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0.
드디어 결착이 났다.
쓰리 카운트의 직후.
[Eyeeeeeeeeeeeeahhhhh!!]
링 벨이 울림과 동시에 관객들이 자리에서 일어나 날뛰었다.
챔피언이 다시 바뀌었고, 시대는 이어졌다. 멋진 경기의 결과를 본 모두가 전율을 느꼈다.
하지만 나는 링 위에 쓰러져 전혀 움직이지 못하고 있었다.
온몸이 땀으로 범벅이었고, 호흡은 한계치를 진작 넘어섰다.
게다가, 내가 몸으로 가리고 있는 그렉이 눈물을 흘려서 말이다.
그의 이미지를 생각해 잠깐 지쳐 쓰러진 척 가려주기로 했다.
“으윽…….”
“그렉, 적어도 백스테이지로 돌아가서 우는 게 어떨까요.”
“고맙다, 정말 고맙다…….”
관객들의 열광적인 반응은 철인 같던 사나이조차 울리고 말았다.
이해는 한다.
현역으로서 자신의 마지막 경기가 이처럼 멋진 과정을 통해 감동적인 결과를 맞이했으니까.
그야말로 프로레슬링 선수로 느낄 수 있는 최대의 영광이겠지.
그렇게 그렉이 좀 진정한 뒤, 우리는 함께 자리에서 일어났다.
승자인 내 음악이 울려 퍼지는 가운데, 심판이 인터컨티넨탈 벨트를 가져와 내게 넘겨주었다.
그렉이 내 손을 번쩍 들어 올리며 나를 승자로 인정해주었다.
[SIN! SIN! SIN! SIN! SIN! SIN! SIN! SIN! SIN! SIN! SIN! SIN!]
관객들의 열화와 같은 챈트 속에 나는 되찾은 인터컨티넨탈 챔피언 벨트를 번쩍 들어 올렸다.
그리고 뒤이어 먼저 퇴장하려던 그렉의 팔을 붙잡았다.
“왜 먼저 가려고 해요?”
“신…….”
관객들은 최선을 다해 싸운 그렉에게도 크게 박수를 쳐주었다.
그렉은 다시 한 번 감격에 겨워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그런 모습을 본 사람들 역시도 깨달은 것 같았다.
이것이 그렉 하트의 현역 마지막 경기였다는 사실을 말이다.
나는 그렇기에 그렉에게 세리모니를 양보하고 먼저 퇴장했다.
벨트를 어깨에 걸치고 고릴라 포지션으로 돌아가던 중, 그렉 하트의 음악이 시작되었다.
키이이이이이이잉-!
날카로운 기타 리프를 들으며 뒤를 돌아본 나는 싱긋 웃었다.
링 위에서 팬들에게 감사를 표하고 있는 그렉은 정말 모든 걸 쏟아냈다는 얼굴이었다.
[Thank you! Grek! Thank you! Grek! Thank you! Grek! Thank you! Grek! Thank you! Grek!]
팬들 역시도 그에게 감사의 마음을 표현했다. 나는 마지막으로 그 시선을 잠시 눈에 담았다.
그러자니 누군가 날 스쳐지나가 링을 향해서 달려 올라갔다.
바로 존 마이클스였다.
그가 링 위로 올라가자 관객들의 박수 소리가 한층 더 커졌다.
두 사람이 감격해 서로를 끌어안는 장면까지 지켜본 나는 이내 고릴라 포지션으로 돌아왔다.
만족감에 전율을 느끼고 있자니, 뒤이어 박수갈채가 쏟아졌다.
안은 무척이나 복잡했다.
“신 선수! 고생 많으셨습니다!”
“멋졌어요!”
“환상적이었습니다!”
직원들은 직원들대로.
“……고맙다. 꼬마.”
“정말 큰일을 해줬어.”
“내가 은퇴할 때도 부탁한다.”
선수들은 선수들대로.
모든 관계자들이 이 경기를 보고 크게 감명을 느낀 것 같았다.
‘좀 좁은데.’
그렇게 생각하며 미소를 지은 나는 그들 사이를 비집고 빠져나가 한 남자에게로 향했다.
자신의 모니터로 링 위를 계속해서 바라보고 있던 남자.
바트 맥센이었다.
“보스.”
“……뭐냐, 신.”
“감사합니다.”
나는 진심을 담아 이야기했다.
어쨌든 이 경기를 가질 수 있도록 최종 승인을 해준 건 그였다.
이것은 내가 나름대로 건네는 화해의 시그널인 셈이었다.
바트가 좀 많이 정신 나간 노인네일지언정 이 업계에서는 나름대로 잔뼈가 굵은 인간이니까.
잠시 침묵하던 그가 내 얼굴을 무표정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끝나고 좀 남게.”
“그렇게 하죠.”
나는 싱긋 웃어 보였다.
* * *
그리고 우리의 뒤를 이어.
메인이벤트로 숀 시나와 JBL의 월드 챔피언 매치가 진행되었다.
경기는 그럭저럭 괜찮았고, 계획대로 시나가 월드 챔피언 타이틀을 획득하는 걸로 마무리됐다.
JBL이 워낙 장기 집권을 한 탓에 사람들은 시나에게 그야말로 어마어마한 환호를 보내주었다.
그렇게 세계 최대의 레슬링 쇼인 레슬 임페리움이 끝났다.
뒤풀이를 하자는 시나와 일행을 먼저 보낸 나는 그대로 계단을 올라가 다시 4층으로 향했다.
시설팀이 경기장을 정리하는 가운데, 바트 맥센이 서있었다.
그가 어둠 속에서 물었다.
“메인이벤트는 어땠나?”
“그럭저럭 괜찮았습니다.”
“그럭저럭? 나는 오늘 있었던 경기 중에 가장 좋은 반응이 나왔다고 생각하는데.”
“회장님께서 그렇게 생각하신다면 그런 거겠죠.”
“……자네가 링에 마지막까지 남아서 세리모니를 했어야 했어.”
바트가 슬쩍 의견을 말했다.
“그렉은 이제 떠날 사람이야. 마지막 순간에는 크게 당해줘야지.”
“그러고 보면 회장님은 떠날 사람에 대해서는 가차 없으셨죠.”
특히나 다른 레슬링 단체에 갈 것 같은 선수는 똥물을 먹이는 각본을 하게 해서 처절하게 이미지를 박살내는 걸로 유명했다.
“그게 맞는 걸세.”
“글쎄요.”
“재계약을 거절하고 떠나는 경우에는 더 응징이 필요하지.”
“그래야 다른 선수들에게 본보기가 되기 때문에?”
“그래.”
“그건 악덕 기업주로서의 발상이군요. 그래서 앞으로 돈을 벌어다줄 시나를 철저하게 띄우는 방향으로 가신 거고요.”
“그래.”
“하지만 너드로서는 어쩌셨습니까? 당신 작품이 마지막에 성대한 결말로 떠나간 것은.”
“…….”
“말하기 싫으시다면 됐습니다. 그래도, 전 나름대로 예우를 갖추면서 그렉을 배웅한 것이죠.”
“왜 그런 것이지?”
“예?”
“자네답지 않은 행동이다 싶어서 말이야. 자네는 성공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해오지 않았나?”
바트가 예시를 들었다.
“쿵-푸를 하고, 압정에 박히고, 여성들의 눈요깃감이 되었지.”
“그게 좀 돈이 됐죠.”
“거기다 내 딸과 만나고.”
“…….”
“아닌가? 너희 둘의 관계를 잘 모르니까 하는 이야기야.”
“자기 딸이 누군가와 만나면 좀 관심을 가져야 하는 것 아닙니까?”
“내가 왜 그래야 하지?”
“딸이니까?”
“흥, 그 아이가 케인과 같았더라면 차라리 나았을지도 모르지.”
“지금 티파니가 여자라고 그러시는 겁니까? 진짜…….”
“아니, 오히려 반대야.”
바트가 내 말을 잘라냈다.
“내 아들이지만 케인은 정말 단순해. 프로레슬러가 그 녀석의 유일한 꿈이었지. 물론 그렇게 되지는 못했지만.”
“당신도 아버지의 반대로 선수가 되지 못했다고 들었는데요.”
“……티파니는 반면, 나와 같아. 야망이라는 것을 타고 났지.”
바트는 내 말을 무시했다.
“그래서 도저히 예뻐할 수 없는 거다. 그 애는 언젠가 분명 내 숨통을 조이려고 들 테니까.”
“그렇습니까.”
“네놈이 그 아이를 꼬드길 수 있었던 것도 야망 때문이겠지. 생각해보면 그게 네가 가지고 있는 최대의 무기일지도 모르겠어.”
바트의 눈이 빛났다.
마치 설원에 숨은 늑대처럼.
“그걸 채워주는 거다. 하지만 이 야망이란 게 두 가지가 합성되어 만들어진 말이라는 거 아나?”
“욕망과 신념이죠.”
“그래, 하지만 자네가 과연 그 아이의 욕망을 이뤄줄 수 있겠나? 절대 아니지. 자네는 그냥 멍청한 레슬러에 불과하기 때문이야.”
“…….”
“반면 나는 다르지. 나는 인간의 욕망을 채워줄 수 있어. 그로서 지금껏 많은 부하를 만들어왔다.”
“저기, 보스.”
나는 어이가 없어 웃었다.
듣자듣자 하니 정말.
영감쟁이 헛소리를 들어주는 건 상당히 재미있는 일이지만, 내 여자에 대해 대단히 큰 착각을 하고 있다.
“티파니가 저와 협력하고 있는 이유는 야망 때문이 아닙니다.”
“그런가?”
“예, 신념이죠.”
나는 빙긋 웃어보였다.
“보스가 욕망을 통해 부하를 만든다면, 저는 반대로 신념을 채워주어서 동료를 만들 겁니다.”
나는 알고 있다.
이 잔인한 업계에서 얼마나 사람을 악독하게 죽여 나가는지.
그렇기 때문에, 지금 깨달았다.
나는 바트 맥센의 방식을 부정해야 한다는 사실을 말이다.
“자네와 나는 상극이군.”
“물론, 보스께서 절 탑으로 밀어주면서 욕망을 채워주신다면 숙이고 들어갈지도 모르지만요.”
“그건 안 될 말씀이지.”
바트가 혀를 찼다.
“자네의 욕망을 채워주는 순간, 반대로 내 욕망이 무너지거든. 애초에 거래의 대상이 아닌 거야.”
“동양인 아이콘이 나오는 게 그 정도로 못해먹을 짓입니까?”
이제는 숨기지도 않는다.
처음만 하더라도 ‘사람들이 좋아하지 않을 거다.’라고 포장했으나 이제는 아예 그러지도 않는다.
왜냐면 내가 그렇지 않다는 걸 지금껏 증명해왔기 때문이었다.
“어디 한번 열심히 해보게나.”
결국 바트는 내 질문에 대답하지 않고 그대로 계단을 내려갔다.
“후우…….”
길게 한숨을 내쉰 나는 그대로 경기장 좌석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래도 기분은 환상적이었다.
오늘 일로, 내가 결국 앞으로 무엇을 해야 하는지 확실히 알았기 때문이었다.
정말로 멋진 날이었다.
내가 해본 경기 중 최고의 상대, 최고의 장소, 최고의 반응.
전생에 쿵-퓨리로 상황을 지켜보면서 아쉽다고 느꼈던 부분이 상당수 개선되었다.
그렉은 자신의 숙적이었던 마이클스와 화해를 했고, 미련을 가지지 않고 은퇴를 결정했다.
그 과정 속에서 있었던 일을 멋지게 각본으로 풀어내 수많은 사람들로부터 호응을 얻었다.
그리고 나는 그렉과 존의 시대를 짊어지고 앞으로 나아간다.
‘아마 앞으로도 그렇겠지.’
자신의 선택, 혹은 바트의 계략으로 불행한 미래를 맞이할 선수들의 도움이 되고 싶었다.
물론 이기는 건 나고.
그리하여 나는 그들의 유지를 짊어지고 위로 올라갈 테지만.
인간의 욕망을 채워 조종하려는 바트 맥센과, 인간의 신념을 믿고 함께 가려는 신의 대결.
‘그렇게 결론이 났군.’
서로 서있는 위치가 다르기 때문에 나올 수 있는 결론이겠지.
나로서도 좋았다.
결국 이 업계는 바트 맥센의 폭정을 견디지 못하고 몰락한다.
오늘의 이 열기는 다시 맛볼 수 없는 것이 되어버리고 만다.
‘그전에 어떻게든…….’
시나가 은퇴한 뒤 버려져 가는 업계의 생태를 바꿔야만 한다.
그렇게 결론을 내릴 즈음, 누군가 어둠 속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티파니 맥센이었다.
“……다 끝났어요?”
나는 눈썹을 찡그렸다.
다가온 그녀의 표정이 썩 좋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들었어?”
“조금. ……아니, 꽤 많이.”
한숨을 내쉰 티파니가 내 옆에 앉아 그대로 어깨에 기댔다.
“그렉, 부상이래요.”
“어디가?”
“발목을 심하게 삐었다는데. 그래서 내일로 예정되어있던 은퇴식이 다음 주로 밀릴 것 같아요.”
“꽤나 무리를 했으니까.”
“어쨌든, 그사이에 좀 쉴 수도 있고 다행이죠. 당신 요새 너무 무리한 거 다 알아요.”
“아무도 모르던데.”
“나는 알지.”
티파니가 내 손을 붙잡았다.
그리고 그녀는 자신의 아버지와 문제가 생길 때마다 하던 대로 담배를 물고 불을 붙였다.
피어오르는 연기.
살짝 나는 레몬의 냄새.
“아버지가 그렇게 생각할 줄은 몰랐어요. 아무리 그래도 나는 그 사람의 딸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렇군.”
“그래서 사실, 요새 진행 중이던 일에 죄책감이 안 생길 것 같아.”
“뭔가 했어?”
“어때요. 내가 당신 몰래 한 행동이 당신 눈에 예뻐 보이면 이번 주 휴가라도 갈래요?”
“당신은 언제나 아름다운데.”
“……사람이 좀 느끼해.”
티파니가 내 뺨을 쿡 찔렀다.
그러더니 다시금 한껏 진지해진 눈으로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투자를 좀 했죠. 아무래도 꽤나 큰돈이 필요해질 것 같아서.”
태양처럼 웃는 티파니.
“안 그런가요? 신.”
“……해보자는 거야?”
“예, 저희에겐 돈이 필요해요. 그것도 아주 많은 돈이.”
“그것만이 아니지.”
“물론, 이름값도 필요하고요. 그래서……. 앞으로 한번 제대로 움직여보자는 거죠.”
“나쁘지 않은 생각이군.”
나 역시도 어렴풋이 지금 느끼고 있던 사실이기는 했다.
우리에게는 힘이 필요했다.
목표를 이루기 위한 힘이.
“어려운 일이겠죠. 헐리우드와 월스트리트를 동시에 노리는 작업이니까 말이에요.”
“레슬링은 계속 해도 되지?”
“그럼~ 물론이죠.”
장난스럽게 속삭인 티파니가 이어 한마디를 더 했다.
“레슬링을 할 때의 당신은 세상에서 제일 멋지거든요.”
“…………느끼해.”
나는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뭐, 레슬 임페리움의 마지막을 장식하기에는 정말로 멋진…….
바로 그때, 주머니 속의 핸드폰이 진동하는 것을 느꼈다.
대체 뭔가 싶어 전화를 받은 나는 이어지는 오튼의 다급한 목소리를 듣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크, 큰일이야. 신.]
“지금 뒤풀이 중인 거 아니야? 뭔데, 그래?”
[일단, 내가 정말로 순수하게 궁금해서 시나와 러셀이 먹는 제로콜라에 보드카를 좀 탔거든.]
“…….”
불길하다.
[그런데, 이 녀석들 취해서 알몸이 되더니 중요 부위에 휘핑크림만 바르고 무대로 올라갔어.]
와.
미친놈들인가.
[도와줘! 신! 이런 광기를 막을 수 있는 건 너밖에 없다고!]
“술은 네가 먹였잖아.”
[으아! 나한테 온다! 안 돼앳-!]
전화가 뚝 끊어졌다.
이것을 기점으로 휘핑크림 좀비가 날뛰는 좀비 아포칼립스가 시작되는 것은 아니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