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6.
“좀, 부끄러운 이야기를 할게.”
“갑자기 왜 그래?”
그렉과 점심을 먹고 돌아온 나는 러셀의 진지한 표정을 보고는 순간 고개를 갸웃거렸다.
‘오튼이 아직까지 잔다’는 내 말을 듣고 버스로 들어간 그렉을 피해서 여기로 도망쳐온 건데.
“진지해. 신. 들어줘.”
“넌 언제나 진지하잖냐.”
“평소보다 더.”
“그, 그래.”
기세가 대단했다.
러셀은 진지한 눈으로 날 바라보았다. 거기에 나는 잠시 주변을 살피다 락커룸으로 들어갔다.
우리는 텅 빈 락커룸 안에 앉아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그리고 러셀의 이야기를 들은 나는…… 순간적으로 감정이 복잡해지는 것을 느꼈다.
한마디로, 나에게 열등감을 느낀다는 건데.
‘그걸 입으로 말해?’
아니, 그게 좋은 건 맞지만.
이렇게 녀석의 진심을 알게 되자 좀 머쓱한 기분이 들었다.
“이게 지금 내 기분이야. 오튼과의 대립도 잘 풀리지 않아서 뭔가 뒤쳐지는 것 같고. 거기에 더해 삼촌을 은퇴시킨 것도 너잖아?”
“그, 그렇지.”
“그 영광을 누리고 싶은 건 나였어.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그와는 별개로 타협할 수 없는 감정이 내 안에 있다는 거지.”
“그렇구나…….”
사과를 해야 하나?
그렇게 느끼자니 또 러셀은 계속해서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그래서, 난 너와 동등한 관계로 있고 싶어서 이렇게 말한 거야.”
“네, 감정을?”
“이걸 각본으로 써보는 건 어때? 턴 힐 하는 거지.”
“………….”
순간 내 눈이 크게 뜨였다.
갑자기 머리를 망치로 얻어맞은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하트가의 후계자가 악역을?
확실히, 아니.
‘죽여주는데.’
말했듯, 나는 선수가 처한 기반에 의거한 각본을 선호했다.
그렉과 존의 유지를 이어받게 된 나는 앞으로 당분간 선역으로 활동해야 할 터였다.
그렇다면 그 상대가 필요했다.
그 시대와 연관이 있고, 나와 대립할 근거를 가진 멋진 상대가.
“……그게 너였군.”
“괜찮은 것 같아?”
“어떻게 이런 생각을 한 거야? 정말로 멋진데?”
“그야 당연하지. 내가 실제로 너한테 그런 감정을 느꼈으니까.”
“아…….”
순간 다 연기였나 싶었는데.
그게 아니라서 순간 분위기가 어색해지는 듯한 느낌이었다.
거기다 이 녀석은 방금까지 상대 선수였던 오튼을 말린 말똥에 비유하며 마구 욕했다.
그것도 진짜라니.
‘앞으로 오튼을 볼 때마다 말린 말똥이 떠오를 것 같잖아.’
아니 뭐, 두 사람의 성격이 안 맞을 거란 사실은 나 역시도 어렴풋이 느끼던 것이었지만.
러셀은 이 일을 꿈으로 생각했고.
오튼은 직장으로 생각했으니까.
그래서 적당히 중간쯤으로 내려와서 대화를 했어야 하는 건데.
러셀에게는 그것이 좀 어려운 일이었던 모양이다.
나였다면 오튼에게 ‘이거 못하면 너 잘림’이라고 해서 어떻게든 하게 만들었을 텐데 말이다.
확실히 그 자식, 요새 좀 안정적으로 반응이 나온다고 다시 빠졌다는 느낌이긴 하지.
하지만 이걸 또 잘만 활용하면 굉장히 멋질 것 같았다.
“신? 왜 그래?”
“일단 말똥…… 아니, 오튼 좀 여기로 불러오자.”
“응? 왜?”
“그냥 턴 힐은 심심하잖아.”
싱긋 웃은 나는 그대로 락커룸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그러자니 또 타이밍 좋게 안으로 들어오는 오튼이 보였다.
투덜투덜대면서 말이다.
“제기랄, 오늘 은퇴하는 양반이 갑자기 와서는 왜 저래?”
“오튼.”
“어, 신.”
“그렉이 갈구든?”
“……말도 마라. 선수 생활 오래 하고 싶으면 습관 같은 거 잘 길들이라고 어찌나 잔소린지.”
“맞는 말이잖아.”
러셀이 내 위로 불쑥 나왔다.
“넌 너무 되는 대로 살아. 계속 그런 식으로 살다가는 반드시 도태되고 말 거다.”
아니, 전생에서 승리한 건 결국 오튼 쪽이었는데.
“뭐야?! 야! 다 먹고 살자고 하는 건데 좀 쉴 때도 있어야지!”
“너는 맨날 쉬잖아.”
“아닌데~!”
“……이, 일단 진정해봐.”
나는 유치한 싸움으로 번지려는 두 사람을 만류했다.
“오튼, 들어오고.”
“뭐야, 또 일 이야기야? 아, 좀만 더 자고 싶은데…….”
“회사에서 조만간 성과 못 내는 사람들 정리 해고 한다는데.”
그 말을 들은 오튼이 허둥지둥 안으로 들어왔다.
사실, 요령을 안다면 누구보다 컨트롤하기 쉬운 게 그였다.
문제는 러셀 같은 성격이라면 그런 요령 자체를 거부하고 밀어붙일 공산이 크다는 거지만.
어쨌거나.
우리 셋은 텅 빈 락커룸 안에서 아이디어를 주고받기 시작했다.
“러셀 하트가 레볼루션의 멤버로 들어가는 거야.”
“……내가?”
“……쟤가?”
“그래! 멋지지 않아?”
“그럼 헌터는?”
“축출해야지!”
“왜?”
“멋진 핑계가 있지. 왕을 축출하는 게 혁명Revloution이잖아?”
“본인은 어떻게 생각하려나.”
“부르자고! 좋아할걸?”
나는 어쩐지 심장이 기분 좋게 두근거리는 것을 느꼈다.
멋진 아이디어였다.
잘만 사용한다면, 이게 레슬 임페리움 이후의 1년간을 책임질 각본이 될 수도 있을 듯했다.
문제는 이 아이디어가 굉장히 잘 먹히려면 바로 오늘 은퇴식부터 변경을 해야 한다는 건데.
시간은 오후 2시 정도.
‘맞출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을 하며 나는 곧바로 헌터에게 전화를 걸어 불렀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근처에 있던 그는 마이클스와 함께 락커룸으로 왔다.
“또 뭔데 그래.”
“죽여주는 아이디어가 있어요. ……아! 팀장님! 잠깐 와주세요!”
나는 헌터의 뒤로 얼핏 지나가는 각본팀장까지도 불렀다.
소란을 듣고 사람들이 점점 락커룸으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자리가 좁은 걸 느낀 나는 아예 복도에서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 뭐냐. 헌터. 일단 복귀를 어떤 식으로 할지 정했어요?”
“그야 물론 레볼루…….”
“구려요.”
“뭐?”
“당신, 나가기 전에 리스펙 쌓고 갔으니까 선역으로 가보죠!”
“아니, 그걸…….”
“나도 좀 생각하던 건데.”
“팀장님?”
“악역을 한 4년 정도 했으니 슬슬 턴 페이스를 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고 생각했어.”
“하, 하지만 그렇게 되면 레볼루션은 대체 어떻게 합니까?”
“레볼루션이 성립하기 위해서는 왕이 죽어야만 하는 법이죠.”
나는 옆에 와있던 플레어의 어깨를 만지며 설명을 이어나갔다.
“선지자가 있고, 그의 아래서 전사들이 왕을 축출하는 거예요.”
“음…… 그렇다면 레볼루션에게 혁명가로서 선역의 느낌이 씌워지는 게 아닐까 싶은데.”
“아뇨, 이 개 쓰레기 같은 놈이 그 모든 걸 망쳐놓을 겁니다.”
나는 러셀을 불렀다.
“제가 그 쓰레기입니다.”
설명을 미리 들어둔 녀석이 자신만만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가……?”
“러셀이 턴 힐을 해서 레볼루션에 가담하는 거죠. 그럴듯하지 않나요? 자기 삼촌인 그렉이 라이벌에게 깨져서 끝났으니까.”
“음, 너무 갑작스…….”
“계속해봐.”
팀장은 진지한 얼굴이었다.
나는 여기에서 러셀의 아이디어에 더해진 우리의 이야기가 성공할 것임을 느꼈다.
모두가 하나둘씩 아이디어를 내며 이 각본을 흥미롭게 받아들이고 있었으니 말이다.
* * *
오늘이 마지막이다.
그런 생각에 감상에 젖은 그렉은 경기장 전체를 확인하며 마지막 출연을 준비하고 있었다.
하지만 어느 순간, 경기장 안에 인적이 사라진 것을 느꼈다.
거기에 좀 의아함을 느끼며 모퉁이를 돈 그렉은 뜻밖의 인물과 마주치게 되었다.
바로 이 회사의 회장.
바트 맥센이었다.
“사람을 찾으러 나와서 처음 만나는 게 자네일 거라고는 전혀 생각하지도 못했군.”
“보스도 그렇게 느끼셨습니까?”
“그래, 이게 무슨 일인지.”
바트는 가볍게 혀를 찼다.
물론 여기에서 말하는 ‘사람’이란 실무에 관해서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간부진을 뜻했다.
잠시 고민하던 그렉은 자신이 알던 사람들에게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대부분 전화를 받지 않아 점점 의아함을 느끼던 찰나.
[어, 그렉?]
겨우 전화에 응답한 것은 버닝콩의 상식인, 부커-리였다.
“부커, 지금 어디야?”
[지금 꼬마 녀석들이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해서 말이야. 그 판타지가 너무 재미있어서 듣고 있었지.]
“뭐?”
그렉의 눈이 순간 커졌다.
그 모습을 의아해 바라보던 바트는 그렉이 전화를 끊자마자 다급한 얼굴로 물었다.
“무슨 일인가?”
“다들 저희 둘만 쏙 빼놓고 작당을 하고 있다는데요.”
“무슨 작당!”
“가보시죠.”
흥분한 바트와 달리, 그렉은 여유로운 표정으로 돌아섰다.
오늘은 자신의 20년 커리어를 마무리하는 날이라 어쩐지 시간이 멈춘 것 같은 기분이었는데.
“설명을 해보게, 그렉.”
“뭐, 다들 제 은퇴식에서 뭔가 거하게 저지를 모양인데요.”
“지금 쇼가 여섯 시간 남았어! 이제와 또 뭘 바꾼다는 건가!”
“저희도 그랬었죠.”
그렉이 미소를 지었다.
그랬었다.
10년, 아니, 15년 전인가?
“건방진 캐나다 놈이었던 저는 뭔가 좋은 아이디어가 있으면 찾아가서 회장님께 허락을 구하고 바로 쇼에 적용하고는 했죠.”
“이제 와서 그러긴가.”
“뭐, 마지막이니 할 수 있는 이야기겠죠. 안 그렇습니까?”
“……나는 자네가 조금 더 오래 활동할 수 있었으리라 믿네.”
“저야말로 그대로 말씀드리고 싶군요. 이제 와서 그러깁니까?”
“진심이야.”
“그래요. 하지만 억지로 현역들의 환호를 빼앗는 것은 저 그렉 하트의 스타일이 아니죠.”
“그래서 좀 아쉽군.”
그렉은 피식 웃었다.
바트의 저 말은 진심이었다.
물론 전성기가 끝난 뒤 그렉 하트는 그다지 중용 받지 못했다.
그럼에도 그렉은 바트가 정말로 자기 자신을 미워해서 그런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때문에 아쉬움과 그 모든 감정을 제쳐놓고, 함께 일했던 보스에게 감사의 마음을 느꼈다.
비록 이후, 시대를 이어가는 젊은 혁명가에게 무척이나 고생할 게 눈에 보였지만 말이다.
두 사람은 늙은 참전 용사처럼 옛날이야기를 주절대며 경기장 안을 가로질렀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복도 끝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사람 무리를 발견했다.
“아니! 그렉이 은퇴식에서 오줌을 지리면 그렉 하트가 아니라 그렉 오줌싸개라고 기억될 텐데 그게 말이나 돼요?!”
“…….”
좀 심한 이야기를 들은 것 같은데.
“저것들이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거지?”
“안타깝게도 정상적인 은퇴식은 아닐 것 같은데요.”
“괜찮겠나?”
“시청률에 도움이 된다면요.”
씁쓸하게 웃은 그렉은 무리에서 가장 멀리 떨어져 이야기를 듣고 있던 존 마이클스를 불렀다.
“존, 이게 무슨 일인가?”
“아, 러셀 하트가 턴 힐을 하는 게 어떻겠냐는 흐름으로 지금 한창 각본이 짜여지고 있죠.”
“러셀이?”
“예, 자세한 건 본인한테 들으시면 될 것 같은데……. 선배님 생각은 어떤 것 같아요?”
“흐음, 나쁘지 않은데? 설득력이 중요하겠군. 왜 턴 힐을 했는지.”
“거기에서 레볼루션 가입.”
“뭐?!”
바트가 소리쳤다.
“헌터의 축출과 턴 페이스.”
“뭐어어어어?!”
“지, 진정해요. 바트.”
“그리고 이건 아직 제가 생각하고 있는 것뿐인데.”
가까이 다가온 존 마이클스가 그렉에게 한마디를 속삭였다.
“신과 헌터가 함께하면서 D-X가 부활하는 건 어떨까요.”
“……자네는?”
“전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이번 일을 겪어보니, 뭔가 후련해져서 말입니다.”
그렇기에 복귀할 마음이 사라졌다. 미래에 맡기고 싶어졌다.
자신의 감정을 이야기한 마이클스는 무리의 중심에서 열변을 토하고 있는 신을 바라보며 몇 마디를 더했다.
“하지만 그 기술이나 모습을 변화에 맞춰 좀 더 세련되게 가다듬을 필요는 있어 보입니다.”
“그래?”
“예, 지금 신은 더 이상 뒷골목에서 온 양아치가 아니라, 한 명의 위대한 프로레슬러니까요.”
확실히 그 말이 맞았다.
그렉과 존은 흥미롭다는 얼굴로 신의 모습을 살펴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