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8.
그야말로 환상적인 반응이었다.
신이 GCW에서 처음 러셀을 배신했을 때가 기억날 정도였다.
충격 자체는 이전까지의 과정을 충분히 빌드 업 했었던 그 시절보다는 물론 다소 떨어졌으나.
그렉 하트의 은퇴 직후, 거기에 메인 쇼라는 점에서 보자면 그 파급력은 훨씬 더 거대했다.
다소 문제를 재기하는 인간들이 나올 정도로 말이다.
[그렉 하트가 은퇴한 날에 이런 충격적인 턴 힐을 한다고? 원래 이런 특별한 쇼에서는 그 선수를 기리며 각본과 상관없이 경기를 하는 게 보통 아닌가?]
[에디 비테레로가 죽었을 때도 그랬지. 물론, 그 두 개의 경중을 따지는 건 아니지만 말이야.]
[시청률에 정신이 나갔군. WWF는 이런 게 문제야. 패륜적인 아이디어를 가감 없이 사용하지.]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우리가 그렉의 은퇴식에서 각본을 전개한 것이 패륜적이라고?
……안타깝게도, 바트 맥센이 그런 스타일의 각본을 좋아한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었지만.
우리는 아니었다.
물론, 은퇴식 같은 중요한 행사에서 대상이 되는 선수를 기리는 것은 일종의 불문율이었다.
우리는 우리 나름대로 그렉의 은퇴에 헌사를 바친 것이었다.
기존의 관습을 부수고 말이다.
그걸 단순히 러셀의 턴 힐이 자극적이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패륜적이라고 표현을 하다니.
어이가 없는 소리였다.
하지만 뭐, 이해는 했다.
‘각본이 좀 멋져야 말이지.’
나는 낄낄거리며 웃었다.
확실히 레슬 임페리움 이후 이런 전개가 나와 줘야 팬들이 계속해서 WWF를 볼 이유가 생겼다.
그런 의미에서 러셀은 그야말로 절호의 기회를 잡은 셈이었다.
오튼과 녀석의 대립이 좋지 않게 풀리는 것은 나 역시 봐왔던 터라 어떻게 될까 싶었는데.
뜻밖의 아이디어 하나가 그야말로 초석을 쌓게 된 셈이었다.
‘문제는 여기에서 러셀이 악역 연기를 잘할 수 있는가, 인데.’
그런 고민을 좀 털어놓자, 티파니는 답 하나를 제시했다.
[러셀이 좀 그렇잖아요?]
“뭐가?”
[좀 사람이 진지하다고 해야 하나. 솔직히 말해서 융통성이 없죠. 그렉하고 비슷한데 조금 다른?]
“어디서 그걸 느꼈는데?”
[같이 일하면서요. 저희는 당신처럼 한 번에 죽여주는 아이디어를 내놓는 게 아니라서 회의를 꽤나 여러 번 거치고는 했는데.]
러셀이 남과 타협하지 않고 몰아붙이는 일이 있었다는 듯했다.
[자기 욕심을 부리는 건 아니었어요. 결과적으로 그는 GCW에서 무적의 챔피언이었지만.]
티파니는 나로선 알 수 없었던 이야기를 상세하게 해주었다.
[너무 완벽한 쇼를 만드는데 집착했어요. 당신 이야기를 자주 하면서 우리를 설득했었죠.]
“……그래?”
[예, 당신이 만들었던 쇼와 비슷한 수준의 쇼를 만들고 싶다고.]
“하지만 뭐, 러셀이 챔피언이었던 쇼는 나보다 더 잘나갔잖아?”
[그 쇼는 당신이 만든 거잖아요. 당신이 악역으로서 러셀을 띄워주고 가서 가능한 결과였지.]
“글, 쎄…….”
[어쨌든, 그로 인해 꽤나 괜찮은 쇼가 만들어지기는 했지만요.]
진지한 러셀인가.
어쩐지 알 것 같았다.
“고마워. 도움이 됐어.”
[아, 러셀 본인은 자기가 꽤 재미있는 캐릭터라고 생각하는 것 같으니까 그쪽도 좀…….]
“설마.”
러셀의 농담보다 차라리 나무늘보의 팝핀 댄스가 더 재밌겠다.
그런 생각을 하자니, 티파니는 이어 본론을 꺼냈다.
[전에 말했던 거 있잖아요.]
“투자?”
[예, 제가 알고 있는 전문가들을 만나서 자문을 구해봤거든요.]
“어땠는데?”
[MS나 구즐은 확실히 미래를 기대할 만하지만, 그 외의 다른 회사들은 때려치우라던데.]
“좀 말이 심한걸.”
[……이것도 제가 필터링을 거쳐서 한 이야기거든요?]
“원래는 뭐였어?”
[돈을 시궁창에 버릴 셈이냐고.]
“하하하, 그렇게 보이나.”
나는 쓰게 웃어보였다.
확실히, 지금 시점에서 전문가들에게 쓴 소리를 들은 회사들은 다들 애매한 구석이 있기는 했다.
액플과 아마곤.
좋은 평가를 받은 MS와 구즐에 비해 그 둘은 딱히 미래를 기대할 수 없다는 것이 중론이었다.
[차라리 노토로라나 노기아 같은 회사를 추천하던데요.]
“길게 보자고. 5년만 지나도 그 평가는 크게 뒤집힐 테니까.”
[……자신 있어요?]
“없었다면 말도 안 했을 거야.”
나는 씨익 웃어 보였다.
2007년.
액플은 전화기를 ‘재발명’한다.
에이폰.
말하자면 입 아픈, 인간의 삶을 혁신적으로 바꿀 기기의 탄생.
특유의 로고 때문에 사과폰이라고도 불리는 스마트폰의 시작.
물론, 그 사실을 알지 못하는 티파니로서는 망설이는 게 당연했다.
[조금만 더 알아볼게요.]
“어떻게 하려고?”
[음, 그쪽 사람들이랑 약속 잡고 식사라도 한번 해보려고요.]
“그쪽 사람들? 아, 사장님?”
[네.]
“…….”
농담조로 이야기했던 나는 너무도 당당하게 대답하는 티파니의 모습에 그만 얼이 빠졌다.
아, 맞다.
이 여자 그럴 수 있지.
* * *
그런 식으로 티파니가 준비하는 동안, 나 역시도 쇼에 선보일 ‘새 모습’을 생각하기 시작했다.
계기는 존 마이클스가 지나가듯이 하던 한마디로부터였다.
‘넌 이제 더 이상 뒷골목 출신이 아니라 WWF의 미래잖아.’
그렇다면 굳이 비슷한 스타일의 경기복을 유지할 필요가 없다.
그것이 그의 주장이었다.
그리고 나는 거기에 살짝 흥미가 동하는 자신을 느꼈다. 안 그래도 얼마 전에 그 비슷한 생각을 하기도 했고.
그리하여 평소보다 조금 더 일찍 다음 도시에 도착해 그렉과 존의 조언을 받기로 했다.
특히나 존은 내가 가장 존경하던 선수였으므로 아마 그 영향을 크게 받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거기에 러셀까지도 그 과정을 지켜보고 싶다며 끼어들었다.
“거기다, 나도 좀 변할 필요성을 느끼거든.”
“너도?”
“그래, 삼촌을 넘어서기 위해서라면 다른 모습을 보일 필요가 있겠지. 아직까진 생각 정도지만.”
“‘게이 코스튬’이 너한테 무척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는데.”
“난 게이가 아니야.”
“…….”
그래, 미안하다.
어색하게 웃은 나는 그대로 경기장 안의 회의실로 들어섰다.
그리고 추억을 느꼈다.
‘이런 느낌이었지.’
GCW에서 처음 레슬링 복장을 맞췄을 때도 이런 분위기였다.
가득 늘어선 옷걸이.
거기에는 종류 별로 온갖 레슬링 기어들이 가득한 채였다.
그리고 존과 그렉이 한창 대화를 나누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저 시험 볼 때는 어떤 미친놈이 맨몸에 멜빵을 차고 수틀리면 멜빵으로 패는 기믹을 했죠.”
“별 이상한 놈들이 많았지.”
추억에 젖은 두 양반.
그 곁으로 다가가자 마이클스가 먼저 웃으며 날 돌아보았다.
“드디어 왔군. 후계자.”
그 말을 들은 나는 줄곧 궁금했던 것을 물어보았다.
“그때 그 말, 사실입니까?”
“뭐, 복귀?”
“예, 그동안 준비하신 게 있으실 텐데요. 저도 선배님과 같이…….”
그렉과 달리 마이클스는 그간 쉬기도 많이 쉬어서 충분히 현역으로 활동할 수 있는 상태였다.
내가 아쉬움을 느끼며 이야기하자 피식 웃은 그가 가볍게 내 어깨를 때렸다.
“너 때문이야. 인마.”
“저요……?”
“그래, 우리 시대는 여기에서 끝이구나, 하는 걸 느꼈거든. 그래서 복귀는 백지로 돌리기로 했다.”
마이클스는 씁쓸하게 웃었다.
“거기다, 너랑 붙어서 더 큰 반응을 끌어낼 자신도 없고.”
“아뇨, 선배님이라면 분명…….”
“됐어, 됐어. 거기다 우리 집도 이제 애가 셋이야. 집에도 못 들어가는 레슬러 생활은 안 돼.”
“셋?”
“축하한다, 존.”
“그렇게 됐습니다. 하하! 이 녀석이 회사를 더 큰 위치로 끌고 올라갈 테니 앞으로 레슬링 도장 산업도 꽤나 번영하겠죠?”
“그렇겠지. 하트 던전에도 연습생이 꽤나 들어왔다고 들었다.”
“그렇게 됐으니, 앞으로도 시청률 대박 쳐서 내가 돈 걱정 없이 먹고 살게 해달라고. 신.”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그것이 존 마이클스가 내린 결론이라면 내가 말릴 순 없겠지.
어깨의 짐이 무거워졌다.
하지만 나는 그것을 자긍심으로서 느끼며 받아들이기로 했다.
나는 지금 한 시대를 쓴 두 선수에게 미래를 부탁 받았다.
거기에서 좀 머쓱해진 나는 뒤쪽의 러셀을 손으로 가리켰다.
“이 녀석과 함께 말이죠.”
“러셀?”
“예, 연기도 좋고. 각본 멋지지 않았습니까?”
“아, 그거 되게 기묘하더라. 하트 패밀리의 레슬러가 악역이라니.”
“없지는 않았죠.”
“아니, 근데 그렉 선배는 악역 시절에도 ‘미국의 적’ 같은 포지션이라 해외에서는 환호를 받았어.”
“그건 상대 선수가 선역으로서 인정받지 못해서였잖아요?”
“……그게 나야…….”
마이클스의 얼굴이 참혹해졌다.
순간 말실수를 깨닫고 당황하자니 그렉이 수습을 해주었다.
“어쨌든, 멋진 각본이다.”
그는 러셀을 돌아보았다.
“러셀 너도. 그런 아이디어를 떠올리다니, 이제 애 취급도 못하겠구나.”
“다 신 덕분입니다. 아이디어를 짜내는 걸 가르쳐줬으니까요.”
“또 이 녀석이냐.”
“예, 솔직히 삼촌만큼이나 이 녀석에게 배운 것도 많습니다.”
러셀이 내 어깨에 손을 둘렀다.
“그래서, 저도 이번 기회에 경기복을 좀 바꿔볼까 합니다.”
“너도?”
“예, 가문의 신념을 배신한 악역이 되었으니 그 복장을 구닥다리로 치부하고 싶은 거죠.”
“나쁘지 않군.”
납득한 그가 책상 위에 한가득 쌓여 있던 파일 철을 내밀었다.
“여기 샘플을 좀 모아봤다.”
그 말을 들은 러셀과 나는 파일 철의 내용물을 확인해보았다.
샘플이라고 해서 처음엔 무슨 소리를 하는 건가 싶었는데.
금방 알 수 있었다.
‘이런 거군.’
간단하게 말해서 그냥 선수들이 촬영한 프로필 사진이었다.
하지만 기믹과 위상을 정리해두었고 옆에 대충 왜 이런 옷을 입었는지 코멘트도 해두었다.
예를 들자면 이러했다.
‘락콜드 스티비 오스틴.’
한 시대의 아이콘이었던 그는 블루 컬러 계층의 대변인이었다.
거기에 텍사스 출신.
왼쪽 무릎에 부상이 있다.
기술은 무릎으로 떨어지는 종류가 많아 이런 복장을 사용했다.
레슬링 부츠.
니 패드.
왼쪽 무릎에 추가 보호대.
장식 없는 검정 팬츠.
팔목에 검정색 테이핑.
링에 올라갈 때에는 특유의 버닝 스컬 문양이 들어간 검정색 조끼를 착용한다.
화려하지 않되, 오스틴의 캐릭터를 드러내는 스타일로 말이다.
조끼는 시중에 판매되는 티셔츠에도 삽입되는 문구를 새겨서 여러 종류를 만들어둔다.
Steen 3:16.
S.O.B(Son of B-tch).
Hell Yeah.
그런 식으로 말이다.
“선배님이 정리하신 겁니까?”
“아니, 바트다.”
“……예?”
“바트 맥센. 그 양반이 팬심으로 만들어둔 거지. 심지어는 60년대 선수들도 있다고.”
“제기랄.”
“왜, 마음이 편치 않나?”
“아뇨, 이렇게 열정적이었던 양반이 왜 이상한 고집을 부리기 시작한 건가 싶어서 말이죠.”
“죽어가니 그렇지.”
“……예?”
“뭐, 일단 형태부터 정하자.”
다시금 능숙하게 말을 넘긴 그렉이 파일 철을 펼쳐 늘어놓았다.
“일단 기본적인 형태는 삼각이겠지. 움직이기에 가장 쉽고.”
“…….”
“아냐, 아냐. 삼각은 좀 그래.”
마이클스가 고개를 내저었다.
“현역 선수들 중에서는 삼각을 입는 비율이 가장 많아. 부커-리나 JBL, 트리플H, 오튼, 바티스타, 플레어. 모두 삼각이지.”
“오튼은 커리어 초창기에는 드로워즈 형태를 입었지만요.”
러셀이 거들었다.
“결국 기어의 형태는 그다지 상관없는 게 아닐까요?”
“아니, 상관있다.”
그렉이 눈을 빛냈다.
“삼각으로 싸우면 땀이 덜 차.”
“…….”
“…….”
“이건 꽤나 중요하다. 그리고 만에 하나, 혹시나 찢어지는 사고도 미연에 방지할 수 있지.”
“그, 그렇습니까.”
실제로 그랬다.
미래에 AG 스타일스라는 선수가 나오는데, 그 친구는 롱 팬츠를 자기 경기복으로 삼았다.
그리고 어느 날.
페이퍼뷰의 경기에서 다리를 너무 세게 벌려 엉덩이 부분이 찢어졌고, 그렇게 그의 엉덩이가 전 세계에 노출되는 사고가 났다.
‘미쳤지.’
때문에 그렉의 말은 옳았다.
확실히 아무리 유연한 소재를 써도 청바지는 움직일 때 좀 걸리적거리는 경향이 있어서.
“일단 뭐, 그 위로는 하프 팬츠와 롱 팬츠가 있겠군. 다리가 얇은 선수들이 주로 이걸 쓰지.”
“선배, 저는 롱 팬츠였는데.”
“나도 상의가 달렸다는 점만 빼면 롱 팬츠였지. 허벅지 근육이 좀 부실한 것 같아서 그랬는데.”
다시 추억에 잠기는 두 사람.
잠시 고민을 이어가던 나는 이내 어렵지 않게 마음을 정했다.
“이걸로 하겠습니다.”
나는 손에 펼쳐들고 있는 파일 철을 모두에게 보여주었다.
자신들도 잘 알고 있는 선수를 본 모두의 눈이 휘둥그레졌다.