서 모르는 마이클스는 고개를 갸웃거렸으나.

“좋아, 믿고 맡기지.”

그렉은 시원한 미소를 지었다.

* * *

2005년의 미국은 그렇게까지 인터넷이 발달하지 않은 상태였다.

물론 직장 같은 곳에서는 잘 썼고 흥미가 있는 사람들은 월드 와이드 웹에 푹 빠져들었지만.

생활 깊숙이 들어온 2010년대에 비하자면 미미한 수준이었다.

‘사람이란 게 의외로 먹던 것만 잘 먹는 성향이 강하거든.’

그렇기에 인터넷이라는 마약 같은 물건이 있어도 다들 딱히 거기에 얽매여 살아가지는 않았다.

애초에 인터넷을 하는 사람들은 너드라면서 은근히 폄하하던 게 이 시절의 분위기였으니 말이다.

하지만 분명히 그곳에는 대중들이 모르는 세계가 존재했다.

그리고 그건, 생각보다 훨씬 더 큰 파급력을 지니고 있었다.

우리는 그런 인터넷을 이용해 존 마이클스의 복귀 및 그렉 하트와의 화해를 보여주고자 했다.

스턴포드 레슬링은 TV 방송으로 나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관계자들을 앞에 모아둔 나는 계획에 대해 소상히 설명했다.

“일단, 촬영을 끝마친 뒤 존과 그렉의 경기 영상을 각종 동영상 사이트에 올리도록 하죠.”

“……공짜로?”

“홍보에 의미가 있는 거죠.”

“몇 명쯤 보나?”

“글쎄요. 평균 조회 수는 대략 1만 정도 나오는 것 같은데.”

“1만?!”

“……그다지 신뢰할 수 있는 집계는 아니에요. 한 영상을 여러 번 보는 사람도 존재하니까.”

나는 씁쓸하게 웃었다.

“중요한 건 그게 아니라 기자들이 우리 영상을 보는 거죠.”

분명히 그들은 흥미를 갖고 우리에게 접근해올 게 분명했다.

기사로 바로 쓸지도 모르지.

“여기서 중요한 점은, 매체 쪽에서 연락이 와도 저희는 전혀 응답을 하지 않는 거예요.”

“왜지?”

“그렇게 해야 바트에게 정보가 더 빠르게 전달될 테니까요.”

스턴포드 쪽에서 입장을 밝히지 않는다면 분명히 기자들은 WWF로 몰려갈 테니 말이다.

그러면 바트는 열이 잔뜩 받아서 우리에게 연락을 할 테고.

“그러면 남은 건 좋은 거래를 성사시키는 것뿐이죠. 그쪽은 두 선배님들께 맡겨두겠습니다.”

일은 그렇게 성사되었다.

촬영용 장비는 스턴포드 레슬링에서 쓰던 것을 활용하기로 했다.

TV 방송에는 나가지 않았으나 이들은 쇼를 비디오로 제작해 판매하는 수익 구조를 사용했다.

그렇게, 바로 다음 날 저녁.

스턴포드 레슬링은 다운타운의 한 소극장을 빌려서 진행되었다.

수용할 수 있는 총원이 500명 정도 되는 장소에 대략 380여 명의 관객들이 입장했다.

하지만 그들이 보내는 환호성은 절대, 2만 명 이상이 몰리는 버닝콩에 뒤지지 않을 정도였다.

[키-이이이이이이이잉-!!]

기어를 단숨에 풀 스로틀로 올리는 듯한 기타 리프의 사운드.

두둥두두둥, 두둥두두둥.

드럼이 박자를 타고.

[Yeeeeeeeeaaaaaaaahhhh!!]

관객들이 갑작스러운 사태를 이해하고는 미쳐 날뛰기 시작했다.

오늘 온 관객들은 완전히 로또에 당첨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단지 20달러 정도인 티켓.

경기도, 시설도, 쇼도 WWF 메인에 비하면 모자람이 많은 쇼.

하지만 그곳에 캐나다의 아들이 돌아오자 상황이 뒤바뀌었다.

이 쇼는 세상에서 가장 멋진 쇼로 탈바꿈했다.

기타와 드럼이 정신없이 연주를 이어가는 가운데, 선글라스를 쓴 그렉이 경기장으로 입장했다.

어린아이가 울음을 터뜨렸다.

그렉 하트를 직접 보고 싶지만, 그럴 돈이 안 되서 이곳에서 대리 만족을 느끼고 있는 작은 소년.

그에게 다가간 그렉은 가볍게 한 팔로 안아주고는 관객들과 함께 환호를 받도록 해주었다.

[Yeeeeeaaaaaahhhhh!!]

거대한 환호.

거대한 음악.

거대한 선수.

지금 이 순간, 소년의 꿈은 프로레슬러가 되었을 것이다.

경기복 위에 가죽 재킷을 멋들어지게 차려입은 그렉은 소년을 다시 내려놓고, 자신의 선글라스를 건네준 뒤 곧바로 링 위로 올라가 힘차게 팔을 펼쳤다.

“이것밖에 안 돼?! 캘거리!!”

사람들의 환호성이 창문을 뒤흔들 정도로 엄청나게 커졌다.

나와 러셀은, 비디오 촬영을 위해 2층에 있는 촬영실에서 링의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러셀은 상기된 얼굴로 삼촌의 존재감에 반응을 보였다.

“저게 전설이지.”

“그래…….”

그렉 하트는 이 업계를 넘어서 캐나다의 국민 영웅이었다.

캘거리의 아이스하키 팀에서 그의 별명인 킬러를 활용해 ‘캘거리 킬러비즈’라는 이름을 쓰는 것은 무척 유명한 이야기였다.

캐나다에서 그렉 하트는 그 정도 존재감을 지닌 사나이였다.

뿐만이 아니었다.

80-90년대만 해도 ‘미국’ vs ‘세계’ 같은 스토리를 자주 짜왔던 것이 바로 WWF였다.

거기에서 캐나다인으로서 선역이자 탑에 오른 그렉은 전 세계인의 사랑을 받는 레슬러였다.

‘미치고 팔짝 뛰겠군.’

나는 심장이 쿵쿵 뛰는 것을 느끼면서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내가 커리어가 끝났을 때, 조지아나 LA…… 아니, 미국 전역에서 저런 반응을 얻을 수 있을까?

반드시 그렇게 해보일 것이다.

그런 의지가 타올랐다.

그렉은 그야말로 ‘쩔어’줬다.

이런 아이디어를 제시한 것도 어찌 보면 굉장한 행동이었다.

바트를 자극하기 위한 목적이 있지만, 수단 자체는 시대를 앞서간 것이 아닌가.

나는 심장이 더 세차게 뛰는 것을 느끼며 그렉이 마이크를 쥐는 것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내가 왜 여기에 있는지 궁금하겠지. 캘거리. 그럴 거야. 난 분명히 재계약을 한다고 했으니까.]

[Booooooooo……!]

갑자기 터진 야유.

하지만 그렉은 사람들이 왜 야유를 보내는지를 캐치해냈다.

[다들 그렇게 생각하겠지. 내가 욕심을 부려서 후배 앞길 막고 타이틀 먹는 게 아니냐고 말이야.]

[Grek Hart! Grek Hart! Grek Hart! Grek Hart! Grek Hart!]

[그래 맞아! 나는 신, 그 개 같은 애송이 자식을 개박살 낸 다음에 인터컨티넨탈 타이틀을 들고 반드시 여기 돌아올 거야!!]

[Yeeeeeeeeeaaaaahhhhhh!]

그리고 환호가 바뀌었다.

‘이렇게 간다고?’

나는 어이가 없어 웃었다.

여기에서 그렉은 자신이 야유를 받게 하는 주범이었던 욕망을 오히려 무기로 들고 활용했다.

[F-ck you SIN! F-ck you SIN! F-ck you SIN! F-ck you SIN! F-ck you SIN! F-ck you SIN!]

그만해, 얘들아.

나 듣고 있어.

“풉, 크큭…….”

“……코에 메이플 시럽 부어버리는 수가 있어.”

나는 웃음을 애써 참고 있는 러셀에게 나쁜 말을 했다.

“아니, 진짜. 이걸로 삼촌이 널 정말 대단한 놈으로 만들었는데?”

“그건 아는데 F-ck you SIN이 뭐냐고. 나쁜 자식들.”

[하지만 그전에! 그 무적의 신인을 상대하기 전에! 나는 한 남자와의 일을 끝내야만 한다!]

그렉은 눈에 핏발이 서서는 그대로 입장로를 돌아보았다.

지금까지도 정말 빌어먹게도 멋졌지만. 가장 흥분되는 순간은 바로 이제부터였다.

[나와! 존 마이클스!!]

입장로를 돌아보는 그렉.

분명 거기에서 관객들은 바지에 오줌이나 똥을 지렸을 것이다.

둘 다 지렸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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