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프로레슬링의 신-157화 (157/634)

157.

그 후.

바트 맥센까지 이야기에 끼어들어, 각본은 쇼가 시작하기 30분 전이 되어서야 완성되었다.

일단 그렉의 은퇴식은 기존의 각본대로 평범하게 진행한다.

그리고 쇼의 메인이벤트를 태그 팀 매치로 가져가면서.

‘러셀이 나를 공격하는 충격적인 연출로 쇼를 마무리한다.’

나쁘지 않은 생각이었다.

일단, 현재로서는 아이디어가 너무 많아 그걸 차근차근 보여주는 것이 가장 중요했다.

중요한 연출이 죽지 않도록.

그리고 너무 이야기가 갑작스럽게 진행되어 보는 사람들이 따라올 때 혼란스럽지 않도록.

말인즉슨, 한 주에 하나의 떡밥을 풀고 뿌리는 식으로 이야기를 진행하자는 말이었다.

러셀의 턴 힐.

트리플H의 복귀와 숙청.

러셀의 레볼루션 가입.

트리플H와 나의 연합.

그 아이디어 하나하나가 주간 쇼의 마지막을 장식하기에 무리가 없는 멋진 것들이었다.

나는 오랜만에 흥분으로 몸이 떨리는 것을 느꼈다.

만약에 이 각본이 제대로 활용될 수만 있다면 그야말로 어마어마한 반응을 가져올 터였다.

나는 본능적으로 그걸 느꼈다.

그리고 그 공을, 온전히 내 옆에 서있는 바보에게 돌리고 싶었다.

러셀 하트.

껄끄러운 일이 될 수도 있는 걸, 이 녀석이 먼저 이야기해줘서 좋은 방향으로 풀렸다.

역시 괜찮은 녀석이다.

이런 상황에서 그런 식으로 문제를 풀고 싶다고 제안해올 줄이야.

‘아니, 엄밀히 말하면.’

문제를 푸는 것이 아니라 그걸 각본으로 짜냈을 뿐이지만.

이걸 통해서 자신의 감정을 드러낼 수 있다면 정신의학적으로도 상당히 도움이 되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해서 물으니.

“내가 전공자는 아니라서.”

러셀 선생은 진지한 대답으로 순간 분위기를 확 깨놓았다.

쇼가 시작되었고 그렉 하트의 은퇴식이 한창 진행 중이었다.

선수들이 미리 정해두었던 순서에 따라 링 위로 올라가 그렉의 은퇴를 축하해주고 있는 가운데.

러셀과 나는 고릴라 포지션 앞의 복도에 서서 순서를 기다렸다.

나는 마지막.

그리고 러셀은 나보다 하나 앞서서 들어갈 예정이었다.

원래 러셀은 딱히 각본과 관련이 없어 초반 부분에 바로 들어가 그를 축하줄 예정이었으나.

이렇게 되었다.

그렇게 생각하며 모니터링 TV를 보고 있자니, 러셀이 조심스럽게 말을 이어나갔다.

“……하지만 만약 그렇다면 프로레슬러라서 다행이라고 볼 수 있나?”

“그렇겠지?”

“나도 그렇게 생각해.”

러셀이 미소를 지었다.

“너에게 질투를 느끼는 걸 오히려 기회로 삼게 되었으니까.”

“그, 그러냐.”

“어찌 보면 웃기는 일이지. 사실 이것조차 너에게 배운 거잖아.”

러셀은 옛날 일을 떠올리는 듯 잠시 눈을 감았다.

“지금 우리가 처한 현실을 각본에 녹여내는 방법 말이야.”

“그게 지금은 질투라는 감정이고.”

“맞아. 나는 그걸 사람들이 공감하지 못하는 방향으로 풀어내서 악역이 되는 거고 말이야.”

“난 선역이 되어서 GCW 때와는 정반대로 풀어나가는 거지.”

러셀과 나는 같은 생각을 하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녀석과의 대립은 GCW를 포함해 이번이 세 번째였다. 하지만 전혀 식상하지는 않을 터였다.

말했듯이 선역과 악역이 바뀌었고, 레볼루션을 포함해 대립 자체가 커질 것이기 때문이었다.

집단과 집단이 충돌하는 대립은 흔히 있는 일은 아니었지만.

잘만 활용된다면 쇼 전체를 주무르는 각본이 될 수 있었다.

그렇기에 나는 이번 각본이 꽤나 괜찮을 것이 될 것을 직감했다.

참여하는 선수들의 위상도 높은 편이었고, 그 흐름이 신선하기까지 했으니.

그렇게 생각하고 있자니 러셀이 내게 주먹을 내밀었다.

“이번에도 멋지게 리드해줘.”

“잘 받아가라.”

싱긋 웃은 나는 녀석의 주먹을 툭 때렸고.

우리의 입장 시간이 다가왔다.

러셀이 먼저 링 위로 나가자 사람들은 환호를 보내주었다.

[Yeaaahhh!]

적당한.

나쁘지도 않고 좋지도 않은.

녀석은 오튼과의 첫 대립이 평범하게 흘러가면서 사람들의 관심을 다소 잃은 상태였다.

평소라면 조금 걱정을 했겠지만, 저걸 우리 의도대로 써먹을 수 있기에 오히려 즐거웠다.

러셀이 링 위로 올라가 그렉과 포옹을 하고 대화를 나누었다.

그리고 그 뒤를 이어, 드디어 내가 입장할 차례가 되었다.

“신 선수.”

옆에 있던 음향팀장이 기대감에 찬 눈으로 날 바라보았다.

“이거 정말 멋질 것 같은데요.”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영상 멍청이들이 제대로 장면을 찍어주면 좋을 것 같은데.”

“잘할 겁니다.”

고개를 끄덕인 나는 타이밍에 맞춰 커튼을 걷고 밖으로 나갔다.

반응은…….

[Yeeeeeeeeeaaaaaaahhhh!!]

말해봤자 입이 아플 수준이었다.

사람들은 내 음악이 시작되는 순간부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음악에 맞추어 노래를 하며 자기들끼리 난리가 났다.

‘……미치겠군.’

입장로 위에 서서 그 모습을 본 나는 잠시 어안이 벙벙해졌다.

물론, 그런 감정을 드러내는 대신 싱긋 웃으며 넘겨버렸지만.

링 위의 선수들도 모두 이런 반응에 적잖이 놀란 얼굴이었다.

[SIN! SIN! SIN! SIN! SIN! SIN! SIN! SIN! SIN! SIN! SIN! SIN!]

그렉 하트의 은퇴식인데도 이런 엄청난 반응이 나왔다.

고작 2년차의 신인이.

모든 현역 선수들이 진심으로 경악하며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링 위로 오른 나는 그중 유이하게 웃고 있던 한 남자의 앞으로 다가갔다.

그렉 하트였다.

그 옆의 존 마이클스와 함께, 그는 나를 띄워줄 수 있었다는 것에 대해 자부심을 느낀 듯했다.

“축하한다. 챔피언.”

“축하드립니다. 레전드.”

우리는 사람들에게 전해지지 않을 정도로 작게 이야기했다.

그렇기 때문에 지켜보는 관객들 사이에는 슬쩍 긴장이 감돌았다.

바로 얼마 전까지 링 위에서 벨트를 걸고 싸웠던 우리였다.

아니, 그뿐이랴.

말했듯 우리는 수많은 것을 걸고 싸웠다. 그리고 나는 승자로서 많은 것을 얻게 되었다.

팬들의 반응.

이 벨트.

그리고 그렉을 이겼다는 상징.

때문에 그런 사실을 알고 있는 관객들이 약간의 긴장감을 느끼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잠시 침묵하던 나는 어깨에 걸치고 있던 벨트를 들어 그렉의 어깨에 걸쳐주었다.

그러자 안심한 관객들 사이에서 커다란 환호가 터져 나왔다.

피식 웃은 그렉이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날 바라보았다.

나는 원래 계획했던 시간보다 좀 오래 뜸을 들였던 것이다.

“너도 참…….”

“재밌잖아요?”

“뭐, 그렇긴 하지.”

고개를 끄덕인 그가 내 팔을 들어주었다. 주변에 서있던 선수들이 우리에게 박수를 쳐주었다.

관객들도 거기에 동참해, 나는 그야말로 무수한 박수 속에서 그렉과 세리모니를 이어나갔다.

그리고 이어 그렉과 마이클스가 내 허리에 인터컨티넨탈 챔피언 벨트를 채워주는 것까지.

그 뒤에서 표정이 점점 굳어져가는 러셀에 대해서는 그 아무도 알아차리지 못했을 정도로 멋진, 그렉 하트의 은퇴식이었다.

* * *

메인이벤트는 신&셀 대 레볼루션의 태그 팀 경기였다.

일을 하면서도 짬을 내 쇼를 시청하고 있던 티파니 맥센은 일이 잘 풀려간다고 생각했다.

말리부 저택의 수영장.

빔 프로젝터를 벽에 쏴서 보는 버닝콩은 박력 자체가 달랐다.

투콰콰콰콰콰쾅-!

폭죽이 튀어 오르는 가운데 경기장으로 나온 신과 러셀이 기세 좋게 링 위로 올라갔다.

레볼루션 멤버 세 사람은 기세에 밀려 아래로 내려가고.

멋진 그림이었다.

해설자들의 설명을 들으며 티파니는 감탄을 금치 못했다.

[신과 러셀 하트, 두 사람은 GCW에서 태그 팀으로 활동했죠!]

[그때 당시 엄청난 인기를 끌었습니다! 아뇨, 지금도 엄청난 인기를 끌고 있습니다!]

관객들의 반응은 아주 좋았다.

SIN-SELL! 챈트가 이어지는 가운데, 방금까지 반응이 살짝 미묘했던 러셀도 이제는 다시 환영을 받는 모습이었다.

저게 신의 가장 큰 장점이었다.

그는 혼자 떠오르지 않는다.

언제나 주변의 동료들을 생각하며 함께 겟 오버 하려고 했다.

그가 가진 야망을 훨씬 더 상회하는 것이 바로 이 업계에 대한 사랑이었다.

그렇기에 티파니 맥센은 그에게 반할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힘내요. 신.’

행여나 불운한 사고가 나지 않기를 기도하며 티파니 맥센은 시작되는 경기를 지켜보았다.

경기는 무난하게 흘러갔다.

일반적인 방식.

위상이 낮은 러셀이 레볼루션의 비겁한 경기 스타일에 당하고.

신이 결정적인 타이밍에 태그를 하며 링을 단숨에 쓸어 담았다.

기대한 그대로의 시나리오에 사람들이 크게 환호를 보냈다.

반응 역시 좋았고, 해설자들의 이야기가 분위기를 끌어올렸다.

[그렉 하트와 그 시대에 인정을 받은 남자답습니다! 신이 완벽하게 레볼루션을 정리합니다!]

[하핫! 저 오튼의 꼴을 보세요! 신이 샤프 슈터를 시전합니다!]

[이제는 완전히 제 기술인 양 사용하고 있는데요?!]

[그럴 수밖에 없겠죠! 그렉 하트에게서 물려받은 기술입니다!]

[이러다 신 하트라는 링 네임을 기대해도 되겠어요!]

‘그럴 리는 없어.’

티파니는 눈을 가늘게 떴다.

말인즉슨 신이 하트 패밀리의 데릴사위가 된다는 말인데.

[그아아아아아아악-!]

링 위의 오튼이 비명을 내질렀다. 신과의 대립 이후로 팬들에게 인정을 받게 된 그다웠다.

위상의 하락 없이 깔끔하게 져줄 수 있는 선수로서 자신만의 영역을 구축하고 있는 그였다.

이제는 완전히 미드-카더로서 쇼에서 자리를 잡은 듯했다.

괴로워하던 그가 탭을 치자 경기장 안으로 환호가 쏟아졌다.

땡땡땡-!

링 벨이 울리고 신은 기술을 풀며 쿨하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무난하고 깔끔한 승리.

[SIN! SIN! SIN! SIN! SIN! SIN! SIN! SIN! SIN! SIN! SIN! SIN!]

“SIN……! SIN……!”

관객들과 함께 박수를 치며 좋아하던 티파니는 링 위에서 승리를 자축하는 신을 바라보았다.

그러자니, 어딘가 좀 이상하다는 생각이 순간 머리를 스쳤다.

그냥저냥 무난한 주간 쇼 매치였다. 그렇기 때문에 티파니는 좀 의아함을 느끼고 있었다.

‘신의 스타일이 아닌데.’

러셀이 평범하게 당하고, 오튼과 바티스타가 패악질을 부리고.

링 아래의 플레어가 스텝을 밟으며 얄밉게 그들을 조롱하고.

관객들의 사랑을 받는 영웅, 신이 등장해 응징을 한다는 각본.

물론, 저런 뻔한 게 먹히기는 했다. 사람들은 바로 저런 이야기를 보며 대리만족을 하고 싶어서 프로레슬링을 보는 것이다.

하지만 저런 이야기에도 극적인 효과를 가미하는 것이 신이었다.

러셀의 이미지를 챙겨주고 레볼루션의 강함을 어필하는 게 바로 그의 원래 스타일인데.

‘뭐지?’

묘한 의문을 느낀 티파니는 계속해서 방송을 시청했다.

자신의 테마 음악과 환호 속에서 계속해서 관객들에게 세리모니를 펼쳐 보이는 신.

카메라가 그를 가까이서 비췄고.

‘어라?’

티파니는 그런 구도에서 한 가지 생각을 머릿속에 떠올렸다.

그렉의 은퇴식 때, 생각보다 러셀을 챙겨주지 않았다고 느꼈다.

그리고 이렇게 얼굴을 가까이 잡는 카메라 구도는 분명히…….

카메라 바깥에서 이어질 행동을 숨기기 위한 의도가 존재했다.

‘설마.’

불길한 감각을 느낀 직후.

신의 뒤쪽에서 난입한 러셀이 그의 뒤통수를 후려쳤다.

[Ooooooohh?!]

경악하는 관객들.

정말이지 갑작스러운 사태였다.

저도 모르게 자리에서 일어난 티파니는 이어지는 상황을 깜짝 놀란 얼굴로 지켜보았다.

[젠장! 이럴 수가 있나요! 러셀 하트가 신을 공격했습니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이죠?! 대체 러셀이 어째서 자기 파트너를!]

요란하게 외치는 해설자들.

그런 가운데, 러셀은 경기장 위에 쓰러져 있던 오튼을 내쫓고 완전히 링을 장악했다.

카메라가 입을 틀어막고 머리를 쥐어뜯는 관객들을 비췄다.

그리고 이어.

러셀에게 거의 역대급이다 싶은 야유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Booooooooooooooooo-!]

그 모습을 본 티파니는 온몸에 전율이 이는 것을 느꼈다.

이걸로 러셀은 신 없이는 미묘한 반응을 받던 선수에서.

단숨에 저 정도로 완벽한 야유를 받는 악역이 되었다.

정말이지 멋진 각본이었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