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8.
20만 명 규모를 수용할 수 있는 초대형 경기장은 미국 전역을 다 더해 봐도 10개밖에 없었다.
거기에 전 세계에서 따져 봐도 그 숫자가 20을 넘지 않았다.
그야말로 미국과 WWF이기 때문에 할 수 있는 돈지랄이었다.
4층까지 지어져 있는 경기장의 꼭대기에서 범프 링을 내려다보고 있자니 코딱지만 하게 보였다.
하지만 링으로부터 바로 위쪽의 허공에 설치되어있는 초대형 스크린이 관람을 도울 예정이었다.
입장로는 이번 레슬 임페리움의 컨셉인 ‘카지노’에 맞춰 온갖 화려한 구조물로 꾸며진 상태였다.
거대한 칩과 룰렛, 슬롯머신, 레슬 임페리움과 WWF의 로고가 들어간 간판은 정말로 멋졌다.
바로 내일.
이곳에서 세계 최대의 프로레슬링 이벤트인 ‘레슬 임페리움’이 개최될 예정이었다.
나는 그렉 하트와 마지막으로 경기장의 모습을 보고 있었다.
그가 말했다.
“사실, 락콜드가 은퇴한 뒤 몇 년 동안은 이런 규모의 경기장은 빌릴 엄두도 내지 못했었지.”
“그렇다고 들었습니다.”
프로레슬링은 스타 파워에 크게 의존해야하는 산업이었다.
그렇기에 락콜드가 은퇴하고, 더 팍이 떠나간 이후로는 매출 자체가 꽤나 줄었다고 들었다.
그렇기에 WWF에서는 각 이벤트를 개최할 때 이전보다 한 단계 낮은 등급의 경기장을 빌렸다고 했지.
“하지만 내 마지막을 이곳에서 할 수 있어서 영광이다.”
20만 규모의 경기장.
이곳에서 경기를 뛸 수 있다는 건 프로레슬러에게 있어서 엄청난 영광이었다.
“그 모든 게 다시금 이 산업을 핫한 궤도로 만들어둔 너와 네 동료들 때문이겠지.”
그가 내 어깨에 손을 올렸다.
“처음 만났을 때 말했지. 너와 링에서 붙는 날이 기대된다고.”
“그러셨던가요?”
“분명 그랬어. 그게 나의 은퇴 경기일 줄은 몰랐지만 말이야.”
“저도 선배의 유지를 이어받을 거라고는 생각 못했습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우리 시대지. 너는 우리를 물리치고 새 시대가 왔음을 선포하게 될 거야.”
“그건 시나의 역할인 게…….”
“아니, 너다.”
그렉이 단호하게 말했다.
“넌 내일 벨트뿐만이 아니라 이 그렉 하트의 커리어와 우리 시대 전체를 가져가는 것이니까.”
그렇게 되겠지.
나는 앞으로 수많은 선수와 대립하며 수없이 말하게 될 거다.
내가 바로 전설이었던 그렉 하트를 은퇴시킨 남자라고 말이다.
벨트와 달리 앞으로 그 어떤 선수도 달성할 수 없는 위업.
나는 그걸 목전에 두었다.
바로 그때, 자리에서 일어선 그렉이 경기장을 내려다보았다.
“이 자리가 50달러였지?”
“예, 경기는 제대로 안 보이고 분위기나 즐길 수 있는 자리죠.”
그리고 경기를 얼마나 잘 볼 수 있느냐에 따라 값이 비싸져, 바리게이트 바로 앞의 자리는 500달러 이상의 값을 치러야만 했다.
“저도 옛날에 이런 자리에서 본 적이 있었는데, 선수들이 뭘 하는지 전혀 안 보이더군요.”
그래서 초대형 스크린에만 집중하는 식으로 경기를 봤었다.
그렉이 피식 웃었다.
“하지만 내일, 적어도 한 부분에 있어서만큼은 아니겠지.”
“…….”
“적어도 네가 입장할 때만큼은 이 자리가 특등석일 거다.”
“살짝 떨리네요.”
“그래도 멋진 아이디어야. 네가 우리 시대를 기억해준다는 멋진 증거가 되겠지.”
그렉은 반짝거리는 눈으로 경기장을 내려다보았다.
* * *
2005년 4월 3일, 일요일.
20만의 관객들이 운집한 가운데, 레슬 임페리움이 개최되었다.
적어도 이날만큼은 WWF에서도 비용 절감 없이 대부분의 연출을 허락해주었다.
레슬 임페리움은 프로레슬링이 이만큼 쩌는 문화라는 것을 보여주는 일종의 프로파간다적인 역할도 수행했기 때문이었다.
앞으로 1년 간, 이 레슬 임페리움 21은 수많은 매체에서 회자되며 관객들을 끌어들일 터였다.
분위기를 띄우기 위한 첫 경기는 레이 미스테리우스와 차보 비테레로의 싱글 매치였다.
[Booyaka-! Booyaka-!]
레이 미스테리우스는 멕시코 출신의 루챠도르로, 가면을 쓴 개성과 실력으로 랙다운 쪽에서 엄청난 인기를 자랑했다.
그 상대인 차보도 에디 비테레로의 조카이자 멕시코 출신의 엄연한 실력자라 두 사람의 경기는 분위기를 띄우는 데 제격이었다.
자신이 사는 지역명에서 이름을 따온 화려한 기술이 작렬해 경기는 무난하게 레이의 승리로 끝났고, 그 후로 버닝콩과 랙다운의 경기가 번갈아 이어졌다.
20만 관객들이 보내는 반응은 순간마다 귀가 먹먹할 정도였다.
주간 쇼의 2만.
일반 페이퍼뷰의 5만.
4대 페이퍼뷰의 10에서 15만.
그리고 지금, 20만.
나는 그 광경을 경기장 4층에 있는 통제실에서 보고 있었다.
보통 때의 통제는 고릴라 포지션에서 완전히 전담하지만 레슬 임페리움은 조금 달랐다.
거대한 경기장 전체의 상황을 조감하기 위해 따로 팀이 구성되어 고릴라 포지션과 유기적으로 소통하며 이벤트를 진행했다.
그리고 나는 조금 특별한 입장을 연출하기 위해 이벤트 시작부터 여기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오히려 경기보다 이게 더 긴장이 되는 것 같은데.’
회사에서 전문가들을 불러 집 라인을 설치한 뒤, 훈련도 받았고 리허설까지도 해봤지만.
막상 20만 관객의 앞에서 집 라인을 타고 내려갈 수 있을까, 만에 하나 사고가 나는 건 아닐까…….
아주 약간은 그런 기분도 없잖아 있기 때문이었다.
나는 그런 긴장감을 집중으로 바꾸기 위해 노력하며 내 차례가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쇼의 후반부.
남은 경기는 세 개.
실버백과 크리스 젠코의 WWF 월드 챔피언십 매치.
세미 메인인 그렉 하트와 신의 인터컨티넨탈 챔피언십 매치.
메인이벤트인 JBL과 숀 시나의 WWF 유니버스 챔피언십 매치.
원래대로라면 세미 메인을 우리가 아니라 월드 챔피언 매치가 맡는 게 정석적이었지만.
그렉 하트의 마지막 경기였기에 세미 메인으로 배정이 되었다.
그리고 실버백과 젠코의 경기가 중간쯤에 이르렀을 무렵, 직원 하나가 나에게 다가왔다.
“슬슬 올라가죠.”
“……그럽시다.”
몸은 충분히 풀어두었다.
고개를 끄덕인 나는 입안이 바싹 마르는 걸 느끼며 통제실 바깥으로 나가 위층으로 올라갔다.
철골 구조물 위.
여기서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면 바로 천장 위로 이어졌다.
나는 집라인 코칭을 해준 선생의 앞으로 다가가 인사했다.
“잘 부탁드립니다.”
“풍속도 괜찮고 집라인도 단단히 설치를 해뒀으니 괜찮을 겁니다. ……그보다, 누가 왔던데요.”
“예?”
의아해 뒤를 돌아보자니 어둠 속에서 누군가 모습을 드러냈다.
티파니 맥센이었다.
……올 거라고는 못 들었는데.
“좀 긴장했어요?”
“아, 조금.”
하지만 이제 좀 풀렸다.
금발을 하나로 묶은 그녀가 구조물 위를 건너 내게 다가왔다.
슬쩍 그녀를 안으며 따뜻한 체온을 느낀 나는 이어 어색하게 웃으며 말을 건넸다.
“여긴 어쩐 일이야?”
“특등석에서 보고 싶어서 왔죠. 어때요. 쇼를 훔치고 사람들을 미치게 만들 준비는 됐어요?”
“그걸 팔아서 생긴 돈으로 같이 호수라도 놀러가자고.”
“좋아요. 재미있겠는데.”
쇼를 훔친다니.
멋진 말이었다.
티파니와 가볍게 입을 맞춘 나는 완전히 긴장이 가시는 걸 느끼며 뒤로 돌아섰다.
허리와 양쪽 허벅지에 장비를 차고 나자 젠코와 실버백의 지루한 경기가 끝을 맺었다.
진부한 구성의 경기를 본 사람들은 약간 지친 상태였다.
하지만 뒤를 이은 경기의 예고를 듣자 다시금 집중을 했다.
[다음 경기는 세미 메인이벤트로, 그렉 하트와 신의 인터컨티넨탈 챔피언십 매치입니다!]
[Waaaaaaaaaaaaghhhhh!!]
이십만의 환호가 경기장을 가득 채웠다. 나는 곧바로 전문가를 따라 경기장 천장으로 올라갔다.
차가운 바람이 뺨을 감쌌다.
그리고 나는 그렉 하트가 먼저 경기장으로 입장하는 걸 보았다.
그는 일부러 나를 띄워주기 위해서 자신이 먼저 나오기로 했고, 별다른 주문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건 틀린 생각이었다.
[Yeeeeeeeeeaaaaaahhhhh!!]
그렉 하트는 그렉 하트인 것만으로도 사람들의 엄청난 환호 속에서 경기장으로 입장했다.
선글라스를 아이에게 건네주고, 벨트를 들어 올리며 포효했다.
승리를 다짐하는 사인.
뒤를 이어 내 음악이 경기장 안에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Yeeeeeaaaaahhhhh!!]
환호를 보내는 관객들.
하지만 링 위로 나온 것은 내가 아니라 스테이시 치글러였다.
순간적으로 의아한 광경에 환호가 살짝 멎었으나 거기에서 스테이시의 기지가 빛났다.
그녀는 사람들을 향해 당연하다는 듯 손을 흔들며 자신을 향해 환호를 보낼 것을 주문했다.
사람들이 다시금 그녀를 향해 환호를 보내기 시작했다.
레슬 임페리움 12에서 존 마이클스의 입장 씬도 그랬었다.
그때는 누군지 모를 노인이 나와서 사람들을 의아하게 했지만.
나는 내 캐릭터에 맞춰 스테이시의 도움을 받는 걸로 전개했다.
그렇게 링 위에 스테이시가 오르자 내 음악이 순간 멈췄다.
사람들이 웅성거리며 순간 환호가 크게 흩어지는가 싶었다.
“시작합니다. 신.”
그 상태에서 스테이시가 척, 하고 손가락을 하늘로 들었다.
이십만 관객의 시선이 집중되었고, 손가락을 휘두르던 그녀가 이어 내가 서있는 위치를 가리켰다.
다시금 음악이 시작되었다.
* * *
쿵쿠쿵-쿠쿵!
아아-아아아아-아아아!
그 음악의 전조는 마치 터미네이터의 음악 같았다.
듣는 모든 이의 뇌리에 깊숙이 박히는 전조와 함께 해설자들은 흥분해 말을 쏟아냈다.
“저는 지금 데자-뷔를 느끼고 있습니다! 이건 분명히……!”
“레슬 임페리움 12! 그때의 재현이군요! 존 마이클스와 그렉 하트의 시대를 불러옵니다!”
“하지만 모든 게 다릅니다! 저기 저곳을 보십시오!”
좌우에서 움직인 헤드라이트가 천장에 서있는 남자를 비췄다.
존 마이클스와는 달랐다.
음악에 맞춰 춤을 추던 마이클스와 달리 사내는 그저 꼿꼿이 서서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십만 관객들은 그가 만들어내고 있는 역사의 산증인이었다.
“이건 완전히 그가 만들어낸 종교와도 다름없습니다! 저 남자는 새로운 시대를 만들어냅니다!”
“황제를 끌어내릴 선지자가 나타났습니다!! 그가 누구라고 생각합니까! 그는 바로 신입니다!!”
투콰앙-!!
신의 바로 옆에서 터진 폭죽이 꼬리를 물고 하늘로 올라갔다.
음악이 전환되었다.
성가를 짜릿하게 불태우며 일렉트릭 사운드가 경기장을 채웠다.
그리고 이어진 해설자의 마지막 말은 신의 커리어 전체를 관통하는 한마디와도 같았다.
“그가 시대를 박살내기 위해 이곳에 왔습니다! 바로 신입니다!!”
20만의 관객이 미쳐 날뛰는 가운데, 집 라인에 몸을 맡긴 신은 힘차게 지붕 아래로 뛰어내렸다.
시대는 그때보다 진화했다.
작은 서커스장에서 레슬링을 했던 이들이 모이고, 그 역사가 쌓이고 쌓여 연간 수천억 달러를 벌어들이는 공룡 기업을 만들어냈다.
집 라인을 타고 내려오는 신은 마치 그렇게 이어진 시대의 봉화를 이어받은 선수처럼 느껴졌다.
플래시 세례가 터졌다.
수십 미터 공중에서 경기장을 향해 낙하하고 있는 신. 그 모습을 카메라가 완벽하게 담아냈다.
마이클스 때는 집 라인의 착지 지점이 달라지는 약간의 실수가 있었지만, 지금은 완전히 달랐다.
시대가 변화하며 기술의 발전으로 신은 완벽하게 예정되었던 위치까지 미끄러져 내려갔다.
입장로 바로 위.
그곳에 기다리고 있던 직원들의 도움을 받아 멈춰선 신이 장비를 풀고 아래로 내려왔다.
그러자 챈트가 쏟아졌다.
[SIN! SIN! SIN! SIN! SIN! SIN! SIN! SIN! SIN! SIN! SIN! SIN!]
입장로 위에 서있는 신에게 다가간 스테이시가 그 뒤에 섰다.
신이 번쩍 손을 들어 올림과 동시에 그 등 뒤로 힘차게 폭죽이 터져 올랐다.
쿠콰콰콰콰콰콰콰-쾅!
모든 남자들의 로망이자 여자들의 선망과도 같은 그 모습.
바로 이 순간, 신은 이 레슬 임페리움을 완전히 훔치고 말았다.
그야말로, 레슬 임페리움을 지켜보고 있는 모든 이가 기억하게 될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