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5.
별장 지하의 스튜디오.
100평가량 되는 공간에는 온갖 값비싼 장비들이 가득했다.
이번 앨범은 아니었으나, 스눕-덕은 혼자 심심풀이 삼아 만드는 음악 대부분을 여기서 제작했다.
즉, 이곳은 그의 감수성이 가장 발휘되는 공간이었고.
그런 의식에 따라 그는 중요한 이야기가 있을 때마다 친구들과 이곳에서 대화를 나누곤 했다.
친구라기보다는 부하였지만.
“……그 아시아 놈의 제안은 거절하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뜻밖에도, 며칠 전 즐겁게 놀았던 것과는 달리 부하들은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어째서?”
“너무 노골적이지 않습니까? 분명 의도가 있을 것 같습니다.”
“말했잖아. 자기처럼 핫한 동양인을 친구로 두면 좋을 거라고.”
어찌 보면 굉장히 건방진 소리였지만, 이상하게도 스눕-덕은 거기에서 꽤나 설득력을 느꼈다.
하지만 부하들은 쉽사리 물러서지 않았다.
“글쎄요. 저는 아무리 봐도 득이 크지 않은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게다가 영화 자체도 그냥 ‘인디’ 영화 아닙니까?”
“힙합도 인디야.”
“인디로부터 시작했을 뿐이죠.”
이제 힙합은 전 세계에서 가장 사랑 받는 음악 중 하나였다.
그렇기에 그런 쪽과는 명백히 선을 그어어야 한다는 게 젊은 랩퍼들의 생각이었다.
하지만 스눕-덕은 그런 시류가 솔직히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럼 스트리트라고 하지. 제기랄, 이 스눕이 언제부터 그런 거 신경 썼어? 헐리우드 ●만이들이나 메이저, 그딴 거. 솔직히 말해서 난 존나게 싫다고. 존나게.”
살짝 짜증을 부리자 부하들은 더 이상 토를 달지 못했다.
스눕-덕은 다들 뭔가 단단히 착각을 하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이 힙합이라는 문화에 대해서.
젊은 놈들이니 돈과 성공에 집착하는 건 이해하지만, 뭔가 좀 앞뒤가 바뀐 듯한 기분이었다.
“물론, 나도 돈 버는 건 좋아해. 그 엿 같던 동네에서 랩 하나로 여기까지 왔으니까 더 큰 미래를 그려보고 싶은 건 사실이지.”
“저희도 그렇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건, 우리가 백인 놈처럼 될 필요는 없다는 거야. 우리에게는 나름의 Thug한 방식이 있는 것 아니겠어?”
그는 담배를 입에 문 채 자신의 철학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이미지 만드는 거? 좋아. 돈이 되니까. 하지만 그 이미지에 얽매이는 건 질색이라는 말이야.”
담배를 재떨이에 꾹 눌러서 끈 그는 이어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부하들을 돌아보았다.
“그래서 말인데, 그 친구를 이번 뮤직 비디오에 출연시키고 싶어.”
“……!”
“불만이 있으면 말해. 계약 해지 서류는 보내줄 테니까 말이야.”
순간 놀라 고개를 들었던 부하들은 스눕-덕의 말을 듣고는 찍 소리도 내지 못했다.
스눕-덕은 험난한 삶을 살아온 자수성가형 인물로, 자신의 안목에 대한 자부심이 무척 강했다.
그리고 그가 봤을 때 신은 분명히 가까이 두어야 할 남자였다.
같은 업종은 아니라서 구체적으로 어떻다고 말하기는 어려웠으나.
‘분명히 크게 될 놈이야.’
그것만큼은 확신할 수 있었다.
* * *
오늘 버닝콩에서는 그렉 하트의 은퇴식이 열릴 예정이었다.
내게 주어진 각본은 간단했다.
은퇴식의 마지막에 나서서 그렉에게 예를 표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부담은 없어 별다른 생각 없이 경기장에 도착한 나는.
‘어라?’
생각도 못한 인물을 복도에서 발견하고는 잠시 굳어졌다.
트리플H.
전보다 벌크가 배는 늘어났다.
어깨까지 이르는 긴 금발을 찰랑거리며 그는 한 남자와 진지하게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바로 존 마이클스였다.
‘저 둘도 화해를 한 건가?’
좀 갑작스러운 광경이었다.
분명 전생에서 두 사람은 지금 정도의 시기에 화해를 하기는 했다.
존 마이클스가 링으로 복귀하는 데 헌터가 결정적인 도움을 주었기 때문이었다.
뭐, 어쨌든.
이번에도 일이 그렇게 풀리려나 싶었던 나는 적당히 두 사람만의 시간을 주려고 했다.
거기다 조금 풀렸다고 하지만 헌터와 나는 아직은 좀 껄끄러운 사이였고 말이다.
하지만 슬그머니 빠져나가려던 순간, 마이클스가 말을 걸어왔다.
“신! 왔나?”
“……존.”
어색하게 웃으며 그들의 곁으로 다가간 나는 일단 옆에 있던 헌터에게 오랜만에 인사를 건넸다.
“몸은 좀 어때요.”
“넌 좀 어떠냐.”
“응?”
우리 둘의 미묘한 기류를 곧장 알아차린 마이클스.
하지만 표정이 딱딱해져 있던 헌터는 이내 내 어깨를 툭 쳤다.
“바트의 시험은 어떻지?”
“……뭐어.”
사실 반쯤 포기했다.
결국 그 양반은 말이 통하지 않는다는 걸 이번 레슬 임페리움을 통해서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쪽에서 시험 과제라고 내는 것도 내 커리어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아서 말이다.
만약 내가 시험을 치르겠다고 하면서 받아들였으면 그렉 영감을 띄워주는 역할이나 맡았겠지.
구려지는 반응 속에서 나는 서서히 인기를 잃어갔을 것이다.
“아주 잘 되진 않았습니다.”
“그동안 내가 얼마나 대단한 일을 하고 있었는지 알 것 같나?”
“뭐, 그렇다고 치죠.”
“정말로. 바트의 아이디어를 받으면서 관객들의 반응을 이끌어내는 게 쉬운 일은 아니야.”
틀린 말은 아니었다.
바트 맥센이 제시하는 아이디어의 대부분은 구렸다.
어딘가 옛날 감성이 충만하다고 해야 하나.
그것은 그의 취향이기도 했지만, 아마 확신컨대 아이콘의 등장을 저지하기 위해 일부러 강행하는 면도 있을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도 아이디어를 포장하고 나름의 디테일을 살려왔다는 건, 확실히 헌터의 능력이 뛰어나다는 반증이기도 했다.
“확실히 당신은 바트가 좋아하는 스타일의 선수긴 하죠.”
“넌 전혀 아니고.”
“저기, 헌터.”
“그런 의미에서, 네가 이번에 한 일은 죽여줬다. 솔직히 말하지. 널 존경하게 되었어.”
“……?”
“뭐해. 안 받아줄 건가?”
헌터는 손을 내밀고 있었다.
제지를 하려던 마이클스도 침묵하고, 나 역시도 좀 당혹스러운 기분을 느끼고 입을 다물었다.
‘날, 존경한다고?’
그 자존심과 자존감과 자존 어쩌고 같은 걸로 가득 찬 헌터가?
나는 어안이 벙벙한 채 헌터와 악수를 나눴다. 그는 내 등을 툭툭 치며 다시금 축하를 해주었다.
그것을 보고 있던 마이클스가 씨익 웃으며 또 날 띄워주었다.
“경기도 죽여줬지. 마지막에 슈퍼 킥에 이은 러닝 니 콤보가 정말이지 환상적이었어.”
“시대를 이었다는 거군.”
“그런 상징성이 컸지. 샤프 슈터도 그렇고. 너 같이 멋진 선수에게 내 기술이 이어진다면 나도 더 이상 미련이 없지.”
“……존?”
“왜?”
“뭔가 불길한 말인데요. 분명히 이번에 복귀를…….”
“뭐, 그건 나중에 이야기하자고. 오늘은 다른 일이 있으니까.”
마이클스가 옆을 돌아보았다.
락커룸의 문이 열리고 평상복 차림의 그렉 하트가 나왓다.
“다들 나 없이 뭘 그리 즐겁게들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거야?”
“아, 그렉.”
“신, 좀 늦었군.”
“아니 뭐, 나름대로 적당한 시간에 맞춰서 온 건데요.”
그보다 이제 딱 정오가 됐다.
쇼는 8시간이나 남았고.
내가 살짝 당황하자니 옆에 있던 존이 낄낄대며 웃었다.
“선배는 괜찮은 후배에게 엄하게 대하는 것으로 유명했죠.”
“나머지는 다 정했는데 은퇴식에서 가장 중요한 네가 늦다니 상식이 있는 거냐.”
“죄, 죄송합니다.”
“밥은 먹었나?”
“……아뇨.”
“일단 먹으러 가지. 다들 어때?”
“그렉, 저는 괜찮습니다.”
“저도요. 헌터하고 좀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서 말이죠.”
“그럼…….”
그렉은 깔끔하게 상황을 정리하고 나를 데리고 식당으로 향했다.
‘나의 마지막이니만큼, 여기에서 뭔가 드러낼 수 있는 게 있을 터다.’
그것이 그가 내건 바였다.
때문에 은퇴식에서 마지막 연출을 통해 관객들에게 뭔가를 보여주고 싶다는 게 그렉의 생각.
“네가 시대를 이어받는다는 연출을 좀 강하게 가져가는 것이 어떨까 싶은데 말이다.”
“어떻게요?”
“사실 나와 마이클스가 젊은 시절, 네가 가진 인터컨티넨탈 챔피언을 두고 지독하게 대립했지.”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나와 마이클스가 벨트를 들고 나온 널 인정하고 허리에 둘러주는 연출은 어떨까 싶은데.”
“나쁘지 않겠네요. 너무 과할 정도로 영광스러운 일이지만.”
“넌 자격이 있다.”
“그, 그런가요.”
나는 쓰게 웃었다.
메뉴로 나온 샐러드를 으적으적 씹으며 나는 다시 생각했다.
눈앞의 전설을 이기고 그의 모든 걸 가져오는 건, 아무리 나라도 과분할 정도의 영광이었다.
“감사합니다. 선배님.”
“……뭐가?”
“마지막 대립 상대를 저로 정해주셔서 말입니다.”
“됐다. 널 믿고 맡기는 거니까 이후나 잘 책임지라고.”
“물론 그렇게 해야죠.”
“나도 은퇴한 뒤에는 조금 쉴 생각이니까. 버닝콩은 앞으로 매 주 꼬박꼬박 챙겨 보면서 생각나는 게 있을 때마다 피드백하지.”
“예, 옙.”
“……이거 더 먹어라.”
그렉이 접시에 담겨 있던 고기 세 조각을 전부 내게 주었다.
‘사, 삼촌?’
왠지 모르게 내가 러셀이 된 것 같은 기분을 느껴야만 했다.
이게 그렉 나름대로 애정을 표하는 방식인 건……가?
* * *
경기복 세탁을 기다리던 러셀은 캠핑 버스에서 좀 늦게 내렸다.
한심한 오튼은 어제 밤늦게까지 비디오 게임을 하느라 아직까지도 자고 있었고.
덕분에 혼자 경기장으로 들어선 그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복도를 거닐었다.
‘신은 어디에 있지?’
거기에 삼촌인 그렉도.
먼저 그 둘을 만나서 오늘 일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싶었다.
그렇게 두 사람을 찾으며 러셀은 선배들과 직원들에게 인사까지도 잊지 않았다.
올해 초에 메인 쇼에 합류한 그는 아직까지도 선수들이 얼굴을 기억하지 못하는 신참이었다.
“안녕하세요. 시몬스 선배님.”
“가하하하, 선배님은 무슨. 그냥 시몬스라고 불러, 멍청아.”
“예, 엡.”
시몬스의 호쾌한 웃음에 일단 고개를 끄덕였으나, 물론 러셀은 그럴 마음은 없었다.
선후배라는 관계는 이 업계를 윤활하게 굴러가게 하는 원동력이었다. 그러므로 예의가 필요한 것이었다.
“저, 혹시 신 못 보셨나요?”
“글쎄다. 못 봤는데.”
“감사합니다.”
그런 식으로 러셀은 한동안 경기장 안을 계속 돌아다녔다.
하지만 두 사람은 어디로 증발했는지 도저히 보이지 않았고.
의아해하던 찰나 만난 존 마이클스가 그에게 답을 알려주었다.
“둘이? 점심 먹으러 갔는데?”
“예?”
“이 근처 식당일 거야. 한 30분 정도 됐는데 전화해보지 그래.”
“아, 음. 감사합니다.”
순간 당황해 대답한 러셀은 머리를 긁적이며 뒤로 돌아섰다.
물론 선배들에게 인사를 할 겸 돌아다닌 것이었으므로 딱히 시간 낭비를 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좀 불러줄 수 있지 않았나 싶어 아쉬운 기분이 들었다.
생각해보면 그랬다.
“…….”
복도에 서서 두 사람이 돌아오는 것을 기다리며, 러셀은 잠시 우울한 내면으로 빠져들었다.
사실, 신의 도움을 받아서 멋진 데뷔를 하기는 했지만.
이어진 오튼과의 대립은 실패했다.
딱히 관심을 받지 못했고, 그냥 선역인 자신이 이기는 걸로 끝이 났다.
오튼은 최악의 파트너였다.
적어도 러셀이 느끼기에는 그랬다. 친구로서는 몰라도 상대하는 선수로는 완전히 상극이었다.
의욕은 딱히 없고 적당히 일하는 게 바로 오튼의 스타일인데, 그런 면에서 외골수에 진지한 러셀과는 업무 스타일이 맞지 않는 것이었다.
‘신과 일을 할 땐 이렇지 않았는데.’
러셀은 눈썹을 찡그린 채 생각했다.
하지만 그런 신조차도……. 이제는 멀리 간 것 같아서 어쩐지 조급한 마음이 들었다.
스멀스멀 기어 나오는 불안.
자신이 과연 잘할 수 있을까.
GCW에 남겨져 있던 1년 동안, 자신은 퇴화해버린 게 아닐까.
먼저 올라간 시나는 유니버스 챔피언이 되었고, 그보다 늦은 신도 자신의 영역을 구축했다.
무려 삼촌인 그렉 하트를 은퇴시킨 장본인이었다. 원래라면 자신이 해도 좋았을 역할을.
바로 그때 눈썹을 찡그린 러셀을 누군가 큰 소리로 불렀다.
“오, 러셀.”
“……?”
“거기서 혼자 뭐하냐.”
경기장 문을 열고 들어온 신이 활짝 웃으며 그에게 다가왔다.
그런 상황에서 러셀은 냉정하게 머릿속으로 생각 하나를 했다.
‘지금의 내 감정을 각본으로 활용한다면…….’
분명히 멋진 이야기가 나올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